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도가 출렁이는 아침 바다에 외로운 섬 하나가 솟아있다.
그 위에 도도한 매가 앉아있고 동쪽 바다 위로 붉고 선명한 해가 떠오르고 있다.
‘바다 매가 해를 맞이하다’라는 뜻의 해응영일(海鷹迎日), ‘아침 해와 독수리’라는 뜻의 욱일취도(旭日鷲圖)가 이 두 작품의 제목이다.
이 그림의 원작자는 영조시대 때의 정홍래라는 도화서 화원이다.
작품에서 매는 왕이나 양반을 상징하고 아침과 해는 조정, 왕을 상징하니까 ‘새해를 맞는 조선과 왕실의 기개나 번영’을 기원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비단에 진채를 사용해 색이 선명하면서도 섬세한 묘사, 바다와 파도의 역동성이 잘 표현된 명작이다.
작품의 섬세함이나 완성도를 보아 취미 삼아 그린 것은 아니다.
특히 비단에 채색을 넣어 그린 작품은 궁중회화의 전형적인 특성이다.
우측과 좌측의 그림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기본 구도는 동일하지만 매의 방향이 반대로 그려져 있고 바위의 모습이나 파도의 모습도 조금 다르다. 무엇보다 좌측의 그림은 진하게 채색이 되어있는 반면, 우측의 그림은 선묘를 중심으로 그렸다. 쓰임새가 달랐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채색을 하지 않았거나 채색하기 전의 원본그림일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일정한 방식이 반복되기에 누가 봐도 같은 화가가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도화서에서 새해를 맞아 왕에게 그려 바친 그림, 일종의 세화(歲畵)이다.
당연히 한 점이 아니라 적게는 서너 점, 많게는 십 수 점을 그렸을 것이다.
그러면 왕은 왕족이나 신하에게 새해 선물로 주었을 것이다.
가끔 우리 옛 그림을 설명하는 문구 중에는 ‘견본채색(絹本彩色)’이란 글자가 있다.
이것을 풀이하면 원본그림에 비단을 얹어 형태를 그린 다음 채색을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원본그림을 비단에 여러 장 복제하여 그린 그림이다.
‘원본그림’을 놓고 베껴 그리는 방식을 ‘본그림’이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권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창작방법이다.
좋은 작품이 있다면 ‘본그림’ 방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창작하고 향유하며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의 원리가 이 속에 숨어있다.
화가는 자신의 작품을 베껴 그린다.
베껴 그릴 수 있는 원본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습작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모두 비슷한 그림을 그린다. 그림만 봐도 누가 그린 것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어제와 같은 오늘을 베껴 생활하고 일주일, 한 달, 일 년을 주기로 반복한다.
그 반복은 일정한 무늬와 결을 가지게 되고 그 무늬가 한 사람의 특성이 된다.
보통 사람들은 베껴 그리는 그림, 혹은 복제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거나 심지어는 창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예술창작원리에 대한 엄청난 오해이자 잘못된 생각이다.
그리스 로마문명을 다시 부흥시킨 것이 유럽의 르네상스인데 현대의 예술, 정치제도, 경제구조, 교육 따위는 모두 그리스 로마문명을 베껴 응용한 것이다.
지금도 유럽의 학생들은 그리스 로마시대나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을 보고 베껴 그리고 있다.
일본이 명치유신을 통해 ‘자식과 마누라를 빼고 모두 유럽식으로 바꿔야 한다’면서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유럽을 모방하고 베꼈다. 미술에서도 그리스 로마시대의 조각상을 석고상으로 모조하여 베껴 그린 것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동양인이 서양인들의 전통을 베낀다는 것은 자신의 전통을 부정한다는 의미이다.
일본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동양에서 벗어나 서구문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구의 전통을 베끼고 복제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튼 베끼거나 복제를 통해 수 천 년 동안 축적되어 온 문화적 전통을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다.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베끼고 복제해야 한다.
그런 다음 현대의 흐름이나 개인의 정서를 가미해 변주하는 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좋은 창작방법이다.
진리에 대한 일편단심

‘바다와 매-일편단심’의 화면구성은 정홍래의 작품을 기본구도로 차용했다.
물론 현대인의 시각에 맞도록 수평선을 낮게 그려 원근감을 넣고 여러 색채를 가미했다.
여기에 ‘해학반도도’, ‘일월오봉도’와 같은 궁중회화에서 정형화된 바다와 파도를 차용하였으며 바위섬은 남성의 성기 모습과 비슷하게 그리면서도 강한 선묘를 넣어 표현했다.
이 그림을 그려놓고 어떤 제목을 붙일까 한참이나 생각했다.
정홍래의 작품과 같은 제목을 사용할 수는 없어서 그냥 우리말로 풀어 ‘바다와 매’라고 했다.
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일단 ‘아침 해’는 이 작품의 핵심 주제와 맞닿아 있는데 제목에 반영이 되지 못했고 일렁이는 파도나 바위섬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제목을 정하자면 정홍래의 작품을 현대에 맞게 다시 해석해야 했다.
원래 아침 해는 조정, 혹은 왕을 뜻하지만 지금은 왕도 없고 대통령으로도 대체하지 못한다. 그래서 동해는 우리나라, 바다와 거친 파도는 험난한 세상이란 뜻으로, 아침 해는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가치로 바꾸어 보았다.
성기를 닮은 바위섬은 강한 생명력을 상징하고 외로운 바다 매는 고귀한 뜻을 품은 사람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까 한반도라는 거친 세상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우리 민족의 가치를 추구하는 외롭지만 의로운 사람을 그린 것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일편단심’이라고 정리했다.
그래서 ‘바다와 매-일편단심’이라는 제목이 만들어졌다.
바람이 불어 파도가 치고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도 아침 해는 어김없이 떠오른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공동체’이다.
이것도 인간사회에서 불변하는 진리이다.
자본과 소비가 판을 치고, 동포를 팔고 착취하여 알량한 자기 욕심만 채우고자하는 행위는 공동체를 훼손하는 일이다.
진리에 대항하는 자, 반드시 천벌을 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