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연구자는 북한영화 속에서 ‘여자의 성’은 혁명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가히 냉전시대의 전형적인 글 같지만 필자가 분석하고자 하는 이 글은 6.15 남북공동선언을 한 해 앞둔 1999년에 쓰여진 글이다. 이미 전세계에서 미소 양극체제가 무너지고 탈냉전의 바람 속에 다극화 시대가 열린 시기에 쓰여진 글이었다. 그럼 그 원문을 들여다 보도록 하자.

“북한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정숙함이라는 언급 이외, 여성을 남성의 성적대상으로 취급하는 대사나 행위는 거의 볼 수 없다는 것이다. 1960년대 만들어진 반미 영화에서 미국인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기 위하여 또는 계급투쟁의 목적으로서 주인인 지주의 만행을 저주하기 위하여 여성이 성적대상으로 도구화된다. 주인, 미국인의 대사와 행위에서 여성을 성적대상으로 여기는 장면이 나온다. 예를 들어 1966년의 ≪최학신 일가≫에서 미국인 장교가 큰딸을 음흉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성적욕망에 의해 능욕하며 결국 살해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강간하는 장면 행위는 영화에서 처리되지 않는다. 1964년 ≪정방공≫에서도 자신의 동생을 능욕한 것에 대한 분노로 주인에 항거해서 뛰쳐나가나 성적인 것을 암시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여성의 성이 혁명을 위해 도구적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확실하다.(밑줄 필자) 미국에 대한 민족의 자존심으로, 또는 가족 내에서 혁명의 동기화를 위해 여성(어머니, 누나, 여동생 등…)의 성이 이용되는 것은 여성의 성적대상화, 타자화를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변혜정, 「북한영화에서 재현되는 '여자다움'과 그 의미에 대한 연구」, 『여성학논집』제16권,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1999)

위의 글에서 저자는 영화 속의 여성인물이 미군이나 지주에 의하여 능욕당하는 장면을 설정하였다는 것은 비록 그 장면을 영화 속에서는 보여주지 않았지만, 능욕을 상상할 수 있게 함으로써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착취계급과 외세에 의해 여자가 능욕당하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북한영화 속에서 여자의 성이 노출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북한영화에서 여자의 성은 혁명의 도구일 때만 사용된다는 의미다. 즉 외세와 착취계급의 잔혹성을 보여줄 때 그 방법으로 여자가 겁탈당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또 그러한 장면을 통하여 인민들의 자주의식과 계급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하여 여자의 성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마디로 과잉해석이라고 생각된다. 만일 이러한 논리가 성립한다면 일제에 의하여 살육 당하는 장면을 영화화면 속에 노출시켜 항일의 의지를 키웠다면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논리가 성립될 것이다. 통상 북한영화 속에서 적이 아닌 인민들 내부에서 재산이나 개인적 감정에 의한 살인장면은 없고, 그러한 살육의 장면은 오직 외세나 착취계급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것으로 노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어의 선택에 있어서 좀 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통상 무언가의 도구로써 여자의 성이 이용된다고 하면 헐리우드 영화처럼 ‘정보 습득’이나 ‘적의 살해’ 등을 위해 자신의 순결한 성조차도 그 목적에 종속시키는 ‘적과의 동침’ 정도는 되어야 ‘도구로써의 성’이 성립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착취계급과 외세에 의해 짓밟히는 여자의 성’과 ‘혁명의 도구’라는 말은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왠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냥 기본적인 인권이 짓밟히는 참담한 상황을 표현하는 한 방법일 뿐인 것을 위의 글에서는 지나치게 자기논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 목적에 맞도록 해석하고 있는 과잉해석인 것이다.

한편 위의 글에서 저자는 예로 든 ≪최학신의 일가≫에서 최학신의 맏딸 성옥이 미군장교에게 능욕당하는 장면을 좀 더 올바르게 서술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를 보지 못한 독자들이 잘못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인용 글에서 “성적욕망에 의해 능욕하며 결국 살해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강간하는 장면 행위는 영화에서 처리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 글을 다시 정리하면, 미군이 조선여성을 강간을 한 뒤 그를 죽였는데, 단지 영화 속에서는 그런 장면이 처리되지 않았을 뿐이며, 이것은 누구나 강간과 살인을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의 영화 속 이야기는 이와 다르다. 아래 예시된 사진에서 보여지듯이 미군장교가 겁탈하려고 최학신 목사의 맏딸 성옥을 껴안자 성옥은 완강히 거부한다(왼쪽 사진). 이에 미군은 더 이상의 겁탈시도를 포기하고 “실례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요”라고 정중하게 사과하고 그녀를 돌려 보낸다(가운데 사진). 그리고 바로 급히 돌아가는 성옥에게 총격을 가한 것이다(오른쪽 사진). 이처럼 실제의 영화내용과 달리 해석할 수 있게 쓰여진 위의 글은 일종의 왜곡이다.

▲ 미군중위 킹그스터가 최학신목사의 큰딸 성옥을 겁탈하려는 장면(좌)과 결국 성옥의 반항으로 포기하고 자신의잘못을 용서해달라며 사과한 뒤 돌려보내는 장면(중), 그리고 조용히 돌려보낸 뒤 바로 총으로 사살하는 장면(우)

뿐만 아니라 ≪정방공≫(1964)에서도 영화설명에 문제가 있다. 영화는 일제 때 가난에 집을 떠나 지주의 집에서 머슴 일을 하던 주인공 옥림에게 어린 여동생이 찾아와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사실을 전해주는데, 바로 그때 다 헤진 동생의 신발을 보고 자신의 신발로 바꿔 신겨주는 모습을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주인이 본다. 그것을 본 주인이 동생을 거지 취급하자 옥림은 이에 분노하여 신발을 벗어 던지고 동생과 함께 위급한 아버지에게 달려가는 것이 올바른 내용이다.

하지만 위의 인용 글에서는 “자신의 동생을 능욕한 것에 대한 분노로 주인에 항거해서 뛰쳐나가나 성적인 것을 암시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고 서술함으로써 이것은 ≪최학신의 일가≫에서 예를 든 것 보다 더 터무니없는 사례인용이 되고 있다. 도대체 여기에 영화의 어떠한 내용과 장면이 성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인지 필자는 이해할 수 없다.

▲ 지주네 종으로 일하는 옥림은 자기를 찾아온 동생 정림에게 신발을 바꾸어 신긴다(좌). 이를 본 주인집 부인이 거지냐고 꾸짖자(중), 옥림은 자기에게 주인이 준 신발을 집어 던지고 도망친다(우)

물론 인용 글에서 사용된 ‘능욕’이란 단어는 국어사전에 의하면 ‘여자를 강간하여 욕보임’이란 의미와 ‘남을 업신여겨 욕보임’이란 두 가지 뜻이 있다. 하지만 여기 인용 글에서는 분명 ‘여성의 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용어이기 때문에 위의 글에서는 그 의미가 ‘여자를 강간하여 욕보임’이란 뜻으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런 용어를 선택하여 영화 장면을 서술한 것은 영화관람이 누구에게나 용이하지 않은 상황에서 문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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