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 (Korean genealogy for U.W.H.L. - Academic Chairman)
배씨대종회는 배씨의 뿌리는 2천여 년 전 신라 건국 초기로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서라벌(신라)의 개국 설화에 의하면, 사로 육촌(斯盧六村) 중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촌장 지타(祗陀, 只他)는 다른 6부 촌장들과 함께 혁거세를 신라 초대 왕으로 추대하였고, 이후 서기 32년에 신라 유리왕(儒理王, 재위 24~57)은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가리부(加利部)를 한지부(漢祗部)로 고치고 배(裵)씨 성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배씨는 중국과 관련이 없는 우리나라의 토성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배씨는 신라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때의 상대등(上大等) 배부(裴賦)이며, 이후 희강왕(僖康王, 재위 838~838) 때의 아찬(阿飡) 배훤백(裵萱伯)과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887) 때의 현령(縣令) 배영숭(裵零崇)이 확인된다, 하지만 이들은 현존하는 배씨와는 계보상 연결이 안 된다. 배씨의 계보도를 처음 편성할 당시에는 기억이나 기록에 없는 미상(未詳)의 계대를 임의로 만들어 무리하게 기록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배(裵)씨는 문헌에 총 59개의 본관이 있으며, 현전하는 인구는 2015년을 기준으로 400,641명이다.
1. 배현경의 후손으로서의 배씨
현존하는 배씨는 거의 모두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사성(賜姓)을 받은 배현경(裵玄慶, ?~936)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의 첫 이름은 백옥(白玉) 또는 백옥삼(白玉衫)으로 성씨가 없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옹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오르고 대광(大匡)을 역임했으며, 배씨 성을 사성 받았다.
표면상으로는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은 신라의 개국공신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촌장 지타(祗陀, 只他)와는 계보상의 연결이 없다. 그러나 배씨들은 지타를 시조로 삼고, 배현경을 중시조로 삼는다. 현재 배씨문중의 보편적인 주장은, “배씨의 중시조 배현경의 현손(玄孫, 6세)이라는 가락군(駕洛君) 배사혁(裵斯革)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 네 아들 중 첫째 배원룡(裵元龍)은 분성배씨(盆城裵氏, 金海裵氏), 둘째 배천룡(裵天龍)은 성산배씨(星山裵氏, 星州裵氏), 셋째 배운룡(裵雲龍)은 달성배씨(達城裵氏, 大丘裵氏), 넷째 배오룡(裵五龍)은 흥해배씨(興海裵氏)로 각각 분적하였다”라는 것이다. 이후 “달성배씨에서 곤산배씨(昆山裵氏)가, 흥해배씨에서 협계배씨(俠溪裵氏)가 분적하였다”라고 한다. 이 외에도 여러 본관의 배씨가 있고, 시조에 관한 한 문중의 이론(異論)이 있지만, 현존하는 배씨는 모두 하나의 혈족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주장이다.
우리나라 성씨의 득성(得姓) 과정과 계대(系代)의 확립 과정에 미루어 보면, 상계대(上系代)의 기록 미비로 인하여 시비가 일어나는 문중이 상당히 많다. 배씨도 그런 문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비는 각 문중에 소속한 파의 상계대를 검토하며, 그 상계대가 기록된 시기를 판별하면 해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지학적 측면에서 볼 때 계대는, 현달한 조성이 있을 때 그와 관련한 구전시기(口傳時期)와 → 필사본 기록을 남기는 행장의 기록, 그리고 계도 및 족도 시기를 거쳐 → 간행하는 시기로 넘어온다. 문중마다 간행 시기로 넘어오기 이전의 구전시기는 기억에 의존하는 시기이므로 전승에서의 엇갈림이나 오차는 당연히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전승의 엇갈림이나 오차가 기록으로 남게 되는 것이므로, 이 전승 원리를 이해하면 시비를 풀어나갈 단초를 찾게 된다.
우리나라 현존하는 여러 배씨의 본관과 그 파시조는 대략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 성주배씨(星州裵氏); 성산배씨(星山裵氏)라고도 한다. 파시조는 배위준(裵位俊, 무열공 8세손)으로 고려시대에 삼중대광(三重大匡) 벽상공신(壁上功臣)이다. 5세손 배인경(裵仁敬)이 고려 충선왕(忠宣王, 재위 1298, 1308~1313) 때 추밀원사(樞密院使)를 역임하고,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복위 1332~1339) 때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다. 11세손 배극렴(裵克廉)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어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다. 2015년 인구는 성주배씨 83,620명, 성산배씨(星山裵氏) 65,052명이다.
- 흥해배씨(興海裵氏); 파시조 배경분(裵景分, 무열공 7세손)은 고려시대에 겸교장군(檢校將軍)을 역임했다. 그의 6세손 배전(裵詮)이 고려 충혜왕(忠惠王, 재위 1330~1344) 때 호군(護軍)을 거쳐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조적(曺頔)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삼중대광첨의평리(三重大匡僉議評理)에 책록되고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졌다. 2015년 인구는 34,259명이다.
- 대구배씨(大邱裵氏); 달성배씨(達城裵氏)라고도 한다. 파시조는 고려 중엽 달성군(達城軍)에 추증된 배운룡(裵雲龍)이다. 그의 6세손인 배정지(裵廷芝)가 고려조에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배정지의 둘째 아들 배천경(裵天慶)이 1354년(공민왕 3)에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지고, 1358년(공민왕7년)에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를 거쳐 동경윤(東京尹)을 역임하였다. 2015년 인구는 대구배씨 38,589명, 달성배씨 39,353명이다.
- 분성배씨(盆城裵氏); 김해배씨(金海裵氏)라고도 한다. 파시조 배원룡(裵元龍, 무열공 6세손)은 도병마사(都兵馬使) 및 평장사(平章事) 등을 역임하고, 고려 우왕 때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졌다. 2015년 인구는 분성배씨 48,427명, 김해배씨 53,222명이다.
- 화순배씨(和順裵氏); 파시조 배련(裵練)은 고려시대에 국자감(國子監) 진사(進士)가 되었다. 2000년 인구는 234명이다.
- 경주배씨(慶州裵氏); 중시조 배현경(裵玄慶), 고려 태조 왕건의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이다. 배씨 성을 사성 받았다. 경주배씨는 모든 배씨의 종주(宗主) 배씨로서, 모든 배씨가 중시조 배현경의 후손으로 분적해 나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주배씨의 파시조는 조선시대 인물인 배충과(裵忠果)인데, 이 파를 처사공파라고도 한다. 2015년 인구는 12,118명이다.
- 협계배씨(俠溪裵氏); 파시조 배진(裵縉)은 고려시대에 합문사인(閤門舍人)을 역임하였다. 2000년 인구는 63명이다. 배진에 관한 기록은 달리 찾을 수고, 협계배씨의 가승이나 세계를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협계는 황해도 신계군이다.
- 곤양배씨(昆陽裵氏); 파시조 배맹달(裵孟達)(달성군 13세손)은 조선 세조13년(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훈장을 받고, 가정대부(嘉靖大夫) 행 호분위 상호군(行虎賁衛上護軍)에 올랐으며, 곤산군(昆山君)에 봉해졌다. 2015년 인구는 곤양배씨 7,546명, 곤산배씨 1,556명이다.
- 남해배씨(南海裵氏); 파시조 배순(裵循)은 조선 성종(成宗, 재위 1469~1494) 때 경기감사(京畿監査)를 역임하였다. 2000년 인구는 680명, 2015년 인구는 472명이다. 배순에 관한 기록은 달리 찾을 수 없고, 남해배씨의 가승이나 세계를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
- 함흥배씨(咸興裵氏); 파시조 배덕수(裵德秀)는 1582년(선조15)에 임오식년시 병과에 급제하여 교서관(校書館) 박사(博士)를 역임한 인물이다. 인구의 대부분이 북한에 거주하고 있으며, 2000년의 남한 인구는 271명이다.
2. 배씨문중의 과거급제자
배씨로서 고려와 조선시대의 과거급제자 통계는 [표1]과 같다. 이 통계표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고려시대에 문과급제자를 배출한 성산(성주)배씨와 흥해(곡강)배씨, 김해(분성)배씨이다. 또한, 통계에서 보듯이 경주배씨와 남해배씨는 조선시대에 문과나 사마시 및 잡과급제자는 전혀 없고, 무과급제자만 각기 12장과 10장을 배출하였다. 반면에 함흥배씨는 문과급제자 1장만을 배출한다. 이 여덟 문중 이외의 다른 배씨문증의 과거급제자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파시조가 조선 성종조의 배순(裵循)인 남해배씨는 경남 남해군을 본관지로 하는 배씨인데, 2015년 현재 인구가 472명이며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상도 남해와 황해도 재령, 한양 등지에 소수가 거주하였다. 그러한 소수의 문중이면서도 조선중기에 무과에서만 10장의 급제자를 배출한다. 또한 함흥배씨의 파시조가 1582년(선조15)에 임오식년시 병과급제자 배덕수이고, 그 외 역사상에 드러난 다른 인물이 없는 것으로보아 배덕수가 창본(創本)한 배씨로 보인다.
[표1] 배씨문중의 과거급제자 통계 (문과급제자 많은 순)
|
본관 |
문과 |
고려 사마 |
무과 |
역과 |
의과 |
음양과 |
율과 |
합계 |
|
|
진사 |
생원 |
||||||||
|
성산(성주)배씨 |
(고려 6) |
(고려 2) |
26 |
0 |
1 |
0 |
3 |
(고려 8) |
|
|
11 |
16 |
18 |
75 |
||||||
|
흥해(곡강)배씨 |
(고려 2) |
4 |
7 |
6 |
0 |
0 |
0 |
0 |
(고려 2) |
|
11 |
28 |
||||||||
|
대구(달성)배씨 |
7 |
9 |
16 |
13 |
0 |
0 |
0 |
0 |
45 |
|
김해(분성)배씨 |
(고려 1) |
10 |
11 |
3 |
1 |
0 |
0 |
1 |
(고려 1) |
|
6 |
32 |
||||||||
|
곤양(곤산)배씨 |
3 |
0 |
1 |
8 |
0 |
0 |
0 |
0 |
12 |
|
함흥배씨 |
1 |
0 |
0 |
0 |
0 |
0 |
0 |
0 |
1 |
|
경주배씨 |
0 |
0 |
0 |
12 |
0 |
0 |
0 |
0 |
12 |
|
남해배씨 |
0 |
0 |
0 |
10 |
0 |
0 |
0 |
0 |
10 |
|
합계 |
(고려 9) |
(고려 2) |
78 |
1 |
1 |
0 |
4 |
(고려 11) |
|
|
39 |
39 |
53 |
215 |
||||||
려말선초에 가장 현달한 배씨 인물은 성산백(星山伯) 배극렴(裵克廉, 1325~1392)이다. 그는 성주배씨 배현보(裴玄甫)의 아들이고, 모친은 성주육리(星州六李)의 성주이씨 이천년(李千年)의 딸이다. 그는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의 개국공신1등에 책록되며,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이 된다. 이것으로 인하여 배씨는 신라의 지타 – 고려의 배현경 –조선의 배극렴으로 이어지는 왕조의 시작 때마다 개국공신을 내어 가문의 번영을 이루었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런데 [표1]에서 보듯이 배씨가 고려에 9장의 문과급제자를 내었고, 그 가운데 6장이 배극렴이 속한 성주배씨이지만, 그 6장과 배극렴의 연결고리는 없고, 또한 배극렴의 가문은 조선전기에 현달한 문벌을 이루지는 못했다. 즉, 배극렴의 출세는 배씨문중 전체 위상을 한 단계 더 끌어 올리지를 못했다. 그의 슬하에는 딸 하나만 있었던 것이 원인일까? 성주 등 배씨문중 전체가 고려시대에 배출한 문과 및 사마시 급제자는 [표2]와 같다.
[표2] 배씨 고려조 문과-사마급제자 (연도순)
|
성명 |
본관 |
생졸년 |
급제 연도 |
과방 |
부 |
조 |
증조 |
|
裵祐 (裵裕) |
성산 |
|
1116년 병신년 |
병신방 을과 장원 |
裵臣秩 |
|
|
|
裵晉 |
흥해 |
|
충렬왕(재위 1274~1308) |
|
|
|
|
|
裵仲線 (裵仲誠) |
성산 |
|
1362년 임인년 |
임인방 동진사 23위 |
裵世 |
裵尙 |
裵宗衍 |
|
裵仲有 (裵中有) |
성산 |
|
1369년 기유년 |
기유방 동진사 5위 |
裵世 |
裵尙 |
裵宗衍 |
|
裵仲綸 (裵中綸) |
성산 |
1352~? |
1369년 기유년 |
기유방 동진사 7위 |
裵世 |
裵尙 |
裵宗衍 |
|
裵尙度 |
흥해 |
|
1369년 기유년 |
기유방 병과 3위 |
裵佺 |
裵榮 |
裵裕孫 |
|
裵中甫 |
성산 |
|
공민왕(재위 1352~1374) |
|
裵世 |
裵尙 |
裵宗衍 |
|
裵規 |
성산 |
|
1377년 정사년 |
진사시 3위 |
裵晉孫 |
裵用成 |
裵文廸 |
|
裵蘊 |
성산 |
|
1377년 정사년 |
진사시 십운사 3위 |
|
|
|
|
裵規 |
성산 |
|
1382년 임술년 |
임술방 병과 3위 |
裵晉孫 |
裵用成 |
裵文廸 |
|
裵乙謙 |
분성 |
|
1382년 임술년 |
임술방 명경 2위 |
|
|
|
배씨문중의 고려시대 문과 및 사마급제자는 합하여 11장이다. 그 11장 가운데 10장이 고려후기 100년에 집중되어 있다.
3. 배씨문중에서 편찬한 중요 족보
배씨 각 문중에서 초간보를 간행한 연대를 정리하면 [표3]과 같다. 물론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배씨문중의 기록에는 없지만, 배씨문중도 몇몇 파에서는 임진왜란(1592년) 이전에, 늦어도 16세기 중반에는 이미 필사본 계보나 가승을 편찬하였을 것이다.
특히 고려 때 문과급제자 6장과 사마급제자 2장을 배출한 성주배씨의 초간보가 1800년으로 조사되는 것은, 그들은 족보를 출간한 시기가 늦었을 뿐이지 실제로는 조선초기부터 필사본 계보를 작성해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1800년 이전에 편찬된 [성주배씨족보]의 사본도 확인하지 못하였다. 어딘가에 가치를 모른 채 비장되어 있을 것이다.
[표3] 배씨 본관의 초간보 간행 목록 (연도순)
|
성씨 |
시조 |
시대 |
초간보 간행년도와 책수 |
인구수(2015) |
|
대구(달성)배씨 |
裵雲龍 |
고려 태조 |
1675년 을묘보, 권책수 미상 |
77,942 |
|
김해(분성)배씨 |
裵元龍 |
|
1760년 경진보, 3권3책 |
101,649 |
|
경주배씨 |
裵玄慶 |
|
1765년 을유보, 10권10책 |
12,118 |
|
성산(성주)배씨 |
裵天龍 |
|
1800년 경신보, 6권6책 |
148,672 |
|
흥해배씨 |
裵五龍 |
|
1868년 무신보, 7권7책 |
34,259 |
[표3]의 다섯 본관 배씨는 배씨 가운데 인구수가 많은 다섯 문중이다. 조선시대에 주로 이 다섯 본관의 배씨문중에 의하여 족보 및 세보가 간행되었다. 필자에 의하여 현재까지 조사된 배씨문중에서 조선시대에 편찬한 옛 족보를 연도순으로 정리하면 [표4]와 같다. 한두권 짜리의 간략한 파보는 이 명단에 넣지 않았다. 이 가운데 가장 거질의 족보는 1827년 [경주배씨대족보(배씨합보)] 정사보 14권14책이다. [표4]에서 언급한 족보이외에도 1~2권으로 간행된 상당수의 파보가 더 있다. 앞으로 배씨문중에서 조선시대에 간행된 족보가 더 확보되어, 계보 간행의 전승도가 정리되었으면 한다.
[표4] 배씨문중에서 편찬한 중요 족보 (연도순)
|
번 |
명칭 |
연도 |
서발 |
판종 |
권책 |
소장처 |
|
1 |
大丘裴氏世譜 |
1675년 |
裵命碩 서 |
미상 |
미상 |
미상 |
|
2 |
金海裵氏世譜 |
1760년 |
裵舜錫 등 서(1759) |
목활자본 (達城 豊角松川) |
3권3책 |
국립중앙도서관 |
|
3 |
大丘裴氏世譜 |
1760년 |
裵正時 서 |
목활자본 (羅州 普興寺) |
3권3책 |
국립중앙도서관 |
|
4 |
慶州裵氏大族譜 |
1765년 |
裵絳 등편, 李象靖 서(1764) |
목활자본(慶尙道 漆谷 松林寺) - (裵氏合譜) |
10권10책 |
필자,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
5 |
大邱裵氏族譜 |
1800년 |
李萬運 서, 裵經國 발 |
목활자본(慶尙道 漆谷 松林寺) |
6권6책 |
국립중앙도서관 |
|
6 |
星山裵氏族譜 |
1800년 |
裵龍翼-裵慶東-裵柱石 발 |
목판본 |
6권6책 |
국립중앙도서관 |
|
7 |
慶州裵氏大族譜 |
1827년 |
姜橒 서, 裵柱元-裵柱天 발 |
목활자본(永同 九湖) - 裵氏合譜 |
14권14첵 |
국립중앙도서관 |
|
8 |
達城裵氏族譜 |
1857년 |
裴益模 발 |
목활자본(慶尙道 鐵城 繡林書院) |
7권7책 |
계명대학교 동산도사관 |
|
9 |
大邱裴氏族譜 |
1858년 |
李敎寅 서, 裵承翊 발 |
목활자본(羅州 武烈祠) |
4권4책 |
국립중앙도서관 |
|
10 |
盆城裵氏世譜 |
1862년 |
李源祚 서, 裵文翰 발, 裵泰中 편 |
목활자본(沃溝 靑巖齋) |
7권6책 |
국립중앙도서관 |
|
11 |
星州裵氏族譜 |
1868년 |
鄭墧 서, 裵貞祚 등편 |
목활자본 |
7권7책 |
서울대 규장각, 계명대 동산도서관 |
|
12 |
興海裵氏族譜 |
1868년 |
裵相勛 등편 |
목활자본 |
4권4책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
13 |
大邱裴氏族譜 |
1871년 |
李喬榮 서(1870), 裵南煥 발, 裵致星 편 |
목활자본(羅州 草洞) |
8권8책(지행록 1책 포함) |
국립중앙도서관 |
|
14 |
星山裵氏族譜 |
1897년 |
裵文喜 발 |
목활자본 |
6권6책 |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
|
15 |
大邱裴氏族譜 |
1899년 |
奇宇萬 서(1898), 裴炳繯 발, 裴奎哲 편 |
목활자본(務安 淸川齋) |
9권9책(총목 1책 포함) |
국립중앙도서관 |
|
16 |
達城裵氏族譜 |
1900년 |
張福樞 서(1899), 裵錫煥 발 |
목활자본(忠淸道 恩津 桂嶺齋) |
11권11책 (부록 1책 포함) |
국립중앙도서관 |
|
17 |
星州裵氏族譜 |
1901년 |
李種杞 서(1900), 裵炳泰 발 |
목활자본 |
10권10책 |
국립중앙도서관 |
|
18 |
星山裵氏族譜 |
1906년 |
裵觀喜 서, 裵相儀 발 |
목활자본(湖南 礪山 湥谷寺) |
7권7책 |
국립중앙도서관 |
|
19 |
金海裵氏世譜 |
1906년 |
裵慶鳳 서, 裵璇燦 발 |
목활자본(盈德 五逸) |
4권3책(세적 1책 포함) |
국립중앙도서관 |
|
20 |
興海裵氏世譜 |
1910년 |
李載冕 서, 裵善營 발, 裵大植 편 |
목활자본 |
7권7책 |
국립중앙도서관 |
이상의 [표4]의 목록에서 제시한 1번 1675년 [대구배씨세보] 을묘보는 현전본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조만간에 갑툭튀하였으면 한다. [표4]의 목록에서 제시한 배씨문중의 옛 족보 가운데 중요한 족보는 2번부터 7번까지의 족보이다. 이 가운데 한 종의 족보가 위보(僞譜) 논란이 있지만, 문중의 형성과 계보의 편찬 과정을 이해한 상태에서는 새로운 관점을 추출할 수 있다.
4. 각 배씨문중에서 간행한 중요 족보
이제 [표4]의 족보를 간행한 본관별로 구분하여 다시 검토해 보자.
[표4]-1. [대구(달성)배씨족보] ;
필자에 의하여 조사된 배씨족보 20종(현전본 19종) 가운데, [대구(달성)배씨족보]가 8종 이상으로 가장 많다. 이 가운데 1760년 경진보의 간기에는 “全羅道 羅州 普興寺 己卯(1759) 四月 日 始役 庚辰(1760) 四月 日 完工”이라 되어 있어, 이 족보를 편찬한 후 간행하는데 꼭 1년이 소요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1760년 [대구배씨세보] 경진보 권3의 끝에 배명석(裵命碩)이 을묘년(1675년) 5월 일에 쓴 구서(舊序)가 1장2면애 걸쳐 수록되어 있다(사진 참조)는 사실이다. 이 구서는 대구배씨의 세보가 1675년에 처음 편찬되었음을 말하여 준다.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1675년 을묘보는 서문은 1760년 경진보 권3 끝부분에 남아있지만, 편찬후 간행하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1760년 경진보에서도 시조를 배지타(裴祗沱)로 기록하였지만, 중시조와 세수나 대수를 표기하지 않고 있다.
[표4]-1 대구배씨문중에서 편찬한 중요 족보 (연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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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
명칭 |
연도 |
서발 |
판종 |
권책 |
소장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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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大丘裴氏世譜 |
1675년 |
裵命碩 서 |
미상 (원고본, 또는 목판본) |
미상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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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大丘裴氏世譜 |
1760년 |
裵正時 서 |
목활자본 (전라도 羅州 普興寺) |
3권3책 |
국립중앙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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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大邱裵氏族譜 |
1800년 |
李萬運 서, 裵經國 발 |
목활자본(慶尙道 漆谷 松林寺) |
6권6책 |
국립중앙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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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達城裵氏族譜 |
1857년 |
裴益模 발 |
목활자본(慶尙道 鐵城 繡林書院) |
7권7책 |
계명대학교 동산도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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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大邱裴氏族譜 |
1858년 |
李敎寅 서, 裵承翊 발 |
목활자본(전라도 羅州 武烈祠) |
4권4책 |
국립중앙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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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大邱裴氏族譜 |
1871년 |
李喬榮 서(1870), 裵南煥 발, 裵致星 편 |
목활자본(전라도 羅州 草洞) |
8권8책 (지행록 1책 포함) |
국립중앙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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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大邱裴氏族譜 |
1899년 |
奇宇萬 서(1898), 裴炳繯 발, 裴奎哲 편 |
목활자본(전라도 務安 淸川齋) |
9권9책 (총목 1책 포함) |
국립중앙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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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達城裵氏族譜 |
1900년 |
張福樞 서(1899), 裵錫煥 발 |
목활자본(忠淸道 恩津 桂嶺齋) |
11권11책 (부록 1책 포함) |
국립중앙도서관 |
그런데 [표4]-1로 정리되는 “대구배씨의 족보는 5종이 1857년(철종8년)부터 1900년(광무4년) 사이의 19세기 후반에 몰려서 간행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특히 1899년 기해보와 1900년 경자보는 1894년에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무너진 직후에 편찬 간행한 족보이다. 우리나라의 현대 보학에서 볼 때, 이 시기는 매보(賣譜)가 성행했던 시기이므로, 19세기 중반 이후에 나온 족보는 1760년 [대구배씨세보] 경진보와 대비하여 탐색해 볼만 하다.
대구배씨는 현존하는 배씨 인구수 3위의 집안이다. 성주배씨와 김해배씨가 현존하는 인구수는 더 많지만, 족보 편찬은 대구배씨가 더 적극적이고 활달했던 셈이다. 그렇다고 대구배씨가 성주배씨나 김해배씨보다 과거급제자를 더 배출하지도 않았다. 1800년 [대구배씨족보] 경신보 6권6책(4번)의 서문을 쓴 이만운은 영남 칠곡 출신의 대학자 묵헌 이만운(李萬運, 1736~1820)이며, 1899년 기해보의 서문을 쓴 송사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은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장이기도 했던 호남의 대학자이다.
[표4]-2. [김해(분성)배씨족보] ;
1760년 [김해배씨족보] 경진보는 1759년(기묘년)에 배순석(裵舜錫)과 배상신(裵尙紳)이 쓴 서문과 1760년(歲庚辰)에 배후문(裵厚文)이 쓴 발문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경진보의 편찬이 완료된 시기가 1759년임을 알려 준다. 간기에는 “歲白龍(庚辰, 1760) 初夏(4월) 達城 豊角 松川開刊”이라 하고 있다. 1760년 [김해배씨족보] 경진보는 배씨문중의 중요한 옛 족보이다.
김해(분성)배씨의 과거급제자 통계를 보면 배을겸(裵乙謙)이 1382년 임술년 임술방 명경과 2위로 급제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도 문과에 6장, 진사에 10장, 생원에 11장, 무과에 3장, 역과에 1장, 율과에 1장 등 모두 32장의 급제자를 배출한다. 조선시대에 현달한 집안보다는 적은 수이지만, 족보의 편찬은 조선후기의 달성배씨나 성산배씨에 비하여 보편적인 간행 연도를 보여준다. 그것은 “1760년 경진보 –(102년 후)→ 1862년 임술보 -(44년후)→ 1906년 병오보”를 간행하는 기간 차를 말한다. 1760년 경진보와 1862년 임술보 사이에 나온 1827년 [경주김씨대족보(배씨합보)]에 김해배씨가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는가는 차후 검토의 대상이 될 것이다.
[표4]-2 김해배씨문중에서 편찬한 중요 족보 (연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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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
명칭 |
연도 |
서발 |
판종 |
권책 |
소장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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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金海裵氏世譜 |
1760년 |
裵舜錫 등 서(1759) |
목활자본 (경상도 達城 豊角松川) |
3권3책 |
국립중앙도서관 |
|
10 |
盆城裵氏世譜 |
1862년 |
李源祚 서, 裵文翰 발, 裵泰中 편 |
목활자본(전라도 沃溝 靑巖齋) |
7권6책 |
국립중앙도서관 |
|
19 |
金海裵氏世譜 |
1906년 |
裵慶鳳 서, 裵璇燦 발 |
목활자본(경상도 盈德 五逸) |
4권3책(세적 1책 포함) |
국립중앙도서관 |
[표4-3]. [경주배씨대족보(배씨합보)] ;
[표4]의 목록을 살펴보면, 현존하는 인구가 12,118명으로 적은 경주배씨문중에서는 1765년 [경주배씨대족보] 배씨합보 을유보(목록 3번)를 10권10책으로 경상도 칠곡에서 간행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1827년 [경주배씨대족보] 배씨합보 정해보를 10권10책으로 충청도 영동에서 간행한다. 경주배씨는 현존하는 인수구는 가장 적지만, 그 시조는 배현경으로 다른 배씨들은 경주배씨에서 분적해 나갔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65년 을유보는 10권10책이고, 1827년 정해보는 14권14책으로 현존 인구수에 비하여 거질(巨帙)이다. 경주배씨는 여러 배씨들이 종주(宗主) 본관으로 주장하여, 여러 본관의 배씨들을 모아 합보를 만들어 간행 비용을 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표4]-3 경주배씨문중에서 편찬한 중요 족보 (연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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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
명칭 |
연도 |
서발 |
판종 |
권책 |
소장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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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金海裵氏世譜 |
1760년 |
裵舜錫 등 서(1759) |
목활자본 (경상도 達城 豊角松川) |
3권3책 |
국립중앙도서관 |
|
10 |
盆城裵氏世譜 |
1862년 |
李源祚 서, 裵文翰 발, 裵泰中 편 |
목활자본(전라도 沃溝 靑巖齋) |
7권6책 |
국립중앙도서관 |
|
19 |
金海裵氏世譜 |
1906년 |
裵慶鳳 서, 裵璇燦 발 |
목활자본(경상도 盈德 五逸) |
4권3책(세적 1책 포함) |
국립중앙도서관 |
1765년 [경주배씨대족보(배씨합보)] 을유보에는, 1764년(갑신년)에 영남학파의 대학자인 대산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쓴 서문이 들어있다. 1764년에 쓴 서문이 들어 있으므로 갑신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필자가 [표4]로 정리한 배씨문중의 옛 족보를 일일이 검토하지는 않았지만, 몇 종을 검토하며 파악한 사실로는, 이 1765년 을유보는 그 중요성이 주목되는 족보라는 점이다.
이 1765년 [경주배씨대족보(배씨합보)] 을유보는 시조를 ‘사로 육촌(斯盧六村) 중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촌장 지타(祗陀, 只他)’로 하고 있고, 중시조를 배현경으로 하고 있다. 6단 횡보이지만, 세수나 대수를 표시하지 않았다. 이렇게 세수나 대수를 표기하지 않는 현상은 임진왜란 이전의 초기 족보에서 자주 보이는 현상으로 조선중기에 이렇게 편집한 예는 매우 이례적이다. 이런 현상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편성된 계보를 참고하여 1765년 [경주배씨대족보(배씨합보)] 유보를 편찬하면서 그 체제를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1868년 [성주배씨족보] 무진보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배씨문중의 모든 옛 족보를 더 확인하여 함께 검토하여야 확실한 종합적인 결론이 나올 것이다.
표(4)-4. [성주(성산)배씨족보] ;
성주(성산)배씨문중은 [표1]에서 보듯이 각 배씨문중 가운데서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고, 배씨 가운데 현존하는 인구수도 가장 많지만, 족보 간행이 다른 배씨문중에 비하여 늦다.
족보 간행이 늦다는 것은 족보 편찬이 늦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1800년 경진보가 간행되기 이전에는 한동안은 필사본 계도나 족도가 있었을 것으로 유추되는데, 현재 1800년 경진보 이전에 편찬하거나 간행한 족보를 찾지 못했을 뿐이다. 현재까지 현전하는 배씨 족보 20종 가운데, 성산배씨의 족보가 5종이다. 그중에서 1897년 무진보와 1901년 신축보, 1906년 병오보 등 3종은 신분제가 무너진 1894년 이후에 4~5년 시차로 간행한 것이다.
각파가 각지에서 파보를 낸 것이 아닌 이상, 한 다른 문중에서는 이렇게 한 세대에 집중적으로 족보를 편찬한 예는 다른 문중에서는 별로 찾아볼 수가 없다. 마치 이것은 1827년 [경주배씨대족보(배씨합보)] 정해보 이후에 배씨 족보 편찬의 주도권은 대구배씨와 성산배씨의 문중으로 넘어온 듯한 모양새이다. 그렇다고 하여 배문씨중의 옛 족보의 가치가 폄훼되어서는 안 된다. 19세기에서 백골양자식(白骨養子式)의 족보 편입은 보편적인 일이었다.
앞에서 필자는 “성주배씨의 초간보가 1800년으로 조사되는 것은, 그들은 족보를 출간한 시기가 늦었을 뿐이지 실제로는 조선초기부터 필사본 계보를 작성해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1800년 이전에 편찬된 [성주배씨족보]의 사본도 확인되지 않는다. 어딘가에 가치를 모른 채 비장되어 있을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그런데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1868년 [성주배씨족보] 무진보를 보면, 조선말기에 만들어진 족보임에도 시조라든가 중시조라고 명시하지 않고 있으며, 또한 6칸의 횡보임에도 세(世)와 대(代)를 명확히 하기 위한 세수(世數)나 대수(代數)를 기록하지 않고 있다. 이는 초보적인 임진왜란 이전 족보의 편찬 형태로 조선말기에 이렇게 편집한 예는 매우 이례적이다. 이런 현상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편성된 계보를 참고하여 1868년 무진보를 편찬하면서 그 체제를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표4]-4 성산배씨문중에서 편찬한 중요 족보 (연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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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
명칭 |
연도 |
서발 |
판종 |
권책 |
소장처 |
|
5 |
星山裵氏族譜 |
1800년 |
裵龍翼-裵慶東-裵柱石 발 |
목판본 |
6권6책 |
국립중앙도서관 |
|
10 |
星州裵氏族譜 |
1868년 |
鄭墧 서, 裵貞祚 등편 |
목활자본 |
7권7책 |
서울대학교 규장각,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
|
14 |
星山裵氏族譜 |
1897년 |
裵文喜 발 |
목활자본 |
6권6책 |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
|
17 |
星州裵氏族譜 |
1901년 |
李種杞 서(1900), 裵炳泰 발 |
목활자본 |
10권10책 |
국립중앙도서관 |
|
18 |
星山裵氏族譜 |
1906년 |
裵觀喜 서, 裵相儀 발 |
목활자본(湖南 礪山 湥谷寺) |
7권7책 |
국립중앙도서관 |
표(4)-5. [흥해배씨세보] ;
흥해배씨는 고려시대에는 2장의 문과급제자를, 조선시대에서는 11장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한다. 배씨문중의 성산배씨에 이은 기록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1910년 이전에 간행된 족보를 확인하지 못했다. 1910년 [흥해배씨세보]는 “隆熙四年庚戌(1910)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장남 이재면(李載冕, 1845~1912)이 쓴 서문과 ”隆熙四年庚戌(1910)에 배선영(裵善營)이 쓴 서문이 들어가 있다. 대한제국이 망하기 직전에 편찬을 완성하고 간행한 족보가 아닌가 여겨진다.
[표4]-5 흥해배씨문중에서 편찬한 족보 (연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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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
명칭 |
연도 |
서발 |
판종 |
권책 |
소장처 |
|
20 |
興海裵氏世譜 |
1910년 |
李載冕 서, 裵善營 발, 裵大植 편 |
목활자본 |
7권7책 |
국립중앙도서관 |
5. 맺음말 ; 배씨는 이제라도 결집하여야 한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배씨는 특출한 인물이 상당수 있다. 그리고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에 많은 의병이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특히 현대에 이르러 특출하여 현달한 인물이 많다. 그 현달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세력이 결집하면 배씨문중은 상당한 역량을 갖추게 되며, 국가와 사회에 큰 공헌을 할 수 있는 유력한 집안이다. 그러나 본관이 너무 세분되어 쪼개져 있고, 파(派)도 많아 결집이 어려운 문중인 것도 사실이다. 이 문제는 배씨문중 일부의 종파주의(宗派主義)에 원인이 있다. 그럴수록 문중의 통일적 결집 시도는 필요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배씨는 우리나라의 토성이라는 사실이다.
특정 문중에서 종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대보학의 발전이 필요하다. 현대보학의 관점에서 배씨문중이 각 시대에 족보 편찬을 진행하여 온 과정과 일부 논란을 보면, 우리나라의 전체 족보 편찬을 진행하여 온 과정과 논란을 보는 듯하다. 그러한 일부에서의 내부 논란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런 일부 논란이 있을수록 정조(正祖, 재위 1777~1800) 말년 이전에 편찬된 족보가 중요하게 인식된다.
현재의 배씨문중에는 유력한 문화예술인이 많다. 그 문화예술인들이 결집하면 한류를 선도하는 세계적인 배문(裵門)을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도 적기(適期)이다. 5년만 더 늦어도 흘러간 세월이 된다.
6. 나의 넋두리
내가 족보를 적극적으로 수집하던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15년간 필자의 경제력은 상당히 어려웠다. 우선하여 연대가 오랜 것에 치중하다 보면 정조말년(1800년) 이후로 나온 족보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에 1800년 이후에 나온 10권10책의 족보 한질을 권당 1만원에 매입한다면 한질은 10만원이 될 것이다. 차라리 영~정조때 간행된 족보 2책을 20만원에 매입하는 것이 제한된 경제력에서 더 시급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나의 족보 수집에 도움을 준 잊히지 않는 골동 상인이 한 사람 있다. 남상기라고도 하고, 남승기라고도 했다. 20대 초반에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그는 1994년경인가에 충북 어디에선가 교통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었다. 나는 지난 한 평생에 관(棺)을 두 번 짊어진 바 있다. 한 번은 나의 스승이셨던 남애 안춘근(安春根, 1926~1993) 박사가 돌아가시자 그 초장지(初葬地) 김포시에서였고, 다른 한 번은 1994년경 남상기의 충북 영동(永同)의 묘터에서였다. 두 번 다 맨 앞에서 관을 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남상기는 나의 고서 족보 수집을 도와준 상인이다. 지금 내가 소장하고 있는 옛 족보의 거의 1/3은 1990년대 초에 그에게서 일괄 매입한 것이다.
어느 날 그가 묵던 종로4가의 여관에 갔더니 계단 옆의 한 방에 책을 가득 쟁여 놓고 있었다. 나보고 인수하라고 한다. 당시는 목돈이 궁하던 시기였다. 궁리 끝에, 당시 내가 소장한 지 10여 년이 되어가던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1384년에 발문을 쓴 고려본 [불조삼경] 초쇄본 3권1책과 교환을 제의하였다. 고려 때 만든 닥종이를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손바닥이 비쳐 나올 정도로 얇은데, 인쇄는 어찌 그리 잘 되어 있는지, 그 책을 보는 남상기는 얼굴을 붉히며 기겁할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나는 ‘1책 : 수백 책’으로 맞교환하였다. 당시 그 고려본 불경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급이니 그렇게 값이 나갔던 것이다. 나는 개신교인이지만 불교 고서와 고려불화에는 웬만한 스님들보다도 더 밝은 안목을 지니고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10여 년간 나는 고려불경을 30여 책 소장하고 있었다.
이번 글을 쓰면서 30년 전에 불귀의 객이 된 그가 또다시 문득 생각이 난다. 이렇게 회상하는 기록으로라도 남상기의 이름을 남겨야 하겠다. 하지만, 그때 그 고려불경, 지금 있다면 그로부터 인수한 족보 값은 그 고려불경 값의 1/3이나 될까? 내가 손해 본 듯하지만, 손해 본 것은 아니다. 나는 이제 평생의 연구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내게 넘겨준 그 수백 책들을 요즘 탐색하면서, 많은 고마움을 느낀다. 진정 고맙소. 남상기 사장.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