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병시절
사병생활에 있어 상병 시절은 황금기이다. 군생활 전체를 통해 가장 활동적일 때가 상병 시절인데 하급자들을 통솔할 실질적 책임이 주어지며 상급자들의 지위를 보장하고 기득권을 지켜줄 역할 또한 부여된다. 내무반에서 도덕적 우위를 획득하고 능력을 인정받은 군인에게 있어 이 시기는 신나는 시간들이 되겠지만, 속으로 혼자서만 올바른 군인이었던 사람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허둥대다 마침내 자신이 그렇게 증오했던 나쁜 상급자가 되거나 원칙없이 휩쓸려 다니는 무능한 상급자로 전락할 위험이 농후하다. 상병을 달고 몇 개월 후엔 이제까지의 의무적 노동이 면제되어 일과 이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기득권자로 변한다.
앞에서 사람관계의 중요성이 동기 바로 밑의 하급자, 바로 위의 상급자 순으로 된다고 한 까닭은 이 세 계층이 거의 동일한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이해로 얽혀 있기에 통일단결의 조건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생활을 통해 이들과 높은 수준의 정서적, 생활적, 정치적 결합을 이루지 못했다면, 즉 ‘개선노력’의 실천 주체를 단결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만드는데 실패했다면 혼자서 착한 체 하는 하급자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의 무책임한 행동쯤으로 자신의 개선노력이 무시될 가능성이 크다.
사실 직장이나 학교의 경험을 통해 일정하게 단련된 사람이라면 군대에서도 역시 존경받는 군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자신있게 말하고자 한다. 단지 조건이 열악한 까닭에 정서적 결합만으로 전우들과의 관계가 제한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 학교나 직장과 다른 점이다. 따라서 하급자 시절부터 계기를 잘 포착하여 수준에 맞는 토론을 만들고, 생활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향의 토론들을 만들어 내는 일을 꾸준히 해야 한다. 개선의 대상을 밝히고 개선해낼 의지를 갖는 사람들을 본격적으로 단결시키는 일은 상병을 달고 해야 할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이다.
내무반의 여러 가지 개선방향에 대한 토론을 계속하여 마침내 전우들 스스로 결의를 모아 창조적인 개선방향을 잡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개선노력은 결합의 수준에 의해 속도와 성과가 규정되지만, 결국 기득권을 옹호하려는 상급자와 상급자들의 기득권 때문에 피해를 받는 하급자, 다시 말해서 사병들을 이해를 달리하는 몇 개의 층으로 분할하여 지배하려는 간부들과의 갈등이며 동시에 하급자들을 교육하는 과정이다.
이 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불평등은 무조건 나쁜가?” “계급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사병간의 질서에는 불평등이 있지만 동시에 타율에 의해 강요된 30개월 동안 공동적 삶의 방식으로 보내야할 처지에서 우리 상급자의 상급자, 그 상급자… 또 그 상급자 때부터 창조적으로 형성되어 정착되어진 공동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역할도 분명히 있다. 그 역할분담이 계급체계의 강제력을 물리적 장치로 하여 유지되면서 점점 최초의 기능을 상실해 병사들의 삶을 질곡으로 규정한 것은 우리의 상급자들이 동료 병사들을 원래부터 미워하는 냉혈한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군대의 성격 자체가 그 원래의 의도를 왜곡하도록 강제했기 때문이다. ‘무조건 평등’이 개선의 내용이 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매일 지급되는 우유를 현재까지는 일병 초기의 병사가 내무반 소요량을 일괄접수해 와서 개인에게 배달했는데 그것을 없애고 ’전부 취사장에 가서 하나씩 수령하자!“는 결정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모두가 우유를 수령하기 위해 취사장에 줄을 선다면 예전의 방식보다 훨씬 불편할 것이며 다른 생활에서도 이와 같이 노동력을 평균적으로 개별화할 때 동일한 불편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싸움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공동체의 이익을 옹호할 목적으로 합의한 질서 이외의 억압구조가 싸워야 할 대상이다. 우리 내무반에서는 어디까지가 공동이익에 부합되는 역할분담인가의 문제, 이것은 물론 전우들간의 토론을 통해 발견되어야 한다.
내무반내에서 시급히 해소되어야 할 억압구조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에를 들어보자.
① 호칭 사용 문제 : 상급자들은 하급자들에게 인격을 모독하는 별명을 부르거나, 성과 이름을 같이 불러 의도적으로 사무적인 관계를 강조하고, “야, 임마!” 식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은 상·하급자 사이를 비인간적 종속의 관계로 만드는 데 커다란 기능을 한다. 상호존중과 애정의 정서가 표현되는 호칭 사용이 정착되어야 한다.
② 개인적인 심부름 문제 : 공적인 업무와 무관한 상급자의 잔심부름이 많은 이유는 그만큼 내무반이 비민주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식기, 전투화는 자기가 닦고, 빨래, 다림질 등을 남에게 시키지 않으며 그밖의 잔심부름도 시키지 않도록 하는 것 등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겠지만, 조금씩 조금씩 토론과 합의의 과정이 반복되는 가운데 충분히 정착될 수 있다. 물론 자신이 상병이면서 말년 병장에게까지 구속력을 갖는 ‘합의’를 이끌어 낸다면 좋겠지만, 대개의 경우 자기 동기들부터 구속력이 발휘될 수 있을 것이고 그것도 엄청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③ 구타, 비인격적 얼차려 문제 : 이런 것이 없으면 내무반의 질서가 엉망이 된다는 인식이 사라질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상·하급자간에 존재하는 차이 중에서 노동력 투여의 양적 차별성이 공동의 이익에 합치되고, 능률이 극대화될 때만 인정된다면 하급자들이 자발성을 발휘할 조건이 생기는 것이다. 자발성이 보장될 수 있도록 내무반 질서를 개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구타 방지책이다. 한편 강제력이 전혀 부정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때에도 내무반 구성원이 전체적으로 합의한 방식을 정착시켜야 한다. 예를 든다면, 평가회, 반성문 등이 있다. 꼭 육체적 처벌을 배제하자는 것은 아니다. 평가회에서 잘못이 지적되고, 군장구보 등이 결정될 수도 있으나 처벌이 결정되는 방식은 민주적이어야 한다.
④ 기타 상급자들의 특권완화의 문제 : 병장들은 취침이 시작되는 22:00부터 TV를 크게 틀고, 침상에서 뛰어다니고, 라면 냄새를 풍기고, 술 마시고, 떠드는 등의 온갖가지 ‘놀이’로 하급자들의 숙면을 방해한다. 보급품이 나오면 상급자 우선으로 지급되거나 자신의 근무를 하급자에게 미루는 등 상급자들만의 특권은 각 내무반의 전통과 민주화 정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양상을 나타낸다. 상급자는 분명 특권을 누려야 한다. 하지만 하급자들이 자발적으로 인정하는 한도내에서! 따라서 상급자들이 누리는 특권이 내무반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철폐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루아침에 이룰 수는 없다. 끊임없는 토론과 설득을 통해 내무반내의 비민주성을 척결하려는 결의로 뭉친 ‘단결된 역량’이 세워질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