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전문에 따르면 박동진은 스나이더에게 ‘제발 미국 정부가 청와대 도청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부인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한 것으로 돼 있다.”

1976년 11월 2일 스나이더 주한미국대사가 미국 국무부로 타전한 비밀전문에서 박동진 외무부장관이 청와대 도청설을 부인해달라고 요청한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 타커스 출판사의 신간, 안치용 기자의 『박정희 대미 로비 X파일』상권(도청.로비편)과 하권(부패.망명편) 표지. [사진 - 통일뉴스]
이 비밀전문을 처음으로 들춰 낸 『박정희 대미로비 X파일』의 저자 안치용 기자는 “명색이 주권국가에서 국가 원수가 거주하는 곳이 도청당했다는 유력지의 보도가 있었다면 당연히 항의해야 하건만 박정희 정권은 사실 여부를 물어보거나 확인하지 않고 무조건 사실을 부인해달라고 매달린 것이다. 이는 주권국가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고 평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 이후 미국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빚으며 집권 후반기에 자주국방과 핵개발에 나서는 등 ‘자주적’ 행보를 하지 않았느냐는 우리 사회 일각의 다소 막연한 환상이 여지없이 깨뜨려지는 역사적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미국에서 ‘1인 미디어’ <시크릿 오브 코리아>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안치용 기자가 신간 『박정희 대미로비 X파일』 상,하권에서 미국 공문서들을 근거로 파헤친 박정희 정부의 대미 로비의 실태는 가히 충격적이다.

1976년 10월 15일 <워싱턴포스트>의 폭로로 시작된 박동선의 대미 로비, 이른바 ‘코리아게이트’의 전말에는 미국 CIA(중앙정보국)의 청와대 도청과 이를 부인해달라는 한국 정부의 ‘바짓가랑이 잡기’를 포함해 미국 상.하원 의원들에 대한 현금로비 등 추악한 맨얼굴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안치용 기자는 깊숙이 묻혀 있던 역사적 사실들을 단순히 한두 건의 비밀전문을 근거로 ‘소설’을 써내려간 것이 아니라 방대한 원자료는 물론 주변 정황과 역사적 맥락까지 거의 완벽한 근거들에 입각해 탄탄한 사실관계를 ‘입증’해내는 발군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같은 성과는 코리아게이트를 다룬 프레이저위원회의 보고서와 4천 페이지가 넘는 10권의 부속책자는 물론 상하원 윤리위원회 보고서와 부속책자, 국무부 외교전문, 외신보도, 심지어 <워싱턴포스트> 기자의 회고록까지 치밀하게 검토하는 고단한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워싱턴포스트> 멕신 체서 기자의 코리아게이트 1보가 탄생하기까지의 전말이나 대미 로비스트 박동선의 미국쌀 수입 중개권 확보와 상실, 재확보 과정, 중앙정보부가 파견한 주미대사관 소속 요원들의 미국 망명 과정 등을 손에 잡힐 듯이 보여주는 묘사는 입을 다물 수 없게 한다.

이 책의 상권에서 주로 다룬 로비스트 박동선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미국 정계에 영향력을 가진 실력파였고, 하권에 등장하는 김한조는 국가의 돈을 착복하는데 급급한 형편없는 로비스트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이후 미국 의회의 인권문제 제기 등에 대해 현금 로비나 한국 초청 로비 등을 통해 자신의 취약점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다는 점이다.

이같은 과정에서 심지어 김동조 주미대사는 하원의원 래리 윈 주니어 사무실에 돈봉투를 직접 놓고 나오는 대사로서는 상식을 벗어난 로비를 했고, 미국으로 망명한 김형욱은 박정희의 여자관계 폭로를 놓고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주한미국대사관 직원 신분으로 미국에서 활약하던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줄달아 미국 망명을 신청하거나 미국에 눌러 앉았고, 일부는 이 과정에서 자신들이 취득했던 정보를 무기로 박정희 정권을 협박해 신변안전을 보장받거나 돈을 챙기기도 했다.

위에서 아래까지 박정희 정권 당시의 대미 로비의 맨얼굴은 참으로 참담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미국 석유 메이저 업체인 걸프사가 1960년부터 1973년 7월까지 해외에 진출한 수십개 나라에 총 500만 달러의 정치헌금을 제공했는데, 그중 80%인 400만 달러가 한국의 여당인 공화당에게 제공됐다는 사실이 당시 박정희 정권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미 올해 4월 발간된 단행본 『시크릿 오브 코리아』를 통해 안치용 기자의 수많은 특종이 알려졌지만 이번 『박정희 대미로비 X파일』 상,하권은 그가 치열하게 파헤쳐온 박정희 시대의 한미관계의 속살을 제대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그의 저력을 실감하게 된다.

저자는 “학자처럼 코리아게이트의 내밀한 의미까지 날카롭게 분석해내지 못했음을 고백한다”며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 그리고 잘못 알려진 사실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겸손한 바람을 전했다.

그러나 ‘사실’을 알리고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기자의 참된 임무이며, 안치용 기자는 『박정희 대미로비 X파일』을 통해 주류언론사들도 해내지 못한 방대한 작업을 혼자서 묵묵히 수행했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의 새로운 기자상을 제시하고 있다 할 것이다.

안치용 기자가 새롭게 알리고 바로잡은 박정희 유신시대의 한미관계 실상이 『박정희 대미로비 X파일』을 통해 널리 알려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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