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일 있었던 2010년 남아공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5차전 남북 축구대표팀의 경기가 치러진 1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은 일방적인 남측 선수들만의 응원전이 펼쳐질 뿐 예년과 같이 공동응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필자도 일단 경기장 입구에서부터 통일기를 빼앗기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공식적으로 남북공동응원단이 사전에 조직적으로 준비가 되지 못하여,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독립영화 <우리학교> 팬까페(http://cafe.naver.com/docuourschool)에서 공동으로 수십 장의 입장권을 예매하여 관람하였다. 적은 인원이지만 자발적으로 남북공동응원단을 꾸리고, 통일기를 흔들며 응원하고자 통일기를 약 50개 정도 준비하여 갔다. 하지만 경기장 입구에서 행해진 철저한 가방 검사를 거치며 모두 빼앗기고서야 들어 갈 수 있었다.

경기장 안에서는 온통 대한민국만을 외치는 소리와 북측 선수들에게 보내는 야유소리에 남북이 하나가 되어 즐거운 스포츠의 한마당이 되어야 할 경기장은 기분이 썩 좋지 못한 그런 곳이 되고 말았다.

이번 남북의 축구경기를 보며 이번 연재글은 스포츠를 주제로 하고 있는 북한영화를 분석한 글에 대하여 비판하고자 한다.

▲ 이번 4월 1일 있었던 남북축구경기에서 현수막에 통일기의 한반도가 그려졌다는 이유로 빼았으려는 경비업체와 시민사회단체의 대립 장면. [자료사진-유영호]

북에서는 격렬한 스포츠를 거부해왔다?

이명자는 예술영화 <가족롱구선수단>(1998)을 분석하면서 그 동안 북에서는 농구와 같이 치고 부딪히고 경쟁하는 스포츠를 거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이르러 농구라는 경기처럼 격렬하게 승부를 가르는 경기종목이 영화의 소재로 뽑힌 것은 앞으로 "실리 사회주의에서 북한 대중들이 현실에서 감당해내야 하는 경쟁의 한 예고편"이라고 한다.

"(예술영화 <가족롱구선수단>에서 : 필자 주) 가족이 함께 하는 스포츠가 농구라는 점이 관심을 끈다. 그 동안 북한에서는 농구와 같이 치고 부딪히고 경쟁하는 스포츠를 거부해 왔다.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전통적으로 체조, 수영과 같은 종목이 발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몸을 부딪히며 경쟁을 유도하는 스포츠를 부정적으로 여겨온 것이다. 그런데 <가족롱구선수단>은 제목에서도 농구를 부각시키고 있으며 대중체육으로서 농구가 좋다고 말한다. 이는 실리 사회주의에서 북한 대중들이 현실에서 감당해내야 하는 경쟁의 한 예고편으로 읽힌다. 실리 사회주의 하에서 경쟁, 책임, 결과에 따른 보상은 북한 대중들이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경쟁적인 게임·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이명자, 『북한 영화와 근대성』, 역락, 2005)

▲ 예술영화 <가족롱구선수단>(1998) : "체육은 국방이며 노동이다"라는 당 정책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한 인민계몽 영화. [자료사진-유영호]

여기서 이명자는 이제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상황 속에서 북은 더 이상 그들의 체제를 고수할 수 없을 것이고, 북에 자본주의 경쟁체제가 도입되는 것은 필연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북에서 그런 변화의 한 모습이 '실리 사회주의'로 표방된 것이며, 이런 시대변화가 영화 속에 나타난 것이 그 동안 북이 거부해왔던 '치고 부딪히고 경쟁하는 스포츠'인 농구 종목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기서 북이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포기하고 자본주의 경쟁체제를 선택할 것인지, 그리고 '실리 사회주의'가 그런 경쟁체제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로써 제기된 것인지에 대하여 논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논쟁은 경제학자들의 몫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명자가 북한영화를 분석하면서 그 체제변화 증표를 그 동안 북이 거부해왔던 '치고 부딪히고 경쟁하는 스포츠인 농구 종목'에서 찾았다는 것에서 의문을 표하고자 하는 것이다. 과연 북은 그 동안 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치고 부딪히고 경쟁하는 스포츠'를 거부해왔는가의 문제이다. 만약 위 논자의 주장과 달리 그렇지 않다면 위에서 서술하고 있는 논리체계의 기초가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럼 이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위의 인용글을 처음 보는 순간 필자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영국 감독 다니엘 고든이 만든 영화 <천리마축구단>(The Game Of Their Lives, 2002)과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경기 때 '붉은 악마'가 내건 응원구호 'Again 1966'이었다. <천리마축구단>은 1966년 영국 런던월드컵에서 북이 우승후보 이탈리아를 꺾고 런던월드컵 8강에 진출한 것을 소재로 하여 영화로 만든 것이고, 'Again 1966'은 남쪽 국가대표팀이 1966년 런던월드컵 때의 북처럼 2002년 '한일월드컵'의 8강 진출을 염원했던 구호였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최소한 축구에 있어서는 남쪽 보다 북쪽이 훨씬 먼저 세계무대에서 이름을 떨쳤던 것이다.

▲ 영국 영화감독 다니엘 고든이 만든 영화 <천리마축구단> 포스터. [자료사진-유영호]

▲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붉은악마'에 의해 연출된 응원 구호 'Again 1966' [자료사진-유영호]

또한 북이 올림픽대회에 처음 참가한 것은 1972년 독일 뮌헨대회였다. 당시 북은 21개의 경기종목 중 10개 종목에 65명의 선수가 출전했는데, 이 대회에서 금메달 1개(사격), 은메달 1개(권투), 동메달 3개(유도, 레슬링, 여자배구)로 종합순위 22위를 차지하였다. 여기서 메달을 획득한 종목만으로 볼 때 북이 '치고 부딪히고 경쟁하는 종목'들을 거부했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둘째, 위의 글에서는 '실리사회주의' = '경쟁사회' = '농구'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며 이러한 3가지가 시기적으로 같은 시대에, 그리고 그 내용면에서 경쟁적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전제로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여기서 '실리 사회주의'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의 문제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경제학자들에게 맡기기로 하자. 하지만 '실리 사회주의'의 내용을 떠나 그것이 위에서 제기한 것처럼 '농구의 활성화'와 동시성을 갖는가의 문제이다. 이 역시 필자는 부정적이다.

'실리 사회주의'가 2000년대 들어서면서 북에서 제기된 경제운용의 한 방침이라면, 농구의 활성화 촉진은 그 보다 훨씬 앞선 1980년대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체육부분 일군들과 한 담화에서 "축구, 배구, 롱구, 탁구를 비롯한 구기는 청소년들에게 가장 알맞은 운동"이라며 그러한 운동종목들을 더욱 활성화 시킬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다.(김정일, 「체육을 대중화하며 체육기술을 빨리 발전시킬데 대하여」, 1986.5.19)

따라서 위의 등식 가운데 '실리 사회주의'와 '농구'는 결코 시기적으로 동시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북의 '실리 사회주의'와 농구경기의 활성화가 동시성을 갖고 있지 못할 때 농구경기를 통하여 실리 사회주의로 표방된 경쟁체제를 학습시킨다는 논리는 성립되기 어렵다고 본다. 더군다나 농구같이 '치고 부딪히고 경쟁하는' 운동종목을 그 동안 북에서 거부해 왔다는 것이 잘못된 분석임은 북의 체육 역사가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북의 월드컵 8강 진출과 남의 중앙정보부 ‘양지팀’

▲ 런던월드컵(1966)에서 북이 8강에 진출하자 이에 충격 받고 1967년 창단된 중앙정보부 소속 양지팀. [자료사진-유영호]

1966년 북의 런던월드컵 8강 진출에 자극 받은 남쪽 정부는 그 다음해 1월 중앙정보부 소속 축구팀인 '양지팀'을 창단하였다.

당시 박정희 정권 하에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중앙정보부는 군복무 중인 선수는 물론 입대 연령인 우수선수들 조차 바로 입대시켜 이들로서 축구팀을 구성하였다. 그래서 '양지팀'에는 이세연, 김호, 김정남, 이회택, 박이천, 정병탁, 정강지, 임국찬 등 축구팬들이 생생하게 기억하는 1960~1970년대 스타 플레이어들이 모두 포함돼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양지팀'을 명실공히 국가대표팀으로 만들기 위해 69년부터는 국내대회에 참가시키지 않고 해외훈련에 집중토록 했다. 그 해 5월 태국의 국제군인축구대회 극동지역 예선을 거쳐 그리스의 본 대회 준결승에서 알제리에게 석패한 '양지팀'은 그 길로 서독,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위스, 인도 등을 돌며 친선경기를 펼치고 105일만에 귀국했다. 선수 대부분이 국가대표였기 때문에 70년 멕시코 월드컵 출전을 목표로 한 대표팀 강화훈련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특별 배려였다.

그리고 바로 그 해 3개월이 넘는 장기간의 유럽전지 훈련에 나서는 등 총력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그 해 5월 축구 종주국인 영국의 미들섹스, 원더러스 클럽팀 등을 초청하여 축구 선수들의 기량향상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지팀은 천하를 호령하던 김형욱 정보부장이 경질되고, 70년 1월 취임한 장덕진 신임 대한축구협회장이 역시 '북괴 타도'를 외치며 국가상비군 청룡 백호를 구성함에 따라 그 해 3월 3년 1개월 만에 해체되었다.

그야말로 우리와 같은 분단국이 아니고서는 전 세계 축구역사에 볼 수 없었던 그러한 진풍경이 1967년 한 해 동안 벌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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