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채 (재미동포)
|
|

진정한 경제적 민주주의의 출발
우리는 진정한 경제적 민주주의하에서 살고 있을까? 참다운 경제적 민주주의는 어떠한 모습이어야 할까? 그것은 인간이 공정하고도 인간다운 경제적 대우를 받는 사회일 것이다. 어떠한 대우가 공정하고도 인간다운 것일까? 그것은 한 인간의 경제적 가치가 제대로 평가 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 인간의 경제적 가치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인간 자신뿐만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가정, 사회 및 국가를 위한 그의 능력과 기여도일 것이다. 이는 한 인간의 전인적 가치이어야 한다. 덕체지(德體智)의 모든 면에서의 쓸모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한 인간의 덕체지의 능력은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가? 그것은 타의에 의해서 주어진 심신이 후천적 교육에 의해 그 능력이 양성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얻는 경험과 사색에 의해서 심도를 더해가고 연마된다. 경험과 사색이란 다분히 그 개인의 과제일 것이나 교육은 그렇지가 않다. 더구나 어릴 적의 경험은 교육에 의해 주도된다. 그런데 교육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기존 사회제도와 한 개인간의 관계의 문제이다.
엄마에게서 갓 태어난 아기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모르는 가장 초보적인 인간이다. 자의에 의해서 태어났다기보다는 부모의 의지, 기존 인간사회의 의지에 의해 태어났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지적일 것이다. 그 가장 초보적인 인간인 아기가 성장하는 과정을 냉철히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아기가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이 사회로부터 어떻게 대우를 받는가를 분석 평가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는 한 인간의 경제적 가치가 형성되는 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 아기의 성장과정은 그가 성인이 된 후의 생활 및 운명과도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아기는 부모의 생육을 통해서 자라게 되며 국가사회의 교육제도의 틀 속에서 교육을 받게 된다. 생육되고 교육을 받는다는 사실은 어느 아기, 어느 인간에게나 동일한 현상이나 문제는 그 내용의 질과 양 그리고 방법이다. 어느 정도 충실하게 생육되고 교육을 받느냐는 것이다. 우리네 사회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각 개인간에 교육과 생육의 많은 질적 양적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그 개인의 경제적 여건에 따라 질적 양적 차이가 지배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으로 부유할 수록 보다 나은 생육과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경제적 여건은 아기의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대체로 부모가 경제적으로 부유하면 다른 아기보다 더 우수한 생육과 교육을 받고 가난하면 상대적으로 더 불량한 생육과 교육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육과 교육의 질적 양적 차이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자본주의체제의 이념적 제도적 속성으로 치부해 버리기는 무책임하고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 인간의 생명은 하나요 삶도 하나이다. 한 인간이 일단 이 세상에 태어나면 제대로 생육되고 제대로 교육받고 자신의 능력이 제대로 평가 받으면서 살다가 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기존 사회체제의 틀 속에서 한 인간이 태어나게 되면 그의 생육과 교육은 거의 부모의 능력에 좌우된다. 부모의 능력이 부족하면 그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문제가 생기고 악조건의 생육환경하에서 건강도 문제이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니 성인으로서의 경제적 가치를 어떻게 제대로 갖추어 갈 수 있다는 말인가? 기존 사회제도의 비합리적 틀 속에서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잘못 대우를 받게 되며 성인이 되어서, 아니 죽을 때까지도 그러한 불완전한 대우의 영향이 두고두고 미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가 과연 인간이 인간답게 대우받고 그의 경제적 가치가 제대로 평가 받는 경제적 민주주의 사회라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경제적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다. 그러한 불공정한 경제적 민주주의 하에서는 다른 어떤 부문에서도 진정한 민주주의(참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없다.
보다 공정하고도 바람직한 경제적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능력과 가치에 따라 보다 공평하게 취급 받고 대우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경제적 능력과 가치가 공정한 여건에서 갖춰질 수 있도록 보호되고 관리되어야 한다. 가령 달리기 선수들의 출발선이 동일해야 되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성인으로서의 경제적 사회생활 출발선이 어느 정도 동일해야 되는 것이다. 성인으로서의 경제적 사회생활 출발선을 동일하게 하려면 생육과 교육이 어느 아기에게나 질적 양적으로 최대한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 태교도 교육이다. 따라서 아기는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제도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이를 부모의 능력에만 의존하여 방치하지 말고 국가와 사회가 대부분을 책임져서 모든 어린이의 성장기가 공평한 여건하에서 동질적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선천적 개성의 차이, 소질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그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 차이를 고려하여 이뤄질 수 있는 것이 교육이다. 순전히 태생적 차이에 따른 생육과 교육의 차이를 두는 것은 민주주의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더 민주주의적일 것이다. 적어도 한 인간이 태어나서 경제적으로 제 앞길을 가릴 수 있을 때까지는 국가와 사회의 보호가 필요하다. 부모가 경제적으로 무능하면 국가와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 제 앞길도 못 가리는 부모에게 내팽개쳐 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부모에게 맡겨져 어떻게 한 아기가 제대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으며 다른 성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이 사회를 새 출발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동일 여건의 선상에서 경제사회적 출발을 해야 한다. 그것이 공정한 인간 관계를 규정하고 보다 공정한 생존경쟁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공정한 게임의 룰은 선수의 불만을 살 수 없다. 우리의 자본주의사회는 한 인간의 생의 출발선을 두고 볼 때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져 있다. 한 인간의 성장기가 보다 제도적으로 확실하고도 공평하게 보장될 수 있는 체제가 필요하다.
기존 체제의 한계와 신체제의 필요성
자본주의와 공산사회주의를 간단히 비교해 보자. 자본주의는 인간의 창의력과 능력을 최대한 살려 이를 보호하고 장려하고 인정하여 경제적 가치화하는 것과 그러한 개인의 능력을 경제적 시장가치로 차별화하여 서로 교환할 수 있게 한 것 또한 잘 한 일이다. 그러나 자제되지 않는 인간의 경제적 욕구충족을 원인으로 한 황금만능주의, 빈익빈부익부 및 부의 세습 등의 비인간적 불공정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를 핑계로 이러한 문제점들이 방치되고 합리화되고 정당화되는 게 현실이다. 또한 시간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화될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경제적으로 불공정한 사회로 고착될 수밖에 없다.
공산사회주의 하에서는 반대로 철저한 사유재산의 불인정으로 개인의 창의력과 욕구에 대한 동기가 지나치게 결여되고 인간의 경제적 가치가 체제에 기준하여 너무 인위적 획일적으로 왜곡 평가되는 나머지 사회 전체가 경제적으로 비생산적일 수밖에 없으며 억압적이고도 폐쇄된 사회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인의 경제적 가치보다는 체제에 대한 충성도를 우선하여 경제적 지위도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 간의 공동체의식의 고취를 통해 더불어 잘 살아 보겠다는 고귀한 이상은 인정되고 보호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인간이 경제적 강자의 논리에 의한 약육강식의 경제적 동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공산사회주의 하에서는 인간이 비능률적 획일적 체제의 유지에 사로 잡혀 함께 못사는 사회로 귀착되기 쉬운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자본주의는 그 속성상 강자의 주도하에 유지된다. 경제적 강자에게 유리하고 경제적 강자가 지배적으로 체제를 유지하는데 근간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경제적 무한 경쟁을 조장함으로써 치열한 경쟁을 이기기 위해서는 때로는 비리도 마다할 수 없으며 이는 결국 위선적이고도 정직하지 못한 사회를 부추길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더구나 정치권력과 경제적 강자가 결합했을 때 부정을 낳고 이는 엄청난 국가사회의 왜곡현상을 초래하기도 한다. 반대로 경제적 약자는 수동적으로 체제에 순응해야 하며 체제의 속성상 약자의 처지에서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극소수의 경제적 강자와 대다수의 경제적 약자라는 구성비 속에 약자는 강자의 기득권이 유지되는데 어쩔 수 없이 협조적이어야 하고 강자는 약자의 처지에 인색할 수밖에 없다. 강자가 약자를 도와줘 봐야 강자의 여유의 한계 내에서만 그것도 강자의 마음에 달렸다. 제도적으로 이뤄지는 게아니라 강자의 자의에 의한 선처/시혜를 바랄 뿐이다.
공평한 경제적 민주주의라는 기준에서 보면 자본주의와 공산사회주의는 너무 양극을 달리고 있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인간의 욕구가 너무 방임되고 공산사회주의 하에서는 지나치게 억제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인간이 스스로를 타락시키기 쉽고 공산사회주의 하에서는 체제유지에 골몰하여 지나치게 비자율적 수동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극단적인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그에 경쟁하는 체제를 만들려다 보니 또 하나의 극단적인 체제가 형성되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가정불화가 심한 집안에서 한 배우자가 극단적이 될수록 다른 한 배우자도 같은 정도로 극단화하는 상황과 비유될 수 있다.
이 두 체제의 대체적 비교를 통해 보다 이상적인 체제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자본주의와 공산사회주의 양 극단의 중간쯤에서 양 극단의 단점을 피하고 강점을 살려내는 이상적인 배합을 통해 형성될 수 있는 보다 진화된 체제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인간의 창의력과 능력이 제대로 육성되고 평가 받으며 더불어 살려는 공동체의식 하에 인간의 무한정한 비이성적 욕구가 제도적으로 어느 정도 견제될 수 있는 사회를 이상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가 Hardware라면 체제는 Software이다. 자연의 섭리에 의해 주어진 대자연은 쉽게 변형할 수 없지만 체제라는 Software는 우리 인간이 원하는 대로 변형할 수 있다. 이제 그 Software를 변형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한정된 면적과 자원을 가진 이 지구도 우리 인간의 본래의 자본주의 체제를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먹여살려야 할 인간의 수요가 너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과포화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문명의 발달로 인간 간의 관계가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상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인간 자신과 그 관계도 경제적 이론의 대상이 되어 제도적으로 철저한 규제를 받아야 한다. 오만과 방종에 빠지기 쉬운 우리 인간의 정신세계를 종교라는 수단으로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처럼 지금까지 경제를 다스리는 주체로만 간주하던 태도에서 우리 인간 자신을 경제의 객체로서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방식대로 지나치게 방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 간의 경제관계를 거시적으로만 규정할 것이 아니라 미시적으로도 꼼꼼하게 교통정리해야 한다.
공산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두 개의 오래된 낡은 신발에 비유해 보자.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신발을 신고 생활한다. 과거 공산주의 신발을 신던 사람들도 공산주의 신발이 불편해 자본주의 신발로 많이 바꾸거나 그 구조를 나름대로 약간 바꿔 신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두 개의 신발을 면밀히 관찰해 보면 어느 신발도 완벽하지 못하고 각기 장단점을 갖고 있다. 다만 공산사회주의라는 신발이 보다 많은 결정적 단점을 가져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애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신발이 아주 마음에 들어 신고 다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 동안 두 가지 신발이 대종을 이루고 있었으니 그 중에서도 더 나은 자본주의 신발을 신고 있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도 이제 와서는 소재와 디자인이 모두 구형이고 많이 낡아 보인다.
각 신발을 분석해 보면 서로 다른 부품을 썼으며 디자인도 사뭇 다르다. 이 두 개의 신발에서 좋은 부품만을 선별하고 새로 개발된 신소재의 부품을 추가하여 보다 이상적인 신발을 만들 수는 없을까? 현대 과학의 수준은 이를 가능케 하리라 확신한다. 그래서 만인의 발에 좀더 편하고 견고하며 착용하기 편리한 신발을 생산할 수 있으리라. 저마다 내 신발이 네 신발보다 더 좋으니 너도 내 신발로 바꿔 신으라고 주장하기보다는 이제는 보다 나은 제3의 신발을 개발할 때가 되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출발할 때의 과학보다 월등히 발전된 새로운 과학문명이 생활화된 현대는 새로운 신발(체제)의 출현을 가능케 하고 필요로 하고 있다.
한 인간의 전 생애의 이상적인 경제생활의 모습
인간은 생육과 교육이 어떤 이유로든 타의에 의해 불평등한 대우를 받지 않는 어린 시절을 살아야 하고 이를 기초로 배양된 자신의 능력이 선의의 경쟁을 통해 최대한 자유롭게 발휘되고 그에 대한 대가가 보장되는 성인으로서의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노후엔 그러한 경제생활을 통해 벌어들인 소득의 축적결과를 토대로 생활을 하되 적어도 노후의 안정적 생존은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자본주의와 공산사회주의의 어느 체제도 이 기준에 충실하다고 볼 수 없다. 적어도 한 인간이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는 생육과 교육이 그 개인의 능력과 개성에 맞춰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성인이 된 후의 생활은 그 개인 자신의 책임하에 이뤄져야 한다. 성년이 된 나이를 19세로 볼 때 이 때까지의 생육과 교육을 위한 의식주와 교육의 혜택이 개인의 능력과 소질을 고려하여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인이 될 때까지의 생활은 사회주의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공평한 생육과 교육을 받고 자란 후 성인으로서의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어느 정도 공정한 출발선에서 성인으로서의 사회생활을 시작한 셈이 되며 공평성 면에서 국가사회에 대한 불만도 최소화될 것이다. 다만 개인의 능력, 소질, 개성 그리고 생육과 교육의 과정에서의 개인의 성실성, 노력의 차이에 따른 개인간의 고유한 차별화만이 남을 것이다.
이렇게 출발한 성인으로서의 사회생활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그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성인으로서의 생활은 자본주의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사유재산은 인정되고 개인의 능력에 따른 반대급부의 차별화가 인정되고 개인의 창의와 문화생활도 보장되어야 한다. 적어도 그것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반하지 않는 한 말이다. 이렇게 되어야 어린 시절에 국가사회 및 부모의 교육을 적극 수용하려는 자세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후 생활은 어떻게 이뤄져야 할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인으로서의 생활의 결과에 기초하여 이뤄지되 어린 시절의 생육과 교육이 국가사회 및 부모에 의해 보장되어야 했던 것처럼 한 개인의 노후 생활은 그가 생육하고 교육한 자식과 그가 기여한 국가사회에 의해 생존이 보장되어야 한다. 다만 그의 성인으로서의 생활의 결과가 다른 정도에 따라 노후생활의 질적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는 당연히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노인의 의료혜택, 임종과 그의 사후 관리는 사회주의적이어야 하며 경제적 수준에 따라 차별 받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노후 생활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겸비된 대우를 받게 되는 셈이다.
이상적인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금전적으로 매개되어서는 안 된다. 부자지간의 관계는 가장 우선적으로 정신적으로 맺어져야 하며 물질적으로는 최소한으로만 맺어져야 한다.
성장기에는 국가의 보호 하에 생육과 교육을 위해 맺어지고 성인기에는 인생의 동반자적 관계에서 서로 작은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로 맺어져야 하고 노년기에는 노후생활의 안정을 도모해 주는 범위에서 맺어져야 한다. 성장기에는 부모가 자식에게 주로 베푸는 관계라면 노년기는 성장한 자식이 노부모에게 베푸는 관계가 될 것이다. 성장기와 노년기가 대체로 경제적 약자가 강자로부터 받는 그리고 경제적 강자가 약자에게 주는 관계라면 부자가 모두 성인기에 있을 때는 정신적 물질적 작은 도움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독립된 대등한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부자지간에 이뤄지는 가장 큰 유산은 부모가 자식을 정신적 정서적으로 어떻게 잘 기르느냐이다. 눈에 보이는 생육과 교육활동은 신체제 하에서 국가에 의해 보호되는 상태에서 부모는 그만큼 용이하게 자식을 돌볼 수 있으며 이는 비교적 공평하게 모든 어린이 및 부모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여건이다. 오직 다른 것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정신적 정서적 영향일 것이다. 부모의 물질적(경제적) 소유의 차별이 자식의 생육과 교육에 큰 차별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정신적 정서적 영향은 자식의 전 생애를 통해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유산이다.
자신이 낳은 자식이라고 해서 자식의 운명을 부모가 좌우할 정도로 자식에 대한 소유권을 독점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다. 부모의 능력이 완벽하지 못한 경우 어떻게 자식을 제대로 돌볼 수 있단 말인가? 가장 가까이서 인간적 정은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후천적 교육은 부모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이 부분은 국가사회적 제도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자식들의 교육은 전적으로 부모의 능력과 연계해서만 가능하다. 즉 부모의 경제적 부담이 없이는 교육의 혜택이 불가능하며 부모의 경제적 능력의 정도에 따라 교육의 질과 양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보다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우선 부모를 잘 만나야, 줄을 잘 서야 행복의 기초를 마련하기가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자식의 뜻대로 될 수 있겠는가?
자식이 부모의 전유물이란 생각은 우리를 특히 자식을 불행하게 만든다. 우리의 모든 자손들은 우리 모두의 공동 소유이다. 그 자식들에게 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관계없이 후천적 교육의 혜택이 각 자식의 고유의 능력에 따라 공평하게 그리고 그 능력의 범위 내에서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공동체적 국가사회의 연대의식 하에서만이 자식의 질적 양적 교육이 보장될 수 있고 공정한 규범의식을 가진 책임감있는 자식의 인격형성이 가능하며 보다 훈훈한 사회가 가능해 질 것이다. 자신이 부유하다고 해서 자기 자식만을 배타적 이기적으로 호화스럽게 키우고 교육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자란 자식에게서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기대할 수 없다. 배타적 자기 가족 중심적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나와 내 가족만이 아니라 내 이웃과남의 자식도 배려할 줄 아는 공동체의식이 증진되어야 한다.
부모는 자식을 무책임하게 마냥 낳아서는 안 된다. 대책도 없이 무책임하게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은 범죄가 아닐 수 없다. 생육과 교육적 책임을 다 할 수 없는데 자식만 낳아 봐야 그 자식을 불행하게 할 뿐더러 국가 사회의 부담만 가중시키게 된다. 자식을 낳는 부모는 자식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국가사회에 대한 도덕적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며 경제적 책임도 그에 상응하게 가져야 한다. 가령 자식을 하나 가진 부모보다 둘 가진 부모는 국가사회에 대한 책임을 두 배로 가져야 한다. 그래야 자식에 대한 철저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자식을 낳을 것이다. 무조건 낳기만 한다고 끝난 게 아니다. 국민의 4대 의무에 자식 양육의 의무와 노부모 공양의 의무가 추가되어 6대 의무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부자지간의 건실한 정신적 관계는 국가사회를 위한 국민적 연대의식을 고취시키고 정신문화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켜 이상적이고 건전한 사회와 국가를 이룩하는데 더욱 든든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신체제는 정신적 도덕적 해이를 막고 우리의 종교생활도 더욱 심오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는 정신적으로 더욱 건전하고 충실한 사회가 될 것이다. 물질만능이 아니라 정신적 근간이 더욱 중요시되는 건전하고도 공정한 사회풍토가 조성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