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가 사람들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것을 새삼 느낀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특색을 가지는 얼굴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새로운 도전에 나서며 매일이 뜨거운 곳이 제주에 있다. ‘몬딱’.
처음 제주로 오니 키위농장과 귤밭, 보리밭으로 둘러 쌓인 집에는 이웃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이 시골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유일하게 제주 이웃의 소식을 전해 주던 곳이 바로 이곳 ‘몬딱’의 단톡방이었다.
“제주에 가면 당신 심심하지는 않을 거야, 많은 사람이 다양한 취미생활로 아주 바쁜 ‘몬딱’이라는 데가 있어... 당신이 미국에서 해보고 싶다고 한 것들, 거기 가면 해볼 수 있을 거야”라는 남편의 말을 나는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그럴 리가... 그런 데가 있을 리가...’라고 생각했다.
쨍한 하늘 아래, 푹푹 찌는 한여름, 제주에 도착한 나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화기만 들여다봤다. 아직 자동차도 없고, 버스는 땡볕에 2,30분은 기다려야 탈 수 있어서 ‘이렇게 살려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지’하는 생각 뿐이였다. 보다보다 남편의 전화기까지 빼앗아 ‘몬딱’ 단톡방을 들여다보다가, 아무의 초대도 받지 않은 낯선 곳에 자진해서 들어았다.
막상 들어와 보니 딱히 반기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올라오는 내용들만 보아도 사람들의 연륜이 예사롭지 않은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는 기자였고, 누군가는 작가로 오랫동안 지역에서 문화활동을 해온 분들이라고 했다.
최근 우리끼리의 만남을 넘어 문화예술 신문을 통해 제주에서의 문화를 꽃피우고, 모든 예술과 삶을 담아내자고 하는 김민수 대표의 큰 계획이 ‘몬딱’을 또다시 뜨겁게 달군다.
이곳에서 만난 바바라는 공립학교 영어교사로 은퇴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의 긍정적이고 활달한 목소리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단번에 좁혀주었다. 처음 인사를 나눈 지 이틀 후, 어제는 제주국제합창축제가 있으니 함께 가자며 초대해 주었다.
서귀포예술의전당에 도착해 그녀의 지인들도 소개받고, 우리는 서로을 잘 알지 못한 채 어색한 웃음과 조심스러운 인사를 나누며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올해로 벌써 10회를 맞는 제주국제합창축제는 22일 전야제를 시작으로 26일까지 이어진다. 오후 2시 30분부터 합창 관련 강의와 세션이 진행되고, 매일 저녁 7시부터 합창 공연이 열린다. 모든 공연은 제주도민에게 무료로 개방된다.
제주국제합창단은 물론, 코스타리카, 미국, 인도네시아, 폴란드 등에서 참가한 합창단과 한국의 각 지역 시립합창단의 공연이 무대에 오른다.
제주국제합창축제 김일환 공동조직위원장은 “사랑은 모든 것을 덮는다(Caritas omnia operit)라는 라틴어의 뜻처럼, 오늘의 합창 축제가 서로 다른 목소리와 각기 다른 속도로 서로의 마음을 감싸 주는 합창이 되기를 바란다”면서 “완벽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믿고 품어 낼 때에 만들어지는 화음이 제주의 자연처럼 서로 경재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기억하는 마음을 모으는 합창 축제가 되기를 바란다”고 인사했다.
합창단이 무대 위에 섰을 때, 나는 문득 우리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함께 오게 되었는지 생각했다. 각자의 삶을 살던 사람들이 우연과 인연을 따라 이곳 제주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 앉아 같은 노래를 듣고 있다니...
‘사랑은 모든 것을 덮는다’라는 이번 축제의 주제처럼, 서로 다른 목소리가 하나의 화음을 이루듯 우리 또한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사실은 내가 제주에 와서 안덕면 여농회원으로 이곳의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매번 느끼는 신기함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합창단은 첫 번째 무대에 오른 비오에이 콰이어(BoA Choir)였다. 연세 지긋한 백인 단원들이 중심이었고, 휠체어에 앉아 동료의 도움을 받으면 입장한 단원과 독창을 맡은 흑인단원, 유일한 동양인 단원도 눈에 띄었다. 연로한 몸으로 음률에 맞취 몸을 흔들다 금세라도 쓰러질 듯 보이는 할머니 단원조차 지휘자의 손짓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만들어 낸 아름다운 화음이 공연장을 채우자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관중들의 가장 뜨거운 환호를 받은 코스타리카 합창단 엘 카페 코랄(El Café Coral)은 바바라가 배우고 있다는 플라멩코풍 복장을 하고 입장해 처음부터 흥겨운 기운을 전해 주었다. 남미의 습하고 더운 지방에서 모기가 날아다니는 소리와 모기를 쫓는 사람들의 모습을 노래로 유머러스하게 풀어냈다. 스페인 플라멩코 전통춤까지 곁들인 경쾌한 노래와 춤으로 관중과 합창단이 하나가 된 듯 박수 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공연이 끝난 뒤, 이들은 공연장 복도로 나와 단원들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화답하듯 즉석에서 ‘베사메 무쵸’를 무대에서 받은 앵콜 곡으로 불러주었다. 큰 박수와 환호를 한 몸에 받으며 기뻐하는 그들과 우리 모두 상기된 얼굴로 가까이에서 서로 인사를 나눴다.
귤빛 여성합창단이 부른 ‘쾌이나 칭칭 나네’, 제주국제합창축제 위촉 곡으로 선보인 제주의 노래 ‘이여도 거래’, ‘아름다운 제주도’들을 들으며 여고 시절 학교에서 열렸던 합창대회가 기억났다. 마음이 사,오십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풋풋한 기분도 느껴졌다.
역시 합창이란 여러 개의 목소리가 하나의 음악이 되는 순간이다. 나는 그 화음이 무대 위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아름다움은 합창을 통한 무대 뿐만 아니라 객석에서도, 그리고 우리 삶과 이웃의 만남에서도 언제든 선율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합창은 목소리를 맞추는 일이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도 그와 비슷한 과정인지 모른다. 서로 다른 높이와 다른 속도를 지닌 삶들이 잠시 멈춰 서서, 같은 호흡을 만들어 가는 일이 동행이고 공동체가 되는 과정이지 않을까!
돌아오는 길,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휠씬 자연스럷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의 지나온 시간과 살아온 이야기, 제주에서의 바람까지, 생각해 보면 우리는 노래를 들으로 갔다기 보다, 서로를 만나러 갔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제의 노래는 끝났지만, 그날 함께했던 시간은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낯선 사람들이 아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