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이야기했듯 특히 제1세대 북한영화 연구자들의 글을 보고 있노라면 필자의 판단으로 볼 때 상당부분 해당 영상물도 보지 않고 문건 등을 기준으로 선험적 판단에 근거하여 북한영화에 대한 평론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6.15 남북공동선언이 나온 뒤에도 이러한 현상이 적지 않으니 남북대결의 냉전기에 있어서 이런 류의 글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또 당시 북에 관한 1차 자료에 대한 엄격한 통제로 인하여 이런 류의 글들을 반박할 근거를 찾기도 쉽지 않았던 것이 지난 시절의 현실이었다.

그럼 당시 이러한 류의 북한영화에 대한 평론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근거없는 것들이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이기봉은 김일성 원작으로 북에서 '불후의 고전적 명작'으로 불리우는 <피바다>, <꽃파는 처녀>, <성황당> 등 3편의 영화를 설명하면서 영화의 내용과는 다르게 왜곡되게 설명하며 독자들에게 반공, 반북의식을 열심히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는 예술영화 <피바다>를 설명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주 오가자에서 창작된 것이며, 내용은 남편과 자식들을 김일성의 빨찌산 대원으로 떠나 보내고 그 자신은 고향을 지키면서 김일성이 밀파한 비밀공작원으로부터 정치교양과 지도를 받고 여성혁명가로 성장하여 일제와 투쟁을 벌이고, 마침내 김일성의 덕택으로 조국이 해방된다는 내용으로 김일성의 위대성 부각(조작)과 유혈투쟁만을 찬미하고 있다."(이기봉, 「북한의 영화와 영화인들」, 『북한』, 북한연구소, 1986.5)

위의 인용글은 북의 문학예술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거짓과 왜곡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예술영화 <피바다>의 원작은 이기봉의 주장처럼 만주 오가자에서 창작된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창작된 것은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1930)이다. 반면 <피바다>는 1936년 조선혁명군이 무송현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만강으로 옮기었을 때 창작이 완성되어 첫 공연을 하게 된 작품이다.

또한 이기봉이 주장하듯 <피바다>에서 주인공의 남편은 빨치산 대원으로 참가한 것이 아니라 당시 소작농들의 소작료 인상을 요구하는 ‘3.7제 투쟁’ 이후 토벌대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마을은 초토화되고, 남편은 토벌대에 의해 화형당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피바다>에는 이기봉의 말처럼 "마침내 김일성의 덕택으로 조국이 해방된다는 내용"도 없고, 이 영화의 이야기는 1930년대 중반에 주인공이 그러한 일제 침략의 피바다에서 각성하여 항일운동에 함께 하는 것으로 끝날 뿐이지 1945년 해방 때까지 이야기가 계속되지도 않는다.

더욱이 영화 속에서 '김일성'이란 이름이 거명되는 것은 주인공이 마을이 초토화되고, 남편이 처형당한 뒤 실의에 빠져 짐을 싸서 아이들과 함께 친정 오라버니를 찾아 떠나는데 오라버니가 계신 마을 근처의 산 언덕 위에서 그 마을을 떠나는 한 노인을 만나 그의 오라버니 역시 잘못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이다.

그 때 그 노인은 주인공에게 그래도 희망을 갖고 살아가야 되지 않겠느냐며, "백두산에서 김일성 장군님이 조선군사를 일으켜 조선의 해방을 위해 왜놈들을 때려부수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더이다"라며 희망 섞긴 말을 전해줄 때 언급되는 것이 거의 유일하다.

▲ 예술영화 <피바다>(1969) : 여주인공이 한 노인에게서 '백두산에서 김일성장군이 조선 독립을 위해 왜놈들을 때려부수고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듣는 장면. 이 영화에서는 '김일성'이란 이름이 이 장면에서 거의 유일하게 등장할 뿐이다. [자료사진-유영호]
영화의 내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기봉의 반공, 반북적인 시각은 예술영화 <피바다>를 왜곡시키고 만다. 그리하여 영화가 본래 전해주고자 하는 우리 민족 항일의 역사를 왜곡되게 바라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제의 야만적인 제국주의 무력 앞에 우리 민족이 겪는 수난 피바다를 이겨내기 위하여 투쟁의 피바다로 나설 것을 이야기하는 영화 <피바다>에서 이들 평론가들은 "그들의 호전성과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 야욕의 편린을 엿볼 수 있다"(김기덕, 「영화 ; 휴매니즘 상실한 지루한 극화」, 『북한』, 북한연구소, 1984.3)며 맹목적으로 반북의식을 우리에게 심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 일제에 항거할 것을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이들은 북의 호전성과 무력 적화통일을 느낀다면 영화 속 그 장면에서 이들이 원했던 대사는 무엇일까? 필자는 이것이 참 궁금하다.

또한 이기봉은 <성황당>(1969)에서는 "지금 지구상에는 2백 개 가까운 나라가 있고 40억 넘는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종교와 미신이 깨끗이 없어진 나라는 영광스러운 주체의 조국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오지 한 나라뿐입니다“라는 해설이 영화 시작에 흐른다고 하였다.(이기봉, 앞의 글)

하지만 이러한 서술은 완벽한 날조이다. 필자가 본 예술영화 <성황당>에서는 이러한 해설자막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혹시라도 서로 다른 영화를 보았을 지 모른다는 생각에 필자가 본 영화자료를 밝힌다면 통일부 <북한자료센타>에 소장된 것이었다.

이처럼 제1세대 북한영화 연구자라는 사람들의 왜곡과 과장은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였다. 북의 1차 자료에 대한 접근이 제한된 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북한영화에 대한 소개를 전해 듣고 이를 통하여 북한영화에 대하여 상상하여 왔던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허위와 왜곡 그 자체였던 반공선전물로써의 지난 냉전기의 자료들에 대한 분석은 접기로 하자. 그러나 지난 남북대결의 시대에 자신이 언급하는 해당 영화의 관람도 제대로 안 한 상태에서 쓰여졌던 위와 같은 글들은 탈냉전의 시대인 현재에도 존재한다. 단지 서술 방식이 지난날과 달리 학술적 성격을 띠며, 북한영화에 대한 흐름이나 그 변화 요인 등 무언가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들은 제1세대 연구자들과는 달리 연구 주제가 되는 영화에 대하여서는 거의 대부분 관람을 전제로 하지만 영화사를 다루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 방대한 영상물을 물리적으로 관람하기 어렵고 또 그러한 선행자료들이 거의 없는 상태라 이러한 오류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물론 분석자료의 특성상 쉽게 접하기 어렵고, 그것이 연구자의 책상에서 멀리 떨어진 특수자료실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보니 해당 영화자료를 찾아가며 꼼꼼히 서술하기 어렵다는 것이 1차적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완벽한 검증 속에서 확신하지 못하는 내용을 불특정 다수 앞에서 문서로 확정시키기에는 좀 더 치밀한 연구발표가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한편, 이러한 근거 없는 분석은 영화 흐름 등의 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 화면들에 대한 거짓도 존재하고 있다. 예컨대 남녀 사이에 사랑의 표현방식을 설명하면서 북한영화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들을 마치 흔한 것처럼 서술한다. 그러나 그것을 주장하는 연구자는 이러한 장면이 어느 영화에서 나오는지에 대하여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다. 이에 대하여 아래의 글 상자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한편 앞서 살펴보았듯이 북에서는 신상옥이 운영했던 촬영소 <신필림>을 처음부터 자신들의 공식적인 영화촬영소로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 역시 북한영화인가 아닌가에 대하여서도 논란의 소지는 있다.

필자의 경험으로 북한영화의 의사전달 방식을 볼 때 영화 속에서 남녀의 육체적 접촉은 손을 잡거나 포옹하는 정도 이상의 자극적인 것은 없다. 키스 장면은커녕 하다못해 팔짱 끼고 걷는 모습도 필자의 기억에는 없었다. 설사 그러한 장면이 있었다고 하여도 그것은 그야말로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영화 이야기의 구성에서 크게 중요하지도 않은 것에 불과할 뿐이다.

북한영화에서 남녀의 애정표현 방식의 노출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남쪽의 연구자들은 지나치게 북한영화에서 이러한 장면에 집착한다. 그리하여 어느 연구자는 예술영화 <봄날의 눈석이>(1985)에서 처음으로 키스씬이 나왔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그가 잘못 본 것이다.(최척호, 「김정일 총비서와 북한 영화」, 『통일논총』, 숙명여자대학교 통일문제연구소, 1999 / 전영선, 이명자, 『북측영화 종합정보망구축을 위한 기초조사』, 영화진흥위원회, 2007 / 전영선, 「북한문화예술인물23-북한 최초의 공훈배우·영화배우-문예봉」, 『북한』, 북한연구소, 1999.11)

이 영화에서 키스씬으로 오해할 만한 장면은 아래 사진일 터인데 그것은 주인공 남수와 영아가 어두운 밤 단둘이 결혼을 앞두고 즐겁게 야산을 거닐다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져 함께 일어나는 장면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워낙 짧은 시간이고 또 어두운 장면이라 관람자의 눈으로 그러한 행위를 확인하기는 불가능하다.

▲ 예술영화 <봄날의 눈석이>(1985:2부작) : 남쪽 연구자가 북한영화 최초의 키스씬으로 오해한 장면, 이 장면은 어두운 밤 단 둘이 야산을 거닐다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져 남수가 영아를 일으켜주는 장면이다. [자료사진-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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