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 (Korean genealogy for U.W.H.L. - Academic Chairman)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강씨(姜氏)는 경남 진주를 본관지로 하는 진주강씨(晉州姜氏)와 금천강씨(衿川姜氏)가 있으나, 동일혈족으로 사실상 단일본이다. 진양강씨(晉陽姜氏), 또는 진산강씨(晉山姜氏)라고도 한다. 진주강씨의 형성과 발전을 탐색하는 일은 조심스럽고도 매우 흥미롭다. 문중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주강씨도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씨족 가운데 하나이므로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의 전개가 문중에서 달갑지 않더라도 이해해 주시기를 앙망(仰望)한다.

1. 진주강씨는 고구려계 토성이다

오래전부터 나는 진주강씨를 외래의 귀화성이 아니라 우리나라 고구려계의 토성으로 보았다. 우리나라 모든 강씨(姜氏)의 시조는 고구려의 용장 강이식(姜以式) 장군이다. 고구려 영양왕8년(597년) 중국 수나라는 고구려에 국서를 보낸다. “상국(上國)인 수나라에 지성과 충절을 소홀히 한다”라는 방자한 내용이었다. 왕은 이에 대한 화답을 논의했다. 이때 강이식은 “이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한다”라고 기개 높이 말한다. 왕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강이식은 정예 병력 5만 명으로 수나라 군사 30만 명을 요동 땅 임유관 전투(臨渝關戰鬪, 임유관은 지금의 산해관)에서 격퇴한다. 그는 또 살수대첩 때 을지문덕과 함께 수양제의 1백만 대군을 무찌른다.

진주강씨는 고구려의 강이식을 원조로 하고, 고려의 강감찬과 강민첨 등등 호국의 명장을 중시조로 한다. 이러한 가문을 16세기 후반의 사대주의자들은 강이식을 수나라의 귀화인으로 주장한다. 이어서 강이식을 중국 주나라 시기의 재상 강태공(姜太公, ?~B.C.1005경)의 후손으로 주장하더니, 한 수 더 떠서 전설상의 인물 염제 신농씨(炎帝 神農氏)가 강씨의 원 시조라 주장한다.

강태공은 강이식 장군보다 1500년 이전의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 성(姓)의 사용은 중국에 비하여 상당히 늦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장수왕 때(5세기 전반)부터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강이식 장군은 6세기 후반부에 활동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성이 같다고 하여 1500여 년 후에 태어나 활동한 인물 강이식을 강태공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한 주장이다.

중국의 고전에 강이식 장군을 언급한 직접적인 문헌은 없다. 일부에서 강이식 장군의 전거로 제시하는 중국측 문헌은 자의적으로 왜곡 해석한 것이다. 더욱이 전설상의 인물 염제신농씨의 후손이라는 주장은 가치가 없다. 이런 주장은 보편적 객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진주강씨의 원조 강이식 장군이 수나라의 귀화인이라는 주장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대주의가 만연하면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1970년대 말에 이러한 무리한 주장에 큰 변수가 생겼다. 당시 안호상(安浩相, 1902~1999) 박사의 대중을 상대로 한 강의에 진주강씨중앙종친회의 한 임원이 참석하여 청강한 적이 있었는데, 안호상 박사는 “중국의 사서에는 염제신농씨와 강태공을 동이족(東夷族)으로 기록하고 있다”라고 강의한 바 있다. 강의가 끝날 즈음에 그 종친회 임원은 발언 기회를 얻어 “진주강씨가 중국 귀화성인 줄 알았는데, 동이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라며, 그 사실을 앞으로 간행하는 족보에 밝힐 듯이 매우 고무되어있었다. 근대의 우리 민족사학 앞에서는 진주강씨는 동이족의 일원으로 다시 정의된 것이다. 어떻든 진주강씨는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고구려계의 자랑스러운 토성(土姓)으로 보아야 옳다.

2. 강이식 장군의 실존성

진주강씨는 고구려 장군 강이식의 후손이다. 강이식에 관한 우리나라의 고문헌은 족보 기록만이 유일하다. 그리고 저 남해 끝의 경남 진주를 관향지로 하고 있다. “강이식이 과연 실존 인물이냐?”라고 회의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강이식을 강태공과 염제신농씨의 후손으로 주장하는 데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민족사학자 첫 세대는 대체로 강이식은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함께 수나라를 무찌른 고구려의 장군으로 보았다. 강이식처럼 이름이 잊힌 고구려의 장군으로는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이 있다. 강이식 장군도 과거의 역사책에서는 지워질 수 있었다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다. 그러나 강이식의 후손들이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강이식 장군의 실존성은 그 후손들의 역사적 활동에 살아있다.

단재 신채호는 강이식의 실존성을 언급하면서 그의 묘소가 중국에 있음을 적시한 바 있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事)』에 따르면, “묘(墓)는 만주(滿洲) 심양현(瀋陽縣) 봉길선 원수림 역 앞에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라는 큰 비석이 있었고, (20세기 초에) 그 돌조각과 거북 좌대가 묘역에 남아 있다”라고 한다. 단재는 『서곽잡록』과 권문해(權文海, 1534~1591)의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인용하여 『조선상고사』에서 당시 병마원수를 맡고 있던 강이식 장군의 5만 병력이 수나라 군대를 격퇴한 것으로 기록한다.

“강이식은 수군(水軍)을 시켜 바다에서 군량 운반선을 맡아 깨부수고 전군에 명하여 보루를 높이 쌓은 채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수군(隋軍)은 군량이 떨어져 먹을 것이 없는 데다, 6월 장마를 만나 굶주림과 역질로 사망자가 늘 펀했다. 어쩔 수 없어 군사를 퇴각시키자, 강이식은 이들을 유수 가로 추격하여 전군을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자 기계를 얻어 개선했다.” 이 묘의 현재의 위치는 “요녕성 무순시 장당향 고려영자촌(辽宁省 抚顺市 章党乡 高丽营子村) 동쪽 농지(農地)인데, 묘비의 대좌만 남아 있다.”라고 한다.

진주강씨문중에서는 중국의 요녕성 문물국이나 현지의 한 대학교와 협상하여 이 묘비의 대좌를 중심으로 하여 지표 조사와 유적 발굴을 추진하며, 이 지역을 고구려 강이식 장군의 유적으로 성역화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중국은 고구려를 고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말하므로, 중국의 그 관점을 실사구시로 파고들어 일단은 성역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3. 진주강씨의 분파

진주강씨는 파조를 달리하는 다섯 개 큰 파로 크게 나뉜다. 즉 인헌공파(仁憲公派, 衿川姜氏)를 비롯해, 은열공파(殷烈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박사공파(博士公派), 소감공파(少監公派) 등 5파이다. 이 다섯 개 큰 파의 내부에도 각기 여러 개의 작은 지파가 있다.

- 인헌공파(仁憲公派) : 시조 강여청(姜餘淸, 790~856)은 신라 때 시흥군(始興郡)으로 옮겨와서 금주(衿州)의 호족이 되었다. 금천강씨(衿川姜氏)라고도 한다. 강여청의 4세손인 강궁진(姜弓珍)을 중시조로 하는데, 강여청의 아들이 귀주대첩으로 거란군을 무찌른 강감찬(姜邯贊, 948~1031)이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강감찬전을 보면, 강감찬의 5대조 강여청이 신라에서 와서 시흥군(始興郡) 즉 금주(衿州)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것은 강궁진의 탄생지는 금주이며, 그는 금주 일대의 토호였다. 그는 고려 태조 왕건을 섬겨 고려 건국을 도운 공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진주강씨 가운데 문중의 형성이 가장 빠른 파는 인헌공파, 즉 금천강씨이다.

인헌공파의 인물로는 조선 인조 때 우의정 세자부(世子傅)를 지낸 문정공(文貞公) 강석기(姜碩期)가 있다. 그의 딸이 소현세자의 빈이 되는 민회빈 강씨이다. 소현세자가 독살을 당하고 그가 사약을 받게 되자, 그의 아내와 친모, 4형제가 모두 사돈인 인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들들 또한 제주도로 귀양 보내져 생을 마감했다. 일제 강점기 일본 총독에게 수류탄을 던진 의사 강우규도 인헌공파의 후손이다.

- 은열공파(殷烈公派) : 자주(慈州)대첩으로 거란군을 무찌른 강민첨(姜民瞻, 963~1021)을 중시조로 한다. 1018년에는 거란군이 고려를 침입하자 강감찬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패배한 소배압의 군사가 다시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추격하여 자주(慈州)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공으로 응양상장군이 되고 일등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이듬해 지중추사 병부상서가 되었다. 그의 후손으로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평론가로 유명한 강세황(姜世晃)이 있다. 조선후기 예림의 총수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은열공파에 속한다.

- 시중공파(侍中公派) : 문하시중 강원용(姜遠庸)을 중시조로 한다. 관서대장군파(關西大將軍派)라고도 한다. 후손들에서 많은 문하시중이 배출되었는데, 그중 전객령 문하시중을 역임한 강윤보(姜允輔)는 포은 정몽주와 도의교(道義交)를 맺기도 했다. 그는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고, 9세손 강행(姜行)은 세조 때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평정했다.

- 박사공파(博士公派) : 국자박사(國子博士) 강계용(姜啟庸)을 중시조로 한다. 그는 고려 원종15년(1274년)에 통신사서장관(通信使書狀官)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박사공파는 박사공의 손자(3세) 강사첨(姜師瞻)이 어사를 지냈다 하여 어사공파(御史公派)라고도 하는데, 강사첨의 5세손(4대) 중 첫째 강회백의 후손은 통정공파(通亭公派)를, 둘째 강회중(姜淮仲)의 후손은 통계공파(通溪公派)를 형성하고 있다. 조선초기의 인물 강석덕과 강희안 강희맹 삼부자가 여기 통정공파에 속하며, 통계공파에서는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강사상(姜士尙)과 역시 선조 때 평난공신에 오르고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거쳐 중추원판사를 지낸 진흥군(眞興君) 강신(姜紳, 1543~1615)이 있으며,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오르고,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진 강인(姜絪) 형제가 있다.

정묘호란의 주역으로 불리는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은 강신의 아들이다. 특히 강인의 후손은 고종 때에 와서 강준흠(姜浚欽)·강시영(姜時永)·강문형(姜文馨)·강난형(姜蘭馨)·강우형(姜友馨)·강국형(國馨) 등 판서급 인물을 배출한다. 이 밖에도 인조 때 화포술(火砲術)을 개발한 강홍중(姜弘重)도 통계공파의 사람이다. 이러한 박사공파는 진주강씨 전체의 약 80%를 차지한다. 즉 박사공파는 100만 명이 넘는다.

- 소감공파(少監公派) : 사도소감(司徒少監) 강위용(姜渭庸)을 중시조로 한다. 소감공의 후손들은 황해도 안악(安岳)을 중심하여 주로 황해도 북부지역과 평안도 덕천(德川) 정주(定州)에 많이 거주하였고, 현재 남한에는 황해도에서 남하한 후손 일부가 있다. 고려와 조선을 거쳐 후손 대대로 효자·열녀를 배출한 지파이다.

4. 진주강씨문중의 과거급제자

진주강씨문중의 조선시대 과거급제자 통계는 [표1]과 같다. 금천강씨를 합하면 문과에서만 234장의 급제자를 내었고 사마시에서는 진사 304장, 생원 296장을 내었으며, 무과에서는 400장의 급제자를, 잡과에서는 29장의 급제자를 내었다. 모두 1,263장이다. 강씨는 2021년 현재 1,321,575명이 현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표1] 진주강씨문중의 과거급제자 통계 (문과급제자 많은 순)

본관

문과

고려 사마

무과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

합계

진사

생원

晉州姜氏

(고려 8)

0

398

18

8

3

0

(고려 8)

228

290

289

1234

衿川姜氏

(고려 1)

14

7

2

0

0

0

0

(고려 1)

6

29

합계

(고려 9)

304

296

400

18

8

3

0

(고려 9)

234

1263

 

진주강씨문중에는 고려시대에 문과급제하였다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상당수 있다. 그러나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서는 [표2]의 9인 9장 만이 검색된다.

[표2]에 있는 6인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형성을 정리하면 [표3]과 같다. 즉, 진주강씨의 고려시대 문과급제자 9인 가운데 6인은 3세 강청서와 6세 강사첨(姜師瞻), 8세 강군보(姜君寶), 9세 강시(姜蓍, 1339~1400)이며 10세 강회백(姜淮伯, 1357~1402) 강회중(姜淮仲, ?~1421) 강회계(姜淮季, ?~1392)로, 5인이 려말선초의 인물이다. 9세 강시의 아우는 1419년 좌의정으로 가직된 개국원종공신 강서(姜筮, 1347~1424)이다. 10세 강회백의 아들은 11세 강석덕(姜碩德, 1395~1459)이고, 손자가 조선초기에 활동한 12세 강희안(姜希顔, 1418~1465)과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며, 강희맹의 아들이 우의정을 지낸 13세 강귀손(姜龜孫, 1450~1505)이다. 려말선초의 이러한 인맥과 문벌의 형성은 조선시대로 들어와 계도 및 세보 편찬의 동기를 부여하게 한다.

[표2] 진주강씨 고려조 문과급제자 (연도순)

성명

생졸 년도

급제 년도

과방

증조

증조

姜邯贊

948~1031

983년 계미

계미방
갑과 장원

姜弓珍

 

 

 

姜民瞻

963~1021

목종 년간

 

姜甫能

姜祉述

姜宗一

 

姜昌瑞

 

1211년 신미

신미방
을과 장원

姜福民

姜希經

 

 

姜君寶

?~1390

충숙왕 년간

 

姜昌貴

姜師瞻

姜引文

姜啓庸

姜蓍

1339~1400

1357년 정유

정유방
병과 4

姜君寶

姜昌貴

姜師瞻

姜引文

姜日華

 

1369년 기유

기유방
병과 1

姜天命

 

 

 

姜淮伯

1357~1402

1376년 병진

병진방
동진사 8

姜蓍

姜君寶

姜昌貴

姜師瞻

姜淮仲

?~1421

1382년 임술

임술방
동진사 12

姜蓍

姜君寶

姜昌貴

姜師瞻

姜淮季

1364~1392

1389년 기사

기사방
동진사 22

姜蓍

姜君寶

姜昌貴

姜師瞻

 
 

[표3] 진주강씨 고려조 문과급제자 6인의 계대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姜希經

姜福民

姜彰瑞

姜啓庸

姜引文

姜師瞻

姜昌貴

姜君寶

姜蓍

姜淮伯

姜宗德

 

 

 

 

 

 

 

 

 

 

 

 

姜友德

 

 

 

 

 

 

 

 

 

 

 

 

姜碩德

姜希顏

 

 

 

 

 

 

 

 

 

 

 

 

姜希孟

姜龜孫

 

 

 

 

 

 

 

 

 

姜淮仲

 

 

 

 

 

 

 

 

 

 

 

 

姜淮季

 

 

 

 

 

 

 

 

 

 

 

姜筮

 

 

 

 

 

 

 

姜渭庸

姜文老

姜冲

 

 

 

 

 

 

 

 

5. 진주강씨문중의 옛 족보

진주강씨의 중흥조라 할 수 있는 강감찬과 강민첨은 고려초기의 인물이다. 그리고 고려후기로부터 조선초기에 이르기까지 진주강씨문중의 여러 인물을 배출하였기에 안동권씨나 문화류씨처럼 상당한 수준의 계보가 작성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40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진주강씨 가문의 누군가가 계도를 완성하여 비전(祕傳)했던 것은 확실하다.그런데 최근에 인재 강희안이 1451년에 지었다고 하는 족보의 서문이 있다는 말을 진주강씨문중의 보학연구가 강명구씨에게서 들었다. 문제는 그 서문이 1930년대 이전에 간행한 족보나 인재 강희안의 『진산세고(晉山世藁)』에는 없다는 점이다. 필자는 강희안의 증조부 강시(姜蓍, 1339~1400)나 그의 아들 강회백(姜淮伯, 1357~1402)이 진주강씨 계도를 처음으로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것이 강희안에 의하여 연원보로 다시 정리되었을 수는 있다.

진주강씨의 박사공파에서는 국자박사 강계용(姜啟庸)을 중시조 1세로 하므로 [표3]에서 강희경과 강복민 강창서 등 3대를 제외하고 있다. 박사공파의 의견에 따르면 [표3]은 아래의 [표4]와 같이 정리된다.

[표4] 진주강씨 박사공파 고려조 문과급제자 5인의 계대

 

 

 

1

2

3

4

5

6

7

8

9

10

姜希經

姜福民

姜彰瑞

姜啓庸

姜引文

姜師瞻

姜昌貴

姜君寶

姜蓍

姜淮伯

姜宗德

 

 

 

 

 

 

 

 

 

 

 

 

姜友德

 

 

 

 

 

 

 

 

 

 

 

 

姜碩德

姜希顏

 

 

 

 

 

 

 

 

 

 

 

 

姜希孟

姜龜孫

 

 

 

 

 

 

 

 

 

姜淮仲

 

 

 

 

 

 

 

 

 

 

 

 

姜淮季

 

 

 

 

 

 

 

 

 

 

 

姜筮

 

 

 

 

 

 

 

姜渭庸

姜文老

姜冲

 

 

 

 

 

 

 

 

그런데 1761년 편찬한 [진주강씨세보] 신사보(청주보) 박사공파의 파보에서는 강희문과 강복민 강창서 3대를 별록(別錄) 상계로 올리고 1세를 강계용으로 수정했다. (이에 대해서는 1761년 청주보를 소개한 부분을 보시길 바란다.)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의 [공목공묘지명](1401년 찬)을 근거로 수정하였다고 하지만. [공목공묘지명]의 문리(文理)를 분석하여 보면, 강계용 이전의 삼대를 몰라서 안 쓴 것이 아니다. 문리로 보면, 강회백이 강기의 행력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이 상황은 앞서 필자가 추정한 ”140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진주강씨 가문의 누군가가 계도를 완성하여 비전(祕傳)했던 것은 확실하다.“라는 주장을 양촌 권근의 [공목공묘지명]이 뒷 바침 해 준다. ”140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진주강씨 가문의 누군가가“는 강회백이었던 것이다. [공목공묘지명]에 진주강씨 시조에 관한 언급은 없다. 강회백이 양촌에게 [공목공묘지명]을 지어달라도 간청할때 7세조 강계용까지의 직계대를 주었고, 시조에 관한 자료는 주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 보면, 강희안이 연원보를 편찬한 것이 사실이라면, 연원보는 강회백이 편찬한 초기의 계도 및 족도를 그의 손자 강희안이 증보한 세보(世譜)나, 최소한 가승(家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원보의 내용은 아쉽게도 현전하지 않는다.

거듭 언급하지만, [공목공묘지명]에 진주강씨 시조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김계용이 박사공파 중시조라는 것은 진주강씨 초간 남한보가 나온 이후에 파명(派名)을 정할 때 정한 것이지, 조선초나 초간보를 편찬할 때 파명을 정한 것이 아니다. [공목공묘지명]을 쓴 시기에는 각 문중에 파명이 없었다. 대체로 각 문중에서 파(派)라는 개념은 조선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연간에 차츰 생겨난다. 요즘도 후손들이 필요에 의하여 파명(派名)을 만들어 낸다. 즉 1685년 [진주강씨족보] 초간 을축보(남한보)가 나오던 시기에 각 문중에서 파(派)라는 개념이 없던 시기이다. 본관 내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 각기 족보를 편찬하기 시작한 시점은 숙종 23년(1697년)에 함흥부에서 목판본 4권2책으로 간행한 [의령남씨족보] 초간 계유보이고, 이 시기부터 파라는 개념이 체계화되어 본관과 파의 구분이 족보상에서 명확해졌다.

현재까지 필자가 조사한 진주강씨문중의 족보와 진주강씨문중의 보학연구가 강명구씨가 제시하는 족보를 종합하면 [표5]와 같이 정리된다. 이 통계에서는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분제도가 폐지된 이후의 소규모 파보와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의 족보는 포함하지 않았다. [표5]에서 보듯이 진주강씨문중에서는 1800년까지 모두 12차에 걸쳐 족보와 세보를 편찬하였으나, 그중 간행한 것은 최소 8회 이상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1685년 [진주강씨세보] 남한보, 3권2책, 목판본, 남한 천주사 간행.[사진 제공 - 이양재]

진주강씨의 1451년 연원보는 현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초간보는 1685년 [진주강씨족보]년에 남한(南漢) 천주사(天柱寺)에서 간행한 남한보이다. 연원보로부터 남한보까지 234년의 시차가 있다. 연원보로부터 1592년 임진왜란 이전의 기간은 141년이다. 1451년 연원보이후 임진왜란 이전의 141년간, 그리고 정유재란이 끝난 88년간 진주강씨의 필사본(筆寫本) 가승이나 세보가 작성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사본들을 모아서 1685년 남한보를 편찬한다. 남한보 이전에 작성한 진주강씨문중의 필사본 계보서가 아직 발견된 바 없는데, 그것은 족보를 편찬하면 구 족보는 그 수명을 다한 것으로 여겼으므로 대개 소홀히 취급하여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1685년 남한보는 출생순으로 등재하였고, 적자녀(嫡子女)를 선 등재하고, 서자녀(庶子女)를 후 등재하였다. 각 인물의 이름 위에 성별을 자와 녀(사위 성명)로 밝혔다. 장차는 앞-뒷면 상단부 판심 쪽에 천자문으로 표기하였으며 판심에는 한자 숫자로 번호를 메겼다. 7단의 횡칸에 판독이 쉽도록 맨 윗칸에는 성과 명을 함께 기록하였다. 각 세계(世系)를 한 눈에 파악하도록 횡칸을 세로 지르는 선을 그어서 사촌간(四寸間)의 구별력(區別力)을 높였다. 이러힌 편집은 1476년 [안동권씨세보]나 1565년 [문화류씨세보]에서도 보인다.

진주강씨는 인구가 많고 세분되는 지파가 많아, 각파에서 각기 족보를 편찬·간행하였는데 정조 즉위년 이후에 나온 족보 가운데 권수가 적은 족보는 모두 파보이다. 족보나 파보를 편찬한 시기나 수단을 주도한 지파에 따라, 상계대에서 일부 혼선을 보이기도 하지만, 이중에는 특별한 가치를 지닌 중요한 초간 파보도 있다.

1761년 [진주강씨세보] 신사보는 실제로는 신사년에 편찬을 시작하였으나 임오년(1762년)에 간행된 족보이므로, 간행연도를 중요시하는 서지학에서는 임오보(壬午譜)라 칭하는 것이 원칙이다. 1761년 신사보는 박사공파 파보인데, 18세기에 간행한 족보로는 가장 거질의 세보로서 9권9책이다. 진주강씨문중에서는 흔히 청주보(淸州譜)나 신사보라고 부른다. 강윤(姜潤)의 서문과 강익주(姜翊周, ?~1764)의 발문이 있다.

(왼쪽) 1761년 [진주강씨세보] 청주보 별록, 목판본. (오른쪽)1761년 [진주강씨세보] 청주보, 9권9책, 목판본. [사진제공 이양재]
(왼쪽) 1761년 [진주강씨세보] 청주보 별록, 목판본. (오른쪽)1761년 [진주강씨세보] 청주보, 9권9책, 목판본. [사진제공 이양재]

이 1761년 청주보는 강계용을 박사공파 1세로 하고 있다. 강계용이 박사공파 1세는 맞다. 강계용이 박사공이기 때문이다. 1761년 청주보는 매우 중요한 족보이다. 그런데 1761년 청주보보다 98년 후인 1859년에 간행된 [진주강씨세보] 기미보 2권2책에서는 강희문과 강복민 강창서 3대를 다시 올리고 있다. 이러한 족보상의 계대 문제는 계보 편찬의 시작과 발전을 이해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느 성씨든 초기의 계도나 가승은 기억과 구전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이러한 초기의 계보를 모아 편집한 것이 세보이다. 그러므로 각파의 상계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일반적으로 있을 수 있는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옛 족보에 불확실성이 일부 있더라도, 족보의 편찬과 발전 과정을 이해하면, 옛 족보의 중요성을 인정하게 된다. 오늘날은 교통이 발달하고 많은 고 문헌이 널리 공개되어 접근성이 좋다. 이제는 20년전 만해도 확인하기 어려웠던 옛 인물들의 생졸연도를 확인하거나 인접하여 추정할 수 있으므로, 내용 서지학적인 측면에서 ”계절불과이삼대야(系絶不過二三代也)”에 대하여 종합적인 검토와 연구를 할 수 있다.

[표5] 진주강씨문중에서 편찬한 주요 족보 (연도순)

명칭

연도

서발

판종

권책

소장처

1

晉州姜氏淵源譜
진주강씨연원보

1451

姜希顔

미상

(초본?)

실전

2

晉山姜氏族譜
진산강씨족보

1685
을축보

姜瑜 (1667),
姜碩耉

목판본,
南漢 天柱寺(남한보)

32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박물관,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강한신, 강연달

3

晉陽姜氏族譜
진양강씨족보

1727
정미보

姜鋧

목판본, 晋州 牛芳寺, (은열공파 초간보)

22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4

晉州姜氏世譜
진주강씨세보

1746
병인보

李聖龍 등 발

목판본
(은열공파 재간보)

33

문중

5

晉州姜氏世譜
진주강씨세보

1762년임오보

姜潤 ,
姜翊周

목활자본,
淸州譜 (신사보)

99

국립중앙도서관

6

晉州姜氏族譜
진주강씨족보

1766
병술보

姜趾煥

미확인,
達城譜

14

미상

 

7

晉州姜氏族譜
진주강씨족보

1775
을미보

姜潤 (1761),
姜周民 (1764)

목판본, 書末 : 宗中通文 乙未(1775)

88

국립중앙도서관

8

晉州姜氏族譜
진주강씨족보

1775
을미보

姜俒 (1768),
姜墰 (1768), 姜墇

필사본

44

미상

9

晉陽姜氏族譜
진양강씨족보

1775
을미보

姜信坤-姜德彦 (1727), 姜柳章

목활자본

44

국립중앙도서관

10

晉山姜氏族譜
진산강씨족보

1784
갑진보

姜師煥 (1783)

목활자본, 龍仁 道村 開刊, (관서대장군파)

32

국립중앙도서관

11

보명 미확인

1790
경술보

姜允成

필사본,
(인현보-통계공파보)

미확인

미완(초보), 미상

12

晉山姜氏世譜
진산강씨세보

1829
기축보

姜彛扑 ,
姜履武

목활자본
(금재공파보)

77

국립중앙도서관

13

晉山姜氏世譜
진산강씨세보

1830
경인보

姜元會

목활자본
(통정공파 초간보)

44

필자

14

晉州姜氏世譜
진주강씨세보

1833
계사보

姜錫禎 서, 姜鳳觀 발, 姜潤垕 지

목활자본 宜寧 高山齋
(장군 昌富派譜)

44

국립중앙도서관,
필자(권1 결)

 

15

晉州姜氏世譜
진주강씨세보

1839
기해보

미확인

미확인

4

미상

16

晉州姜氏世譜
진주강씨세보

1848
무신보

姜必孝 ,
姜胄永 기사, 姜漢喆

목활자본,
(통계공파)

1118

미상

17

晉州姜氏世譜
진주강씨세보

1859
기미보

姜在良-姜文欽

운각인서체자본
(은열공파)

22

필자

18

晉州姜氏世譜
진주강씨세보

1861
신유보

姜在五 ,
姜漢赫

목활자본,
貞洞譜

1818

필자, 고려대학교 도서관 

19

晉州姜氏世譜
진주강씨세보

1865
을축보

許傳

목활자본
斗芳影堂(은열공파보)

44

국립중앙도서관 

20

보명 미확인

1872
임신보

姜崙秀

미확인,
진주(통정공파)

미확인

미상

21

晉山姜氏世譜
진산강씨세보

1873
계유보

姜寅會 (가승)

목판본,
(양희공파-영광)

44

필자

22

보명 미확인

1891
신묘보

姜蘭永

미확인,
(대장군공파)

미확인

미상

23

晉州姜氏世譜
진주강씨세보

1898
무술보

姜健善 ,
姜浩善

목활자본, 懷川 重刊 (은열공파보)

 1010

필자

24

晉州姜氏族譜
진주강씨족보

1902
임인보

姜文會-姜友馨-姜成會-姜鍮-姜秀容

목활자본, / (신축보, 한성보, 서창보)

2024

문중

 

계사년(1833년)에 의령 고산재에서 간행한 [진주강씨족보] 계사보는 이 책의 끝에 붙어 있는 ‘족보인(族譜引)’은 “숭정기원삼주후소양대황락(崇禎紀元三周後昭陽大荒落)”에 강윤후(姜潤垕, 1764~?)가 쓴 근지(謹識)이다. 여기에서 숭정(崇禎) 후 세 번째 계사년은 1773년이다. 그리고 이 ‘족보인’의 뒷면에는 “계사중춘 의령고산재 설인중추성(癸巳仲春宜寧高山齋設印仲秋成)라고 되어 있어, 계사년 중춘(음력2월)에 의령 고산재에서 인쇄를 시작하여 중추(음력 8월)에 마쳤음을 말하고 있다.

의령 고산재는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 선생의 고향이다. ”고산재는 1778년(정조2년)에 증(贈) 이조참의 안기종(安起宗, 1556~1633)의 5세손 설산재(雪山齋) 안여석이 주도하여 창건하였다“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 주장은 틀린 주장이다. 지금이 고산재 건물은 1778년에 지어졌다고 해도, 안여석(安如石, 1630~1695)의 생존연대로 보았을 때 17세기 말에 이미 고산재는 존재하고 있었고, 그 옛 고산재를 1778년에 중건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말하자면 진주강씨의 계사보는 계사년에 탐진안씨 헌납공파 종중 소유의 고산재에 인쇄 시설을 차려 놓고 간행한 족보이다. 그런데 이 계사보의 계대 부분을 실펴보면 영묘(英廟)와 정묘(正廟)의 묘호(廟號)가 보인다. 즉 이 계사보는 순조조(純祖朝)에 간행한 것이다. 순조조 계사년은 1833년으로 숭정후 네번째 계사년이다. 계사보의 본문을 검토해 보면, ‘족보인(族譜引)’의 강윤후가 쓴 근지의 “숭정기원삼주후소양대황락(崇禎紀元三周後昭陽大荒落, 1773년)”는 “숭정기원사주후소양대황락(崇禎紀元四周後昭陽大荒落, 1833년)”으로 정정되어야 한다.

필자 소장의 계사보 4권4책(권1 결)본 외에도 국립중앙도사관에 1833년 계사보 4권4책본이 있어, 필자 소장본 권2부터 대비하여보니 동일한 목활자본이다. 필자 소장본은 권1 결본이고, 국립중앙도서관본은 권4의 마지막 장 2장이 결락되어 있다. 이 두 종을 합하면, 1833년 계사보 4권4책은 강석정(姜錫禎, 1762~?)서의 서문과 강봉관(姜鳳觀, 1785~?)의 발문을 권1에, 강윤후 근지를 권4 끝에 붙여 의령 고산재에서 1833년에 목활자로 간행했음이 규명된다.

1773년 [진주강씨세보] 계사보 근지(謹識), 4권4책(권1 결), 목활자본. [사진 제공 – 이양재]
1773년 [진주강씨세보] 계사보 근지(謹識), 4권4책(권1 결), 목활자본. [사진 제공 – 이양재]
1859년 [진주강씨세보] 박사공파, 기미보, 운각인서체자본, 2권2책. [사진 제공 – 이양재]
1859년 [진주강씨세보] 박사공파, 기미보, 운각인서체자본, 2권2책. [사진 제공 – 이양재]
1865년 [진주강씨세보] 을축보, 박사공파보, 목활자본, 4권4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1865년 [진주강씨세보] 을축보, 박사공파보, 목활자본, 4권4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이러한 특수성에서 우리나라에서 1910년도 이전에 편찬한 족보와 파보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그 계통도를 만들 필요가 있다. 특히 진주강씨문중의 족보를 다룬 [표5]는 미완성의 통계이다. 그 미진한 부분은 진주강씨문중의 보학연구가 강명구씨가 채워 주었으면 한다.

이 글을 써서 10월 27일 자에 1차 발표한 이후 강명구씨의 도움으로 많은 부분을 수정하고 증보하여 31일 자에 수정판을 올린다.

6. 맺음말

강이식 장군이 지켰던 고구려가 결국 668년에 망하고, 300년이 지난 고려초(10~11C)에 강감찬 장군과 강민첨 장군이 나왔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모두 1,263장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한다. 조선의 문과급제자만 234장이다. 특히 14세기의 과거급제자 5인과 조선초의 강회백과 강희안 강희맹 삼부자는 조선초기 진주강씨문중의 핵심으로 부상한다. 조선중기의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이라든가, 조선후기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라는 예림의 총수,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강우규(姜宇奎, 1859~1920) 지사도,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진주강문(晉州姜門)의 중요한 인물이다.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진주강문의 이러한 인물의 실존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고구려의 강건한 활동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하자면, 진주강문은 고구려계 성씨로 확고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여야 한다. 진주강문은 고구려 후손으로서의 진취성과 대륙적 기질을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고구려계의 진주강문을 사대주의를 기초로 한 동북공정의 역사왜곡으로 씨족 전체를 중화인(中華人)으로 만드는 일에 동조하는 것은 멈추어야 한다.

어느 성씨든 초기의 계도나 가승은 기억과 구전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이러한 초기의 계보를 모아 편집한 것이 세보이다. 그러므로 각파의 상계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일반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옛 족보에 불확실성이 일부 있더라도, 족보의 편찬과 발전 과정을 이해하면 중요한 기록으로 인정하게 된다.

특히 진주강씨문중의 족보에 나타나 있는 강이식 장군 등의 상계 기록은 사대주의의 독소만 빼어 낸다면, 우리의 역사에서 잊혀진 빈틈을 채워 준다. 조선중기까지 편찬된 각 문중의 거의 모든 족보는 중요하다. 진주강문의 보학연구가 강명구씨는 진주강문의 보학에 깊이 들어가 있다. 반면에 필자는 우리나라의 거의 전 문중의 족보를 현대적 관점에서 비교 연구한다. 당연히 상호간에 다른 해석을 가질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북방 고구려사를 우리 민족사의 한 본류로 인식한다면, 그 핵심은 몇 문중 되지 않는다. 진주강씨 시조 강이식 장군을 수나라의 귀화인으로 만들면, 고구려 원 유민의 후손이 한국인에게는 거의 없다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진주강씨문중의 옛 족보는 고구려계 족보라는데서 특히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그러면서도 사대주의의 침해에 난감(難堪)한 면이 있다. (2025.10.22. 기고 / 2025.10.3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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