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 안희숙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이 7일 저녁 7시 서울 흑석동 중앙대학교 병원 응급실에서 별세했다. 향년 85세. 유족으로는 부인 신선옥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대방동 보라매병원 장례식장 7호실에 마련됐다.

관련 단체들이 8일 장례절차를 논의한 결과 '통일애국열사 안희숙 선생 민족통일장'은 8일 오후 8시 30분 추도식을 개최하고 9일 장례식장에서 발인해 오후 1시 서울 서초구 원지동에서 화장할 예정이다.

▲ 비전향 장기수 안희숙 선생이 7일 저녁 별세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김도형 객원기자]
고인은 1929년 군산에서 태어나 해방전부터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1950년 9월부터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1952년 2월 체포돼 복역하다 석방됐지만 사회안전법으로 재구속돼 1989년 비전향 출소했다.

출소 후 통일광장 회원,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양심수후원회 회원으로 자주와 통일을 위해 열성적으로 활동했으며, 고인의 쉰 목소리는 옥중에서 강제급식을 당해 식도를 다쳤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향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감옥에서 폐결핵을 치료받지 못해 한쪽 폐도 기능이 완전히 멈춘 상태로 지냈다. 

지인에 따르면 고인이 1976년 5월 사회안전법으로 재구속됐을 당시 일곱살이던 딸이 빨갱이의 자식이라고 동네사람들에게 고통을 당하다 마음의 병을 앓다 세상을 떴고, 그 어린 딸이 시름시름 앓면서도 엄마에게 “엄마, 아빠 곧 나와. 그러니까 엄마 시집가지 말고 아빠 기다려야 돼”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한평생 염원했던 통일조국 못보고 갑자기 돌아가셔서 너무나 안타깝다”며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자주 통일을 위한 활동에 참여했고 입산해 치열한 전쟁을 겪고 그 때문에 옥고를 치르고 나중에 사회안전법으로 감호처분을 당해 오랜 옥고를 치르고 나오신 분으로 통일에 대한 의지가 누구보다 강했다”고 회고했다.

<안희숙 선생 약력>

1929년 1월 13일 군산에서 태어남
1938년 10세에 초등학교 입학
1945년 3월 초등학교 졸업, 군산제지공장 취직, 노동운동으로 해고
1947년 민주청년동맹(후에 민주애국청년동맹) 가입, 수배
1948년 2.7구국투쟁과 5.10단선단정반대 투쟁
1949년 2월 선고유예로 석방. 전북옥구군 간척지 등지에서 노동
1950년 9월 장수 장안산 입산. 38유격대와 장수부대 건설해서 활동
1951년 1월 덕유산으로 활동지역을 옮김. 장수군당 당호위대 책임자로 활동
1951년 5월 지리산 뱀사골로 옮김
1952년 2월 전북 임실 운장산에서 활동 중 체포. 광주 포로수용소에 수감, 6개월 후 대전교도소로 이감. 1심에서 사형구형, 무기선고, 2심에서 15년형 선고
1956년 폐결핵 발병
1964년 3월 석방. 직후에 반공법으로 재구속.
1967년 4월 석방. 봉천동으로 상경. 신선옥님과 결혼
1976년 사회안전법으로 재구속
1989년 청주 보안감호소에서 출소
1990년 통일광장 회원,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양심수후원회에서 조국의 자주와 통일을 위해 열성적으로 활동
2013년 4월 7일 저녁 9시경 별세


(추가,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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