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영일기
9월 26일 (맑음)
잘 해냈다. 춥고 힘들었지만 내 역할을 다했고 소대원 모두 다친 데 없이 돌아온 것이 기쁘다. 훈련 마지막 100㎞ 행군으로 복귀. “건빵만 주면 계속 걷겠음”을 장난삼아 외쳐대던 김 상병이 “정말 언제까지 이렇게 걸아야 하는 거야”하며 울상지었고 사람들 전부 걷기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낙오에 대한 불안에 짓눌려 오로지 걸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라 엄숙하기까지 한 행군대열. 70㎞ 이후에는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군가를 먼저 부르고, 힘내라 파이팅을 외치고 농담도 해보고 우리 동기들의 활약이 큰 힘이 되었다. 어려울 때 진짜 전우애, 단결력 수준의 실체도 보이는 것, 우리 소대는 잘해냈다. 소대장만 낙오 안 했으면 소대 인원·장비 이상 무 되는 건데 소대장이 말썽이다. 어제 행군중 가장 힘들었던 그 순간, 나를, 우리들을 이런 고통으로 몰아넣은 진짜 명령권자. 그놈이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만 같았던 그 때. 힘차게 시작한 군가 “전우우여 이 몸 바쳐 통일이 된다아면 사나이 한 모옥숨 무엇이 두려우랴”
9월 30일 (비)
따블백이 뒤집어지고, 수첩의 개인메모, 개인노트 낙서내용까지 점검당하고 주머니 뒤짐이 행해지는 내무사열이 불시에 있었다. 분대는 전부 ‘이상 무’, 탄피가 세면백에서 나오고, 수첩에 적힌 노래 가사가 이상하다고 행정반으로 끌려가고 ○○분대는 박살났다.
10월 5일 (흐림)
소대 분위기를 개선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일단 성공하고 있다. 주번하사군번들은 식기고참에게 대부분의 권한을 넘겼고, 우리 동기들과 식기고참간의 단결력은 높아지고 있다. 우리 동기들은 식기고참의 자율원칙이 아래 군번들에게서 제대로 시행되도록 점검하고, 청소군번들도 청소평가회를 통해 자율원칙을 실천하고, 예전보다 훨씬 잘 돌아간다. 이대로 정착이 되면 확실히 성공인데 문제는 몇 명의 폭군들이다. 그들과 더 가깝게 사귀도록 노력하자. 지금이 예전의 억압적 분위기가 지배할 때보다 훨씬 소대 전체에게 이익임을 몸으로 설명하고 알리자.
10월 12일 (맑음)
손 상병이 술 먹고 고참들에게 개긴 날. 분위기가 순식간에 뒷걸음질이다. 고참들이 식기군번에게 허용한 권한을 회수하면 모든 게 허사다. 손 상병이야 원래 꼴통으로 찍혔던 인물이니 당장 체계에 위협이 되는 조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모르는 일이다. 허용된 자율에 책임이 따른다는 걸 다시 한 번 알리고 고참에 대한 예의지키기를 강조해야 한다. 뛰는 군번들 사이에 자율적 풍토가 조성되고, 고참들이 개인적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마구 횡포를 부리던 모습을 수그리는 지금의 분위기 이것을 지켜내야만 한다. 그것을 위해 내일 할 일, 식기 고참과 우리 동기와의 회의. 아래 군번들 집합시켜 교육.
10월 17일 (맑음)
설악산에 첫눈. 철원지방이 영하 1도로 떨어진 초겨울이다.
싸리비 묶는 작업 하루 종일. PRI에 시달리며 지겹던 생활로부터의 탈출이라 모두들 쌀쌀함도 잊고 좋아했다.
10월 21일 (흐림)
화생방 교육. 자동경보기. IM-93A/UD, IM-174B/PD 등의 장비가 보급된 것은 언제나 한반도에서 핵 화생방전이 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제 저녁 점호시간에 청소 깨졌고 오늘 아침에 동기들이 아래 군번 집합. 험악한 분위기였으나 구타는 막았다. 압력은 계속되고 불안한 기운. 확실히 동기들이 동요하고 있다.
10월 24일 (맑음)
내무반이 번쩍거린다. 커튼이 세탁되고 모포가 털렸고 바닥은 윤이 난다. 이대로 계속 밀어붙여야 한다.
10월 31일 (비 시월의 마지막 밤)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 졌지요…
군바리에게 세월이 가고 있음이 실감될 때는 여하튼 기쁘다. 내무반에서 이용의 노래가 아예 합창으로 울렸으니, 왕고참 둘이 제대하고 폭군 김 병장 동기들도 이제 이빨이 빠지고 있다. 내일부터 식기 잡는다. 드디어 왔다. 우리 동기가 실질적인 내무반의 ‘지도층’이 된거다. 식기를 놓고 어엿한 위치에 선 김 병장이 든든하게 우리를 지원하고, 아래 군번도 우리를 어느 정도 믿고 따르니 해볼 만하다. 계급별로 자율·책임을 주고 계급별 평가회가 활성화되도록 계급별 책임자간 평가회도 강화하고…할 일이 많다. 동기와 상의하는 것이 시작… 그래,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역앨범 사이에서 긴 잠에 빠져 있던 일기쪽지들을 읽으면서 기억의 어느 구석엔가 그때의 추억들이 하나둘씩 되살아오는 걸 경험했다. 일기에 김 상병으로 나오는 사람은 나보다 세달 고참이었는데 이등병 때부터 친하게 지내면서 군생활을 보람있게 보낼 수 있는 방안들을 같이 찾기로 의기투합한 후 줄곧 배짱을 맞추며 지냈다. 김 상병과 동기들이 없었다면 고참들의 서슬퍼런 체제(?)를 개선할 엄두를 감히 꿈조차 꿀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하급자들 중에도 군대가 뭔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성실히 실천한 믿음직한 사람들이 많았다. 혹자는 우리 내무반의 이런 조건들을 ‘우연’ ‘행운’으로 여길지 모르겠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어느 내무반이라도 문제를 느끼는 사람은 많다는 것이다. 주위를 조금만 살펴보면 누구든지 ‘행운’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글을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