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암절벽의 장대한 기세를 자랑하는 외금강이 남성미를 보여준다면 여러 갈래의 물줄기와 녹음이 우거진 내금강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고 여성적입네다."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을 비롯해 남측 불자와 취재진 160여 명을 태운 버스가 22일 외금강 온정각을 출발해 내금강으로 향하자 동승한 북측 해설원은 온정령을 경계로 나누어지는 외금강과 내금강의 특징을 이렇게 소개했다.

외금강 지역의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온정령을 거슬러 올라 정상 부근에 뚫린 온정령굴을 통과하면 내금강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이 때부터 산세가 확연히 달라져 기암괴석은 뒷전으로 사라지고 둥글고 펑퍼짐한 산들이 눈을 편하게 만든다. 약 500m 길이의 온정령굴은 고성군과 금강군의 경계이기도 하다.

북측 해설원은 "이 길은 전쟁시기인 1951년 고성군과 금강군 사람들이 '떨치고 일어나' 두 달 만에 완성했다"고 설명했다.

외금강 지역 고성군 쪽은 시멘트로 포장돼 있지만 온정령굴을 지나 금강군으로 넘어가면 먼지가 풀풀 나는 비포장 도로다. 금강산 서쪽을 휘돌아 40여km 가량 비포장 도로를 버스로 달려가면 내금강 입구인 장안사터에 이른다.

◇ 옛 시골풍경 보여주는 내금강 가는 길

100리에 이르는 비포장 도로를 달리다 보면 차창 밖은 1960-70년대 시골 정취를 느끼게 한다. 농부가 황소를 앞세우고 산등성이 비탈밭에서 쟁기질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아낙들이 콩밭을 매는 모습도 자주 펼쳐진다.

방문단을 태운 버스가 금강군 단풍리를 거쳐 금천리 근방을 지날 때 뙤약볕 아래서 어린아이를 등에 업은 채 밭을 매는 아낙의 모습은 우리 시골의 옛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엄마 곁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네댓 살 여자아이가 얼굴이 벌겋게 익은 데다 땟물이 흐르는 모습으로 밭고랑을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도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내금강에 이르는 길은 이렇듯 타임머신을 타고 옛 시골풍경으로 빠져드는 듯한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기도 한다.

온정각을 출발해 2시간 가량 버스를 타고가면 아름드리 전나무가 하늘을 가리는 숲속의 계곡길로 이어지고 만천교를 지나자마자 내금강의 관문과도 같은 장안사터에 이른다. 버스는 장안사터를 지나쳐 계곡 안쪽으로 더 들어가 내금강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표훈사에서 순례객을 내려놓는다.

외금강의 신계사를 비롯해 유점사, 장안사와 더불어 금강산 4대 명찰 가운데 하나였던 표훈사는 6.25의 전화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찰이다. 서기 598년에 창건돼 처음엔 신림사로 불리다가 신라 문무왕 10년(670년) 표훈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전해진다.

표훈사는 원래 20여 채의 건물로 이뤄졌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고 지금은 북측이 복원한 반야보전과 영산전을 포함해 능파루, 명부전, 칠성각, 어실각, 판도방 등 7채가 남아 있다.

이 절의 주지 청학(靑鶴.55)스님은 "내금강이 개방돼 이남 불자들이 우리 사찰을 찾아오니 반가움이 크다"면서 "이곳의 좋은 경치를 마음껏 즐기고 돌아가라"고 환영의 말을 했다.

조계종 원로의원 법흥(77.전 송광사 주지)스님은 청학스님의 손을 붙잡고 흔들면서 "이곳에서 20년간 주지를 하셨던 원허(圓虛)스님을 아느냐. 그 분이 살아계신다면 지금 118세가 됐을 것"이라며 남북분단이 몰고온 불교사의 단절을 새삼 일깨웠다. 표훈사는 비구니 일엽스님이 구족계를 받은 도량이기도 하다.

◇ 묘길상에서 하산하며 성지순례

표훈사 뒤쪽 커다란 자연바위 틈으로 난 금강문을 지나면 내금강의 진수인 만폭동(萬瀑洞)이 눈앞에 펼쳐진다. 흑룡담(黑龍潭), 비파담(琵琶潭), 벽파담(碧波潭), 분설담(噴雪潭), 진주담(眞珠潭), 구담(龜潭), 선담(船潭), 화룡담(火龍潭) 등 금강산 3대 절경의 하나인 이른바 만폭팔담이 차례로 나타난다.

내금강 성지순례길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묘길상(妙吉祥)은 높이 15m, 폭 9.4m에 이르는 거대한 고려시대 마애불로 북한 국보 제46호로 지정돼 있다.

나옹(懶翁)선사가 직접 새겼다는 이 마애불상은 아미타불의 모습이다. 그러나 18세기에 불상 앞에 있던 암자 이름을 따서 불상 옆 바위에 '묘길상'이라고 새겨넣는 바람에 문수보살의 한자어인 지금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마애불 앞에는 높이 3.66m에 이르는 석등이 서 있다.

성지순례 코스는 표훈사에서 묘길상까지 비교적 평탄한 등산로를 따라 1시간 가량 오른 뒤 하산길에 마하연선원(摩訶衍禪院)터, 관음도량인 보덕암(報德庵), 서산대사비가 있는 백화암(白華庵)터, 삼불암(三佛巖) 등을 차례로 돌아보도록 짜였다.

한때 59칸 짜리 건물에 선객 53명이 동시에 참선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던 마하연선원은 창건자인 의상대사를 비롯해 보우ㆍ청담ㆍ성철ㆍ석주스님 등 신라시대 이후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승들이 용맹정진했던 참선 도량이다.

6.25 전란 때 소실된 이곳은 현재 잡초 속에 숨은 듯 자리를 지키고 있는 둥근 주춧돌과 여기저기 널린 깨진 기왓장들이 절터의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본채 뒤쪽의 수풀에 가려 용케 폭격을 피한 부속건물 칠성각이 문짝이나 편액도 없이 헛간처럼 처량한 모습으로 옛 자취를 전해준다.

마하연선원터를 방문한 지관스님은 잡초 무성한 폐허에서 동행한 스님들과 함께 잠시 좌선에 들어 옛 선승들을 기렸다.

등산길에 봤던 만폭팔경을 다시 내려보며 하산하다가 왼쪽으로 난 출렁다리를 건너가면 분설담 절벽 위로 구리기둥 하나에 의지한 채 절벽에 매달려 있는 보덕암을 올려다 보게 된다. 다소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금방 무너질 듯 낡은 기왓장을 머리에 인 보덕암 입구로 내려가는 비좁은 계단이 나타난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계단을 내려서 기왓장에 머리가 닿지 않도록 잔뜩 웅크린 채 보덕암 입구에 들어서면 아래쪽에서 구리기둥이 받치고 있는 좁다란 난간 뒤쪽으로 고작 서너 명이 앉으면 꽉 찰 자연동굴이 자리 잡고 있다.

고구려 때 보덕화상이 지었고 1675년 중건한 보덕암은 마음씨 착한 보덕각시가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인 보덕굴 앞을 막아 절벽에 세운 것이다. 지금은 내부가 텅 비어 있는데 이곳을 방문한 지관스님은 불상을 봉안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 잡초 무성한 장안사터는 언제 복원될까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표훈사 앞 개울 건너편으로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42호인 서산대사비를 비롯해 석종(石鐘) 형태의 부도(浮屠) 등 10개의 부도비가 남아 있는 백화암터가 있다.

여기서 가까운 곳에 문(門)을 세우듯 양쪽으로 바위가 서있고, 오른쪽 삼각형의 바위에 아미타ㆍ석가ㆍ미륵불을 새긴 삼불암이 있다. 이 부처바위에는 장안사 나옹선사와 표훈사 금동(金同)거사의 다툼에 얽힌 울소(鳴淵)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표훈사에서 장안사 쪽으로 백화암터와 삼불암을 지나는 울창한 숲길은 그야말로 산림욕을 하기에 최적이다. 우람한 전나무를 사이에 두고 부드러운 흙길을 걷으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다 보면 마음이 저절로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삼불암을 경계로 위쪽은 표훈동, 아래쪽은 장안동이라 부르는데 장안사는 금강산 장경봉(長慶峯)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고구려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551년 창건해 진표율사가 773년 중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사찰이다.

조선 중기의 화가 이정이 금강산 1만2천봉을 그려놓은 벽화로도 유명했으나 전화로 소실되어 현재는 넓은 절터에 잡초만 무성하다. 절터의 한 쪽 귀퉁이에 부도탑이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구니 혜해(86.경주 흥륜사 선원장) 스님은 "1944년 신계사 법기암으로 출가했다가 해방 이듬해 이곳 내금강을 찾아왔던 적이 있다"면서 "61년 만에 다시 이곳에 오니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신계사 복원 불사가 진행되는 동안 1년의 절반 정도를 금강산에서 보내고 있는 혜해스님은 장안사터를 방문한 순례단에 둘러싸여 가요 '황성옛터'를 불러 보이기도 했다.

백양사 방장 수산(85)스님은 "왜정시대에 금강산에 와보려고 서울까지 왔다가 전쟁이 벌어져 못 오고 말았다"면서 "평생 와보고 싶던 이곳에서 참배하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지관스님은 "전쟁으로 소중한 불교유산이 폐허로 변해버린 현장을 보니 안타깝다"면서 "구체적 일정을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내금강 불교유적지는 마땅히 복원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계종에서 파견해 신계사 복원 불사를 현장 지휘해온 제정스님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장안사의 설계도를 서까래 하나까지 정밀하게 그려놓은 것이 남아있어서 복원불사가 진행될 경우 옛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고 전했다.

내금강 성지순례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조계종 한국불교문화사업단장 종훈스님은 "우리나라 선(禪)불교 법맥의 중흥조인 서산대사의 자취가 많이 남아있는 백화암터 등은 불교도에게 매우 의미 있는 성지"라면서 "현실적으로 복원 불사를 당장 진행하기 어려우므로 우선 장안사터와 마하연선원터 등의 주춧돌이나마 제자리에 갖다놓고 묘길상 앞의 석등이나 서산대사비, 부도탑 등 훼손된 유물을 보수하는 일부터 차근차근 시작하려 한다"고 말했다. / (금강산=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인터뷰> 北 표훈사 주지 청학스님


"내금강이 개방돼 이남의 불자와 스님을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을 비롯해 남측 순례단 160여 명이 22일 내금강 표훈사(表訓寺)를 찾았을 때 이 절의 주지 청학(靑鶴.55)스님은 "금강산의 좋은 경치를 다 보여드리게 됐으니 마음껏 즐기라"며 환영했다.

내금강의 중심부 만폭동(萬瀑洞) 어귀에 자리 잡은 표훈사는 서기 598년 백제의 고승 관륵(觀勒)과 융운(隆雲)스님이 처음 세워 신림사(神林寺)라 부르다가, 670년 표훈(表訓)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 20여 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고 지금은 북측이 복원한 반야보전과 영산전을 포함해 능파루, 명부전, 칠성각, 어실각, 판도방 등 7채가 남아 있다. 신계사, 유점사, 장안사와 더불어 금강산 4대 명찰로 불렸던 표훈사는 유일하게 전화(戰禍)를 면해 전통사찰의 면모를 유지하게 된 곳이다.

남측 순례단이 찾았을 때 표훈사에는 주지와 삼십대로 보이는 승려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둘 다 머리를 길렀고, 북측의 다른 승려들과 마찬가지로 양복 바지 위에 짙은 회색 장삼과 적색 가사를 걸친 모습이다. 삭발에 대한 규정이 따로 없기 때문에 북측 승려들이 머리를 기르거나 깎는 것은 자유라고 했다.

청학스님은 "이 절에는 10명이 스님이 있으나 작업을 나가거나 안거(安居)에 들어가 현재 두 명 뿐"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북측 승려들도 여름과 겨울에 각각 3개월간 선방에 모여 외출을 금하고 수행에만 전념하는 안거에 든다"면서 "현재 함남 영광군 백운산 룡흥사(龍興寺) 선방에 7명이 수행정진 중이며. 안거에 들어가는 승려는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이 정해준다"고 덧붙였다.

그는 표훈사 외에도 칠보산 개심사, 구월산 월정사, 사리원 성불사, 묘향산 보현사, 평남 평성 안국사, 함남 고원 양천사 등 전통사찰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금강산의 좋은 경치와 우리 사찰을 이남의 스님과 불자들에게 모두 보여드리니 우리 마음도 좋습니다. 북남 불교도가 서로 내왕해 자주 만나면 결국 마음의 뜻이 통할 것이고, 대자대비한 부처의 뜻대로 살아가면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갈 것입니다."

(금강산=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사람들> 北 신계사 단청작업 김준웅씨


"남북 공동으로 단청작업을 하면서 눈에 보이는 외적 성과보다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한 것이 더 큰 소득이었습니다."

불교 조계종과 북측 조선불교도연맹이 2000년 6.15선언을 계기로 복원 불사를 함께 진행해온 금강산 신계사 단청작업의 남측 책임자인 김준웅(64.충남 무형문화재 제33호 단청장)씨는 23일 "현재 짓고 있는 요사채를 끝으로 7월 말이면 단청작업이 모두 마무리된다"고 밝혔다.

남북 공동으로 발굴조사 등을 거쳐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복원 불사를 시작한 신계사는 현재 90% 정도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대웅보전, 만세루, 산신각, 종각, 나한전, 어실각, 요사채 등 주요 전각이 모두 세워졌고 이제 부속건물인 창고와 화장실을 짓고, 주변 축대와 수로 등을 정리하는 일만 남았다. 최종 낙성식 날짜는 10월 13일로 잡혀 있다.

마무리 작업을 위해 4월 20일부터 남측 인부 4명과 함께 이곳에 상주하고 있는 김씨는 "단청작업은 '조선고적도보'와 '한국고적도보' 등 자료에 근거해 최대한 원형을 살려내겠다는 원칙을 갖고 진행했다"고 말했다.

"작년에 단청작업을 마친 대웅보전과 만세루 등은 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의 문양을 분석해 복원했습니다. 사진자료로 남아 있지 않은 부분은 신계사와 거의 비슷한 문양을 보이는 내금강 표훈사나 안변 석왕사의 단청을 참고했습니다."
김씨는 "신계사 단청작업은 북측 전문가들과 공동 연구를 통해 진행했기 때문에

남북 문화.학술교류에 적잖은 의미가 있다"면서 "문양을 그리는 일은 대개 남측에서 맡았고, 색칠 작업은 북측에서 많이 했다"고 소개했다.

북측에서는 남측의 국립문화재연구소에 해당하는 조선문화보전사의 김수용 단청실장이 인부 20여명과 함께 공동작업에 참가했다.

"신계사가 1887년 중창됐으므로 대부분 전각의 단청은 조선 중기 이후 수려한 금단청 문양을 살렸습니다. 하지만 맞배지붕을 가진 어실각 등은 문양의 근거가 없어 17세기 건축양식에 맞춰 단청작업을 했습니다."

김씨는 "북쪽 사람들도 남북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통일을 기다리는 마음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면서 "북쪽 인부들과 공동작업을 하면서 같은 말, 같은 피를 나눈 우리 민족이 머지 않아 하나가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금강산=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