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도의 내용

장생도는 주로 기념일에 선사하는 길상화나 궁궐을 꾸미는 장식화로 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장생도의 내용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장생도’라는 그림 제목이 내용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장생도’는 부와 명예와 함께 장수하고자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담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명색이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에서 고작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담기 위해 최고의 화원들이 비싼 재료를 사용하여 거대한 그림을 제작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5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이다.
조선은 왕권과 선비들의 힘이 팽팽히 맞서며 서로 견제하며 정치를 했다.
왕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고, 선비들도 왕의 최종적인 명령이 없이는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서구나 중국, 일본 같은 나라들이 봉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조선은 이미 전국의 군대를 통합하여 의정부 산하 병조 아래에 두었으며 지방군수까지 임명하여 내려 보내는 중앙군현제 사회였다.
선비들 사이에도 당을 만들어 치열한 논쟁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으며, 여러 번의 전쟁과 반정과 민란이 일어났지만 종묘사직은 유지되었다.
과학과 문화가 발전했고 공업이나 상업이 크게 발전하지 않아도 먹고 살만한 나라였다.
이런 조선의 정치, 문화, 사상적 힘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흔히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을 ‘장수(長壽)’라고 표현하지 ‘장생(長生)’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래 사는 염원을 담은 그림에 ‘장수도’라고 하지 않고 ‘장생도’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장생도에 나오는 사물들은 해와 달, 하늘, 구름과 바다, 산과 바위, 소나무와 복숭아나무, 대나무와 영지와 같은 자연물이 대부분이다.
자연을 인간의 수명과 연결시켜 비유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인데 자연과 일치시키는 것은 수명과는 관련이 없다.
또한 사슴, 학, 거북 같은 동물도 현실의 동물이라기보다는 영험하고 이상적인 동물을 뜻하는 영수(靈獸)이다.
영기(靈氣)를 내뿜는 거북, 청색, 황색의 날개를 가진 학, 크고 아름다운 뿔과 상징화된 등 갈기, 흰색, 갈색, 회색의 사슴 따위의 표현은 그것을 말해준다.
이런 영수((靈獸)에 인간의 수명을 비유하는 것도 정서에 맞지 않다.
인간의 장수보다는 ‘자연과 영험한 동물들이 함께 어우러진 이상적인 세계’를 표현한 것에 가깝다.
장생을 나름대로 풀이하면,
‘장(長)’의 뜻은 ‘길다’고 해석하지만 그 안에는 ‘크다. 높다’의 뜻도 있다.
또한 ‘생(生)’의 뜻은 ‘생명, 존재’라고 해석한다.
그러니까 ‘긴 생명(존재)’, ‘높은 생명(존재)’, ‘큰 생명(존재)’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관점으로 ‘장생도’를 해석하면 ‘생명력이 충만한 이상세계’가 된다.
‘자연과 영험한 동물들이 함께 어우러진 이상적인 세계’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라면 ‘생명력이 충만한 이상세계’는 내면적인 모습이다.
장생도는 궁궐뿐만 아니라 선비, 일반백성에게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비록 8, 10폭의 병풍 형식은 아니더라도 부분을 차용하거나 변주하여 작은 그림이나 노리개, 생활용품, 가구, 침구 따위에 응용되었다.
모란그림과 함께 가장 많이 대중화된 그림이다.
하지만 장생도의 ‘생명력이 충만한 이상적인 세계’의 내용이 일반 백성들에게 적용되기는 부담이 따른다.
백성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장생도를 수용하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인 ‘장수(長壽)’이다. 발음도 비슷하고 내용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문화적 현상은 흔하다.
남성이나 여성의 성기를 닮은 자연물은 생명력을 뜻하지만 민간에서는 아들, 딸을 잘 낳는데 도움을 주는 상징으로 이해한다.
또한 다리가 셋인 삼족오(三足烏)는 ‘천부경’ 사상과 연관되어 있지만 민간에서는 남성의 성기로 인식한다.
논리보다는 직관이나 감성에 의존하여 인식하는 것은 쉬우면서도 강력한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궁중모란도’는 ‘생명이 활짝 핀 모습’의 내용이지만 민간에서는 ‘부귀영화’가 된다.
궁중의 ‘책거리그림’은 ‘학문을 사랑하고 권장’하는 내용이지만 선비나 민간에서는 책과 귀한 물건들이 결합한 그림으로 변주하여 ‘과거에 급제하여 영화를 누린다’는 내용으로 바뀐다.
큰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현실적인 내용과 결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백성들이 ‘장생도’를 ‘장수도’로 수용한다고 해서 틀렸거나 나쁘게 여길 필요는 없다.
백성의 꿈이 스며든 또 다른 장생도-서수낙원도
화면 중앙에는 떠오르는 아침 해가 그려져 있고 오동나무 아래에 봉황과 새끼가 앉아있으며, 우측에는 소나무를 중심으로 학, 사슴, 기린이 그려져 있다.
봉황을 중심으로 좌측 중간쯤 아래에는 연꽃이 피어있고 원앙과 새끼들이 헤엄치고 있다.
좌측 상단에는 구름을 뚫고 거대하게 자란 복숭아나무와 천도가 있고 그 아래에는 공작새 가족이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눈다.
또한 좌측 하단의 연못에는 영험한 거북이가 놀고 있으며 좌측 끝에는 신비한 구름 사이로 용들이 꿈틀거린다.
배경은 위, 아래, 좌우를 구분하기 어렵고 물과 땅, 하늘과 구름이 뒤엉킨 신비한 4차원의 공간이다.
그렇다고 나무가 중력을 무시하고 거꾸로 매달려 있거나 사슴이 하늘을 날아다니지도 않고, 원앙이 물속을 벗어나지도 않는다.
기존의 상식을 유지하면서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그렸다.



서수낙원도, 제목 그대로 영험한 동물이 사는 이상적인 세계를 표현한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용, 기린, 봉황, 거북과 같은 상상 속의 동물과 함께 현실 속의 동물인 학, 사슴, 공작, 원앙도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상과 현실이 결합되어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이상세계를 표현하고 있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이 작품의 핵심이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림에 나오는 동물은 모두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많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이다.
그러니까 그림 속에 등장하는 상서로우며 복과 좋은 징조를 가진 동물인 서수(瑞獸)는 오로지 다산과 가족의 화목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또한 그림 속에는 다산(多産)과 출세를 뜻하는 연꽃과 부부의 금슬을 뜻하는 원앙, 부귀를 뜻하는 모란, 높은 관직을 뜻하는 공작새 따위가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가족의 화목에 필요한 세속적인 요소를 상징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생명력이 충만한 이상세계’의 뜻을 가진 ‘장생도’가 양반이나 백성들의 정서와 욕구인 ‘장수(長壽), 가정의 화목, 다산, 부귀영화, 출세, 부부사랑’ 따위의 인간의 욕망이 궁중회화에 반영된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궁중회화는 가족을 그린 그림은 ‘곽분양행락도’ 밖에는 없다.
당나라 현종 때의 실존인물인 곽자의는 권력과 명예를 얻고 8명의 아들과 7명의 딸과 사위를 얻어 80세 까지 부귀를 누리면서 장수하였다.
‘곽분양행락도’는 호화로운 저택에서 잔치를 열고 있는 모습을 담은 그림인데 화면구성은 장생도와는 전혀 다르다.
뭐 조금 다르게 생각하면, 장생도를 기반으로 한 ‘서수낙원도(瑞獸樂園圖)’는 중국의 ‘곽분양행락도’의 조선판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그림은 궁중회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화면의 기본구성은 장생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작품의 크기나 재료, 채색기법이나 표현기량은 도화서 화원의 수준이 아니라면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도화서에서 기획한 그림이라고 보기에는 세속적인 내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
추측하건데, 이 그림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도화서가 폐지된 이후에 고관대작의 주문을 받아 도화서 출신의 화가가 그렸을 것이다.
제작비용도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억대가 넘었을 것이다.
이것도 아니라면 도화서가 폐지된 이후 졸지에 실업자가 된 화원들이 판매를 목적으로 그렸을 수도 있다.
이 정도의 대작을 혼자서 그리기는 어렵다.
도화서 출신의 화원 여럿이 합작을 했거나 아니면 여러 명의 수제자들과 함께 공동 작업을 했을 것이다.
이 그림은 도화서 출신 화원이 양반이나 백성들의 정서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창작한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있었고 처지가 달라진 도화서 출신 화가들은 생계를 위해 시장으로 달려 나가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