개성공단 폐쇄 위기를 넘기고 남북대화가 시작되면서 이제 관심은 북미대화 쪽으로 모아지고 있다. 지난 6월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밝히며 미국에 고위급회담을 제안한 후 6자회담 관련국들 사이의 접촉도 활발해지고 있다. 특히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은 여러 경로를 통해 미국에 북한과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 8월 미국을 방문한 중국 창완취안 국방부장이 미국 척 헤이글 국방장관과 수전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만나 전달한 메시지가 가장 강력했다. 중국 언론보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중국, 대화와 협상 강력 촉구
“현재 한반도의 정세가 완화되고 있다.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미국이 어렵게 얻은 대화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대화의 조건을 달지 말고 대화에 나서야 한다. 대화를 하지 않고 압력과 제재에 의존한다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국이 대북 제재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군사훈련은 북한 핵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만큼 미국이 훈련을 축소해야 한다.”
중국 외교부도 우다웨이(武大偉) 한반도사무특별대표가 8월 26~30일 평양을 다녀온 뒤 북한의 대화 공세로 한반도 정세가 완화된 기회를 이용해 비핵화 대화 프로세스를 재개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러시아의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도 9월 2일 한반도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됐다고 평가하면서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이 재개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은 비핵화 대화 재개를 위해서는 북한이 진정성을 먼저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핵보유를 전제로 한 군축 대화를 강조해온 북한의 태도 변화가 이른바 ‘2.29 합의 플러스 알파(α)’수준으로 분명히 나타나지 않으면 비핵화 대화 재개도 어렵다는 것이다.

남북대화에서 물꼬가 터지면 자연스럽게 북미대화와 6자회담도 재개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셈이다. 현재로서는 북한이 한국과 미국이 요구하고 있는 ‘2.29 합의 플러스 알파’ 수준의 전향적 제안을 내놓거나 아니면 한미가 어쩔 수 없이 대화에 나설 수밖에 없는 ‘강력한 카드’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대화재개는 힘든 상황이다. 일단 북한은 전자를 택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 7월 평양을 방문한 미국 조지아대 박한식 교수는 “이번에 북측의 고위층과 대화를 해보니 북측은 두 가지 조건, 즉 정전상태를 끝내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한반도 주변국가들이 북한에 대해 불가침선언을 한다면 현존하는 핵무기와 핵프로그램을 폐기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특히 북한은 지난 8월 29일 발표된 국방위원회 정책국 대변인 담화를 통해 “건설적이며 과감한 평화적 조치”를 언급했다. 우다웨이 대표의 방북 기간(26~30일)에 나온 점이 주목된다. 은연중 중국과 협의를 거친 조치라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이와 관련 대외적으로 북한 입장을 대변해온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8월 31일)는 “그동안 평화 대화의 시작에 이러저러한 전제조건을 달면서 대결 노선에 집요하게 매달려온 미국과 남조선 당국이 더이상 시비할 수 없는 대범한 행동 계획, 통이 큰 문제타결안이 구상됐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신문은 “지금 조선(북)이 열어제끼려고 하는 전환의 국면은 몇해 전에 중단된 다자회담을 다시 개최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며 “영도자의 뜻을 구현한 대화 제안, 평화 공세의 조준은 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 지역의 오랜 역사적 현안을 거침없이 해결해 나가는 데 맞춰져 있다”고 강조했다.
‘2.29 합의 플러스 알파’ 수준의 ‘평화적 조치’가 가능하다는 메시지인 셈이다. 문제는 미국의 상응하는 조치가 있어야 ‘2.29 합의’보다 한 단계 진전된 합의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2.29 합의’는 잠정적 합의
지난해 2월 23~24일 베이징에서 진행된 3차 고위급회담 후 북미 양국에서 동시에 발표된 ‘2.29 합의’과정에서 북한은 과거의 입장에서 벗어나 유연성을 발휘했다. 우선 북한은 2006년 1차 핵실험 이후 유엔의 대북제재가 발효된 후 일관되게 주장해온 ‘대화와 제재는 양립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그 동안 북한은 일관되게 “미국과 국제사회의 제재는 ‘불신의 표현’(an expression of distrust)”이라며 6자회담이 재개되기 전에 해제돼야 한다고 공식 요구했다. 그런데 ‘2.29 합의’에서는 대북제재 해제를 6자회담 복귀의 선결조건으로 삼지 않았다.
둘째, 북한은 2010년 1월 외무성 성명을 통해 한반도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한 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의한 이후 적어도 6자회담에서 평화협정과 비핵화문제가 동시에 의제가 돼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는데, ‘2.29 합의’에서는 이를 합의의 전제조건으로 삼지 않았다. 북한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 정전협정의 준수를 언급했지만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라는 단서를 달았다.
북한이 당장 미국과 남측이 받기 어려운 대북제재 해제와 평화협정 문제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2.29 합의’가 가능했던 것이다. 다만 ‘2.29 합의’는 ‘잠정적 조치’의 성격이 강했다. 북한은 “6자회담이 재개되면 우리(북)에 대한 제재해제와 경수로 제공 문제를 우선적으로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밝혀 이 문제가 ‘적절한 시점’에 담보가 되지 않을 경우 합의 이행이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북측의 발표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결실 있는 회담이 진행되는 기간”, 혹은 “농축활동을 임시중지 하고”, “추가적인 식량지원을 실현”, “행정 실무적 조치들을 즉시 취하기로”, “미국은 조선을 더 이상 적대시하지 않고”, “자주권 존중과 평등정신에서 쌍무관계를 개선”과 같은 사항들을 미국이 충족시키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합의가 깨질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대북제재 해제와 평화협정 논의를 후순위로 ‘양보’하면서도 이러한 문제들이 적절한 시점에서 논의되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비핵화 조치를 원상으로 되돌릴 수 있는 복선을 깔아놓은 셈이다.
‘2.29 합의’가 무산된 요인도 여기에 있다. 미국은 북한이 위성발사를 위한 로켓을 발사하자 ‘2.29 합의’위반이라고 비난했지만 북한은 위성발사가 자주권에 해당한다고 반발했다. 북한의 입장은 지난해 4월 15일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김일성 주석 탄생 100돌 경축 열병식에서 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첫 공개연설에서 잘 드러났다. 이 연설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은 “강성국가 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을 총적 목표로 내세우고 있는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에 있어서 평화는 더없이 귀중하다”라며 ‘평화’의 중요성을 언급했지만 “우리에게는 민족의 존엄과 나라의 자주권이 더 귀중하다”라고 강조했다. 미국은 지난해 4월 7일 대니얼 러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과 시드니 사일러 NSC 북 담당관을 평양에 보내 비밀접촉을 했지만 북한의 위성 발사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잠정 합의’란 ‘2.29 합의’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2.29 합의’를 뛰어넘는 북한의 추가적인 ‘평화적 조치’(국제원자력기구 감시단의 복귀 등)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미국의 조치도 수반돼야 한다.
러셀 차관보는 이번 방한 중에 “나는 북한의 말과 행동에 근거한 증거를 본다”면서 “무엇을 할 필요가 있는지는 북한도 분명히 알 것”이라고 말했다. 역으로 지난해 방북해 북측과 비밀대화를 나눴던 러셀 차관보로서는 북한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미국은 지난해 4월에 이어 8월에도 평양에 대표단을 보냈다. 북한전문가들은 2차례 ‘북미비밀접촉’에서 미국이 대통령선거 전에 장거리로켓 발사 및 핵실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달했고, 북한은 장거리로켓 발사는 주권의 문제이지만 미국이 북미협상을 통해 평화조약 체결을 논의한다면 유보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일단 미국은 평화조약 논의를 약속함으로써 북한의 추가 행동을 막는데 성공했다. 미국이 지난해 대선 전까지는 추가 장거리로켓 발사나 핵 실험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던 이유도 특사 파견을 통한 교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 미국의 적대시정책 포기 요구
이러한 추론은 지난해 7월 31일부터 8월 2일까지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민간급회의(트랙2)에 참석한 북측 대표들의 발언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 이 회의는 지난해 4월 북한의 로켓발사로 2.29합의 이행이 무산된 후 이뤄진 북미 양자접촉이었다. 미국 측 참여자들은 북한과 북핵문제 관련 전문가들이었고, 북측 참여자들은 모두 외무성 북미국 간부였다. 표면적으로 민간급회의였지만 회의에서 한 북측 관리들의 발언은 북한 당국의 입장을 공식 대변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 북측 대표단장이었던 외무성 최선희 북미국 부국장은 먼저 김정은 제1위원장이 북미관계를 개선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노선을 변경하지 않고 있다. 김 제1위원장은 미국이 북한에 대해 적대시정책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양국 간에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김 제1위원장은 지금 인민생활에 집중하고 있고, 경제를 향상시키기를 원하며, 인민들의 민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면서 최 부국장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을 문제삼았다.
“문제는 미국이 북한에 대해 취하고 있는 제재들이다. 만일 미국이 관계개선의 의향이 있다면, 북한도 미국과 평화롭고 상호존중하면서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대북정책을 보건대, 그것이 더 나빠지고 있다. 미국은 적대시정책은 없다고 말하지만, 아직도 북한에 대해 인권과 대북개입을 이야기하고 있고 북한의 체제를 부패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미국이 계속해서 제재와 적대시정책을 강조하는 한 2.29합의의 일부라도 되살릴 수 있는 길은 없다.”
북한은 미국이 대북 적대시정책을 폐기해야 한반도비핵화 논의가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북한은 싱가포르회의에서 비핵화의 조건으로 미국에 대북 적대시정책 폐기와 경제제재 해제, 평화조약 체결과 관계정상화를 요구했다. 2005년 ‘9.19공동성명’이나 2009년 12월 오바마 행정부 출범 후 첫 북미 간 고위급회담이었던 스티븐 보즈워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북 때도 북한은 일관되게 북핵문제(한반도비핵화)와 평화협정 논의가 병행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결국 ‘한반도비핵화프로세스(先북핵폐기)’의 진전을 강조하는 미국과 ‘한반도평화프로세스(先관계정상화)’의 진전을 강조하는 북한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왔고, 현재도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러셀 차관보가 방한 중에 언급한 것처럼 미국은 “6자회담의 목적은 가능한 한 가장 짧고 신속하며 분명한 시간표를 가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한반도 비핵화 달성 로드맵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고, 북한은 “평화조약과 관계정상화를 포함하는 성명 같은 미국 측이 확신을 줄 수 있는 구체적인 조치들을 포함하는 선언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차이를 좁히고, 타협점을 찾는 유일한 해법은 이미 나와 있다. ‘919공동성명’에서 합의된 것처럼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입각해 ‘한반도비핵화프로세스’와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동시에 추진하는 방법이다.
미국도 오랫동안의 북미협상을 통해 이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2006년 11월 1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북한의 핵 불능화 후 체제보장 문제와 관련, 남과 북.미국 3국이 ‘종전선언’과 평화조약에 서명하는 방안을 언급한 바 있다. 이를 통해 종전선언→종전협정→평화조약→평화체제 구축이라는 한반도 평화체제프로세스가 잠정적으로 마련됐고, 평화조약의 당사국도 ‘3자 또는 4자’로 합의됐다.
역시 문제는 북미간에 신뢰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6자회담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한반도비핵화와 평화조약 관련 합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를 보장할 수 있는 상호 신뢰가 필요하다. 미국과 한국은 북한이 ‘9.19공동성명’을 비롯한 각종 합의를 먼저 어겼다고 비판한다. 반면 북한은 2000년대에 들어와 북미합의.6자회담 합의가 한국.미국.일본의 정권교체에 따라 뒤집어지거나 불이행됐다고 인식하고 있다.
또한 ‘한반도비핵화프로세스’와 ‘한반도평화프로세스’가 가지고 있는 비대칭성을 해소하는 것도 시급한 관건이다. ‘한반도비핵화프로세스’, 즉 북핵폐기는 비가역적(irreversible)으로 비교적 단기에 이룰 수 있지만, 반대로 ‘한반도평화프로세스’, 즉 북미관계정상화와 평화체제 구축은 장시간에 걸쳐 추진될 수밖에 없고 언제든지 가역적(reversible)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미.일은 6자회담을 통해 북핵시설 철거, 핵무기와 핵물질 폐기, 비핵화 검증 등 3개 분야를 수년 안에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과연 ‘한반도평화프로세스’도 이렇게 단기간에 이룰 수 있는지 의문이다.
‘북미신뢰프로세스’를 기초로 ‘한반도비핵화프로세스’와 ‘한반도평화프로세스’가 병행 추진돼야
또한 ‘한반도평화프로세스’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더라도 합의사항이 유지될 수 있다는 신뢰를 북한에 어떻게 줄 것인지 고려돼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하는 ‘신뢰프로세스’가 북미간에도 필요한 것이다. 전 미국 국무부 북한담당관이었던 조엘 위트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연구원은 “우리가 북한과 적대관계이고 관계개선에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북한의 행동 중 이러저러한 것이 마음에 안 든다, 잘못됐다고 지적하기 시작하면 관계는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며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여러 문제를 제기한다면 훨씬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이라고 조언한 바 있다. ‘북미신뢰프로세스’를 기초로 ‘한반도비핵화프로세스’와 ‘한반도평화프로세스’가 병행 추진될 때 한반도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이 가능한 셈이다.
북한은 지난 6월 미국에 고위급회담을 제안한 후 미국이 요구하고 있는 ‘확실한 비핵화 신호’를 언제 보낼 지 고민하고 있다. 북한이 언급한 ‘평화적 조치’가 정세 변화에 어느 정도의 파괴력을 가질 지는 미지수다. 다만 미국이 호응한다면 지난해 ‘2.29 합의’ 때보다 더 유연한 입장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조선과 관계정상화 할 준비가 돼 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그렇다면 미국과 한국은 북미관계정상화와 한반도평화조약에 대해 얼마나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까지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는 것 같다. 오바마 행정부는 제1기 행정부 때 취했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에서 북핵문제의 전략적 관리(strategic management)로 선회하면서 한반도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중.단기적 차원에서 북핵 상황이 더 악화하지 않도록 관리하면서(先비확산) 비핵화를 장기적 목표로 접근하자는 것이다. 최근 한미가 북한 핵위협에 대응한 ‘맞춤형 억제전략’을 완성하고 10월 초 서울에서 개최되는 한미안보협의회(SCM) 회의에서 서명하기로 한 것도 이같은 차원의 대응으로 보인다.
취임 전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해 즉각 북.미 양자 협상은 물론 군축.정전 협정의 대체와 통일 문제까지 논의할 뜻이 있다”고 공언했던 존 케리 국무장관도 미국 내 대북강경 분위기에 몸을 사리고 있다.
그러나 한미 군 당국이 최근 북한이 언제든지 핵을 무기화 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한 것처럼 현실적인 고민은 ‘맞춤형 억제전략’으로는 북한의 핵무기에 대응할 수는 있어도 북한이 추진하고 있는 ‘핵의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다는 점이다.
2년 전 미국의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는 북한의 핵능력을 평가하면서 북한의 핵프로그램의 확대가 가져올 안보 위협을 경감하는 최고의 길은 협상이라면서, 협상은 활기 있고 강력하게 추구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대화를 통한 핵동결이 한반도비핵화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지난해 북한의 위성 발사 후 중국의 한 국제전문가도 “중국은 북한으로부터 위성발사 계획을 사전에 통고를 받았고, 북한과 미국 사이의 협상내용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있었다”며 “미국이 좀더 빨리 6자회담 재개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정세가 악화됐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미국이 북핵 문제에 대해 좀더 현실적으로 대처하는 방향으로 대북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않는다면 한반도비핵화는 그만큼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남북간에 금강산관광 재개문제가 풀리는 시점을 전후해 북미, 다자회담이 다시 열린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북핵와 미사일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클린턴 행정부에서 추진된 ‘페리프로세스’와 유사한 대북접근법이 마련돼지 않는다면 북미관계는 언제든지 대결국면으로 치달을 수 있는 불안정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접촉과 갈등이 지속될 것이다. 이것은 김정은시대 북한의 변화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