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네거리 비각 앞에 도착하자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피케팅 시위를 하기 위해 나왔다. 시작 시간인 오전 11시30분이 되려면 이제 3분이 남았다. 2-30명이 모여 있었다. 대체로 낯이 익은 얼굴들이다. ‘내란청산 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에서 집회와 시위의 실무를 책임지던 사람들, 전체대표자회의 등에서 보던 얼굴들이었다. 이런 활동가, 실무집행책임자들 이외에는 참여가 저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인 모양이다.
원래 오늘은 집회를 하려고 했던 날이라고 들었다. 비상행동은 해산되고 그 중 일부가 모여서 ‘트럼프의 경제 일자리 먹거리 안보 위협 저지 공동대응(준)’이라는 공동투쟁기구를 만들었다. 왜 이렇게 이름이 기냐고 지역 대표로 준비모임에 참가하고 온 최미숙에게 누군가 물으니 ‘일자리’가 들어가야 민주노총이 참여할 것이고, ‘먹거리’가 들어가야 전국농민조직 혹은 먹거리 관련 단체들이 함께 한단다. 줄여서 ‘트럼프 위협 저지 공동행동(준)’이라고 하기로 했단다.
당면 투쟁을 위한 연대 기구라 이름이 길어지는 것은 불가피할 수도 있다. 그런데 급박하고 심각한 의제에 비해 국민대중의 관심은 적은 것 같다. 아니 관심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민대중의 분노는 일정 정도 있으되 그것이 투쟁에 대한 호응으로 표출되지는 않았다. 탄핵 국면에 지쳤고 새로운 정부에 대한 기대도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견해와 질적으로 다른 국면이기 때문에 또 다른 전술이 요구된다는 견해가 있었다.
신돌석씨는 최미숙의 연락을 받고 피케팅 시위를 하려고 나온 것이었다. 집회를 하려고 했는데 오늘 폭우가 쏟아진다는 일기 예보가 있어서 취소를 했다고 들었다. 그 대신 피케팅 시위라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서 하게 된 것이었다. 커다란 현수막 이외에 작은 현수막도 여러 개 있었다. 그리고 나무로 만든 피켓도 있었다. ‘트럼프의 경제수탈 안보위협 규탄한다’ ‘이재명 정부는 국민을 믿고 당당히 맞서라’ 등의 구호가 적힌 현수막과 피켓들이었다.
진행자가 마이크를 들고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자 40대 남자가 집회 신고했냐고 물었다. 종로경찰서 정보과 형사라고 신돌석씨도 알고 있다. 진행자가 피케팅 시위하는 데 무슨 집회 신고가 필요하냐고 하면서 무시하였다. 형사는 진행자의 말에 더 이상 묻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진행자는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해 트럼프의 경제 안보 위협이 현재 어떻게 진행되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왜 우리가 지금 피켓시위를 하려고 하는지를 이야기하였다.
진행자가 이야기하면서 모인 사람들을 향해 광화문 네거리 여기저기로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흩어져서 자리를 잡으라고 하였다. 신돌석씨도 피켓을 들고 최미숙을 따라 동화면세점 앞 횡단보도로 갔다. 광화문 네거리 일대 여기저기에 트럼프의 경제 안보 위협을 규탄하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과 피켓이 눈에 띄게 배치되었다. 아주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반미시위가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졌다고 볼 수 있었다. 생각하기 따라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 그냥 무관심한 듯한 태도였다. 신돌석씨는 이순신 장군 동상 쪽을 바라보면서 피켓을 높이 들었고, 최미숙은 일민미술관 쪽을 바라보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신호가 바뀔 때마다 사람들이 건너왔다. 그런데 그냥 소 닭 보듯 했다. 다만 미국 이야기만 하면 지 애비 욕이라도 하는 듯 달려들던 인간은 보이지 않았다. 워낙 트럼프가 하는 짓이 어처구니없는 것이라서 그런 듯하였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최미숙은 우비를 입고 있었다. 신돌석씨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어서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산을 펼쳐 들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원래 계획은 1시간 30분이었는데 50분쯤 지나자 활동가 한 사람이 와서 이제 그만하고 모이라고 했단다. 신돌석씨와 최미숙은 좀더 할 만했지만 전체적으로 그렇게 결정이 됐는데 괜히 어깃장 놓을 필요가 없을 듯하여 피켓을 들고 따라나섰다.
다시 비각 앞에 모였는데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임형택이었다. 신돌석씨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를 보자 반가우면서도 조금 의아한 느낌도 들었다. 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이 같이 일하던 조직에서는 계급 문제만을 중심으로 활동했을 뿐 민족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았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민족문제는 소부르주아들이나 관심 갖는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조직의 리더인 조철구는 그런 점에 대해 우려했으나 어찌하지는 못했다.
그런 그가 여기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조금 특이하게 느껴졌다. 더욱이 그는 아직도 이전 지역에 남아서 활동하기 때문에 주로 그때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오늘은 어쩐 일일까? 그는 1987년 당시에 20대 초반이었다. 공단에 있는 어느 공장에서 해고된 뒤 천주교가 운영하는 ‘함께 하는 집’에 와서 교육을 받고 조직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 당시 어린 나이인데도 상당히 날카로웠고 투쟁 현장에서도 물러설 줄 몰랐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진짜 노동자가 나타났다고 하였고,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프락치 아니냐고 수군대기도 하였다. 조직끼리 갈등이 생기면서 더욱 그런 일들이 많았다. 그는 80년대 말에 방위 근무를 하면서도 조직 사람들이 많이 있는 ‘노동자의 터’라는 단체에서 일을 하였다. 거기서 만난 여성 노동자와 결혼을 해서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었다. 지금도 공장에 다니면서 노조활동을 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의 하나이다.
조철구는 살아있을 때 임형택에 대해 우리가 헛살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칭찬하곤 하였다. 그만큼 진짜 노동자다운 노동자였다. 너무 반가워서 함께 점심식사를 하자고 하였다. 대중집회가 아닌 피케팅 시위나 기자회견 등을 하고 나면 몇 그룹으로 나뉘어서 식사를 하러 가곤 하였다. 신돌석씨도 아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럴 때는 끼리끼리 모여서 간다는 것이 너무 티가 났다.
신돌석씨처럼 그럴 무리가 마땅하지 않은 사람은 이럴 때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최미숙이 항상 챙기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도 함께 어울리는 무리가 있었다. 괜히 부담 주는 것 같았는데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임형택과 함께 가기로 하고 최미숙에게는 같이 온 사람들과 가라고 했다. 최미숙은 그도 함께 가자고 했지만 강하게 권하지는 않았다. 마침 임형택도 누구 권유로 왔지만 딱히 함께 갈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신돌석씨와 임형택은 세종문화회관 뒤쪽 골목에 있는 중국집에 갔다. 아주 오래 된 집이었다. 여기 오게 되면 얼마 전 돌아가신 선배가 생각이 났다. 무려 반 세기도 넘은 옛날 고교 시절에 이 중국집에서 술과 안주를 시켜 먹고 도망친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뒤 양심의 가책을 받고 다시 와서 값을 치른 뒤 단골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집 주인 할머니와 아주 친한 사이였다. 그 아들, 손자까지 이어서 운영한다고 하였다.
고등학생 시절에 중국집에 가서 술을 마시는 것은 신돌석씨도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다. 아니 알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한 적도 있다. 그러다가 고2가 거의 끝나갈 무렵 중국집에 친구 생일파티를 하려고 한 20명이 간 적이 있었다. 옆방에서는 졸업을 앞둔 이웃 학교 고3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옆방이래야 칸막이로 구분한 정도였다.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한마디도 빠짐없이 다 들릴 정도였다. 시비가 붙었다. 옆방 고3들이 시끄럽다고 한 것이었다.
술 마신 김에 가만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칸막이가 넘어지고 우동 그릇, 짬뽕 그릇이 날아갔다. 수적으로 우세한 신돌석씨네 편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는데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중국집에서 신고를 한 것이었다. 결국 경찰이 출동했고 대부분 연행되어 갔다. 경찰서에 있을 때 담임선생과 형이 달려 왔다. 그때 형은 신돌석씨를 데리고 나온 뒤 한강으로 데리고 갔다. 아무 말도 없이 담배만 세 대를 연달아 피운 뒤 억양이 없는 소리로 말했다.
돌석아, 우리 이리 살 바에야 한강에 빠져서 함께 죽자.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겠노. 신돌석씨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형은 방위 훈련을 마치고 이틀에 한 번씩 나가서 하루 밤을 새면서 보초를 서는 방위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 날은 오전에 돌아와서 쉬고 있는 중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형이 별안간 신돌석씨를 주먹으로 발길질로 패기 시작했다. 한참을 때렸다. 그리고는 둘이 부둥켜 안고 한참 울었었다.
임형택과 둘이서 짬뽕에 연태고량주를 시켜서 먹었다.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이제 지역에서는 너나없이 미국의 경제 침탈에 대해서 공동대응하자고 한단다. 물론 강조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트럼프의 위협이 너무 심각해서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돌석씨 역시 마찬가지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밖에서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한 병 더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물었더니 그만하고 어디 함께 가자고 한다.
그가 가자고 하는 곳은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이 하는 후원주점이었다. 신돌석씨는 대리운전기사들의 노동조합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는 아는 것이 없었다. 술을 더 마시고 싶은데 어차피 후원주점이라니 가자고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를 알게 되었냐고 하니까 아주 오래 전 기억에 있던 사람의 이름을 꺼냈다. 김진기가 거기에서 상근을 한단다. 신돌석씨가 노동운동을 막 시작했을 당시에 노동현장에 들어온 학생출신이었다.
김진기는 공장 생활을 접은 뒤 지역에서 노동단체 일도 하고, 학원강사도 하고, 배달도 하고 했는데, 대리운전기사가 되더니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상근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임형택이 바로 대리운전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자신도 조합원인 셈이었다. 임형택은 얼마 전까지 직장에 다닌다고 했는데 어쩐 일이냐고 물으니 몇 년 전에 회사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그래서 하게 된 일이 대리운전이란다.
후원주점은 1호선 남영역 부근에 있는 곳이었다. 운동단체에서 후원주점을 자주 하는 생맥주집이었다. 홀이 넓어서 후원주점 하기에 좋았다. 신돌석씨도 여러 번 갔었다. 차편이 애매해서 시청역까지 걸어간 뒤 전철을 타기로 했다. 이제는 비가 제법 많이 내렸다. 올해는 정말 비가 많이 내린다. 아니 6월까지만 해도 심한 가뭄이었다. 7월 들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홍수, 산사태가 아주 빈번하다. 이제 누구도 기후위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하리라.
비가 많이 내리니까 바지 아래쪽이 다 젖었다. 홍수 하면 기억나는 일이 있다. 제대하고 얼마 안 되어서 성수동에서 지하방에 세 들어서 자취한 적이 있었다. 1984년이었을 것이다. 그해 여름에 비가 무지하게 쏟아지더니 하천 물들이 역류하고 시내 도로가 물에 잠기는 일들이 발생하였다. 지하방은 여지없이 잠겨 버렸다. 신돌석씨의 방도 잠겼다. 회사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같이 살던 친구가 물을 퍼내느라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의 일을 특히 기억하는 것은 홍수피해를 처음 당하는 것이라서 그렇기도 하였다. 신돌석씨는 고2 때까지는 망태산 고지대에 살아서 홍수 구경은 많이 했어도 직접 당한 적은 없다. 그 뒤에 성남으로 이사 가서 살 때도 비교적 높은 지대에서 살았다. 그런데 처음 직접 홍수피해를 겪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보다는 북에서 수해 피해 물자를 지원하겠다고 했고, 전두환 정부가 과감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겠다고 해서였다. 신돌석씨는 직접 그 물품을 받았다.
처음에는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이 지금 거주지로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 지하, 반지하에 살던 사람들 거의 대다수가 그곳에 주민등록이 옮겨 있지 않았다. 결국 실제 거주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주는 것으로 결론이 났던지 배급이 되었는데, 쌀과 거즈 등이었다. 그 외에도 있었다고 하던데 신돌석씨가 받은 것은 그랬다. 이때만 해도 북에서 이런 걸 받아도 민심이 흔들릴리 없다는 자신감이 생겼나 보다.
지금 기억으로 쌀은 알이 굵고 괜찮게 보였다. 신돌석씨는 쌀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어서 그게 좋은 건지 확신이 안 드는데 동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거즈를 비롯한 의료품은 어딘지 조악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튼 군사독재정권이라도 남북교류를 시도해 보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때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 비해 전쟁이나 해보려는 정권은 정말 민족사에 지워버려야 할 놈들임에 틀림없다.
그때 물에 잠긴 방을 치웠던 기억을 떠올리면 홍수가 나고 산사태가 나서 집이 물에 잠긴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을 치우고 복구할 수 있을지 남 일이 아니게 걱정이 되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87년에는 망원동에서 홍수를 당한 적이 있었다. 반지하방이었는데 물에 잠겼다. 그 방은 신돌석씨가 살던 방이 아니라 모임방이었다. 물에 잠겨서 책과 서류들이 모두 젖었다. 하지만 이때는 주인이 혹시 신고할까 봐 아무 말도 못하고 집을 옮겼던 기억이 있다.
이제는 도시 특히 서울에서 물난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신돌석씨 기억으로 망원동이나 반포 일대는 한두 번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일이 좀처럼 없다. 그것을 보면 수해에 대한 대응도 지역 소멸 위기와 무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기후위기에 따른 수해 피해의 대규모화 등도 있겠지만, 수도권 집중이 그에 대한 예방책 등도 함께 독점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남영역에 도착해서 횡단보도를 건너 후원주점에 도착했다. 2층에 있는 곳이었다. 가운데 널찍한 홀이 있고, 삼삼오오 모여서 함께 마실 수 있는 자리들이 칸막이로 쳐져서 10여 군데 있었다. 임형택이 미리 온라인으로 입금을 해서 5만 원짜리 표를 두 장 받았다. 신돌석씨도 돈을 내려고 하니 이따가 추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해서 그러기로 했다.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김진기 어디 있는지 안내하는 이에게 물으니 무엇을 사러 갔다고 했다.
생맥주 두 잔과 골뱅이를 시키고 몇 모금 마시는데 김진기가 왔다. 정말 30년 만에 만난 것 같았다. 너무 반가워서 악수를 하고 다시 끌어안았다. 신돌석씨보다 네 살 아래인데 열 살은 아래나 되는 것처럼 늙지 않았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 잔 하라고 하니 지금 손님 접대도 해야 하고 몇 년 전에 위암을 앓아서 술을 자제한다고 한다. 굳이 권하지 않았다. 요즘 들어서 술 못 마시는 사람이 주위에서 많이 늘어서 이전처럼 강권하는 분위기는 사라졌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