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북한영화를 연구하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있어서 공통적인 하나의 문제점은 본 연재에서 계속 이야기했듯이 연구논문의 근거가 객관적 자료에 있지 않고, 연구자의 주관적 기대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북한영화의 흐름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더욱 그러하다. 흐름, 즉 변화라는 것은 연속선 상에서 검토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일단 많은 1차 자료들에 대한 검증과 각 데이터들의 상호 비교 속에서 객관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광범위한 조사 위에서 검토되지 않고 주관적 기대 속에서 북한영화의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는 글들이 적지 않다.

일반인들이 손쉽게 북한영화를 접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연구에 대하여 누구도 쉽게 반박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므로에 상대적으로 연구자들은 자기 글에 대한 비판이라는 위험부담을 덜고 손쉽게 글을 쓸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냉전의 질곡은 머지않아 해체될 것이고 그때의 비판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렇게 쉽게 자기 주관대로 글을 쓰고 또 당당히 주장하는지 좀처럼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럼 아래에서 그러한 사례들을 검토해 보자.

북한영화의 흐름과 변화에 관한 연구물들을 보다 보면, 어떠한 자료에 근거하여 연구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황당하게도 실제 북한영화의 흐름과 정반대의 결과를 주장하는 연구물도 존재한다. 박사급 연구자들의 글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도 황당한 결론인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김정일 정치의 기본으로 불리는 ‘선군혁명’은 인민군을 앞세우는 정책으로 문학예술 분야에도 영향을 미쳐 선군문학, 선군음악, 선군미술을 비롯해 선군영화가 창작되었다. 다시 말해 선군정치는 영화와 문학에서 인민군의 활동상, 인민과 군의 관계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양산하게 했고 이는 곧 ‘선군혁명영화’라는 명칭을 얻었다. 영화사적으로 선군영화는 김일성 주석이 사망을 전후한 시기부터 준비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앙년감』을 보면 1994년과 1995년부터 2.8예술영화촬영소 작품을 부쩍 많이 열거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다.(밑줄 필자) 북한은 한 해에 제작한 영화를 연감에 모두 기록하지 않고 선별해 기록하는 경우가 많은데 선별된 작품 가운데 2.8예술영화촬영소 작품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 작품을 중요시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선군혁명영화의 증가로 군대나 전쟁, 통일을 소재로 하는 영화를 주로 찍는 2.8예술영화촬영소의 위상이 높아졌다.(밑줄 필자) 그 동안 통계를 볼 때 4.25예술영화촬영소(2.8예술영화촬영소의 현재 명칭:필자 주)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에 비해 작품수가 적었던 것이 관례였는데 선군혁명영화가 관심을 받으면서 그 제작편수가 증가한 것이다.”(이명자,『북한영화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7)

위의 분석은 과연 맞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명자가 어떠한 자료에 근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은 명백한 오판이다.

아래 표는 위의 저자가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는 『조선중앙년감』에 기록된 예술영화 가운데 '2.8예술영화촬영소'에 의하여 제작된 영화들의 수를 필자가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우측에 나열된 것은 위의 인용글이 실려있는 그의 저서 『북한영화사』(이명자:2007)의 부록에 기록되어 있는 북한영화 목록을 기준으로 '2.8예술영화촬영소'의 해당 년도 별 작품 수이다.

이명자는 “『조선중앙년감』을 보면 1994년과 1995년부터 2.8예술영화촬영소의 작품을 부쩍 많이 열거”하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그 전후로 약 5년씩 총 10년 정도의 영화제작 상황만 보아도 위의 글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 있다고 판단되어 필자는 1990년부터 2000년까지를 조사대상으로 하여 분석해 보았다. 
 

 

≪2.8예술영화촬영소≫작품의 수(1990~2000년)

구분

『조선중앙년감』

『북한영화사』

본서 부록

1990년

11

8

17

1991년

8

9

12

1992년

4

1

7

1993년

8

8

8

1994년

6

7

7

1995년

9

5

8

1996년

6

5

8

1997년

2

2

3

1998년

1

3

3

1999년

4

2

5

2000년

5

1

6

▲ 위 도표에 기록된 수치는 다부작예술영화의 경우 총 편수를 나누어 계산된 것임



 

 

 

 

 







필자의 분석 결과는 표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위의 주장이 완전히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황당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그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2.8예술영화촬영소의 작품이 줄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흐름은 바로 위의 인용글이 쓰여져 있는 책의 부록에 기록된 북한영화의 제작현황표에 따라 분석하여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저자는 자기 저서의 부록에서는 2.8예술영화촬영소의 작품이 줄어들고 있음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고 있으면서도 바로 그 책의 본문에서는 김정일 위원장이 권력을 승계하는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북의 선군정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2.8예술영화촬영소의 작품이 증가하고 있다는 과오를 범한 한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결론은 그것이 1차 자료의 철저한 검증 속에서 내려진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선험에 근거했기 때문인 것이다. 즉 그의 사고 속에는 이미 '선군정치' = '군부정치' = '2.8예술영화촬영소'(이 촬영소는 군 관련 영화를 주로 제작하며, ‘조선인민군’소속이다)라는 도표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기에 분석자료들의 객관성을 뛰어 넘는 그의 선험이 결론으로 도출되며, 따라서 이처럼 실제와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2.8영화촬영소에 대하여

북의 영화촬영소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조선4.25예술영화촬영소(‘조선2.8예술촬영소’의 변경명칭), 조선기록과학영화촬영소, 조선4.26아동영화촬영소 등 모두 4개가 설치되어 각 촬영소의 명칭에 맞는 영화들을 창작해내고 있다.(아래 표 참조) 

조선예술영화촬영소

1947년 2월 창립한 북의 대표적인 예술영화촬영소. 김일성훈장 수상(1972.4), 상표로 ‘천리마동상’.

조선4.25예술영화촬영소
(옛 2.8예술영화촬영소)

1959년 5월 ≪조선인민군2.8영화촬영소≫로 발족, 초기에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로 군사·전쟁영화 제작에 주력하였으나, 1970년 1월 ≪조선2.8예술영화촬영소≫로 개칭한 이후 군대관련 영화와 함께 혁명전통과 계급교양을 주제로 한 예술영화도 제작. 1995년 10월 현재의 명칭으로 개칭. 김일성훈장을 수상(1984.6). 상표로 인민군를 중심으로 하여 노동자, 농민이 서있는 3인 조각상.

조선기록과학영화촬영소

1996년에 ≪조선기록영화촬영소≫(1946.7 설립)와 ≪조선과학교육영화촬영소≫(1971.5 설립)를 통합한 영화촬영소로 기록영화 및 시보제작과 함께 과학 교육영화를 제작

조선4.26아동영화촬영소

1996년에 ≪조선과학교육영화촬영소≫가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아동용 교양영화 부분을 독립하여 설립한 영화촬영소

특히 위에서 논의된 '조선2.8예술영화촬영소'는 현재 '조선4.25예술영화촬영소'로 이름이 변경되어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2.8이란 의미는 북의 정규군인 조선인민군이 창립된 날(1948.2.8)을 기념하는 의미인데, 그 후 북은 1978년에 ‘항일혁명투쟁 전통과 연결한다는 의미’에서 김일성주석의 항일혁명 당시 ‘반일인민유격대’가 창립되었던 날(1932.4.25)로 창군일을 바꾸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 뒤 조선2.8예술영화촬영소라는 명칭도 현재의 조선4.25예술영화촬영소로 바꾼 것이다.

이렇듯 이 영화촬영소는 군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북의 『문학예술사전』에서 규정하고 있는 이 촬영소의 목적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조선2.8예술영화촬영소는 위대한 수령님의 주체적 문예사상과 우리 당의 문예정책을 지침으로 하여 영광스러운 항일혁명투쟁의 빛나는 혁명전통과 그것을 이어받아 조국해방전쟁시기에 용감하게 싸운 인민군대와 인민들의 영웅적 투쟁 그리고 사회주의조국을 지키기 위한 인민군군인들과 인민들의 헌신적인 투쟁을 주제로 한 예술영화작품들을 창작하는 것을 기본사명으로 하고 있다.”(『문학예술사전』,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93)

한편, 조선2.8예술영화촬영소의 이러한 목적에 따라 이곳 촬영소의 상표로 만든 3인 조각상에서도 노동자, 농민을 옆에 끼고 중앙에 인민군이 서있는 것이다. 참고로 조선예술영화촬영소의 상표는 ‘천리마동상’이다. 이러한 이유로 북에서 제작된 예술영화는 영화시작의 첫 화면에 나타나는 상표가 무엇이냐에 따라 어느 촬영소에서 창작된 것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한편, 평양연극영화대학의 '청소년창작단'에 의해 창작된 예술영화의 경우 '조선예술영화촬영소'의 상표인 ‘천리마동상’이 영화의 첫 화면에 보여진다. 그리고 이곳 청소년창작단에 의해 창작된 영화들 가운데 극히 일부가 청소년들로 이루어진 3인 조각상을 첫 화면에 내보내며 그 밑에 ‘청소년영화’라고 표시되어 나타난다. 하지만 이 청소년 3인 조각상이 어떠한 의미를 상징하는지는 북의 자료에서 찾지 못하였다. ‘청소년영화’로는 <노래여 너와 함께≫(1996), <나의 가정≫(2000) 등이 있다.

▲  2.8예술영화촬영소에서 창작된 예술영화의 첫 화면. [자료사진-유영호]

조선예술영화촬영소와 평양연극영화대학에서 창작된 예술영화의 첫 화면(왼쪽)과 평양연극영화대학의 작품가운데 일부의 창작물에서 보여지는 첫 화면(오른쪽). [자료사진-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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