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명자

이명자는 『북한영화사』(2007)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1992년 김정일의 <주체문학론>을 신호탄으로 다부작 영화인 <민족과 운명>과 같이 새로운 영화들이 시작되었는데 다부작 영화가 아닌 영화들에서 변화는 더욱 큰 것이었다. …(중략)… 밝고 경쾌한 분위기의 영화들은 곧 ‘경희극’이란 이름을 얻었는데 경희극 작품들은 이후에 짙어가는 북한의 그림자와 반비례로 증가하였다.(밑줄 필자) ‘가는 길 힘들어도 웃으며 가자’는 김정일 시기 구호가 영화에 경희극으로 역투사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위에서 이명자는 1990년대 중반 김 주석 사망과 식량위기 등 북의 고난의 행군과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영화 속에서는 가볍고 경쾌한 경희극들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 속에서 나타난 북의 구호인 ‘가는 길 힘들어도 웃으며 가자’를 경희극 제작 증가의 반증처럼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일단 경희극 작품의 개념규정과 그 범위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판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물론 위의 저자가 이야기하듯이 1992년 <주체문학론>이 나온 바로 그 다음 해 <대동강에서 만난 사람들>(1993:2부작), <도시처녀 시집와요>(1993) 등 밝고 경쾌한 예술영화들이 제작되었고 또 그 뒤에는 <청춘이여>(1995), <가족롱구선수단>(1998) 등이 이어져 제작되었다.

하지만 북의『조선중앙년감』에 기록된 예술영화들을 기준으로 봤을 때,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경희극이 가장 활발하게 제작되던 시기는 다부작 형식의 <우리 집 문제> 시리즈가 제작, 상영되던 시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총 12부작에 걸친 이 다부작 형식의 예술영화는 1973년 처음 창작되어 거의 대부분의 제작시기가 1979년부터 1983년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다부작 형식의 경희극 외에도 <안녕하십니까?>(1979), <사랑의 노래>(1982), <두 선장>(1982) 등의 예술영화가 그러한 흐름에 더함으로써 당시 경희극 분위기의 영화계 흐름에 힘을 실어 주었다고 보인다.

앞서 지적했듯이 경희극 작품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하느냐의 문제가 남아있지만, 실제 당시 제작된 영화들을 엄밀히 분류해 보면 특별히 그 이전에 비해 1990년대 중반 이후 경희극 예술영화들이 더 늘어났다고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한편 이명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자신의 논리에 더욱 힘을 실어보려고 한다.

“근대가 끊임없이 동질성을 요구하며 거대서사를 요구하는 것이었다면 김정일시기 북한식 근대에 대한 회의는 거대서사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에서 김일성 항일혁명이라는 거대서사는 김정일시기에 명시적으로 폐기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일상의 에피소드로 인해 침식되고 있는 것이다.(밑줄 필자) 일상의 에피소드는 영웅이 아닌 범인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북한식 근대화가 만들어낸 영도자와 그의 거대서사는 축소되고 있음이 분명하다.”(『북한 영화와 근대성』, 2005)

위에서 이명자는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를 ‘김정일 시기’로 파악하고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그의 기준에 따라 필자는 1994년 이후의 예술영화들에 대하여 조사해 보았다.

물론 이 역시 쉽지 않은 조사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일단 다부작 예술영화를 중심으로 조사하였다. 그 외 작품들은 모든 영화를 보지 않고는 영화제목만으로는 그 내용이 거대서사로 짜여 있는지 파악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해당 시기의 영상물을 모두 관람하여 분석한다는 것은 남쪽 사회의 현실상 일단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위에서 이명자는 1980년에 시작된 본격적인 수령형상영화인 다부작 예술영화 <조선의 별>(10부작)과 그것에 이어 1991년까지 제작된 <민족의 태양>(5부작)이 끝나고, 1992년부터 시작된 <민족과 운명>에서 초기 약 10 여 부작이 제작될 때까지는 그 이야기가 항일혁명이 아닌 월북하거나 친북적인 사람들을 형상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이 비추어졌기 때문에 이제 항일이라는 거대서사는 감소했다고 판단한 듯 하다.

하지만 이 역시 자신이 북이라는 사회를 그렇게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지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당장 1994년에는 다부작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대표적인 민족주의자 허헌의 딸인 항일혁명가 허정숙을 원형으로 하는 <허정순편>(3부작)이 제작되었고, 또 뒤이어 항일혁명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민족과 운명>의 기둥작품이라 이야기되는 <로동계급편>(11부작 : 강선제강의 노력영웅 진응원을 원형으로하는 작품)을 통하여 전후 천리마운동 대고조기의 분위기를 띄운다. 뿐만 아니라 1996년부터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쓴 항일 문학예술인 리찬을 원형으로 한 <카프 작가편>(9부작)이 창작된다. 그리고 1999년부터 2000년에 걸쳐 항일혁명 1세대인 최현을 원형으로 하는 <최현편>(6부작)을 창작하여 수령결사옹위의 ‘총대사상’을 강조하였다.

더욱이 이러한 거대서사는 단지 <민족과 운명>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1997년부터 시작하여 2000년에 끝난 수령형상 영화로 193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를 시대배경으로 하는 다부작 예술영화 <밀림이 설레인다>(12부작)가 창작되어 인민들에게 항일혁명의 대서사 속에서 수령의 역할과 중요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 다부작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의 <허정순편>(1993:3부작) : 허정순(김영숙 분)은 김일성의 조선혁명군이 아닌 중국 판로군에 속하여 항일운동을 하였지만 해방이 되고 그를 조국으로 부르는 김일성의 친서를 김책(김창일 분)을 통해 받고 감격해 하는 모습. [자료사진-유영호]

▲ 다부작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의 <최현편>(1999~2000:6부작) : 6.25전쟁 당시 혁명1세대인 최현(최봉식 분)은 항일혁명의 여성영웅 김정숙의 생일인 12월 24일에 맞춰 그날 0시에 권총으로 축포를 올리는 모습. 이날 최현은 제2전선형성에 관한 최고사령부의 작전적 방침을 완벽히 수행해 낸다. [자료사진-유영호]

▲ 다부작 예술영화 <밀림이 설레인다>(1997~1999:12부작) : 일제 때 고난의 행군 당시 최고사령부를 자처하며 적들을 혼란 속에 빠뜨렸던 오중흡(김철 분)의 7련대와 감격적으로 회후하는 김일성의 모습. [자료사진-유영호]

이러한 조사에 의할 때 위 인용문에서 이명자가 이야기하듯 ‘김정일시기에는 북한식 근대화가 만들어낸 영도자와 그의 거대서사는 축소되고 있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이명자는 자신의 저서 『북한 영화와 근대성』(2005)에서 <김주석 사망> = <김정일 시대> = <거대서사의 축소> = <경희극의 증가> = <북의 개혁, 개방>으로 자신의 논리를 연결시키고자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볼 수 있었다.

2. 이우영

한편 또 다른 연구자인 이우영의 글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다시 늘어난 빨치산 소재 영화들(밑줄 필자)은 북한문예정책이 다시 보수적으로 흐르고 있음을 보여준다”(「북한영화의 자리를 생각하며 북한영화 읽기」, 2004)고 하였는데 이 역시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필자의 판단으로 볼 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80년대 전반기라고 할 수 있는 1985년에 이미 <조선의 별> 총10부작 가운데 9부작이 제작되었고, 그 뒤 후반기에 <조선의 별> 제10부인 ‘불타는 근거지’와 1980년대 후반기부터 1990년대 초반에 걸쳐 <민족의 태양>(5부작)이 제작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특별히 1980년대 후반기에 ‘빨치산 소재 영화들’이 더 많이 제작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총 제작편수로 따지면 1980년대 전반기에 8편이 제작되었고, 후반기에 6편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역시 필자는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부작 예술영화들을 기준으로 평가한 것이다.

3. 변혜정

변혜정은 위의 경우보다 더 빠른 1980년대부터 수령형상 영화제작이 감소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경향은 1980년대 후반 또다시 방향 선회한다고 결론짓는다. 이에 대한 그의 언급을 직접 확인하면 다음과 같다.

1967년 문학예술계 반종파투쟁을 통해 일당일인체제의 수령 형상화 중심의 영화제작은 1980년대부터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밑줄 필자) 편향된 작품들의 지속적인 양산 결과, 북한 주민들의 정치적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판단되어 생활에 밀착된 소재와 일반주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일상생활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찾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 권의 몰락과 함께 김정일의 영화를 비롯한 문예정책은 또다시 방향선회를 하게 된다.(밑줄 필자) 다시 혁명성을 강화하는 영화가 등장하게 되는 변화를 맞게 된 것이다."(「북한영화에서 재현되는 ‘여자다움’과 그 의미에 대한 연구」, 1999)

위의 글 속에서 문맥상 1980년대부터 수령형상 영화가 변화했다는 것은 곧 감소했다는 의미이다. 앞서 <조선의 별>(10부작, 1980~1987), <민족의 태양>(5부작, 1987~1991), <밀림이 설레인다>(12부작, 1997~2000) 등 3편의 전형적인 수령형상 다부작 예술영화에 대하여 이야기했으므로 그 제작시기를 보면 위의 글에서 1980년대부터 감소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 주장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북한영화에서 수령형상영화가 본격적으로 제작된 시기가 바로 1980년대이기 때문이다.

영화부문에서의 수령형상화는 1977년 <누리에 붙는 불>을 처음으로 하여 시작된 이래 1980년 다부작 예술영화 <조선의 별>이 제작되면서 본격화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한 북의 『문학예술사전』에 언급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80년대에 우리의 영화예술은 1970년대 전성기의 성과를 더욱 공고히 하면서 주체의 혁명위업수행에 적극 이바지하는 사상예술성이 높은 혁명적 영화 창작에서 새로운 앙양을 이룩하였다. 이 시기 우리의 영화예술이 이룩한 가장 중요한 성과는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위대한 혁명력사와 공산주의적 풍모를 높은 사상예술적 경지에서 형상한 작품들을 수많이 창작함으로써 수령형상영화창작에서 새로운 높은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밑줄 필자)”

따라서 수령형상영화의 개념과 범위 등에 관한 객관적 자료에 기초해 볼 때 1977년 처음 시작된 수령형상영화가 시작되자 마자 1980년대부터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80년에 예술영화 <조선의 별>(10부작) 제1부를 시작으로 감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본격적인 수령형상영화들이 창작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자는 저자가 위에 언급된 내용으로 미루어 수령형상영화 = ‘혁명성을 강화하는 영화’ 쯤으로 생각하고 서술했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그러한 의미로 수령형상영화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하였을 지라도 위의 주장은 북한영화의 흐름과 전혀 다른 것으로 완전히 잘못된 주장이다.

이처럼 변혜정은 자신의 연구에서 첫 번째 단추를 잘 못 끼웠기 때문에 그 뒤에서 언급하는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 권의 몰락과 함께 김정일의 영화를 비롯한 문예정책은 또다시 방향선회를 하게 된다”는 말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역시 남쪽의 연구자들이 북을 그렇게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지 현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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