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 (Korean genealogy for U.W.H.L. - Academic Chairman)
고구려가 망한 후에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의 영토 위에 살면서 발해를 건국하였다. 신라가 망할 때의 백성이 곧 고려의 백성이 된다. 여섯 가야는 어땠을까? 각기의 영토 위에서 신라의 백성이 되고, 그 후손들은 고려의 백성이 되고, 그리고 그 후손의 후손들은 또다시 고려의 백성이 되고, 조선의 백성이 된다. 대한제국이 망하고 대다수의 사람이 이 땅 위에 그대로 살았다. 해외로 나가서 독립운동한 사람들도 많지만, 다수의 사람이 이 땅에 그대로 살면서 현실에 순응하거나, 나라를 되찾으려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왜정 때 적극적인 친일파는 전체 인구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경상북도 성주군에는 육리(六李)가 있다. 우리나라의 한 성(姓)의 여섯 씨족이 한 지역에 관향을 두고 있는 곳은 여기 성주가 유일하다. 성주의 육리에 감추어진 비밀은 무엇일까?
1. 성주육리(星州六李)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을 관향지(貫鄕地)로 하는 성주육리(星州六李)가 있다. 즉 “벽진이씨(碧珍李氏), 경산이씨(京山李氏), 성주이씨(星州李氏), 광평이씨(廣平李氏)와 성산이씨(星山李氏), 가리이씨(加利李氏)” 등 여섯 이씨를 말한다. 그들 문중은 시조가 다르지만, 성주군 지역을 관향지로 한다.1)
원래 성주(星州)는 여섯 가야국의 하나인 성산가야국(星山伽倻國)인데, 신라 때는 본피현(本彼縣)이라 하다가 757년(경덕왕16)에 신안현으로 개명하였고, 후기 신라 때 벽진군으로 승격했다. 고려 940년(태조23)에는 경산부로 승격하였다. 1308년(충렬왕34) 성주라는 지명을 처음 사용하여 성주목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1310년(충선왕2) 다시 경산부로 환원하였다. 1400년(조선 태종 즉위년)에 성주목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1614년(광해군7) 성주 사람 김창록이 왕의 비행과 조정을 비방한 사건으로 인해 성주목이 폐지되고 고령현에 합속된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성주목으로 환원되지만 1631년(인조9)에는 성산현으로 강등된다. 1895년(고종32년) 칙령 제101호에 의해 8도제를 폐지하여 23부제를 실시하고, 종래의 부·목·군·현 등의 불균등한 지방 구획을 폐합하여 신설 부 아래 획일적으로 군을 두면서 성주군이라 개칭하고 군수를 두었다.
[표1] 경북 성주군 관향의 여섯 이씨
|
성씨 |
시조 |
시대 |
초간보 편년 |
인구수(2000) |
|
碧珍李氏 |
李悤言 |
858~938, 신라말 고려초 |
1652년 |
|
|
京山李氏 |
李德富 |
신라말 고려초 |
1803년, 李禹世 필사본 |
7.978 |
|
星州李氏 |
李純由2) |
敬順王(재위 927~935) 전후 |
1464년 |
|
|
廣平李氏 |
李茂材 |
신라말 지방호족 |
1593년(초찬?), |
|
|
星山李氏 |
李能一 |
|||
|
加利李氏 |
李承休 |
1224~1300, 고려후기 |
편찬사실 학인 안됨. |
1,956 |
이상에서 보았듯이 성주군 지역이 여러 차례 군명을 바꾸게 됨에 따라, 한 지역의 동성이족(同姓異族)의 이씨들이 나름대로 차별나는 관향 명칭을 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 육리(六李) 가운데 귀화한 성씨로 주장하는 씨족은 하나도 없다.
이 육리 중 가리이씨의 시조는 고려후기의 대학자로 [제왕운기(제왕韻紀)]를 저술한 동안거사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이니, 가리이씨를 제외한 성주의 다섯 이씨는 모두 신라말 고려초의 인물이다. 어떻게 신라말 고려초의 성주에 다섯 이씨가 할거할 수 있었을까? 현재 족보 기록으로서는 이들은 각기 시조를 달리하고 있어 연관성은 입증할 수는 없지만, 이들 스스로도 한때는 혈족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표2] 성주육리 문중의 과거급제자 통계
|
본관 |
문과 |
고려 사마 |
무과 |
역과 |
의과 |
음양과 |
율과 |
합계 |
|
|
진사 |
생원 |
||||||||
|
碧珍李氏 |
(고려 1) |
78 |
73 |
18 |
0 |
0 |
0 |
0 |
(고려 1) |
|
51 |
220 |
||||||||
|
京山李氏 |
(고려 5) |
3 |
12 |
0 |
0 |
0 |
0 |
0 |
(고려 5) |
|
3 |
18 |
||||||||
|
星州李氏 |
(고려 6) |
(고려 1) |
64 |
2 |
12 |
3 |
3 |
(고려 7) |
|
|
75 |
104 |
110 |
373 |
||||||
|
廣平李氏 |
1 |
2 |
1 |
2 |
0 |
0 |
0 |
0 |
6 |
|
星山李氏 |
(고려 2) |
(고려 2) |
16 |
0 |
0 |
2 |
0 |
(고려 4) |
|
|
19 |
29 |
37 |
103 |
||||||
|
加利李氏 |
(고려 3) |
0 |
0 |
0 |
0 |
0 |
0 |
0 |
(고려 3) |
|
0 |
0 |
||||||||
[표2]에서 보듯이 가리이씨의 고려 때 문과급제자 세 장이 있다. 그들은 가리이씨 시조 이승휴와 그의 두 아들인데, 의외로 가리이씨의 조선시대 과거급제자는 전무하다. 가리이씨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하는 데 항거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연유로 조선초기에 이르러 거의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리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는 666가구 1,956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2015년 국세조사에서는 의외로 0명으로 조사되었다. 2015년 인구조사 참고서에 가리이씨가 없는 상태로 조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2. 성주육리의 족보 편찬
벽진이씨 문중에서는 성주육리 가운데 성주에 가장 먼저 정착한 씨족이 벽진이씨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성주 육리 가운데 오리(五李)의 시조는 모두 후기신라와 고려 건국기에 활동한 인물이며, 대체로 육리 모두는 성주를 근거지로 한 이씨(李氏) 토성인 것을 보면, 상호 간 상계대는 연결이 안 되지만 이들은 성주에서 발생한 고대국가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1) 벽진이씨 문중에서 편찬한 족보
벽진이씨 시조 이총언(李悤言, 858~938)은 아들 이영(李永)을 보내 왕건 아래에서 일하게 하였다. 이총언은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벽진장군(碧珍將軍)으로 제수되었으며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현재 성주에는 벽진면이 있다. 벽진이씨 문중에서 조선시대에 편찬한 중요 족보는 [표3]과 같다.
벽진이씨의 초간보는 1652년에 이상일(李尙逸, 1600~1674)이 편찬한 [성주벽진이씨세보] 임진보 1책이 목판본으로 나왔다. 재간보는 1710년에 편수를 시작하여 판각하였으나 오자가 많아 간행을 보류하였다가 직지사로 옮겨 두 차례(1725년과 1726년) 교정하여 완성한 후 16년 만에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조선후기의 대학자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는 벽진이씨이다.
[표3] 벽진이씨문중에서 편찬한 족보 목록 (연도순)
|
번 |
명칭 |
연도 |
서발 |
판종 |
권책 |
소장처 |
|
1 |
星州碧珍李氏世譜 |
1652년 |
李尙逸 편 |
목판본 |
1권 |
문중 |
|
2 |
碧珍李氏世譜 |
1710년 |
李柱天 서, 李世瑾 서, 이세환 발 |
목판본 |
5권 |
문중 |
|
3 |
碧珍李氏世譜 |
1826년 |
金陽淳 서, 李存永 서 |
목활자본 |
11권 |
문중 |
|
4 |
벽진이씨족보 |
1865년 |
李鐘潤 記(1865) |
목활자본 |
17권 |
문중,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영본 14책) |
후기 신라 때 벽진군으로 불렸던 지금의 성주는 고려 940년(태조23)에는 경산부로 명칭이 바뀌고 부로 승격하였다. 이 경산부의 명칭을 따서 이덕부(李德富, 신라말 고려초)를 시조로 한 경산이씨가 생겨난다. 경산이씨는 고려 때 5장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한다. 성주육리 가운데 성주이씨의 문과급제자 6장보다 1장이 적지만, 경산이씨가 과거에 급제한 시기 성주이씨보다는 이른 시기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명문이던 경산이씨가 조선시대에는 문과에 3장, 진사에 3장, 생원에 12장을 배출하며, 무과와 잡과 급제자는 전무하다. 2015년에 조사된 인구수도 6,682명이다. 조선이 건국한 이후에 경산이씨는 몰락한 것과 다름이 없고, 조선시대에 벌족을 이루지 못했으니, 족보의 편찬도 매우 늦다. 현전하는 경산이씨의 중요 족보는 [표4]와 같이 정리된다.
[표4] 경산이씨문중에서 편찬한 족보 목록 (연도순)
|
번 |
명칭 |
연도 |
서발 |
판종 |
권책 |
`소장처 |
|
1 |
京山李氏家乘 |
1803 |
李禹世 서 |
필사본 |
1책 |
계명대학고 동산도서관 |
|
2 |
京山李氏族譜 |
1949년 |
李鉉昌 서, 李斗埈 발 |
석판본 |
2권2책 |
국립중앙도서관 |
현재로 확인된 경산이씨의 계보는 1803년에 이우세(李禹世, 1751~1830)3)가 서문을 쓴 [경산이씨가승] 1책이다. 가승(家乘)이라 한 것을 보면 세보보다는 규모가 좁은 계보서를 의미한다. 아마도 이우세 집안의 계보일 것이다. 1803년 가승의 수준을 넘어선 초보(抄譜)가 발견된다면, 그것은 상당히 중요하게 평가될 자료일 것이다.
(3) 성주이씨문중에서 편찬한 중요 족보
성주이씨는 성주육리 가운데 고려와 조선시대에 가장 현달(顯達)한 집안이다. [표2]에서 보듯이 성주이씨는 성주육리 가운데 가장 많은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성주이씨는 13세기 중반부터 이미 계도를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14세기초에 성주를 본관으로 정하였다. 따라서 조선초기에 일찍이 계도 편찬이 가능하였고, 그 결과는 성주육리 가운데 족보를 가장 먼저 편찬한 것으로 나타난다.
성주이씨문중에서 조선시대에 편찬한 중요 족보는 [표5]와 같다. 1464년에 편찬한 [성주이씨세보(星州李氏世譜)] 초찬보는 1471년 [안동권씨세보] 초간보보다 7년이나 이른 세보이다. 대체로 계보도 수준이었을 것인데, 성주이씨문중의 1464년 초간 갑신보는 현전하지 않아 판종(版種)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1545년 을사년에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이 필사한 현전하는 세보를 통하여 대체적인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이문건의 을사년 필사본의 표지에는 농서공족보(隴西公族譜)라고 씌어 있다. 세계도에 영정(隴西公, 文烈公, 敬元公, 政堂)과 세덕자료(世德資料)까지 첨가된 진일보한 족보로 평가된다. 이후 상주이씨문중에서는 이욱(李稶, 1562~?)이 서문을 쓴 1613년 [성주이씨족보] 계축보 목판본 1책으로 간행한다.
성주이씨문중이 편찬한 족보 가운데 걸작품은 1689년 [성주이씨족보] 기사보 목판본 4권3책이다. 이 책의 하책(下冊)에는 권하(卷下)뒤에 [성주이씨별록(星州李氏別錄)]이 17장 있다. 천안에 거주하고 있는 성주이씨로서 상계가 연결되지 않는 이실(李實) 후손의 계대를 등재한 것이다. 1689년 기사보의 권(卷) 상중하(上中下)의 계보에는 세수(世數)를 적고 있으나, 별록의 계보에는 상계가 연결되지 않아 시조로부터 세수를 정할 수가 없으므로 세수를 기록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동일혈족은 분명하지만, 상계가 연결되지 않는 종족을 무리하게 연결시키려 계대를 조작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많은 족보를 수집하여 종합 검토하여야 하겠지만, 성주이씨의 1689년 기사보에서 알 수 있듯이 17세기의 족보는 거의 모두 청보(淸譜)이다.
[표5] 성주이씨문중에서 편찬한 족보 목록 (연도순)
|
번 |
명칭 |
연도 |
서발 |
판종 |
권책 |
소장처 |
|
1 |
星州李氏世譜 |
1464년 |
李尹孫 서 |
미상 |
1책 |
실전 |
|
2 |
星州李氏族圖-隴西公族譜 |
1545년 |
李文楗 편 |
필사본 |
1책 |
성주이씨묵재공파종중-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
|
3 |
星州李氏族譜 |
1613년 |
李稶 |
목판본 |
1책 |
문중 |
|
4 |
星州李氏族譜 |
1689년 |
李光迪 서(1687) - 발(1689) |
목판본 |
4권3책 |
필자,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
|
5 |
星州李氏族譜 |
1751년 |
李應協 편 |
목활자본 |
6권6책 |
국립중앙도서관. 계명대학교 동산도사관 |
|
6 |
星州李氏族譜-世德編 |
1797년 |
李漢鎭 서 |
목활자본 |
12책(세덕편 1책, 10권10책, 별록 1책) |
국립중앙도서관,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9책 영본), 일본 와세다대학 도서관 (10권10책). |
|
7 |
星州李氏族譜 |
1830년 |
李箕欽-李梧齋-李春遇 등 |
목활자본 |
21권 |
문중 |
|
8 |
星州李氏世譜 |
1850년 |
|
정리자체 철활자본 |
27권19책 |
국립중앙도서관 |
(4) 성산이씨와 광평이씨문중에서 편찬한 중요 족보
광평이씨의 시조는 이무재(李茂材)이고 그의 아들이 이능(李能)인데, 고려 태조가 후 삼국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고 해서 통일을 상징하는 일(一)자를 내려 ‘능일(能一)’로 부르게 하고 성산군(星山君)으로 봉했다. 즉, 광평이씨 2세 이능일과 성산이씨 시조 이능은 같은 인물이다.
성산이씨문중에서 조선시대에 편찬한 중요 족보는 [표6]과 같다. 상산이씨문중에서는 1593년(계사년)에 이칭(李偁, 1535~1600)4)이 쓴 지가 있으므로 [성산이씨족보] 초간보가 1593년에 간행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1593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바로 이듬해이므로, 전란 중에 간행하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필자는 1593년 계사보는 필사 원고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원고본의 소실이라면 곧 망실을 의미한다. 이 족보는 이칭이 서문을 쓴 연도가 1593년이지, 족보의 편찬은 임진왜란 훨씬 이전부터 진행하였을 것이다. 물론, 이 족보는 7년간의 왜란이 끝난 1598년 이후에 간행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필자는 1593년 계사보는 편찬 후 간행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표6] 성산이씨문중에서 편찬한 족보 목록 (연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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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
명칭 |
연도 |
서발 |
판종 |
권책 |
소장처 |
|
1 |
星山李氏族譜 |
1593년 |
李偁 지, |
초찬보(?) |
1책 |
미상 |
|
2 |
星山李氏族譜 |
1726년 |
李爾沆 서 |
미상 |
미상 |
미상 |
|
3 |
星山李氏族譜 |
1767년 |
李敏樹 서 |
미상 |
미상 |
미상 |
|
4 |
星山李氏族譜 |
1772년 |
李世衡 |
미상 |
미상 |
문중 |
|
5 |
星山李氏族譜 |
1848년 |
李廷億 |
미상 |
미상 |
문중 |
|
6 |
星山李氏世譜 |
1880년 |
李中祿 |
미상 |
미상 |
문중 |
많은 사람들이 성산이씨와 성주이씨가 같은 성씨로 착각한다. 그러나 성산이씨와 상주이씨는 시조가 다르고 편찬된 족보도 분명히 다르다.
(5) 가리이씨문중에 관하여
가리이씨의 시조는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한 고려후기의 대학자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이다. 가리이씨의 시조 이승휴의 유적지는 강원도 삼척 두타산에 있는데,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필자는 고려의 이승휴를 정신적인 면에서는 고려의 김부식보다도 높이 평가한다. 그는 [제왕운기](1287년)에 단군에 관한 기록을 남긴 고려중기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기 때문이다. 가리이씨는 이승휴와 그의 두 아들 이외에는 남은 기록이 없다. 가리이씨가 몰락한 것을 보면, 가리이씨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항거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연유(緣由)로 조선초기에 이르러 거의 몰락한 것이 아닐까?
성주육리 가운데 가리이씨는 분명히 현존한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1,956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기 때문이다.5) 그러나 가리이씨는 현재 문중이 형성되어 있지 않고, 작성된 계보도 아직은 발견되지 않았다. 가리이씨는 이승휴 한 분만으로도 높이 평가하고 대우받아야 마땅한 집안이다.
3. 성주육리는 가야국의 후손일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성주목 기사에 “본주(本州)의 토성(土姓)이 7이니, 이(李)·배(裵)·여(呂)·백(白)·전(全)·박(朴)·차(車)이요, 내성(來姓)이 1이니, 임(林)【서울에서 왔다.】이며, 속성(續姓)이 4이니, 강(姜)【진주(晉州)에서 왔다.】 ·손(孫)【밀양(密陽)에서 왔다.】 ·김(金)【김해(金海)에서 왔다.】 ·조(趙)【근본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모두 향리가 되었다.】이다. 가리(加利)의 성이 5이니, 윤(尹)·조(趙)·이(李)·홍(洪)·정(鄭)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지금 향리가 되었다.】이다. 화원(花園)의 성이 5이니, 서(徐)·갈(葛)·석(石)·조(曺)·정(丁)이요, 내성(來姓)이 3이니, 한(韓)·이(李)·백(白)이다. 팔거(八莒)의 성이 3이니, 도(都)·현(玄)·임(任)이요, 백성(百姓)의 성이 2이니, 전(田)·변(卞)이며, 내성(來姓)이 2이니, 배(裵)·임(林)이다. 인물(人物)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이승경(李承慶)·판삼사사(判三司事)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문충공(文忠公) 이인복(李仁復)【모두 공민왕 때 사람이다.】과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이숭인(李崇仁)【공민왕 때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성주의 토성은 일곱인데, “이(李)·배(裵)·여(呂)·백(白)·전(全)·박(朴)·차(車)”씨가 토성이라는 것이다. 성주를 관향으로 하는 성씨는 성주육리와 성주배씨(星州裵氏) 성주여씨(星州呂氏)이다. 그러나 성주육리와 성주배씨는 토성이지만, 성주여씨는 귀화성씨이다. 성주육리는 성주에서 발생한 성씨이다. 특히 조선후기까지 성주육리는 한 같은 혈족이라는 의식이 팽배하였는데, 조선후기에 이르러 각 씨족의 계보가 명확히 정리됨에 따라 혈족의식이 약화한다.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육리(星州六李). 우리나라의 여섯 씨족이 이렇게 한 지역에 관향을 두고 있는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 성주의 육리에 감추어진 그 비밀은 무엇일까? 성주육리는 2015년 통계에 조사가 안 된 가리이씨를 제외하고서라도 인구 총수를 추산해 보면 약 40만 명이 좀 못되리라 본다. 40만 명은 웬만한 큰 씨족보다 적은 수이다. 이들 중 성주육리는 각기 시조가 달랐지만 예로부터 대체로 한 혈통으로 인식됐다.
이 가운데 성주이씨는 자신들은 경주이씨의 분적해 나온 씨족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경주이씨문중에서는 성주이씨는 경주이씨에서 분적한 씨족이 아니라고 명확히 천명하였다. 성주이씨와 경주이씨는 태생이 다르다. 경주이씨는 신라를 건국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알평의 후손이고, 성주이씨는 성산가야국의 후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주이씨가 경주이씨에서 분적해 나왔다는 성주이씨의 주장은 경주이씨에게는 전혀 용인되지 않는다. 경주이씨가 성주이씨를 분적해 나간 동종(同宗)으로 인정하는 순간 알평의 정통성은 경주이씨에서 성주이씨로 바뀌게 될 것으로 예측하기 때문이다.
성주육리 가운데 가리이씨를 제외한 다섯 이씨는 모두 후기 신라에 연원을 두고 있다. 가리이씨 시조 이승휴는 고려 후기의 인물이지만, 성주에서 태어났으므로 성주육리에 계수된다. 성주육리는 대체로 시조가 성주로 들어 왔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성주에서 태어나 시작한 씨족으로 보아야 한다.
성주는 신라가 지배하기 전에는, 여섯 가야(六伽倻)의 하나인 성산가야(星山伽倻)였다. 성산가야는 6세기 무렵 신라의 세력권에 들어간다. 성산가야는 가야연맹체에 속하였으나, 4세기 이후 문화적으로는 신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성주목의 성주육리는 가야국의 후손일 것으로 추정된다.6)
4. 맺음말
이상에서 토성 성주육리를 탐색하며, 필자는 성주를 관향지로 쓰는 성주육리의 원류는 성산가야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성산가야가 6세기 무렵 신라에 의하여 병합되었어도, 평화적인 병합이었다면 성산가야의 지배층은 전쟁 포로가 아니므로 그대로 신라의 귀족사회에 편입되어 들어갔을 것이다. 고고학적 유물로 보면 성산가야가 있던 지역에는 가야계의 유물보다도 신라계의 유물이 많아 출토한다. 이것은 성산가야가 일찍부터 신라와 교류 및 교역하는 문화권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성주육리는 신라가 쇠퇴해 가는 시기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성주육리의 일부는 고려의 건국에 참여하지만, 성주육리의 대성(大姓)이라 할 수 있는 성주이씨는 성주로 들어와 잠적하였다고 주장한다. 성주이씨가 성주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면, 그러한 곳으로 세력을 끌고 들어와 지역을 무혈(無血) 할거(割據)하여 고려의 호족으로 이어 나갈 수 있을까?
성산가야의 상층부는 성산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이후 신라에 복속하여 충성을 맹세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300여 년을 성주의 호족으로 신라의 상층부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신라가 망하는 것을 보며 본거지로 들아와 은거(隱居)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나라가 망하여도 다수의 사람이 망한 나라의 그 땅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며, 성주육리의 가문과 계보의 형성은 고려에 들어와서이기 때문이다.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고구려가 망한 후에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의 영토 위에 살면서 발해를 건국하였다. 신라가 망할 때의 백성이 곧 고려의 백성이 된다. 여섯 가야는 어땠을까? 각기의 영토 위에서 신라의 백성이 되었고, 그 후손들은 고려의 백성이 되었고, 그리고 그 후손의 후손들은 또다시 고려의 백성이 되고, 조선의 백성이 되었다. 대한제국이 망하고 대다수의 사람이 이 땅 위에 그대로 살았다. 해외로 나가서 독립운동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다수의 사람이 이 땅에 그대로 살면서 현실에 순응하거나, 나라를 되찾으려 독립운동한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왜정 때 적극적인 친일파는 전체 인구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경상북도 성주군에는 육리(六李)가 있다. 우리나라의 한 성(姓)의 여섯 씨족이 한 지역에 관향을 두고 있는 곳은 여기 성주가 유일하다.”
성주육리 모두는 외래성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토성이다. 성주육리가 신라계를 주장하든 성산가야계를 받아들이든, 이들이 우리 민족의 토성이라는 본질은 변함이 없다. 그러한 토성이 본격적으로 우리 역사 무대에서 활동한 자취가 역사서와 족보에 담겨있다. 성주의 토성, 각 씨족의 족보가 조선초기나 중기에 편찬되었어도, 심지어 아직도 초간보가 편찬되지 않은 문중이 있어도, 그들 모두가 우리 민족사의 한 구성원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보편적으로 볼 때 조선후기에 편찬한 족보일수록 확대 포장은 크다. 그렇다고 토성이라는 본질을 변경하려 해서는 안 된다.
[표7]은 [표1‘을 초찬 및 초간보 편찬 연대순으로 재배열한 표이다. [표7]은 성산이씨의 1593년 [성산이씨족보] 계사보는 간행을 안 한 초찬보로 판단하고 1726년 [성산이씨족보] 병오보가 초간보가 된다. 그렇다면 성주육리의 족보 편찬 순서는 문과급제자가 많은 순이며, 또한 인구수가 많은 순이 된다. 이것은 과거급제자가 많거나 현달한 집안의 족보 간행이 이르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표7] 경북 성주군 관향의 여섯 이씨 (초간보 발행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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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
시조 |
시대 |
초찬 및 초간보 편년 |
인구수(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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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州李氏 |
李純由7) |
敬順王(재위 927~935) 전후 |
1464년(초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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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珍李氏 |
李悤言 |
858~938, 신라말 고려초 |
165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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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平李氏 |
李茂材 |
신라말 지방호족 |
1593년(초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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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山李氏 |
李能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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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山李氏 |
李德富 |
신라말 고려초 |
1803년, 李禹世 필사본 |
7.9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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加利李氏 |
李承休 |
1224~1300, 고려후기 |
편찬사실 학인 안됨. |
1,956 |
이제 여기에서 13세기 가리이씨의 시조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제왕운기](1287년)를 다시금 떠올리자. 그의 [제왕운기]에 보이는 단군에 관한 기록은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1281년경)와 쌍벽을 이룬다. 일연은 속명(俗名)이 전견명(全見明)이며 경산전씨(慶山全氏)이다.8)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일연의 [삼국유사]보다 6년 후에 편찬되었으니, 그 두 책에서 말하는 단군은 같은 시대, 다른 버전의 이야기이다.
13세기 후반 충렬왕 재위 연간에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단군사화가 등장하지만, 이 사화는 13세기에 지어진 것이 아니다. 12세기 말 명종 재위 연간 [동명왕편]의 사화 기록은 414년에 건립된 [광개토태왕릉비]보다 779년 후에 지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릉비 앞부분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의 단군 기록도 서로 다른 버전이지만, 13세기보다 훨씬 이전부터 구전으로 전승된 사화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9)
계보가 기록되기 이전의 가문의식은 단순하다. 본관이 확정되기 이전에는 동성이면 일단 동족으로 인식하였다. 성주육리의 후손들에게 본관이 정해진 뒤로는, 그리고 족보가 간행되어 동성을 본관에 따라 분리한 후에는 성주육리의 혈족 의식은 약화한다. 이들 성주육리 각 씨족의 계보는 시조가 활동하던 신라말 고려초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대체로 13세기 중반에 시조에 관한 기억을 소급하여 계도를 작성하며 시작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광평이씨 시조와 상산이씨 시조는 부자(父子) 사이라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이외에 벽진이씨 성주이씨 경산이씨 등 각 시조의 혈연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성주육리가 한 지역의 동성 호족이었다는 사실로 이들은 상호 간에 형제 씨족으로 한때 인식되고 있었다. 가리이씨의 이승휴는 성산에서 태어나 말년에 강원도 삼척으로 들어가 일생을 보냈다. 그도 성주에서 태어났으므로, 그도 성주를 관향지로 하는 다른 이씨들과 혈족이었을 것이다.
성산가야의 후손들은 신라말 고려초까지도 성주에서 계속 거주했다고 보는데,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성주육리의 존재가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6세기 이전 고대사의 흐름은 이렇게 후기 신라와 발해, 고려와 조선을 거쳐 근대까지 존속되어 내려온 것으로 가설을 세우고, 이들 성주육리의 유전자 조사는 시도해 볼 만하다.
주(註)
주1) 성주(星州) 지역에 세거했던 여섯 이씨가 조선 정조 이전까지는 다 같이 본관을 성산 또는 성주로 사용하였다. 그 후 각각 시조별로 벽진(碧珍), 경산(京山), 성주, 가리(加利). 광평, 성산 등으로 본관을 달리 칭하였다.
주2)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시조 이순유(李純由)는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년) 때 재상(宰相)의 지위에 올랐다. 성주이씨 대동보에 의하면, 이순유는 아우 이돈유(李敦由)와 더불어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의 사직(社稷)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의 방책을 기도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쳐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京山里)에 옮겨 숨어 살았다”라고 한다.
주3) 이우세는 1798년(정조22) 생원시에 3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보다는 경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성리학과 예학(禮學)에 밝아 이의조(李宜朝)와 많은 문답을 나누었다. 성리설에 있어서는 주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관한 논설이 많으며, 사승(師承)에 따라 호론(湖論)을 지지하였다. 향약을 결성, 풍속 순화에 힘쓰고, 스승 송환기가 죽자, 노강서원(老江書院)에 추배하는 데 힘썼다. 또한, 글씨에도 능하여 현판과 금석문에 이우세의 글씨가 많이 남아 있다. 저서로는 『석연문집(石淵文集)』 3권과 『향약증해(鄕約增解)』 등이 있다. 참조; 김재열, ‘이우세’ 항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주4) 이칭(李偁)은 1558년 무오 식년시 생원에 입격한 바 있는데, 그의 저서 [황곡선생문집(篁谷先生文集)]에는 본관을 광평으로 적고 있다. 반면에 1767년 정해보 서문을 쓴 이민수(李敏樹, 1715~1785)는 1750년 경오 식년시 생원에 입격한 바 있는데, 방목에 그는 성주에 거주하는 성산이씨로 되어 있다.
주5) 가리이씨가 2000년 인구조사에서 666가구 1,956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2015년 국세조사에서는 의외로 0명으로 조사되었다. 2015년 인구조사에 가리이씨 항목이 없이 조사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주6) 필자는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120) - 가락국 수로왕계 『김해김씨족보』에 관하여’에서 “김해김씨 이외에 양천허씨와 김해허씨 하양허씨 인천이씨 등등이 가야계 씨족이다. 현전하는 가야계 씨족으로 자처하는 씨족은 거의 모두 금관가야계(金官伽倻系) 씨족이다. (후일 기회가 있으면 금관가야계 이외의 다섯 가야계 씨족을 탐색해 보고자 한다.)”라고 언급하였다. 이번 글은 그 첫 시도이다.
주7)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시조 이순유(李純由)는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년) 때 재상(宰相)의 지위에 올랐다. 성주이씨 대동보에 의하면, 이순유는 아우 이돈유(李敦由)와 더불어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의 사직(社稷)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의 방책을 기도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쳐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京山里)에 옮겨 숨어 살았다”라고 한다.
주8) 여기서 말하는 경산은 경상북도 경산(慶山)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의 전씨(全氏)는 백제 십제공신의 전섭(全聶) 장군 후손이라 주장한다. 일연은 전섭의 1200년 후 인물이고, 백제가 망한 660년으로부터도 550년 이후의 인물이다.
주9) [제왕운기]의 단군은 가야국 후손 계열을 통하여 전승된 버전일 수 있고, [삼국유사]의 단군은 신라나 백제 계열을 통하여 내려온 버전일 수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에도 또 하나의 버전이 있을까? 북부여에서 기원하는 주몽의 사화는 단군사화를 계승한 버전일 수 있다고 보면, 단군사화에 나타나는 천손의식(天孫意識)이 주몽의 사화에 담긴 것이다.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1193년에 편찬한 [동명왕편]은 주몽의 사화를 잘 묘사하고 있다. 지어진 순서로 보면 이규보의 [동명왕편] 1193년(명종23), 일연의 [삼국유사] 1281년경(충렬왕7), 이승휴의 [제왕운기] 1287년(충렬왕13). 이 책 세 권은 고려중기에 널리 알려진 우리 고대사에서의 천손의식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