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 (고려미술연구소 대표)
최근 널리 이용하는 챗GPT(Chat GPT)는 우리나라의 회화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준다. 나는 최근 챗GPT를 배워 고려 공민왕(恭愍王, 재위 1351~1374)의 어진(御眞)을 채색으로 변환해 보았다.
1. 흑백 사진을 천연색 사진으로 변환하는 원리
1970년대 후반에 사단법인 한국마이크로그래픽스협회(회장 고형찬)로부터 마이크로그래픽스에 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다. 이 교육은 후일 내가 흑백 사진으로 찍혀진 미술품을 분석하고 상상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90년대 어느 시기인가? 미국에서 할리우드의 고전적인 흑백 영화를 천연색 영화로 변환했다는 보도를 보았고, 사진에 관한 전문 지식이 있어 이를 쉽게 이해하였다.
청색이나 적색, 황색 등등은 흑백 필름으로 찍으면 그 흑백의 농도가 달리 나온다. 이론적으로는 그 농도를 측정하면 원래의 색을 대체로 판단할 수 있다. 이 기술이 처음 개발한 시기는 이런 작업으로 변환하는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었으므로, 후속 작업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작업은 널리 확산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요즘에는 인공지능(AI)으로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흑백 영화를 천연색 영화로 아주 쉽게 변환할 수 있다.
2. 흑백 사진만 남기고 소실된 공민왕의 어진
화장사(花藏寺)는 일제 강점기의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대원리에 있었다. 현재는 조선의 개성특별시 용흥리 보봉산에 있다.
화장사의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1115년(예종 10)에 묘응(妙應)이, 1216년(고종 3)에 정각국사(靜覺國師)가 이 절에 와서 머물던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계조굴(繼祖窟) 또는 계조암(繼祖庵)으로 불리던 암자였는데, 고려 공민왕 때에 계조암 터에 중건하였다.
현재는 이 절에 있는 유물 몇 점이 조선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에는 공민왕의 어진이 조선 초기부터 전해지고 있었으나 1927년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없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경기도 장단군 화장사에 전래하였던 『고려 공민왕 영정(어진)』의 유리판 건판(가로 11.9cm, 세로 16.4cm)을 소장(소장품번호 - 건판 4664)하고 있다. 이 건판은 1916년도에 당시의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촬영한 흑백 유리판 원본이다.
나는 이 흑백 사진을 국립중앙박물관의 e뮤지엄에 접속하여 내려받아 챗GPTt로 원색 변환하였다.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3. 챗GPT로 복원된 공민왕 어진
흑백 사진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웠던 공민왕의 어용(御容)이 챗GPT로 사실감있게 재현되었다. 얼마 전 현대의 어느 초상화가가 복원하였다는 공민왕의 어진과 대비하여 보면, 현대의 복원품은 여러 곳에서 잘못 복원되었다는 사실이 한눈에 보아도 쉽사리 들어온다.
챗GPT로 흑백 사진(1)에서 채색 사진(2)로 변환된 공민왕의 어용은 화려한 채색, 특히 금채(金彩)에서 고려불화를 보는 듯하다. 고려의 왕좌는 조선조의 것과는 전혀 다르고, 복식에서도 차이가 보인다.
머리에 쓰고 있는 왕관(王冠)은 북의 고려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왕건의 나신상(裸身像)』의 왕관과 거의 동일하다. 이것은 이 초상의 주인공이 고려의 국왕임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 이 어잔은 그림의 오른편 위 가장자리에 표기된 대로 공민왕의 어진임을 여실히 입증해 준다.
4. 고려 공민왕을 보다
변환된 공민왕의 어용은 변환할 때 부분적으로 과장(誇張)되거나 복식의 색이 다른 면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어용에 음영(陰影)이 나타나는데, 고려 불화의 주불 얼굴에 음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어, 이러한 변환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
사진(1)과 사진(2)를 대비하여 보자. 특히 얼굴 모습에서 실제로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을 느낄 수가 있다.
이 어진의 용모는 개성에서 출토한 『왕건의 나신상(裸身像)』의 용모가 매우 비슷하다. 고려 제31대 왕인 공민왕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30대손이다. 그는 그림과 서예에 능하였다.
공민왕의 할아버지 충렬왕은 원나라 공주와 결혼했다. 그러므로 공민왕은 칭기즈칸의 외현손(外玄孫)이다. 그는 어린 시절 원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하며 그 세력을 직접 경험했지만, 왕이 된 후에는 오히려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원 개혁 정책을 펼쳤다.
원나라의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 즉위 직후, 몽골식 머리 모양인 변발을 풀고 몽골식 옷인 호복(胡服)을 벗어 던졌다. 아울러 원나라가 고려의 북방 영토를 직접 다스리기 위해 설치했던 쌍성총관부(현재의 함경도 지역)를 무력으로 공격해 되찾았다.
공민왕은 자주적인 개혁 군주였으나, 1365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사망한 이후 몰락의 길을 걷는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