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신돈을 요사스러운 승려로 그리는 야담집이 많이 있습니다. 천한 신분으로서 승려였다가 우연한 기회에 공민왕의 마음에 들어 궁중에 드나들면서 왕의 총애를 무기로 삼아 갖가지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가 저질렀다고 하는 나쁜 짓은 대개 다음과 같습니다.

공민왕은 원나라 공주로서 왕비가 된 노국공주를 깊이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어 버렸습니다. 왕비가 죽자 공민왕은 괴로워하였습니다. 신돈은 이 틈을 타 노국공주와 닮은 여자를 공민왕에게 소개하고 왕을 자신의 손아귀에 올려놓고 주물렀습니다. 또 왕의 후궁들과 간통을 일삼아서 공민왕의 아들로 뒤에 왕위에 오른 우왕과 창왕이 모두 신돈의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뒤 그때 왕이었던 우왕을 물러나게 한 명분이 바로 우왕이 왕우가 아니라 신우, 다시 말해서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성계 일파는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왕위에 앉힙니다. 웃기는 일이지요. 창왕의 아버지인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면, 창왕은 신돈의 손자가 아닌가요? 그런데도 왜 우왕을 쫓아내면서 창왕을 왕위에 앉혔을까요?

물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위화도 회군 때 함께 했던 조민수가 우왕의 장인과 인척간이라서 우왕의 아들이 왕위에 앉아야 한다고 고집을 하여 할 수 없이 그랬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뒤에 창왕도 신돈의 손자라고 해서 다시 쫓아냅니다. 6백 년이 더 지난 지금 보아도 우스운 변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외에도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서도 신돈은 나쁜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신돈을 조선시대 명종 때에 대왕대비의 총애를 받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온갖 나쁜 짓을 하던 보우와 같은 요승으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홍명희 같은 사람이 신돈을 나쁜 사람으로 서술하는 것을 보면 신돈에 대한 나쁜 평가가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공민왕을 원나라의 굴레를 벗고 자주성을 되찾으려고 했고, 권문 세족의 횡포로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훌륭한 왕이라고 소개합니다. 신돈 때문에 왕의 총명이 흐려졌다는 따위의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권문 세족의 반격으로 신돈이 제거되고 끝내는 공민왕까지 시해됨으로써 개혁 정치는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신돈은 개혁을 추진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셈입니다. 그런데 왜 신돈이 요사스러운 승려로 알려져 왔고, 그가 정당한 평가를 받기까지 그토록 오랜 세월이 걸린 것이었을까요?
 
앞에서도 보았듯이 여러 가지 반원 개혁 정책에 힘입어 어느 정도 주권을 되찾은 공민왕은 대토지 소유자인 권문 세족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개혁 정책을 펴기 위해 신돈을 등용했습니다.

공민왕은 한때 정치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세력을 신진 관료들 사이에서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관료들은 거의 대부분 권문세족과 연결되어 있었고, 권문세족과 연결되지 않은 신진 관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파당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원의 지배와 권문세족의 횡포가 관료 사회에 미친 영향은 뿌리가 깊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공민왕은 권문세족과 전혀 연결되지 않고 아무 파당에도 속하지 않은 신돈을 등용하게 되었습니다. 신돈은 어머니가 사원의 종이었고 그 자신은 승려로서 권문 세족과는 인연이 없는 천민 출신이었습니다.
 
공민왕은 신돈에게 국정을 총괄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신돈은 등용되자마자 이공수, 경천흥 등 권문세족 출신을 축출하고 가문이 미약한 사람들을 등용하였습니다. 또 `전민변정도감`이라는 기관을 설치하자고 제의해 그 기관의 장관에 해당하는 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기관은 토지와 노비들의 원래 소속과 신분을 판명해서 되돌리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 기관이 이러한 일을 처리해 가자 권문 세족이 수탈했던 많은 토지들이 본래의 주인인 농민에게 돌아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권문 세족의 농장에 얽매여 노비로 전락했거나 사실상 노비와 다름없게 된 양인 농민들이 자기 땅을 되찾아 자영 농민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권문 세족들의 땅은 산과 하천을 경계로 삼을 정도였고, 양인들이 그 농장에 노비로 들어가서 양인의 씨가 마를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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