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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나의 지니, 파르티잔 김 씨제3회 6.15통일문학상 대상 수상작 / 황윤희
황윤희  |  jajaknamu7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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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6.26  00: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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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윤희 / 안성신문사 편집국 부국장

제3회 6.15통일문학상 대상에 황윤희 씨의 ‘나의 지니, 파르티잔 김 씨’가 수상작으로 당선됐다. 시상식은 ‘6.15 남북정상회담 13주년 기념 행사위원회’가 6월14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컨벤션센터 2층 그랜드볼룸에서 주최한 ‘6.15공동선언 13주년 기념식’에서 진행됐다. 이 상은 김대중평화센터와 6.15청년학생본부가 주최하고 6.15남측위와 한국작가회의, 전교조가 후원했다. <통일뉴스>는 황윤희 씨의 소설을 <안성신문>과 공동 게재한다. / 편집자 주

살다보면 별 이상한 일도 생긴다.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인연이 불쑥 나타나 온갖 주위를 집중시키는 경우가 있다. 지금 내 앞에서 고요한 침묵을 거느리며 부엌과 방을 오가는 저 노인 김 씨, 한 마디로 신기하다. 그와 내가 이 우주에서 만나 관계를 맺을 확률이 얼마나 됐을까? 우리는 고향도 다르고, 살아온 곳도 달랐으며, 심지어 나이도 반세기 넘게 차이가 난다. 그와 나의 삶에 공통분모라곤 거의 없다. 우리를 묶어줄 수 있는 유일한 공통분모가 있다면 이 좁은 한반도에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김 씨가 꽤 오래 살아남아 우리의 생의 주기가 조금 겹쳤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삶이란 것이 내보이는 이 새로운 국면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좀 얼떨떨하다. 나름 삶의 질서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의외의 관계를 펼쳐 보이는 인생이란 것에 대해 지금은 경외감까지 갖게 될 지경이다.
아침 밥상을 치운 김 씨가 설거지를 하고 마른행주로 그릇을 꼼꼼히 닦는다.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처마 밑에 쌓인 눈을 쓸어낸다. 나는 방안에 누워 오직 청각으로만 김 씨의 동작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는다. 남의 집에 와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지만 그의 동작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오늘 나는 김 씨가 차려온 아침밥을 먹었다. 몇 개의 나물과 고소한 현미밥, 그리고 된장찌개가 작은 소반에 차려져 있었다. 내가 밥을 먹는 동안 김 씨는 마당의 눈을 쓸었다. 그의 걸음을 따라 두껍게 쌓인 눈밭에 나뭇가지가 뻗듯 길이 생겨났다. 길은 동네 입구까지 느린 속도로 뻗어나갔다. 허공에서 내려다본다면 대지를 캔버스로 해서 큰 고목 하나 그려낸 듯 보일 것이다.
김 씨가 방을 들여다본다. 나는 그를 향해 한껏 열어놓았던 청각을 닫고 눈을 감는다. 내가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다. 잠자코 섰던 김 씨가 방안으로 들어와 내가 깔고 누운 요 아래로 손을 넣어본다. 아마도 방바닥의 온도를 가늠하는 것이리라. 그는 내가 잠들었다고 생각하는지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다. 요를 목까지 끌어올려 덮어줄 뿐이다. 그가 다시 돌아나간다. 점심때 혹시 오지 않는 건 아니겠지? 내 안에서 슬쩍 불안감이 고개를 든다. 눈을 뜨고 점심 때 올 거냐고 물어볼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든다. 김 씨가 꼼꼼히 방문을 닫고 나간다. 그의 발걸음에는 소리가 없다. 솜이불을 밟듯이 바닥을 디디는데 어찌 보면 허공을 걷는 듯한 걸음걸이다. 시골 촌부로 늙었지만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는 부정할 수 없는 기품이 흐른다. 얼핏 21세기에 선비가 살았다면 저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김 씨가 떠나자 나는 속절없이 혼자 방치된 환자 신세가 된다. 일주일 전 텃밭에 주저앉는데 허리에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뭔가 어긋나고 비틀어지는 듯한 아주 불쾌한 느낌이었는데 금세 지나가겠거니 했다. 일어서서 허리를 좌우로 한 번 돌리는 것으로 나는 상황을 종료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불행의 서막이었다. 이틀 후, 나는 허리통증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제 갓 서른 먹은, 아직 장가도 가지 않은 청년이 허리에 문제가 생기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아, 요즘은 서른도 어엿한 청년이다. 고령화 사회 아닌가?
그냥 둘 일이 아니구나 싶은 깨달음이 일어 겨우 차를 끌고 읍내 정형외과로 갔다. 의사는 통증이 가라앉지 않으면 수술을 할 수밖에 없다며 며칠 경과를 보자고 했다. 뼈 사이로 돌출된 디스크가 신경을 눌러 통증이 있는 것이라고 의사는 설명했다. 병원에서 돌아온 후 처음 며칠은 좀 괜찮아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몸을 일으킬 수도 없을 만큼 통증이 심해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칼로 뼈를 건드리는 듯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김 씨가 나타난 것은 빈 물병을 채우기 위해 십 분째 방바닥을 기고 있을 때였다. 방문 앞에 서서 잠자코 나를 지켜보던 김 씨는 그날 오후부터 밥을 차려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낼모레 구순을 바라보는 노인네가 이제 삼십 인 새파랗게 젊은 놈 수발을 드는 동거 아닌, 동거가 시작되었다.
내 이웃 김 씨가 밥을 차려온다거나 하루 두 번 아궁이에 불을 때준다거나 물수건을 만들어와 내 얼굴을 닦아준다거나 하는 일은 그런 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기어이 어제, 나는 세상이 내게 내지르고 강요한 기이한 광경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만 했다. 내 생애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곤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때 내가 제정신이었는지도 가늠할 수가 없다.
어제 저녁쯤 되자 허리통증은 가공할 폭력으로 나를 덮쳤다. 세상에 그런 통증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처음이었다. 자리에 누운 채로 꼼짝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통보다 더 심한 문제가 발생했다. 오후 내내 참아 오줌보가 팽팽히 부풀어 있었다. 누운 채로 이불에 오줌을 지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방바닥에서 버둥거렸다. 김 씨는 내 고통이 오직 허리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판이었다. 김 씨는 내 불편을 읽었던 것이다.
“오줌 마렵구만. 요강에 싸지?”
그의 말은 내게 환희이면서도, 고통이었다. 요강이란 물건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지도 못한 나에게 회생의 한 줄기 빛이었으며, 동시에 그 요강이란 물건을 쓰기 위해서는 최소한 앉기라도 해야 할 터인데 그럴 수도 없다는 난감함이 함께 고개를 들었다. 김 씨는 그때 내 얼굴 위로 번지는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를 다 읽었을 것이다. 김 씨가 다시 말했다.
“누워서 싸. 별 수 있나?”
결국 나는 모로 누운 채로 김 씨가 들고 온 요강에 내 물건을 걸쳐놓고 소변을 봤다. 알루미늄 요강에 오줌줄기가 떨어지며 내는 소리가 방안에 가득 찼고, 김 씨와 나는 무거운 침묵 속으로 엉겨들었다. 그때 나는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김 씨는 방문 쪽으로 고개를 모로 틀고 있었다. 나는 극단적인 감정들을 동시에 느꼈다. 그것은 온갖 미분화된 감정, 쾌감과 수치, 허탈과 긴장, 그리고 김 씨에 대한 짜증과 감사함까지 한꺼번에 몰고 왔다. 오줌을 다 쏟아내고 나자 나는 진이 쏙 빠져버렸다. 그리고 누워서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 씨가 내 오줌이 가득 든 요강을 들고 방안을 나갔다. 겨우 2분쯤의 시간이었지만 평생 잊히지 않을 경험이었다. 온전한 무기력에 놓여 타인에게 나를 고스란히 드러내야 하는 일은 내게 적잖은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김 씨랑 꽤 친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건 아니었다.
휴대폰이 울린다. 겨우 팔을 뻗어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을 든다. 액정화면에 뜬 것은 사모님이란 글씨다. 엄마다. 엄마는 내게 무슨 일이 있으면 귀신 같이 알아채고 전화를 한다. 이번에도 분명 며칠 사이 엄마 꿈에 내가 나타나 무슨 사고를 쳤든가 했을 것이다. 전화를 받을지를 망설인다. 엄마에게는 뭘 속이기가 힘들다. 천 리쯤 떨어진 곳에 앉아서도 그녀는 내 목소리만 듣고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챌 것이다.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 분명 득달같이 운전기사를 대동하고 내려오겠지. 나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지금 엄마가 내려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 저자 황윤희 씨
■ 수상자 약력 
황윤희. 1975년 경북 봉화 출생.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현재 안성신문사 편집국 부국장.

■ 수상소감 
올해 초, 장기수 선생님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까이서 그 분들의 육성을 들으며 통일을 염원하는 소설을 구상했습니다. 통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나 일반인들은 통일을 잊어가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핵심을 잃어버리고서야 진정한 삶과 역사는 이뤄지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미흡한 소설이지만 그런 일반인들에게 조금의 울림이라도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사합니다.

다 합쳐봐야 열댓 가구도 되지 않는 작은 마을로 몇 개 되지 않은 세간을 지고 내려온 것은 그림에 목숨을 걸어보겠다는 의지였다. 아니, 미안하다. 솔직하지 못했다. 사실은 아버지로부터의 도망이었다. 아버지는 그림에 평생을 걸어보겠다는 나를 조금도 이해해주지 않았다. 그림이라고 하면 기가 차다고 코부터 푸는 양반이었다.
“그림, 그 따위 것 그려서 뭘 한다고! 그림을 그려 세상을 바꿀 수 있냐, 아니면 그림이 밥 한 그릇, 옷 한 벌이라도 될 수 있냐? 사내놈이 할 게 없어서 그림이야? 당장 집어치우란 말이다.”
아직도 아버지의 호통이 귀에 쩌렁쩌렁하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당신이 걸어온 길과는 전혀 관련 없는 길을 가겠다는 것에 실망하고 분노했다. 아버지를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평생 집을 지어 집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고 돈을 벌자 땅을 사서 부동산 투기로 한 몫 잡은 사람이었다. 그리고는 건설회사를 차려 미등기 전매, 다운계약서 작성, 정부가 주는 온갖 특혜 받아먹기 등의 온갖 편법을 써서 돈을 끌어 모은 위인이었다. 덕분에 나는 어린 시절 가난이라고는 몰랐다. 아이들에게 부잣집 아이라서 따돌림을 당한 적도 없었다. 그건 분명 아버지의 공로였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길을 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회사에 내가 들어가 가업을 잇기를 기원했다. 남자라면 스케일이 커야 한다고 믿는 그 경상도 사내에게 그러니 그림이란 게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림을 그렸다. 온갖 박해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내 길을 갔던 것이다. 그러나 서른이 넘어서도 미술계에서 특별한 부각을 나타내지 못하자, 아버지는 기어이 지난해부터 주도면밀하게 나로 하여금 회사로 들어올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이번 시골행의 전모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특히 싫어하는 전라도를 택했다. 그것은 그림에 대한 내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다. 한 번 발 디딘 적도 없는 이곳에 내려와 이백 평쯤의 텃밭이 딸린 빈집을 빌렸다. 푸성귀나 재배하면서 오직 그림에만 몰두할 생각이었다. 도시에 비하면 생활비도 적게 들 거라는 게 내 계산이었다. 아버지는 지난해부터 내 생활비도 일절 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비가 얼마나 드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일면 그런 계산이 맞아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시골생활은 전혀 예상치 못한 난관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가장 젊은 사람이 60대 노인인 마을에서 나의 출현은 모든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사를 내려온 첫날부터 마을 노인들의 간섭에 시달려야 했다. 뭣하던 양반인가, 이 시골에는 왜 내려왔능가, 언제까지 살 작정인디, 집은 얼마에 빌렸으까, 농사는 지어봤능가 몰러, 고것은 뭣에 쓰는 물건인고, 장개는 안즉 안 갔남?
내 정수리를 향해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대문이랄 게 따로 없는 집이어서 골목을 지나던 노인들은 빠짐없이 한 번씩 고개를 들이밀고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처음에는 한동안 그러고 말겠지 했지만 그게 잠깐 그러고 말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새파랗게 젊은 나라는 존재는 외계인 비슷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나는 노인들의 질문에 단답형으로 짧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또 은근히 불편한 기색을 내비쳐도 보았다. 하지만 노인들은 늙어서 사라진 것이라고는 오직 염치뿐이라는 듯이 오히려 더 들이댔다. 그들에겐 내가 골목을 걸어가는 것만도 신기해 보이는지 한 번은 평상에 앉아 있던 할머니 둘이 내 걸음걸이에 대해 평하는 것까지 들어야 했다.
“아따, 저 총각 안짱다리구마잉. 어릴 적에 어매가 어지간히 업어 키웠나 보네잉.”
한 할머니가 하는 소리가 뒤통수에 매달려왔다.
“그라제. 그래도 젊어서 엉덩이가 실하구마잉. 호박 두 개 폭 엎어놓은 것 같소. 한 번 만져봤음 좋것네.”
뒤통수가 저릿했다. 내가 받은 충격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머니들이 뒤에서 깔깔거렸다. 도시에서라면 충분히 성희롱으로 고발하고도 남을 만한 이야기였다. 할머니들의 그 대화를 듣고 나는 이 시골 생활이 결코 만만치 않을 것임을 짐작했다. 그 길로 나는 한 번 제대로 해본 적도 없는 톱질을 해 대문이라고 할 만한 것을 만들어놓았다. 몇 개의 나무토막을 엇갈리게 박아놓은 것이어서 엉성하기 그지없었지만 문이 열려있는지, 닫혀 있는지는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노인들을 물리치긴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시골의 대문은 닫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듯했다. 어느 날 열심히 캔버스에 붓질을 하고 있는 와중에 노인네 둘이 들어섰고 나는 기어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당에 들어선 노인들은 텃밭에 왜 김을 매지 않느냐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한참 붓질에 신명이 돋던 와중이어서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몰두를 하러 내려온 것인데 도무지 그 몰두가 되지 않았다. 이 침탈과 침투를 물리칠 방법에 골몰하던 나는 기어이 연극을 하기로 했다.
연극은 예의 그 노인네들이 마당을 들어섰을 때 시작되었다.
“야, 이 새끼야! 일을 그 따위로 처리해? 여기 다 싸잡아 불질러놓기 전에 당장 내려와. 애들 연장 들려서 내려오라고! 오늘 거기 친다. 알았어?”
나는 방안에서 휴대폰을 든 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노인들도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마당에 선 채로 더 이상 진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고함이 계속되자 슬그머니 대문을 돌아서 나갔다. 그들이 뒤돌아서는 모습을 보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곳에 내려와 거둔 첫 승이었다.
그 뒤로 무조건적인 침탈은 거의 사라지는 듯했다. 나는 드디어 한적한 전원생활을 즐기게 된 것이라고 자축했다. 그러나 두 달쯤 지나자 내 생각이 짧았음을 나는 인정해야 했다. 시골생활은 불편한 것이 너무 많았고, 고쳐야 할 것도 너무 많았으며, 갑자기 필요한 물건들도 너무 많았다. 시골은 혼자 살기 적합하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결국은 옆집과 안면 트고 기대어 살아야 하는 곳이라는 것을 나는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마음이 쓰렸다.
그때 내 눈에 띈 것이 김 씨였다. 내 집과 담을 마주한 집에 사는 김 씨는 나와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면 이웃이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마당에 함부로 들어선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내게 먼저 말을 거는 법도 없었다. 골목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도 그랬다. 내가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하면 김 씨도 마찬가지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했다. 새파랗게 젊은 나에게 하대를 하지 않는 이는 마을에서 김 씨가 유일했고 그래서 그는 나의 시선을 끌었던 것이다.
어느 날 된장이 똑 떨어졌을 때 나는 김 씨와 안면을 틀 수 있을 것인가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어쩔 수 없이 누군가에게 기대 살아야 하는 곳이라면 김 씨가 가장 적합한 인물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할배요!”
나는 이전에 연극을 통해 마을에 공포한 건달 행세를 그대로 유지하며 김 씨를 불렀다. 담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불이 켜져 있는 그의 안방 창문을 향해……. 잠시 후 방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리더니 김 씨가 마루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할배요, 된장이 똑 떨어져서 그런데 혹시 된장 있어요?”
된장이 없을 리 없다는 것을 알건만 나는 그렇게 물었다. 김 씨의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팔십도 넘은 노인네니 가는귀가 먹었을지도 몰랐다.
“된장, 된장! 된장 있냐고? 된장찌개 끓이려고 하는데 한 숟갈만 달라고요!”
내가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김 씨의 얼굴에 표정이라 할 만한 게 떠올랐다. 그가 빙긋, 사람 좋은 웃음을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소가 요상했다. 그 상황에서 미소를 짓는다는 게 뭔가 싶었다. 잠시 후 문 너머로 그의 얼굴이 사라졌다. 몇 번의 그릇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김 씨가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담장 위로 두 개의 그릇이 넘겨졌다. 한 그릇에는 된장이 푸짐하게 담겨 있었고 또 한 그릇에는 두부 반 모가 반듯하니 놓여있었다.
“두부는 됐는데.”
내가 담 너머로 말을 보냈다. 김 씨가 또 예의 그 미소를 지어보였다.
“됐어. 된장찌개에 뚜부가 없으면 쓰나.”
내가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때 김 씨가 갑자기 반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귀가 먹은 게 아닐지도 몰랐다. 그때 나는 어쩌면 그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느낌을 받았다. 김 씨는 말을 마치고는 휭하니 돌아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하얀 두부는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날 이후로, 김 씨는 나에게 마을에서 가장 이상적인 이웃이 되었다. 그는 하나를 요구하면 둘을 가져다주었고 한 마디를 전해도 내가 무얼 더 필요로 할 것인지 짐작하는 것 같았다. 천장에서 물이 샐 때도 그를 불러 방책을 논의했고 구들이 꺼졌을 때도 김 씨의 진두지휘 아래 수리를 완료할 수 있었다. 작물을 언제 어떻게 수확해야 하는지도 김 씨에게 물으면 인터넷보다 더 정확한 답변을 얻을 수 있었고 온갖 곤충의 퇴치법도 그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드디어 그에게 별명을 하나 붙여주기에 이르렀다. 어느 날 번쩍 떠오른 그 별명은 묘한 부조합을 이루면서도 김 씨를 지칭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단어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에게 붙여준 별명은 ‘나의 지니’였다. 아, 그는 요술램프에 머물면서 주인이 요구하면 언제나 나타나는 동화 속 지니였다. 나는 김 씨의 면전에서 나의 지니라고 부르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그러나 내게서 김 씨는 영원한 나의 지니였다.

   
▲ 지니. [삽화-최민]

그 지니의 충격적인 과거를 알게 된 것은 한 달쯤 전이었다. 평상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노인들이 지나가는 내게 막걸리를 권한 것이었다. 안 그래도 입이 텁텁하던 차라, 한 잔쯤 괜찮겠다 싶어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노인들이 엄마의 젖빛 같은 막걸리를 사발 한 가득 따라주었다. 그러나 한 잔쯤이라 여겼던 자리는 두 잔, 세 잔으로 이어졌다. 막 그림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아 엎고 나온 참이라 막걸 리가 입에 너무 잘 달라붙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나의 지니, 김 씨 이야기가 나왔다.
“근데 김 씨 할아버지는 가족이 없어요?”
김 씨에 대한 관심을 표하는 질문을 던진 것은 순전히 취기 때문이었다. 노인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친하게 지내는 것 같더니 아무것도 모르냐는 표정이었다.
“김 씨? 가족이 뭐당가? 팽생 장가도 한 번 안갔구마이.”
의외의 이야기였다. 나는 김 씨가 자식에게 버림받은 흔하디흔한 독거노인쯤 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왜요?”
“왜긴? 서른 맻 해를 징역을 살았는디 은제 장가갈 기회가 있었당가?”
나는 화들짝 놀라 동공을 넓혔다. 징역이란 말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서른 몇 해 정도의 징역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살인 아닌가 하는 계산이 빠르게 머릿속을 훑어갔다.
“왜요? 왜 징역을 그렇게 오래 살아요?”
나는 다급하게 다시 질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질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노인의 이야기는 그때부터 길게, 한 사람의 일대기를 읊듯 만연체로 이어졌다. 노인에게 들은 김 씨의 과거는 이랬다.
김 씨는 해방정국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붙잡혔고 그 길로 사형을 받아 징역을 살기 시작했다고 했다. 사형은 이십몇 년 형으로 감형되었지만 그 수감기간을 다 채우고도 김 씨는 사회로 나오지 못했다. 사회안전법이라고 하는 것이 시행되면서 전향하지 않은 정치범들은 무기한 수감기간이 연장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그 법이 폐지된 89년도에 김 씨는 출소할 수 있었는데, 그때까지 산 징역햇수만 서른몇 해는 족히 된다고 노인은 말했다. 그러니 가족이 있겠냐고 노인은 내게 되물었다.
충격적이었다. 나의 지니, 김 씨가 그런 과거사를 가진 인물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는 소위 사회주의자, 빨갱이가 아니던가? 노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취기는 어디론가 쏙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 길로 집으로 들어왔다. 내 이웃에 빨갱이가 살고 있다. 그 한 문장이 내 뒤통수를 가격했다.
집으로 들어온 나는 당장에 노트북 앞에 앉았다. 휴대폰을 통해 인터넷을 연결하고 검색창에 커서를 올렸다. 무엇을 먼저 쳐야 하는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한참을 머뭇거리다 나는 최초의 검색어를 써넣었다. ‘장기수.’
김 씨는 그러니까 비전향 장기수였다. 삼십 년 넘게 징역을 살면서도 자신의 이념을 포기하지 않은……. 장기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습득한 후, 나는 두 번째 검색어를 써넣었다. ‘빨갱이.’ 늘 들었던 말이지만 빨갱이가 단순히 공산주의자를 뜻한다는 것밖에 나는 알지 못했다. 어원이 무엇인지, 그 말이 왜 생겨났는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날 나는 밤늦게까지 노트북을 붙잡고 있었다. 충격이 좀체 가시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김 씨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한참 콩으로 메주를 쑤고 있었다. 남자가 메주를 쑤는 일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의 집 마루에 걸터앉아 줄곧 그가 콩을 삶고 식히고 그것을 치대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제의 검색에 따르면 그는 사상범이자 정치범이었다. 사회주의자였고 빨치산이었다. 빨치산이 스페인어 ‘파르티잔’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민중봉기를 일으킨 유격부대에서 시작된 말이라니, 어원만 따지면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놀라운 것은 우리의 그 장기수가 인류 역사에 유래가 없는 장기수라는 사실이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30년 넘게 사람을 가둬두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세계 최장기수는 우리나라에 있었다.
김 씨는 내 앞에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콩만 만지고 있었다. 그에게 위악을 떨고 싶다는 감정이 솟구쳤다. 평생을 이념에 바친 인생이란 허깨비가 아니겠는가 싶었다. 도대체 얼마나 고집이 세면 서른 몇 해를 감옥에서 썩으면서도 전향을 하지 않았나, 그 이념이란 게 그렇게 소중한 것인가, 아니 인간의 생생한 삶과 자유보다 더 소중한 이념이란 게 있을 수 있나, 정말 정신이 햇가닥 돌은 게 아닌가, 부모님이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 것인가, 아직도 그 이념을 고수하고 있는가, 그래서 당신이 이룬 게 뭔가, 온갖 질문들이 고개를 쳐들고 날을 세우고 있었다.
“할배요.”
나는 두 시간쯤 그를 묵묵히 바라보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질문을 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일단 들이대 보자 싶었다. 지금껏 1년 남짓한 시간을 함께한 이웃을 이해불가와 요령부득의 미지의 공간에 남겨둘 수는 없었다.
“왜?”
김 씨가 마을에서 반말을 던지는 건 나뿐이었다. 그것이 친근감의 표현인지, 나를 하찮은 후레자식으로 보아 그런 것인지 분명히 가늠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할배, 사회주의자라면서요?”
나는 굉장히 놀라는 듯한 반응을 기대했지만 김 씨의 태도는 딴판이었다. 그는 여전히 콩을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근데, 왜?”
부정도 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 대답이 또한 충격적이었다.
“여긴 대한민국입니다. 민주공화국인데, 사회주의자가 말이 됩니까?”
말이 뾰족하게 나가고 있었다.
“너 웃긴다. 잘 모르나 본데 북한의 정식명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 공화국이 이 공화국과 같은 공화국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지식의 부족함으로 나는 말의 화두를 돌려야 했다.
“빨치산이었다는데 사람 죽였습니까?”
나는 다리를 꼬고 앉아 김 씨에게 질문했다. 그제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왜? 그게 궁금한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니가 생각하기엔 어떠냐? 내가 사람을 죽였을 것 같으냐? 내가 사람의 탈을 쓴 늑대쯤으로 보이냐, 늑대의 탈을 쓴 사람으로 보이냐?”
김 씨가 되묻는 바람에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질문할 수 없었다.
그 뒤로 김 씨와의 관계는 사실,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물론 며칠 동안 충격에서 헤어날 수 없었지만 나는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눈앞의 진실을 가리는 무언가에는 남다른 민감성을 가지고 있었다. 김 씨는 내 눈앞의 그냥 김 씨일 뿐이라는 생각이 사흘이 지나자 고개를 들었다. 그가 지금 사회주의자이든, 뭐든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김 씨는 그저 나의 순박하고 성실한 촌부일 뿐이었다. 게다가 일반 노인네들 보다 일면 더 순수하고 착한 면을 가지고 있기도 한……. 그리고 그는 내가 아는 가장 속 깊은 사람이었다. 김 씨를 반세기 전의 과거사 따위를 이유로 버릴 수는 없었다.

   
▲ 6월14일 63빌딩 컨벤션센터 2층 그랜드볼룸에서 개최된 ‘6.15공동선언 13주년 기념식’에서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제3회 6.15통일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황윤희 씨를 비롯한 수상자들에게 시상하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선잠에 들었다가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깬다. 또 사모님이다. 이 사모님은 못난 아들에 대한 미련을 평생 버리지 못할 것이다. 부모가 된 죄로 치러야 하는 업보가 꽤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엄마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또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전화는 가을날의 여치처럼 맹렬히 울다가 제 풀에 스르르 꺼진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올려다본다. 한 시가 가까워지고 있다. 요의가 느껴진다. 어제와 같은 일은 만들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며 나는 몸을 조심스럽게 움직여본다. 심한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팔을 짚고 목과 배에 힘을 주고 끙, 몸을 일으킨다. 다행이다. 화장실까지는 갈 수 있을 것 같다.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기어오고 있는데 김 씨가 방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의 손에 쟁반이 들려있다. 그가 쟁반을 내려놓고 바닥을 기고 있는 나의 옆구리에 두 팔을 낀다. 나는 김 씨의 팔에 이끌려 다시 이부자리로 돌아온다. 김 씨가 내려놓은 쟁반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칼국수가 담겨있다. 김 씨가 주는 대로 나는 자리에 앉아 칼국수를 떠먹기 시작한다. 송송 채 썬 연둣빛 애호박이 들어있고 양념간장을 푼 칼국수는 구수한 맛이다. 시골집 할머니의 옆구리를 생각나게 하는 맛이다. 나는 문득 김 씨에게 좀 착해지기로 마음먹는다.
“점심 드셨어요?”
“응.”
단답이다. 김 씨는 말에 무얼 더 덧붙이지 않는다.
“같이 좀 드시죠?”
무안해진 내가 다시 말한다. 김 씨가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왜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느냐는 표정이다.
그릇을 다 비우는 것을 보고 다시 방을 나가려는 김 씨를 나는 불러 세운다.
“뭐 바쁜 일 있어요? 좀 앉았다 가요. 하루 종일 심심하다고요.”
김 씨가 선 채로 돌아본다. 그리고는 잠시 망설이더니 그대로 주저앉는다. 우리는 잠시 서먹하다. 어젯밤의 그 요강 사태가 미묘한 감정을 일으키는 탓이다. 나는 그 긴장이 싫어 아무 말이나 꺼내놓는다.
“얘기 좀 해주세요. 옛날 얘기. 할아버지가 돼서 재밌는 옛날 얘기 없어요?”
김 씨가 피식 웃는다. 그의 웃음에 나도 잠시 입 꼬리를 끌어올린다.
“오줌은 잘 쌌나? 어제보단 덜 아픈가 보다.”
김 씨가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궁금해요. 이념이 그렇게 중요했습니까?”
나는 기어이 오래 궁금해 했지만 묻지 않았던 것을 묻는다. 거동이 불편한 상태는 요상한 일을 많이 만들어내는 법이다.
“그때는 이념이란 개념도 없었다. 우리는 그냥 좀 더 살기 좋은 세상 만들자고 그랬던 거제. 신분에 차별이 없고, 남녀에 차별이 없는 세상. 가진 놈도 배우고 못 가진 놈도 배우고, 가진 놈이 하대하지 않고 못 가진 놈도 당당한 그런 세상.”
김 씨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한다.
“근데 그것 갖고 반평생을 감옥에서 살아요?”
“그냥 어영부영 세월이 간 것뿐이다.”
거창한 대답을 기대했던 참에 의외의 대답이 날아와 나는 김이 좀 빠진다.
“이념은 몰라도 사람은 배신할 수 없었다. 산에서 죽은 선배, 형, 누나, 동무 생각하면 감옥에서도 그들을 부정할 순 없었다. 세상에서 보면 어떤지 몰라도 우리 앞엔 정의와 정의가 아닌 것이 분명했지. 사람 죽여 가며 전향하라고 하는데 거기서 정의로운 것이 전향하는 거냐, 전향하지 않는 거냐?”
김 씨의 말은 질문의 형식을 띄지만 대답을 듣기 위한 말은 아닌 듯하다. 우리는 해가 기웃해지도록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건넨다. 초침이 돌고, 분침이 돌고, 시침이 돌고……. 서울 있을 적만 해도 팔십이 넘은 노인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다. 도시는 세대의 단절을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
“니는 왜 여 들어와 살고 있나?”
김 씨가 문득 질문한다. 나에 대한 사적인 질문은 처음이다. 그것이 기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다. 머뭇거리다 아버지 이야기를 꺼낸다.
서울에서 내려오기 전 아버지와 크게 다퉜던 일을 나는 떠올린다. 아직도 힘이 펄펄 넘치는 아버지는 내 작업실의 모든 도구들을 다 집어던졌다. 완성된 그림 위로 물감이 뿌려지기도 했다. 참을 수 없었던 나는 결국 아버지에게 대들었고 그 끝에 따귀를 몇 대 맞았다. 고막이 얼얼할 정도의 강도였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뭉게뭉게 솟구쳤다. 아버지 앞에서라면 나는 영원히 철없는 아이로만 남을 것이었다. 나는 주먹을 들어 유리창을 깨고 집을 나왔다. 사실은 그때 아버지를 치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전 늘 모자란 자식이죠. 성에 안 차는 자식이고요. 맘 같아선 아버지를 다시 안 봐도 좋을 것 같아요. 내 모든 콤플렉스의 근원이 아버지거든요. 부자간 인연을 끊을 수 없다면 끝까지 버틸 거예요. 사실 아버지 속이 까맣게 타는 걸 보고 싶어요.”
내 이야기에 내 스스로 놀란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그렇게 깊이 박혀있는 줄은 말로 꺼내기 전에는 나도 몰랐다. 기분이 묘하다. 내 안의 것을 끄집어내 누군가에게 드러내본 적이 처음인 듯하다. 나는 왠지 쑥스러워진다.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 씨가 나를 줄곧 바라본다.
“평생 칼을 들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세상에 칼 겨누고 그렇게 부동자세로 있어봐야 니 팔만 아프다. 결국엔 관절은 굳고 혈관은 막히고 몸은 썩어서 저만 병신 되는 거지. 세상에 칼 휘둘러 이길 수 있는 건 거의 없거나 아예 없다.”
김 씨의 말에 나는 괜한 반항심이 인다.
“그렇지 않아요. 내가 병신이 되더라도 아버지에게 굽히고 들어가진 않을 거예요.”
김 씨가 나를 바라본다. 상대의 저 안쪽을 뚫어보는 듯 강렬한 눈빛이다. 문득 나도 저 나이가 되어서 저런 눈빛을 가질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건 신념의 문제다. 내가 무얼 믿느냐의 문제지. 칼을 든 자가 이기는 세상이라 믿으면 그런 세상이 올 거다. 하지만 내 신념은 그렇지 않다. 품는 자가 이긴다. 결국엔…….”
김 씨의 말에서 무어라 표현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을 것 같은 강한 힘이 느껴진다. 그것은 어쩌면 오래도록 싸워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나의 못된 버릇은 수그러들지 않고 다시금 반론을 편다.
“그런 사람이 평생 감옥에서 칼을 들고 앉아있었어요?”
내 말에 김 씨가 고개를 튼다. 그가 멀리 창밖을 바라본다.
“틀렸다. 그건 칼을 들고 있는 세월이 아니라 품는 세월이었다. 누구도 칼을 들고는 그렇게 오래 견디지 못한다.”
김 씨의 옆모습이 쓸쓸했다.

이제 와 돌이켜 말하자면 결국 나는 그날 입원했다. 밤이 되자 통증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일었다. 이를 앙다물고 견디다가 나는 결국 김 씨를 불렀고 한밤에 내 부름을 들은 나의 지니는 다행스럽게도 내복 바람으로 달려와 주었다. 허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이 공포로 변하고 있었다. 문제는 눈이 쌓여 구급차가 마을로 올라오지도, 트럭이나 자가용이 큰길까지 내려가지도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의 지니가 결정적 한 방을 했다. 나는 결국 김 씨의 등에 업혀 마을길을 내려왔다. 거짓말 같은 일은 일어나라고 있었다. 팔십 먹은 노인네가 다 큰 청년을 업고 1킬로미터 남짓한 길을 내려갔던 것이다. 내가 절대로 안 된다고 했지만 김 씨는 막무가내였다. 안 그럼 방법이 있느냐는 김 씨의 호통에 나는 지고 말았다. 내 등산화에, 내 아이젠을 찬 김 씨가 지팡이를 짚고 나를 업은 채로 길을 내려갔다. 예전에 산에서 이 정도는 장난이었다고 그는 나를 위로했다. 기적처럼 기어이 김 씨는 나를 구급대원에게 인도했고 나보다 구급대원들이 더 놀라워했다.
그 날 이후로 김 씨를 보지 못했다. 대신 나는 사모님을 호출해야 했고 결국 그녀의 호들갑스런 방문을 감내해야 했다. 엄마는 도대체 이 지경이 되도록 거기 처박혀 있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끝도 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나는 엄마에게 거기에 그냥 처박혀 있었던 건 아니라고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문제는 수술 경과를 지켜보느라 일주일 넘게 입원해 있는 데도 김 씨가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어이 오늘 전화를 걸었더니 눈 치우느라 바쁘다는 대답만 들었다. 당장에 허리가 나아지면 쫓아가 볼멘소리를 잔뜩 늘어놓을 작정이다. 그리고 그에게 전하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 쑥스러운 말이어서 나는 지금 며칠째 그 말을 연습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할배요. 제가 생각해봤는데, 진짜 내 할배하면 어떻겠습니까? 피차 서로 외로운 마당에 그러면 좋지 않겠어요? 나는 괜찮은데, 할배는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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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13-06-29 22:47:10
소설로 그려지는 모습들이 구수한 숭늉같습니다......늘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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