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장생/10첩 병풍/비단에 채색/210*552.3/삼성미술관 소장. [자료사진 - 심규섭]

5m가 넘는 큰 그림이 있다.
그림 속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상세계가 펼쳐진다.
신령스런 구름이 휘감고 있는 영산(靈山)을 배경으로 기이한 바위가 여기저기 솟아있다.
산에는 폭포가 흘러내리고 기암에는 대나무가 자라며 한번 먹으면 천년을 산다는 영지가 울긋불긋 피어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뻗은 소나무, 복숭아 나무들 사이로 사슴들이 떼 지어 노닐거나 물을 마신다.
육지의 한 켠에는 바다가 있고 넘실거리는 파도 위로 거북이가 헤엄치고 저 높이 해가 떠 있다.
하늘인지 구름인지 바다인지 경계가 모호한 공간 속으로 학들이 날아든다.
사람은 없지만 어디선가 신선이 바위 뒤에서 불쑥 나오고, 선녀가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내려올 것 같다.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곳, 그래서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곳, 어쩌면 죽어서나 갈 수 있는 곳,
인간이 그토록 갈망하던 유토피아의 세계이다.
사람들은 이 세계를 표현한 그림을 일컬어 ‘장생도’(長生圖)라고 부른다.

오래 사는 일, 장수(長壽)는 인간의 오랜 꿈이었다.
특히 영아 사망률이 높고, 평균 수명이 40~50세 전후로 짧았던 조선시대에 오래 사는 일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다섯 가지 복-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중에 으뜸이었다.
그래서 20~30세인 약관(弱冠)과 이립(而立)의 나이에 학문을 통해 뜻을 세우고, 40~50세인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되면 풍부한 경험으로 원칙과 신념을 세우고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런 과정을 통과하여 60세(耳順-귀가 순리대로 들린다)가 되면 환갑잔치를 열어준다.
환갑잔치는 인생을 거꾸로 본다면 그야말로 어린아이의 돌잔치나 다를 바 없다.
돌잔치가 생존의 조건을 어느 정도 확보했다고 보는 잔치라면 환갑잔치는 삶을 제대로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축하하는 잔치인 셈이다.

장생도(長生圖)는 오래 산다고 하는 소재들을 넣어 왕실의 안녕과 장수를 기원하는 그림이다.
또한 일월오봉도, 궁중모란도와 함께 조선의 궁중회화를 대표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일월오봉도와 장생도는 여러 면에서 닮은 구석이 많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장생도는 고려시대부터 있었고 중국이나 일본, 혹은 동남아시아의 여러 곳에서도 발견되는 국제적인 그림이다.
장생도는 보통 병풍형태로 만들거나 벽장 문을 장식하던 그림이고 정치나 사상, 종교적 내용은 없고 오로지 장수에 관한 내용이 전부이다.
화면이 크고 구성이 복잡하며 표현이 만만치 않아 웬만한 화원들은 창작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장생도는 도화서 화원들에 의해 집단창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장생도는 궁궐에서도 주로 내전을 장식하는데 많이 사용되었다.
궁궐에서 내전은 왕과 왕비가 생활하는 공간이다. 왕의 권위가 아무리 높다하나 일상생활에서는 보통의 성인 남녀와 다르지 않다.
남녀가 생활하는 공간에서는 정치와 사상이 중심이 아니라 사람의 기본적인 욕망과 관계가 지배한다.
장생도가 꽃이나 나비보다는 하늘과 구름, 바위, 바다 따위가 중심이 되어 웅장하고 역동적인 화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궁궐의 은밀한 내전을 장식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쨌든 장생도가 화면이 크면서도 그리기 어렵고 궁궐을 장식했던 그림이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왕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에 남녀노소, 신분이나 계급의 차이가 어디 있겠는가.
궁중의 그림보다는 격이 떨어지고 적절한 크기의 장생도가 양반의 집안을 장식했고, 그것보다 더 단순한 형태의 다양한 장생도가 민가의 관혼상제에 보급되었다.
또한 그림보다는 문양형태로 침구나 식기, 가구 옷, 노리개 따위의 생활품을 장식하여 우리 민족의 모든 사람들이 장생도를 알고 향유하였다.
조선의 사람들은 장생도가 그려진 옷을 입고 돌잔치를 하고 장생도가 그려진 병풍을 배경으로 환갑 잔치상을 받았다. 그리고 끝내 그림 속의 주인공들처럼 장수하지 못하고 세속의 삶을 마감했다.

장생도에는 장생을 상징하는 대략 13가지 요소가 등장한다.
해, 달, 구름, 산, 바위, 물, 학, 사슴, 거북, 영지, 소나무, 대나무, 복숭아가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3가지 소재 중에서 10가지를 선택해 그린 ‘십장생도(十長生圖)’가 주로 그려졌다.
장생의 소재를 살펴보면 해, 달, 구름, 산, 바위, 물은 일반적인 생명이 아닌 그냥 자연이다.
학, 사슴, 거북은 동물이고, 영지, 소나무, 대나무, 복숭아는 식물이다.
해, 달, 구름, 물, 바위, 산에 대해 수명을 말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고, 실제 학이나, 사슴, 거북의 생명이 사람보다 길지도 않고, 수 천 년이 되었다는 소나무, 영지, 대나무, 복숭아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장생의 소재는 모두 사람들이 약속한 상상의 결과물인 셈이다.

▲ 십장생도/10첩 병풍/비단에 채색/208.5*389/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자료사진 - 심규섭]

장생의 요소가 배치된 곳은 현실에 없는 상상의 공간이다.
3차원의 세계와 4차원의 세계가 공존하고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요소가 자연스럽게(?) 결합하고 있다.
사실적인 그림의 바탕에는 명암법과 원근법이 있다.
유럽의 르네상스 시기부터 미술작품에 적용되기 시작한 이 방법은 서구인의 관점, 사고방식, 세계관 따위를 결정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명암법과 원근법에 의한 사실적인 관점은 현상이나 단면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장점이 있다.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사실적인 영화기법은 모두 명암법과 원근법을 활용한 것이다.
로봇이나 외계인, 우주선 따위는 모두 실제처럼 보이지만 모두 허구이다.
사람은 명암과 원근이 잘 결합하여 보여주면 모두 사실로 믿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반대로 이용해 가짜를 진짜처럼 만드는 것이다. 사기꾼일수록 사실적으로 보이려고 한다.
그래서 원근과 명암은 사물을 다각적이고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또한 시공간을 넘나드는 화면구성이 불가능하고 방대한 내용을 담는데도 한계가 있다.
반면 대상이 너무 추상화되어 형체가 사라지면 내용적인 알맹이는 온전히 남을 수 있지만 현실세계로부터 이탈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 그림에서는 서구적인 명암법과 원근법과 그에 따른 화면구성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원근법을 사용하거나 명암을 제거하고 의도적으로 사물을 추상화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가끔 사람들은 서구미술과 비교하면서 우리 그림은 사실적 묘사가 떨어져 수준이 낮은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한다.
하지만 이건 무지에서 오는 오해이다.
이것은 서구인들처럼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음식의 수준이 낮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장생도의 화면구성은 구체성과 추상성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풍부한 내용을 담으면서도 대중성을 확보했다.
원근법은 무시되었고 명암법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간배치, 선묘와 색채 따위를 절묘하게 활용해 만화처럼 가볍거나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제각각인 사물의 독립성을 드러내면서도 서로는 유기적 관계를 통해 역동적인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장생도에 나오는 모든 소재들은 누구라도 쉽게 알아본다.
나무나 식물은 땅에서 자라고 사슴을 땅 위를 거닐고 거북이는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으며 학은 하늘을 난다.
하지만 바다와 땅은 하늘에서 내려다 본 시점이고, 영지나 사슴, 학, 소나무는 정면에서 본 시점이며, 해와 달, 산, 폭포는 아래에서 올려 본 시점이다.
좌우측이 함께 표현되어 있고 여러 시점이 겹쳐 하나의 공간에 존재한다.
너무나 당연한 모습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광경이다.

또한 장생도에는 사계절이 공존하고, 아침과 낮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사슴, 영지, 거북, 학 따위의 소재는 현실에서 가져왔지만 현실의 모습과는 다른 상상의 존재들이다. 사슴, 학, 영지는 상대적으로 거대하게 표현되어 있고 거북의 입에서는 영험한 입김이 흘러나온다.
복숭아 나무에는 복사꽃과 이파리와 복숭아 열매가 함께 그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불가능하지만 누가 봐도 의심 없이 복숭아 나무라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현실과 머릿속에서 상상하고 조합한 이상적인 형상들이 복합적으로 결합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렇듯 장생도는 사실성을 보여주는 명암, 원근, 묘사 따위가 없지만 시공간을 초월하고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눈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실감나게 창조한 이상세계이다.

그림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장생도의 주인공은 해나 바다, 사슴이나 학이 아니라 결국 사람일 것이다. 사슴이나 학이 천년을 살든 만년을 살든 인간의 삶과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각각의 소재는 모두 사람의 욕구가 반영된 상징물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에는 보통의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신선이나 선녀처럼 신격화된 존재에게나 어울릴만한 공간이다.
그림을 찬찬히 보고 있으면 오래 살아야 한다는 욕망이 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이 가라앉고 차분해진다. 그림 속에 펼쳐진 놀랍고 이상적인 세계에 동화된다고 해야 하나.
이 말은 인간의 기본적 욕망이 아무리 강렬해도 결국 자연의 흐름이나 이치에 따라야한다는 의미이다.
몸에 좋다는 동물이나 식물을 잡아먹고 자연을 파괴하거나 훼손하여 수명을 늘이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그릇된 욕망에 경종을 울리는 탁월한 예술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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