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여성학적 측면에서 북한영화에 대한 흐름을 분석한 것 가운데 일부이다. 이 글은 1970년대 북한영화에서는 여성이 남성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로 형상화되었다고 비판하며, 여성을 혁명의 담당자라기 보다 남성의 매개에 의해서만 혁명적 목표에 이를 수 있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시켰다고 결론내린다.

“여성을 남성과 대등한 전사가 아닌 오히려 구원의 대상으로서 묘사하고 억압받는 여성 인물의 이미지와 서사가 70년대 영화에 미만하게 한다. 전통적 여성상을 그린 <꽃파는 처녀.나 혁명전사로 알려진 김정숙의 활동을 그린 <사령부를 멀리 떠나서>에서나 여성은 남성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꽃분은 오빠 철영에 의해, 정숙은 사령관 김일성에 의해 말 그대로 구원된다. 꽃분은 진정한 혁명가가 되기 위해 오빠 철영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김정숙조차 뛰어난 총포술이나 논리에도 불구 결국 사령부에서 도움이 있기 전까지 무기력하게 갇혀있는다. 여기서 철영은 꽃분과 마을을 해방시켜주는 인물이고 사령관 김일성은 진실을 보증해주는 인물이다. 혁명적 가계와 혈통이 중요해지는 이 시기(1970년대 : 필자 주)에 여성에 대한 보수적 시각과 가부장제적 특성의 강화는 여성 인물들을 혁명의 담당자라기 보다는 남성의 매개에 의해서만 혁명적 목표에 이를 수 있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시킨다.(밑줄 저자)" (이명자, 「북한 주체영화의 여성성 재현에서의 변화 연구」, 『영화연구』제23호, 한국영화학회, 2004. 6)

위에서 사례로 거론된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와 <사령부를 멀리 떠나서>를 독자들이 보았다면 위에서 언급된 것에 대한 판단은 간단한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1970년대의 다른 영화들을 좀 더 보았다면 완벽한 평가가 가능할 것이지만, 그러한 방법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우리만의 냉전' 속에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위의 두 영화를 관람한 사람들이 극히 적다고 보기 때문에 위의 주장에 대하여 필자가 이곳에서 평가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 나름대로 위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하고자 한다.

먼저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1972)의 핵심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인 어린 꽃분이(홍영희 분)는 지주의 착취와 수탈 속에 병든 어머니와 오빠 철영, 여동생 순희와 함께 살다가, 동생을 눈멀게 한 지주네 집에 불을 질러 오빠 철영은 감옥살이를 하게 되고, 이러한 역경 속에서 병든 어머니의 약값을 구하러 꽃을 팔며 생활을 유지한다.

한편 징역을 살던 오빠가 감옥을 탈출하여 반일유격대에 결합한 뒤 훗날 오빠 철영은 유격대와 함께 꽃분이네 마을로 와서 지주를 몰아내고 그곳을 해방시킨다. 이 속에서 꽃분이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오빠와 감격스러운 재회를 하게 되며, 이후 항일유격대인 오빠의 도움으로 꽃분이도 그 동안 슬픔에만 잠겨있었던 나약한 자신을 뛰어 넘어 조국해방을 위하여 항일의 전선에 나서게 된다.

그리하여 이전에 생계를 위하여 꽃을 담아 팔던 바구니에는 유격대에게 전해지는 쪽지도 함께 담겨져 꽃분이의 성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즉 조국이 외세의 식민지가 된 상황 속에서 가난과 수탈의 상징이었던 꽃바구니는 꽃분이의 각성을 통하여 이제 저항과 혁명의 상징으로 바뀐 것이다.

▲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1972) : 꽃분이의 오빠가 속한 유격대가 마을을 해방시키고 꽃분이 자매와 그의 오빠가 상봉하는 장면 [자료사진-유영호]

핵심적인 스토리만 이야기했을 때 위와 같은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에서 여성을 혁명의 수동적 존재로 전락시킨 것이라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조금 과장된 평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꽃파는 처녀>의 시대배경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그 원작이 만들어졌던 시기와 창작 목적 등을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이것의 원작이 만들어진 1930년 당시 만주의 조선인들은 식민지 조국을 떠나 조국을 잃은 설움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조직화된 항일혁명조직도 없이 그저 일제와 사대매국세력의 억압과 착취 속에서만 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에 만주 오가자에서 반일유격대가 좌절과 체념 속에 빠져있던 민중들을 각성시키고 항일혁명의 열기를 불러일으키고자 창작된 것이다. 즉 착취와 수탈에 대하여 슬픔과 분노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며 항일혁명을 위한 조직적이고 가열찬 투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속에서 맏이인 오빠가 막내의 실명에 항의하다 징역을 살게 된 것이고, 그 뒤 오빠는 감옥을 탈출하여 그 동안 막연히 개인적 감정에 근거한 투쟁만으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유격대에 결합하여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직도 분노와 슬픔에만 머물러 있던 동생 꽃분이가 유격대의 마을 습격으로 유격대의 교육과 조직 속에서 그도 추상적 분노와 슬픔을 넘어 구체적 항쟁의 대열에 함께 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필자의 시각 속에서는 그저 자연스럽고 사실주의적인 서사로 짜여져 있는 듯한데 꽃분이를 각성시킨 사람이 다름아닌 오빠라서 이러한 구성이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시킨 것이라면 그것은 지나친 과잉해석이 아닐까 생각한다.

<꽃파는 처녀>(1972)와 같이 항일혁명의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포구의 처녀들>(1971)을 비교해보도록 하자.

▲ 예술영화 <포구의 처녀들>(1971) : 계수원으로 일하는 주인공 성실이가 책임계수원의 잘못을 비판하며 수정하도록 요구하는 장면 [자료사진-유영호]

<포구의 처녀들>에서 여주인공 성실은 통조림 제조 노동자에서 어선들의 어획량을 측정하여 위에 보고하는 일을 하는 계수원으로 새롭게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일을 하면서 책임계수원이 그 동안 자기 직업에 대한 애착이 없이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비판하여 고치게 만들어 나아간다. 그리고 인민들의 밥상에 좀 더 신선한 물고기가 올라갈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한다. 뿐만 아니라 여주인공 성실의 이러한 노력으로 인하여 포구의 선장과 어부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가공하는 여타 작업반 사람들도 그 동안 당 정책과 물고기의 신선함에 대해 주의 깊은 관심 없이 일을 해 왔던 자신들을 반성하고 모두가 올바르게 일을 해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여주인공의 노력과정에서 그가 형식주의에 빠져 있던 자기의 상사인 책임계수원 인순을 비판한 내용을 보자.

“인순동무에게는 열정이 없어요. 혁명에 대한 자각이 없단 말이예요. 우리가 그날 그날 살아가자고 밥벌이를 하고 있나요? 아니, 우리는 혁명을 하고 있어요. 미국 놈들을 내쫓고 조국을 통일하자고 혁명을 하고 있단 말이예요.
인순동무는 혁명하는 시대의 청년답지가 않아요. 나라에 무엇인가 보탬을 주려고 끓고, 애쓰고 하는게 뭐예요? 남들이 열 걸음 걸으면 우리는 백 걸음을 떼어야 할게 아니예요. 원수님의 교시대로 한 마리의 물고기라도 썩이지 말자고 사로청 회의 때 얼마나 열렬하게 토의를 했어요? 원수님께서는 한마리의 물고리라도 홀시하지 말고 인민들의 구미에 맞게 잘 가공해서 사철분함있게 공급하라고 얼마나 간곡하게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냉동공장도 새로 더 크게 짓고 가공공장도 더 널쿠고 가공품의 질도 높여야 하자나요? 우리 사로청원들이 할 일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인순동무는 이 초소를 버리고 가겠다고요? 가면 어딜 간단 말이예요? 자기 혁명초소를 버리고 가면 어디를 간단말이예요? 인순동무~!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살수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요? 우리가 사는 이 포구가 지난날 어떤 피눈물이 잦아든 곳이라는 것을 인순동무는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나요?
난 저 파도소리를 들을 때 마다 이 바닷가에 깃든 우리 부모님들의 피맺힌 원한들을 생각하곤 해요. 인순동무~, 벌써 잊었어요? 지주 놈의 등살에 골병이 들어 앓아누운 할머니께 한술의 미음이라도 대접하려고 파도 사나운 바다로 선주 놈의 쪽배에 몸을 싣고 떠나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는 아버지의 피눈물나는 이야기 말이예요.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를 부르는 어머님의 원한에 찬 울부짖음이 인순동무의 귀에서 벌써 사라졌어요. 다시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우리가 아닌가요? 입술을 살에 물고 안일과 해이를 불사르고 일해야 할 우리가 아닌가요?“


위의 대사를 보면 알겠지만 북한영화에서는 꼭 시대배경이 일제시기나 전쟁 때인 영화에서만 혁명이란 개념이 도입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위의 영화대사는 같은 여자들끼리의 대화이다. 단지 아랫사람이 자기의 책임자인 윗사람의 사업작풍을 비판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 포구의 선장 및 선원 등 남녀를 가리지 않고 형식주의와 보수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여주인공 성실은 비판하며 그들을 교양, 개조시킨다. 그렇다면 여기서 포구의 많은 사람들을 일깨우고 그들을 올바른 혁명의 길로 이끌어 간 사람이 여성이니 위에서 저자가 언급한 내용 즉, 여성은 혁명의 수동적 존재로 형상되었다는 것은 부정되지 않는가?

두 번째로 예술영화 <사령부를 멀리 떠나서>(1978)는 여성 항일혁명가 김정숙의 실제 이야기를 기본으로 하여 창작된 영화이다. 그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하면, 1938년 김정숙은 부상자와 노약자들을 데리고 청봉밀영으로 가서 항일혁명군의 조국진출을 위해 600벌의 군복을 제작하는데 대하여 지원하라는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떠난다.

하지만 그곳 밀영책임자인 군수관은 이 과업에 대하여 일도 하지 않고 일제의 탄압과 공격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이에 군복제작에 대하여 사령부의 명령을 끝까지 지키려는 김정숙과 그 명령을 지키지 않고 있던 군수관과의 갈등 속에서 결국 김정숙은 이 엄중한 사태를 사령부에 보고하기 위하여 동료 재봉단원을 사령부에 보낸 것이 발각되어 군수관에게 반혁명분자로 몰려 그곳 청봉밀영에서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러한 엄중한 사태에 결국 사령부로 떠난 동료가 이 사실을 보고하게 되고, 사령부 정치위원이 청봉밀영에 와서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조사하고 그 뒤 군수관은 체포되며 김정숙은 석방되는 이야기다.

이러한 이야기 전개 속에서 위 글의 저자는 사령부=김일성=남성이라는 생각 속에 사령부에 의하여 김정숙이라는 여성 혁명가가 구원되었기 때문에 이것 역시 여성을 수동적 존재로 전락시킨 것이라는 논리이다.

▲ 예술영화 <사령부를 멀리 떠나서>(1978) : 청봉밀영 재봉대원 김정숙이 밀영 군수관과의 갈등 속에 반혁명분자로 몰려 갇혔다가 사령부 정치위원에 의해 석방되어 기쁨 속에 같은 재봉대원과 껴안는 모습. [자료사진-유영호]

하지만 필자는 좀 더 객관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영화는 큰 줄기 면에서는 실재한 이야기를 영화 속에 담고 있다고 한다(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제7권 제20장 2의 '청봉의 교훈' 참조). 그리하여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흐르는 안내문구는 이 영화가 "항일혁명투쟁시기 청봉밀영에서 반혁명분자들의 책동을 짓부시며 사령부를 정치사상적으로 옹호보위하여 투쟁한 력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만든 영화"라고 분명히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실재한 이야기냐 아니냐의 문제는 역사학자나 정치학자들의 몫이니 제작자들의 말을 일단 신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당시 김정숙은 사령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했던 충직한 부하였을 뿐이며, 조선혁명군의 일개 재봉대원에 불과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임무를 받고 새로운 밀영으로 와서 그 밀영의 책임자인 군수관 엄창호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청봉밀영의 최고 책임자인 군수관이 다른 핑계를 대며 사령부의 명령을 제대로 집행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곳 지휘관이 아무리 잘못한다고 하여도 일개 재봉대원인 김정숙이 그를 처벌할 수는 없었던 것이고, 그러하기에 당시 밀영의 엄중한 사태를 사령부에 알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직적인 차원에서 청봉밀영 책임자의 명령수행 여부를 판가름 할 수 있는 사령부 정치위원이 와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필자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위의 두 편의 영화를 보며 여성이 혁명의 수동적 존재로 전락되었다고 느꼈다면 너무 과잉 해석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편 위 두 편의 영화에 대한 이명자의 분석이 설사 옳다고 하여도 두 편의 영화로 70년대 영화에 대한 일반적 경향성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된다.

먼저, <사령부를 멀리 떠나서>가 제작된 뒤 2년 뒤에 제작된 <검사는 말한다>(1980)를 위의 접근방식으로 분석해보자. 영화에서는 공장 창고의 화재사건이 반동들에 의하여 치밀하게 준비되어 화재로 연결된다. 이에 방화범으로 몰려 처형받게 된 노동자 리남수(정의겸 분) 조차 그러한 음모 사실을 모른 채 자기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했다고 자백하였다.

그런데 옥녀 검사(문정복 분)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방화를 자백한 그가 다름 아닌 일제 때 친일파 지주의 작간으로 헤어져 연락이 그 동안 끊겼던 남동생임을 알게 된다. 여기서 검사인 누나는 그 진실을 파헤쳐 공장 방화는 결국 반동들의 계략에 의한 것임을 밝혀내어 남동생을 구해내고 뜨거운 형제간의 해후를 갖게 되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 대한 매우 간단한 스토리는 이러한 것인데 이것을 위의 접근방법으로 분석한다면 북한영화에서 남자는 여자에 의해 구원받는 수동적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북한영화에서 여자는 남자에 의하여 구원받는 수동적 존재로 형상화된다는 이명자의 분석은 그 힘을 잃고 말게 되는 것이다.

▲ 예술영화 <검사는 말한다>(1980)에서 누나인 옥녀검사에 의해 반동의 음모로 인해 방화범 용의자로 몰렸던 동생 리남수의 누명이 벗겨지고, 그 동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오누이가 감격적인 해후를 하는 장면 [자료사진-유영호]

또한 <새 화물지도원>(1975)에서는 새로 부임된 주인공 정임이가 전쟁 때 전사한 아버지의 옛 동료였던 황포역장의 관료주의와 형식주의적인 업무수행을 비판하며 그를 깨우치게 한다. 그리하여 새롭게 화물운송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그리고 <바다 먼 산촌에서>(1974)에서는 기술원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영희가 자기보다 상관급인 작업반장과 또 부위원장의 실적 중심의 사업방식으로 당의 정책을 끝까지 관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크게 비판한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영희는 결국 양어장 건설을 성공시켜 그곳 고향 땅을 풍성한 농장으로 건설해 낸다.

위에서 이야기하는 '혁명'이 항일혁명에 국한되지 않았을 때 <새 화물지도원>과 <바다 먼 산촌에서> 등의 영화에서 벌어지는 남녀의 역할에 대하여 남자는 혁명의 수동적 존재로 전락되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와 유사한 스토리의 1970년대 예술영화는 수없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만일 이런 류의 영화는 항일이나 전쟁에 관련된 것이 아니어서 반박자료로 성립하기 어렵다면 <사령부를 멀리 떠나서>(1978)와 비슷한 시기에 창작된 다부작 예술영화 <이름없는 영웅들>(1979~1980 : 20부작)에서 여자주인공 순희는 과연 남자주인공 유림에 대하여 수동적 존재였는가? 영화 속에서 미군 정보기관 장교로 있는 북의 고정첩보원 순희는 사령부의 과업을 받고 내려온 유림이 결정적인 군사정보를 획득하도록 도움을 주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이 위급함을 알고도 피하지 않고 적들과 싸우다 전사하게 된다. 순희가 생명을 마쳐 유림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유림의 공작 과업은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여 여성은 혁명의 수동적 존재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이 영화를 직접 보았다면 영화 속의 순희라는 여성이 주인공 유림과 얼마나 끈끈한 혁명적 동지였는지를 잘 알 것이다.

▲ <새 화물지도원>(1975) : 주인공 정임이 전사한 아버지의 옛 동료인 황포역장을 비판, 교양하는 장면  [자료사진-유영호]

▲ <바다 먼 산촌에서>(1974) : 주인공 영희가 부위원장과 작업반장을 비판, 교향하는 장면 [자료사진-유영호]
 
▲ <이름없는 영웅들>(1979~1980:20부작) : 유림의 혁명과업 수행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각오한 채 그와 마지막 만남을 갖는 순희의 모습 [자료사진-유영호]

위에서 제기한 '1970년대 영화 속에서 여자들은 혁명의 수동적 존재로 전락되고 있다'는 주장은 참으로 비판하기 쉽지 않은 문제임을 안다. 그러한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영화사 속에서 1차 자료가 충분히 광범위하게 검토되었을 때야 성립되는 것이고, 반대로 필자가 그러한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서도 마찬가지의 전제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필자의 비판은 이 정도에서 머무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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