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우(통일연대 전사무처장)

다시 연재를 시작하며
- 민족, 민족주의에 대하여

필자는 2004년 6월부터 2005년 7월경까지 매주 1회씩 주로 조국통일 정세와 조국통일운동에 대해 기고한 바 있다. 기고를 하게 된 동기는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찬찬히 정리해 보고 싶었던 데 있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조국통일정세와 운동에 앞선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중 하나의 주제가 민족, 민족주의에 관한 것이다.

필자는 조국통일정세와 운동을 다룸에 있어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을 하나의 ‘전제’처럼 다루어 왔지만 요즈음에는 민족문제 그리고 민족문제에 접근하는 관점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민족, 민족주의 문제를 재조명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작업이 되리라 생각한다.

위의 문제의식에 따라 주로 민족, 민족주의와 관련해 여러 방면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다양한 방면에서 재검토해 보겠다. 논쟁의 활성화를 위해 다소 ‘도전적인' 태도로 적어 볼까 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8번에 걸쳐 민족, 민족주의와 관련된 유력 논객들의 주장을 검토해 왔다. 앞으로도 이러한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지금 시기 굳이 민족, 민족주의를 논하고자 하는 이유’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 글에서는 지금 시기 민족, 민족주의를 논하는 이유 중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지적해 보겠다.

① 자유주의

전근대사회에서 부의 원천은 토지와 농업이었다. 토지에 결박된 농민들의 고된 노동이 모든 부를 만들어 낸 원천이었다. 농민들을 토지에 결박시키기 위해서는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 구조가 필요했는데 이에 부합하는 사상 체계가 종교(성직자)와 혈통(귀족)이다.

BC 5~6세기(이슬람의 경우는 AD 7세기)를 전후하여 출현한 세계 유수의 고등종교는 대체로 초월적인 절대자를 상정하고 이에 대한 순종과 믿음을 강조하여 농민이 토지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막고 농업 공동체의 유지에 필요한 정체성을 부여해 왔다.

성직자나 귀족에 비해 재력과 교양에서 우월했던 신흥 집단인 부르죠아 계급은 자신들의 지배권을 관철하기 위해 전근대사회와는 다른 논리 구조가 필요했다. 부르죠아 계급이 자신들의 지배권을 관철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상 체계가 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체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 토지 귀족의 지배를 정당화했던 초월적인 존재 따위를 부정한다. 초월적인 존재를 부정하면서 사회 구조를 설명하려니 ‘상상’을 통해 사회역사의 시원(始原)을 가정해야 했다. 홉스, 로크 등이 만들어낸 자연상태(혹은 원시상태)는 사회의 시원을 과학적으로 밝히는 과정에서 출현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세계관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과도적 인식을 보여 준다.

둘째, 자유주의 이론에 따르면 원시상태에서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구성 요소는 개인이고 개인들의 자유로운 활동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 사유재산이다. 그리고 이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개인들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집단이 곧 사회이다. 재력과 교양을 갖춘 개인, 이들이 축적한 부, 그리고 이를 보호하는 사회. 이것이 자유주의 이론이 만들어낸 이론 체계의 골간이다.

모든 사상에는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과 그들의 이해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자유주의 이론의 주체는 재력과 교양을 갖춘 부르죠아 계급이고 자유주의 이론이 제시하고자 하는 핵심 골자는 사유재산의 신성화(神聖化)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자유주의 이론이 인류 역사의 진보였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보면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래에서는 이를 몇 가지로 나누어 검토해 보겠다.

첫째, 자유주의 이론은 절대적 진보나 진리가 아니라 근대, 서유럽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만들어진 역사적으로 한계지워진 상대적인 진보와 진리라는 점이다. 문제는 근대, 서유럽이 만들어낸 자유주의 이론을 절대적인 진보나 진리로 보고 이를 맹신하는 경향인데 한국 사회의 주류, 제도권 사회의 거의 모든 논객들이 이러한 경향을 보인다.

근대라는 시간은 인류 역사 전체로 보면 미미한 부분에 지나지 않고 근대 사회가 이루어낸 역사적인 성취보다 놀라운 역사적 성과는 인류 역사에서 얼마든지 있다. 또한 서유럽은 공간, 인구라는 면에서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중화, 이슬람 세계는 근대 형성의 과정에서 서유럽에 뒤졌지만 인류 역사의 더욱 오랜 기간 서유럽보다 선진적인 지역이었다.

더구나 자본주의의 폐해가 날을 따라 전면화되고 있는 조건에서 근대, 서유럽이 만들어낸 가치를 절대화하고 그 연장선에서 해법을 구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역사의 발전은 지나온 과거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사상의 혁신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어중간한 변형, 아류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근대 서유럽을 절대화하는 연장선에서 출현한 하나의 관점이 사회 역사의 주체를 ‘개인’으로 보고 그 연장선에서 배태된 가치를 긍정하는 경향이다.

인류 역사의 많은 기간 사회역사적인 관점에서 개인은 존재하지 않거나 부차적이었다. 먹을 것을 찾아 유랑하던 원시 사회에서 집단으로부터 분리된 개인은 생명을 부지하는 것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원시 사회라면 생물학적인 개인은 존재할 수 있어도 사회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개인은 존립할 수 없었다.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전근대사회를 규정했던 인간 단위는 토지에 결박된 농업 공동체였다. 공동체적인 노동과 생활속에서 자연히 사회를 운영하는 기본 구조도 집단적이고 공동체 지향적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역사적인 차원에서 의미있는 존재로서의 ‘개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역사의 주체로서의 ‘개인’은 근대 서유럽 특히 부르죠아 계급이 만들어낸 역사적 산물이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근대 서유럽의 역사는 제한적인 차원에서만 긍정되고 수용되어야 하며 자본주의의 폐해가 심각해지고 있는 조건에서 그것이 갖는 역사적 한계에 대한 의미있는 비판이 제기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의 핵심의 하나는 근대, 서유럽의 부르죠아 계급이 만들어낸 사회역사적 실체인 ‘개인’과 거기에서 파생된 제반 이데올로기를 상대화, 부정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② 제국주의와 식민지

자유주의로 무장한 부르죠아 계급은 19세기말 제국주의로 변신한다. 근대, 서유럽을 열었던 영국, 프랑스 등의 부르죠아 계급은 전 세계를 무대로 참혹한 약탈과 침략을 자행했다. 흔히 약탈과 침략의 역사를 독일이나 일본 등과 같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 전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자유주의와 제국주의와의 태생적 연관을 끊어 내려는 터무니없는 역사 왜곡이다.

제국주의가 비서구세계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비서구사회는 전근대적인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전근대사회는 대체로 토지에 결박된 농업 공동체였고, 이 농업 공동체는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혈연과 언어를 같이 하는 공동체’ 즉 민족과 대체로 일치했다. 특히 유서깊은 문명 지역인 동아시아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서구 사회의 침략에 맞선 투쟁은 농업공동체의 지배자였던 지주 계급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들의 저항은 압도적인 물리력에 의해 비교적 간단히 제압되었다. 제국주의자들은 공업화된 군대를 배경으로 비교적 소수의 병력으로 짧은 시간에 전 세계를 유린했다. 그 만큼 근대와 전근대의 차이가 컸던 것이다.

지주 계급의 절망적인 저항이 막을 내린 이후 진보적 인텔리, 노동 계급 등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출현한다.

레닌은 토지 귀족이 벌이는 전근대적인 저항과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전망을 보여 주었다. 레닌의 사상 곧 근대적 혁명이론과 혁명적 당이라는 발상은 다음 단계에 출현할 민중적 민족해방운동에 유력한 자산이 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레닌 자신은 러시아의 토착 사상과 집단에 근거한 ‘민족주의자’라기보다는 서유럽의 전통에 충실한 ‘국제주의자’였다. 레닌의 성공은 1차대전으로 촉발된 경제적 위기를 배경으로 주로 도심지에 집적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볼세비키에 의존한 것이었으며 여전히 러시아 사회의 가장 커다란 집단이었던 농민은 중립적이거나 방관적(?)이었다.

러시아의 광범한 농민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것은 아마도 히틀러의 소련 침략 과정에서일 것이다. 유럽을 석권했던 유럽 최강의 공업국가 독일에 맞서 유럽의 동부 지역을 피로 물들였던 러시아 농민의 경이적인 저항은 2차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분깃점이 되었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싸움 이면에는 ‘근대, 서유럽에서 태동한 문명화된 근대 세계와 여전히 농업공동체에 결박되어 있거나 이제 갓 그 태내를 벗어난 전근대사회의 충돌’이 내재되어 있었다. 러시아 농민(또는 농민에서 갓 변신한 노동자)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는 전근대적 사회의 저항이 얼마나 근본적이고 강력한가를 잘 보여주었다.

근대적인 혁명이론, 조직화된 지도 집단과 전근대사회의 농업공동체를 결합한 반제 투쟁의 전형은 중국의 마우쩌둥, 북의 김일성, 베트남의 호지민 등 동아시아의 사회주의였다. 레닌이 자본주의적 발전을 역사의 필연으로 간주하며 러시아의 농업공동체에 근거한 저항이 무모한 것임을 지적했다면 동아시아 사회주의자들은 그 농민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그들을 혁명의 주역으로 삼았고, 레닌이 독일 등 선진 부국의 혁명을 고대하며 낙후한 러시아만의 혁명을 무망(無望)한 것으로 간주한 국제주의자였다면 동아시아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의 존엄과 혁명의 토착성을 강조한 민족주의자였다.

레닌의 발상은 근대 서유럽 나아가 마르크스의 유산과 맞닿아 있는 ‘전근대인가 근대인가’, ‘생산적인가 비생산적인가’에 있었다면 동아시아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은 ‘자주인가 종속인가’에 있었다. ‘전근대인가 근대인가’의 문제 설정이 전근대사회에서 생산력을 해방시켰던 부르죠아 계급과 유사한 문제 설정이라면 ‘자주인가 종속인가’의 관점은 외세 침략에 저항하는 전근대사회의 전통 집단에게 유효한 사상 관점이었다. 자주의 주체는 근대 서유럽이 만들어 낸 ‘개인’이 아니라 혈통과 언어를 같이 하는 공동체 곧 민족이었다.

비서구 사회가 민중적 민족주의를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비서구 사회는 비로소 서구 사회의 제국주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다. 19세기말 20세기 초반의 제국주의의 침략 과정이 근대가 전근대에 비해 얼마나 우월한 것인가를 보여 주었다면 20세기 중후반의 역사는 민중적 민족주의가 그러한 제국주의에 맞서 얼마나 강인하게 싸울 수 있는가를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제국주의의 침탈이 현실인 식민지 세계에서 자유주의란 주류 사상일 수 없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약탈의 칼끝은 너와 나를 가리지 않고 식민지 사회 전체에 부과되었고 식민지 사회는 식민지 사회 전체를 동원하지 않으면 제국주의와 싸워 이길 수 없었다. 여기에는 이해와 요구를 같이 하는 전체로서의 집단이 있을 뿐이지 ‘개성과 개별’을 중시하는 개인은 존재할 수 없거나 주변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식민지의 민족해방 투쟁은 제국주의의 언어인 자유주의를 뛰어 넘어 가장 강력한 집단주의의 표현인 민족주의와 결합되어야만 승리할 수 있었고, 개별 인간의 자유란 민족 집단의 자주성이 보장된 이후에야 가능한 문제였다.

③ 자유주의의 변화

20세기 초반 전쟁과 공황, 파시즘의 출현 등 전 세계를 도탄과 참화로 몰아갔던 자유주의는 2차 대전 이후 여타 세력,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자유주의를 시대에 맞게 변화시킨다. 이를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뉴딜 정책 등으로 대표되는 케인즈의 사상이다.

케인즈 이론은 개인의 재산과 개성을 발양하기만 하면 사회는 순조롭게 발전한다는 순진한 낙관론 대신에 국가가 개입하여 경제를 조절해야 한다는 새로운 발상을 가지고 있었다. 철학적으로 보면 자유로운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국가가 필요하다는 점, 경제 현상 또한 조절과 통제가 필요하다는 점 등에서 자유주의 이론과 맥을 달리 하는 사상이다.

사회역사를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열쇠는 사회계급적인 역관계이다. 케인즈의 발상은 전체적으로 보면 자본주의의 위기에 직면한 부르죠아 계급이 부분적인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었다. 지배 계급의 너그러운 선의에 기초하고 있고, 의미있는 세력 관계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케인즈의 사상은 자유주의의 변종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정치적 민주화의 확대이다.

모든 사상에는 그것을 대변하는 주체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자유주의 이론의 주체는 재력과 교양을 갖춘 부르죠아 계급이었다. 이들은 종교와 혈통을 부정하여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임을 선언했지만 이 때의 인간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재력과 교양을 갖춘 부르죠아 계급’이었다. 초기 자유주의 이론이 입헌 군주제나 제한선거와 같은 보수적 색채를 띠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만민평등, 인민주권의 원리는 자유주의 이론에서 태동한 것이 아니라 부르죠아 계급에 맞선 밑으로부터의 투쟁에 의해 쟁취된 것이다. 보통선거의 원리는 자유주의에 내장되어 있던 본질이 아니라 비(非)부르죠아 계급이 수백년에 걸친 지난한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결과물이다.

자유주의는 부르죠아 계급이 갖고 있는 사유재산을 골간으로 전개된 이론 체계라면 민주주의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보편적인 신념으로부터 발원한 신념 체계이다. 자유주의 이론이 부의 많고 적음을 수긍하고 이에 따른 차별을 두는 정당화하는 세계라면(주식회사에서 1주 1표제를 생각해 보라) 민주주의는 재산과 교양이 있든 없든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1표를 행사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원리적으로 갈등 관계에 있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띨 것인가의 문제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다. 2차 대전 이후 서구 사회에서 나타난 현상은 자유주의 이론이 민주주의를 차용하면서 부르조아 계급의 주도 아래 민중과 타협한 사례이다.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성장과 정치 참여가 자유주의 세력의 전횡을 제어하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결합시켰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유럽의 사례는 역사적으로 보면 예외적인 사례에 가깝다. 한국에서의 자유주의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아니라 사상과 양심을 억압하는 보수반공주의로 표변하였고 중동과 중남미에서 자유선거를 강조하던 미국은 자유선거를 통해 들어선 반미정부를 공공연히 부정하곤 했다. 최근에는 신자유주의가 심화되면서 중동이나 중남미에서 민주주의를 통해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 사례 모두 민주주의가 어떤 시대적 환경과 조건속에서 추진되는가의 중요성을 시사해 주는 사례이다.

2차 대전 이후 서구사회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한 것은 부르죠아 계급의 주도권 하에서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참여가 보장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역사적 진보라고 할 수 있겠다.

셋째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폐해를 사회복지의 확대나 연대를 통해 보완하려는 시도이다.

자유주의는 그대로 두면 빈부격차를 양산하고 공황, 전쟁 등 미증유의 유혈사태를 빚어낸다. 따라서 사회가 개입하지 않으면 자유주의 자체로는 존립할 수 없다. 앞서 지적한 케인즈류의 발상이 경제 위기를 해소하려는 다분히 속물적인 임기응변의 산물이라면 서유럽, 북유럽의 사민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이론에 모든 인간은 인간다운 존엄을 누릴 권리가 있고 그 책임은 사회에 있다는 ‘연대’의 발상을 새로이 결합한 것이다.

특히 북유럽의 놀라운 성과는 자유주의 사상의 천박한 발상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철학적 관점의 교정으로부터 사회를 재구축했다는 차원에서 특기할 만하다. 이는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정치적 참여라는 정치적 민주화뿐만 아니라 철학, 사회적 차원으로 민주화의 영역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 나타난 자유주의의 변화들은 서구 사회의 자정능력을 잘 보여준 사례이다. 서구 사회의 긍정성은 자유주의 사상에 있다기보다는 시대의 변화에 맞게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에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서구 사회는 다시금 적나라한 정글의 논리 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200~300년 전의 자유주의가 영국, 프랑스 등의 일국적 차원의 ‘꼬마’ 부르죠아였다면 현대의 자유주의는 제멋대로 국경을 뛰어 넘는 거대 금융자본이라는 점에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④ 신자유주의와 한국 사회

현재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 문제가 다시금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이와 관련한 다양한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겠다.

한나라당과 조선일보 등의 보수수구 세력은 신자유주의를 채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의 주체가 초국적 금융자본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초국적 금융자본의 이해를 ‘무조건’ 대변하려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보수수구 세력의 친미적 성향은 일종의 신앙이다.

노무현 정부의 대응은 케인즈류의 발상인 듯하다. 경기를 부양하고 재정 지출을 확대하면 경기 불황을 해소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케인즈류의 처방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사방에 넘쳐 나는 돈이 증시와 부동산에 집중되면서 사회적 양극화, 빈부 격차를 오히려 확대시키고 있다. 노무현 정부류의 대응이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노무현 정부의 실정(失政)이 명확해 지면서 노무현 정부를 지지했던 사람들속에서 서구식 사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는 발상이 늘어가고 있다(최장집 교수가 대표적인 논객이 아닐까 한다). 이들은 앞서 ③에서 지적했던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적 연대를 보다 발전시켜 즉 ‘민주주의를 경제 영역까지 심화’시켜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필자는 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유럽의 사민주의 모델은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 인간적인 존엄을 누릴 수 있다는 철학적 신념의 소산이며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투쟁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분단반공 질서가 여전하고 미국식 자유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조건에서 유럽식 사민주의가 성장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 아닐까 싶다.

한나라당류의 자유주의 옹호론이나 노무현 정부류의 케인즈류의 발상이나 ‘민주주의 심화론’ 등은 모두 초국적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질서 전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그렇게 해서 형성된 국제 질서를 고정시켜 두고 국내 정치사회질서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에 초점이 가 있다.

이들 모두 철저하다 싶을 정도로 이제는 ‘제국주의-식민지’ 문제는 사라졌다고 보거나 자유화ㆍ개방화된 국제질서나 외세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를 누락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주류든 비주류든, 진보든 보수이든 필자가 앞에서 지적한 두 가지 대립했던 역사적 전통, 즉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흐름 중 지나치게 전자의 연장선에서 사물을 바라본다.

위의 여러 조류 중 가장 건전하고 진보적인 것으로 보이는 ‘민주주의 심화론’ 또한 별로 다르지 않다. 민주주의 심화론은 노무현 정부가 형식적인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한 반면 사회적 양극화 해소라는 실질적이고 사회경제적인 민주화를 이룩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민주화를 사회경제적인 영역으로까지 확대하여 문제를 해결하자는 발상이다.

좋은 말이기는 하나 자물쇠가 가리키는 방향과 열쇠가 지향하는 방향이 다르다는데 문제가 있다. IMF 이후 한국사회의 양극화는 보수수구 세력과 개혁진보 진영이 민주주의의 정도를 두고 각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 초국적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경제 질서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따라서 핵심은 초국적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경제 질서를 수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아니면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선차적이고 우선적인 대응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민주주의를 말하면 만사형통하는 처방이 되는 경향이 있는 데 이들은 문제를 정면에서 바라보는 정공법을 쓰기보다는 익숙한 담론에 기대어 현실에 미봉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그 만큼 이들 또한 근대 서유럽식 가치관, 세계관에 깊숙이 포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건은 초국적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경제 질서를 ‘우리’가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차적으로 민족(그것도 아니라면 국민경제)이고 그 다음이 내부의 사회경제적인 역관계이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라면 ‘개인’이란 내부의 사회경제적인 역관계 이후에나 나서는 문제이다. 그 만큼 IMF 이후의 경제 상황은 그 사람이 어떤 계급적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선명하게 명암이 갈렸다.

이렇게 보면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민족과 민족주의의 문제이다. 1990년대 철지난 유행가처럼 치부되었던 민족과 민족주의를 다시금 꺼내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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