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가 선정한 2024년 3월의 근현대사적지는 ‘3·15의거 발원지’와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문화의길 54)입니다. 필자는 지난 3월 9일 옛 마산(현 창원시)을 방문하여 3·15의거의 역사 현장을 둘러보았습니다. 오늘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필자주

3·15의거 발원지에 세워진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

이승만 독재정권의 3·15부정선거에 맞서 마산에서 일어난 1960년의 3·15의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 3·15의거가 처음 시작된 곳은 당시 민주당 마산시당사로 사용되고 있던 2층 목조건물 앞이었다. 현장에는 ‘3·15의거 발원지’ 기념동판이 설치되어 있고, 당시 민주당 마산시당사 건물 자리에는 2021년 10월 말에 창원시가 건립한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이 운영되고 있다.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 [사진-필자]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 [사진-필자]

필자가 현장을 방문한 지난 3월 9일, 기념관 입구의 도로는 한창 공사 중이었다. 그 탓에 애석하게도 도로에 설치되어 있던 ‘3·15의거 발원지’ 기념동판은 직접 볼 수 없었다. 대신 발원지 기념관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기념동판 사진과 설명문을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기념관 방문에 앞서 찾았던 국립3·15민주묘지 역시 3·15의거 기념일을 불과 6일 앞둔 상황임에도 한창 에스컬레이터 설치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3월 15일까지 공사가 마무리될지 심히 걱정됐는데, 발원지 기념관 입구까지 이렇듯 공사가 진행 중이다보니 그 아쉬움은 두 배 이상으로 클 수밖에 없었다.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3.15발원지 기념동판 사진 [사진-필자]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3.15발원지 기념동판 사진 [사진-필자]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 내부 [사진-필자]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 내부 [사진-필자]

발원지 기념관에는 3·15의거가 시작된 1960년 3월 15일부터 독재자 이승만이 하야를 선언한 4월 26일까지의 역사가 생생한 사진자료와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지하1층 영상실에서는 3·15의거의 전개과정과 의미를 소개하는 동영상을 볼 수 있었고, 1층의 ‘깊은 울림’실에서는 3·15의거의 배경이 되는 한국 현대사 연표를 둘러본 후, 3·15의거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사진자료와 설명을 만날 수 있었다. 

2층의 ‘강건한 울림’실에서는 3·15의거의 직접적인 이유가 된 3·15부정선거의 구체적인 양태와 3·15의거의 전개과정은 물론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사진과 자료를 만날 수 있었고, 3층의 ‘힘있는 울림’실에서는 3·15의거로 시작된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물론 3·15의거의 여러 유적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된 내용을 만날 수 있어 이후 3·15의거의 역사를 둘러보기 위한 행선지를 정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3·15의거와 4·19혁명의 시대적 배경

마산 앞바다에 있는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표지판. 옆에는 김주열 열사 동상도 있다. [사진-필자]
마산 앞바다에 있는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표지판. 옆에는 김주열 열사 동상도 있다. [사진-필자]
국립3.15민주묘지. 세 번째가 김주열 열사의 가묘이다. [사진-필자]
국립3.15민주묘지. 세 번째가 김주열 열사의 가묘이다. [사진-필자]

이승만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대통령을 맡아 1960년 4·19혁명으로 하야할 때까지 무려 12년간 한국의 절대자로 군림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기간 한국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경제적 부정·부패는 대단히 심각했다. 당시에는 말단 행정기관인 동사무소에서 어지간한 서류 하나 발급받으려 해도 뇌물로 양담배 한 갑쯤 쥐어주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었다고 한다. 

요즘도 자주 쓰는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은 원래 여순10·19사건을 비롯하여 사람 목숨이 한 순간에 결정되던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한국현대사의 비극적인 시대상황을 반영한 말이었는데, 1950년대는 말 그대로 당시 자유당정권에 어떻게든 줄을 서지 않으면 이러저러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원조경제라는 용어가 등장할 정도로 미국의 경제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1950년대 당시의 경제 상황에서 대중의 삶은 변변한 일자리 하나 구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웠다. 특히 적산불하 등으로 기회를 얻은 일부 기업들이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에 정치자금을 제공한 대가로 원조경제의 혜택을 독점한 탓에 민중의 삶은 더욱 더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자유당 정권은 이러한 민중의 현실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우상화 작업을 벌이면서 장기집권을 위한 방안 마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1950년대는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이시요, 세기의 영도자이신 국부”라거나, “자주독립의 사도이신 세기의 지도자”, “민족의 태양”과 같은 이승만을 우상화하는 표현이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있었다. 

이승만은 심지어 서울시의 명칭을 외국인이 발음하기 어렵다는 핑계를 들어 자신의 호를 딴 우남시로 바꾸려는 시도까지 했고, 1956년에는 40만 달러 이상을 들여 탑골공원과 남산 등에 현직 대통령 이승만을 위해 동상과 송덕비를 세우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당시 최연소 국회의원이던 김영삼은 “동 금액으로 2만여 명의 굶주린 한국인들에게 1개월간의 식량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비판하여 언론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시기 학생과 민중은 단지 관제 데모에 동원되는 통치대상으로 전락했고, 이에 대한 대중적 불만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이 3·15부정선거를 대대적으로 벌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 정권이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한 것이다. 3·15부정선거에는 투표함 바꿔치기는 기본이었고, 40% 사전투표, 유령유권자 조작, 3인조와 5인조로 구성된 반공개 투표, 개표 때 야당후보 지지표를 여당후보 지지표로 둔갑시키기와 같은 기상천외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다. 너무 열심히 부정선거를 준비한 나머지 막상 개표에 들어갔을 때, 일부 지역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이 얻은 표가 총 유권자수를 초과하는 웃지 못 할 해프닝마저 벌어졌다. 

이승만 독재정권의 부정선거는 물론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4년 전인 1956년의 정·부통령 선거 때도 이미 부정선거가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당시 2위로 낙선한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의 유명한 말도 이때 나왔다. 

하지만 1960년의 정·부통령선거가 갖는 의미는 남달랐다. 4년 전의 정·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음에도 부통령에는 자유당이 내세운 이기붕이 낙선하고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는 일이 벌어졌고, 이는 이승만과 자유당의 행보에 적잖은 장애 요소였다. 당선 직후인 1956년 9월 28일에 벌어진 장면 부통령 암살기도 사건은 자유당 정권의 위기의식이 얼마나 컸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승만이 3·15선거를 앞두고 “각각 의견이 다른 사람이 정·부통령으로 피선된다면 나는 응종(應從)할 수 없다.”라는 내용의 대국민 협박성 담화를 발표한 것도 이러한 위기의식의 반영이었다. 더군다나 담화 직후인 2월 15일에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미국에서 치료 도중 갑자기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이미 이승만의 당선이 사실상 확정된 상태에 이르렀을 때, 위 담화는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을 선출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대통령 취임을 거부하겠다는 선언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부통령 선거의 결과는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는데, 자유당 정권으로서는 부통령 선거의 절대적 중요성이 하나 더 있었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나이가 85세에 이르다보니 급작스러운 대통령 유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3·15선거는 이때 대통령직을 승계할 부통령이 누가 되는가를 결정하는 선거였던 것이다. 

자유당 정권으로서는 1956년 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의 장면에게 패했던 자당의 이기붕을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선시키려고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옛 마산통합병원(현 마산의료원) 앞에 세워져 있는 4.19혁명 진원지 표지석 [사진-필자]
옛 마산통합병원(현 마산의료원) 앞에 세워져 있는 4.19혁명 진원지 표지석 [사진-필자]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의거

3·15의거는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 당일 오전에 시작되었다. 투표 당일 선거번호표를 받지 못한 유권자들은 아침부터 “내 표를 찾아 달라”고 호소하며 당사 앞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투표구별로 파견된 투표참관인으로부터는 ‘사전투표가 이루어진 투표함 발견’과 같은 대대적인 부정선거 실상이 보고되기 시작했다. 이에 민주당 마산시당의 선거대책위원회는 당일 오전 10시 30분 경 전국 최초로 ‘선거부인’을 선언하고 당사 앞으로 모인 군중들과 함께 시위행진을 시작했다. 이것이 3·15의거의 시작이었다. 

마산 시민들은 “썩은 정치 바로 잡자”, “협잡 선거 다시 하라”, “부정 선거 다시 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불종거리로 진출했고, 시위는 야간까지 지속되었다. 분노한 시위군중은 남성파출소와 북파산파출소, 민주당 소속이었으나 이승만 독재에 굴복하여 선거 직전 민주당을 탈당하고 자유당에 입당한 허윤수 의원의 집을 전소시켰다. 이어 선거 개표가 진행되는 마산시청(현 창원시 합포구청)으로 향했다.     

이에 경찰은 최루탄은 물론 총기를 사용하여 무차별 발포를 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발포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는데, 사망자는 부상 이후 치료 중 사망한 사람까지 포함하여 12명에 달했다. 여기에 이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오열(북괴 간첩)의 침투를 의심한다’면서 배후세력을 수사하겠다고 나서는가 하면, 이기붕은 “총은 쏘라고 있는 것이지 놀라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해괴한 말을 남기는 등 자유당정권과 경찰의 총기 사용의 정당성 강변은 마산 시민의 분노를 더 자극했다.  

마산시민의 응축된 분노는 4월 11일, 28일 동안 실종되었던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중앙부두에서 떠오르자 대대적인 2차 시위로 다시 한 번 표출되었다. 2만으로 늘어난 학생과 마산 시민들은 김주열 학생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마산통합병원(현 마산의료원)을 에워싸고 진상규명과 함께 주범으로 지목된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를 비롯한 관련자를 학생에 인계할 것 등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경찰은 학생들의 요구를 외면한 채 김주열 학생의 시신을 몰래 빼돌려 고향인 남원에 묻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렇다고 학생과 시민의 분노를 묻을 수는 없었다. 마산의 2차 의거는 3·15부정선거에 맞서는 항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도화선 역할을 한다. 서울에서는 4월 18일 고대생들이 국회 앞 시위 후 돌아가던 중 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학생들이 큰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다음날인 4월 19일에 대대적인 학생시위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하여 3·15의거로 시작된 마산 시민들의 항쟁이 4·19혁명으로 귀결되었고, 이 과정에서 시위대의 요구도 부정선거 무효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하야 요구로 발전하여 마침내 4월 26일 이승만의 하야 발표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3·15부정선거, 이승만이 질 책임이 없다고?

3.15의거기념탑 [사진-필자]
3.15의거기념탑 [사진-필자]

최근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은 이승만을 미화하면서 이승만을 3·15부정선거의 책임에서 제외시킨 것은 물론 3·15의거와 4·19혁명에 학생들이 나설 수 있었던 이유를 이승만이 집권기간 동안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광범위하게 한 결과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유력한 경쟁자였던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선거 전 서거하면서 대통령 당선이 사실상 확정된 상황이었기에 부정선거를 획책할 이유가 없다’는 영화 <건국전쟁>의 논리는 당시 실상과 너무나 동떨어진 주장에 불과하다. 앞에서 소개한 이승만의 “각각 의견이 다른 사람이 정·부통령으로 피선된다면 나는 응종(應從)할 수 없다.”고 한 담화는 자유당 지도부와 고위 공무원 등에게는 부정선거를 해서라도 반드시 이기붕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로 들렸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 <건국전쟁>의 주장은 이승만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실시한 교육이 자유민주주의 교육이었다는 전제부터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교육 덕에 학생들이 광범위하게 3·15의거와 4·19혁명에 나설 수 있었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실제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한 교육은 온 국민이 절대복종의 자세로 이승만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반공체제를 구축한다는 발상에서 나온 일민주의(一民主義) 교육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일민주의를 ‘민주주의의 영구한 토대로 삼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하였지만, 그의 일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승만식 민족적 민주주의’에 불과했다.

필자는 이번 마산 기행에 앞서 여순10·19사건의 아픔이 서려있는 여수·순천 지역을 여행했다. 그곳에서도 이승만 독재정권 당시 자행된 광범위한 집단학살의 역사 현장을 둘러보면서 이승만의 악행에 치를 떨어야 했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 등은 이승만 독재정권이 벌인 민주주의 파괴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제주4·3사건, 여순10·19사건, 6·25 한국전쟁 당시 벌어졌던 보도연맹원을 비롯한 수많은 민간인에 자행된 학살사건은 그 어떠한 핑계로도 합리화할 수 없는 독재자 이승만의 씻을 수 없는 죄과이다. 

반대로 이러한 불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되살리고자 한 3·15의거와 4·19혁명은 이후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 반유신투쟁, 부마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2016~17 촛불항쟁으로 이어져 왔다는 점에서 그 어떠한 폄훼로도 왜곡될 수 없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주항쟁의 역사이다. 불의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188명의 3·15의거와 4·19혁명 원혼의 명예를 훼손하는 이승만에 대한 미화작업은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글을 맺는다. 

3월 15일을 전후하여 ‘3·15의거 발원지’와 ‘3·15의거 발원지 기념관’을 둘러보시거나, 네이버(https://naver.me/FZWZTaNg), 카카오(https://place.map.kakao.com/2065597234), 구글(https://maps.app.goo.gl/HLKWF55SL3Vq8gJP7)에 들어가 각자의 생각을 남겨주십시오. 전자지도에 우리의 근현대사를 새기는 작업은 이러한 여러분의 참여 과정을 거쳐 완성될 것입니다.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서울 동작구에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을 맡아 지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서울현충원 역사탐방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근현대 역사탐방을 이끌고 있다.

저서로 『현충원 역사산책』(2022),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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