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필자는 2024년 2월부터 금년 5월 초까지 여기 통일뉴스에 현동자 안견과 그가 활동하던 시대의 화가, 안견파(安堅派)라 불리는 그의 화풍을 따른 후대의 화가를 다룬 글을 모두 29편 발표하였다. 그 목록을 분야별로 나누어 정리하면, 이 논고의 맺음말에서 제시하는 목록과 같다. 이번 글은 현동자 안견과 관련하여 통일뉴스에 연재하는 30번째 논고로서, 필자가 최근에 쓴 글에 관한 총론(叢論)이다.
0. 1994년 안견론쟁 이후 무엇이 변했는가?
서울대학교 출신의 해외유학파 안 모 교수는 자신이 석-박사학위 논문을 중심으로 재편 구성하고, 『몽유도원도』의 시문을 이병한에게 번역하게 하여 묶어서 『안견과 몽유도원도』라는 책을 도서출판 예경에서 출판하게 하였는데, 그 초판본은 1991년 2월 13일 자에 나왔고, 그 개정판은 1993년 8월 20일 자에 나왔다.
1993년 연말에 문체부에서는 1994년의 문화 인물을 발표하였는데, 이듬해 7월의 문화 인물은 현동자 안견이었다. 당시 필자는 안 모 교수의 안견론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간파하고 그 문제를 지적하는 글을 월간 『미술세계』 1994년 4월호에 시험삼아 기고하였다. 이후 9월호까지 6회에 걸쳐. 월간 『서화정보』에는 7월호부터 9월호까지 3회에 걸쳐 연재한바, 이 논고는 우리나라의 미술사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이후 격월간 『한국고미술』 1998년 1·2월호(통권10호)에 「몽유도원도의 신해석」을 기고하여 몽유도원도의 본질을 논하였고, 이보다 앞선 1997년 1·2월호(통권4호, pp.54~65)에는 「이수문의 생애와 예술」을, 3·4월호(통권5호, pp.50~60)에는 「문청, 그의 회화에 대한 이해’」를 기고하였다. 1997년에 발표한 논고는 안 모 교수가 『안견과 몽유도원도』를 저술하면서 왜곡한 문청(文淸)과 이수문(李秀文, 1403~?)에 관한 관점을 바로잡은 글이니 안견론쟁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2000년 12월 안견의 관지가 있는 『안견고잔도장축도(安堅古棧道長軸圖)』가 출현하였고, 이를 관찰하여 월간 『미술세계』 2001년 1월호(pp.84~88)에 「「안견신론」을 위하여 다시 쓴다 – 새로이 발견된 안견작 「고잔도」에 대하여」를 기고하였고, 그해 6월에는 백선문화사가 발행한 단행본 『안견고잔도장축도』 pp.113~140에 「안견과 고잔도 연구」를 기고하여 ‘고잔도’의 의미를 규명한 바 있다. 당시의 여파는 매우 컸다.
이후 2005년 9월 30일자로 시공아트는 『경매된 서화』를 발행한다. 이 책의 공동 저자 김 모와 황 모, 그리고 출판사는 자신들의 책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하여 안견론쟁을 호도(糊塗)하는 언론 보도를 추진하였다. 마치 안 모 교수의 용병으로 나선 꼴이 되었다.
필자는 즉각 반론을 써서 월간 『미술세계』 2005년 11월호에 「이중섭과 박수근, 그리고 안견의 서화위작추문(書畵僞作醜聞)」을 기고하였다. 여기까지의 상황은 필자가 2024년 5월 13일 자에 통일뉴스에 기고한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63) - 「30년 전 안견론쟁을 회상하며 - 안견 관(款)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에 관한 나의 고해성사」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이제 우리나라 최초의 회화사논쟁 ‘안견론쟁(安堅論爭)’은 처음 시작한 지 30년이 지났다. 그러나 지난 2024년까지 어떠한 변화를 보였는가? 안 모 교수에게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안 모 교수는 2009년 9월 29일 자로 출판사 ㈜사회평론에서 『개정판 안견과 몽유도원도』을 내면서 『안견과 몽유도원도』 1993년 도서출판 예경 개정판에 있던 ①이병한씨가 번역한 『몽유도원도』의 제시 「시원문 및 역문」을 들어냈고, ②안견의 관지가 있는 것으로 pp.90~91에서 소개한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와 ③p.43에서 “그림 3. 安平大君 筆 <竹門斜掩帖>”으로 소개한 도판도 역시 삭제하였다.
그것은 1994년 안견론쟁시 이건환씨는 ①이병한씨 번역을 오역투성이로 비판하였고, ②『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는 필자나 이건환씨가 아니라 안 모 교수가 미술사학계에 처음으로 소개한 그림임을 지적하였으며, ③필자는 안 모 교수가 안평대군 필로 단정한 <죽문사엄첩>은 안평대군의 작품이 아니라 타인의 작품을 변조한 것으로 규명해 내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미미한 변화는 변화라고 할 수 없다. 그렇기에 필자는 지난해 5월을 전후로 안견론 정립을 다시 시도하여, 현재까지 1년여 동안 여기 인터넷 통일뉴스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안 모 교수는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시기마다의 회화사학자 몇 분은 안견의 인흔(印痕)이 남아있는 『설천도(雪天圖)』와 『강향장색(江鄕㢓色)』을 안견의 진작으로 소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안 모 교수의 논리를 뒤집는 데 부담을 느낀 소장파 회화사학자들은 조선전기 화가의 연구는 기피하고, 조선중-후기 화가들 연구에 주력하였다.
1. 안견 연구는 고려말 회화 연구로부터 시작하여야
우리나라에는 려말선초, 즉 1392년을 기점으로 하여 그 전후 50년간(1342~1442)에 그려진 현전하는 그림은 매우 적다. 그것도 대체로 불화이다. 안견의 산수화 『몽유도원도』가 1447년 4월에 그려진 것이니, 1342년부터 1442년까지의 산수화를 거의 모두 전칭 작품으로 띄어 놓아야 안견과 그의 작품 『몽유도원도』가 드러나기 때문일까?
필자는 조선초 회화세계를 연구하기 위하여 우선 고려회화의 다양성에 관한 연구의 필요성을 인지하였다. 안 모 교수의 『안견과 몽유도원도』를 보면, 고려회화가 안견의 작품세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조선초기 회화는 고려회화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관점보다는 안견의 천재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안견이 그냥 ‘짱’하고 나타난 양하고 있다. 1392년 조선이 개국(開國)하던 시기의 백성은 모두 고려의 백성이었다. 고려의 백성들이 조선을 개국하였고, 조선의 정치와 경제, 문화, 사회를 주도하였다. 그 간단한 진실이 가려진 것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1447년 4월 20일 꾼 꿈을 사흘 만에 그려낸 작품이다. 1447년 4월 23일 완성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몽유도원도』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이 그림이 그려지기 일백 년간의 려말선초의 미술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려말선초의 미술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현전하는 고려불화에서 인물 산수 화훼 영모 누각(樓閣) 등등의 표현을 찾아보아야 했다. 그 연구 결과 려말선초의 회화론으로 ②「고려회화의 다양성 연구의 단초(端初)를 우선 고려불화에서 찾아야」와 ③「우리나라의 고려불화연구사」를 탈고하였다. 아울러 고려와 인접한 금(金)나라와의 교류에 착안하여, 국내 전래의 『행화구욕도(杏花鸜鵒圖)』를 주제로 하여 ④「『행화구욕도』와 이인로를 통해 본 고려와 금나라의 서화 교류」를 탐색하였고, 기타 국내외에 현전하는 작품을 중심으로 하여 ⑤「고려말 화단(畫壇)에 관한 탐색(1) - 1. 익재 이제현과 이재 공민왕의 작품은 한국회화사에서 매우 중요하다」와 ⑥「고려말 화단(畫壇)에 관한 탐색(2) - 2. 작가미상의 고려후기 회화」을 탐색하여 발표하였다.
이상의 논문에서 필자는 안견의 회화가 출현하는 ‘예술 환경(Art culture infra)’의 형성을 고려시대의 회화에서 규명한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안견이 불세출의 천재 화가라고 해도 그는 기존 미술의 바탕 위에서 자신의 회화세계를 구축해 나갔음을 상식적으로 논한 것이다. 이러한 필자가 논한 5편의 고려말회화사론은 안 모 교수 안견론의 기반이 매우 허약함을 논증하였다.
2. 안견과 조선초 화가의 연관성
필자는 또한 ⑦「려말선초의 서화가 순은(醇隱) 신덕린(申德隣, 1330~1402)과 그의 작품에 관한 고찰」을 발표하였다. 신덕린은 안견이 태어나기 이전에 활동한 문인화가로서 그의 관지가 있는 「신덕린 필 산수도」(덕수 5060) 한 점과 전칭작품 「전 신덕린 필 산수도」(덕수 3791) 한 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가운데 「신덕린 필 산수도」를 안견작 『몽유도원도』와 대비하여 논하였다.
“「신덕린 필 산수도」 역시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처럼 사람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의외(意外)의 공통성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폐쇄된 산중에 초옥이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으며, 초옥으로 이르는 길은 잔도(棧道)로 그리고 있다. 초옥 왼쪽에는 대나무를 그리고 있지만, 다른 나무들은 모두 잎을 떨군 늦가을의 정취(情趣)를 그리고 있다.
만약 이러한 작품① “「신덕린 필 산수도」를 횡폭의 작품으로 계절을 봄으로 바꾸어 심산유곡으로 그린다면 어떤 구도와 모습으로 그렸을까?”를 상상해 보자. 최선의 명작은 어떤 모습으로 나올까? 「몽유도원도」가 아닐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작품① 「신덕린 필 산수도」는 안견의 「몽유도원도」의 출현을 끌어낸 몽학(蒙學) 선생의 역할을 한 수준의 보편적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
필자가 1997년에 발표한 조선초에 일본으로 가 그림을 그린 조선인 화가 이수문(李秀文)과 문청(文淸)을 2024년에 각기 재 탐색하여 ⑧「이수문(李秀文)의 인생과 예술」과 ⑨「문청(文淸)과 그의 회화를 다시 논한다」를 수정하여 발표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일본 무로마찌 시기에 일본 미술에 영향을 준 것은 안견이 아니라 이수문과 문청임을 논하며, 안견의 출생연도를 근거 없이 올려잡은 원인이 틀렸음을 논증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항목에 의하면 “『삼강행실도』의 밑 그림에는 안견(安堅)의 주도 아래 최경(崔涇)·안귀생(安貴生) 등 당시의 유명한 화원들이 참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東國新續三綱行實撰集廳儀軌)』에 안견의 그림으로 전한다는 기록이 있고, 이러한 유형의 작업에는 작업량으로 볼 때 여러 화원이 동원되고 실제 작품에서도 몇 사람이 나누어 그린 흔적이 발견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주장은 『삼강행실도』와 당시대의 화가들에 관하여 충분히 검토하여 나온 결론이 아니다. 『삼강행실도』는 1434년에 직제학 설순(偰循, ?~1435) 등이 세종의 명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부자·부부의 삼강(三剛)에 모범이 될 만한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모아 편찬한 도판(圖版) 언행록이다. 『삼강행실도』는 고려때 편찬된 권부(權溥, 1262~1346)의 『효행록』을 본받아 편찬하였다. 편찬한 해가 1434년이므로 한글 창제 이전이다. 따라서 초판본은 한문본이며, 재판본부터 한글 언해(諺解, 번역)가 들어간다.
『동국신속삼강행실찬집청의궤』에 ‘안견의 그림으로 전한다(三綱行實之畵則自前相傳安堅之筆)’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국신속삼강행실』(1615년)을 편찬할 당시의 주장이다. 이 주장을 상세히 분석하지 않고 확대 수용하여 “안견(安堅)의 주도 아래 최경(崔涇)·안귀생(安貴生) 등 당시의 유명한 화원들이 참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최경은 1420년경에 태어나 1490년 이후에 사망한 인물이며, 안귀생은 최경보다 3~4세 정도 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34년에 편찬한 『삼강행실도』 원화를 그리는 일에 최경과 안귀생은 참여할 수 없었다.
문제는 “안견이 『삼강행실도』의 원화 제작에 참여했는가?”이다. 필자의 판단에는 안견이 1434년에 편찬한 『삼강행실도』의 원화를 그리는 데 참여한 것으로 당대 사회 일각에서 대대로 전해져 왔지만, 이것은 안견을 과대(過大)한 오전(誤傳)으로 안견은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나 최순우(崔淳雨, 1916~1984) 등등은 안견의 출생년도를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초로 보아왔기 때문이다. 안견의 출생년도를 세종초로 본 이유는 김안로(金安老, 1481~1537, 선비화가 金禔의 부)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 “본조안견 자가도 소자득수 지곡인야(本朝安堅字可度小字得守池谷人也)”라고 한것과 신숙주의 「비해당화기(匪懈堂畫記)」에 “아조득일인언, 왈안견, 자가도, 소자득수, 본지곡인야(我朝得一人焉, 曰安堅, 字可度, 小字得守, 本池谷人也)”라고 하였다. 즉 “우리 왕조에 한 사람을 얻었으니, 안견이라 하는데, 자는 가도이고, 소자는 득수로, 본은 지곡인이다”라고 한데 있다. 여기서 본조(本朝)와 아조(我朝)를 세종조로 보았고, 세종조 첫해는 1418년이기 때문이다. 안견이 1434년에 편찬한 『삼강행실도』의 원화 제작에 참여했다면, 그는 140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킨다.
안 모 교수는 일본 무로마치 시대의 화가 주문(周文)이 1423년에 조선에 왔으며, 그를 통하여 안견화풍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추정한 바 있다. 그런데 주문의 최고년대(最古年代) 전존작품은 1418년 작 「삼익재도」인데, 『변옥집(辯玉集)』(1672)에는 이수문을 “……後圓融帝永和年中人”이라고 하였다. 일본에서 “후원융제 영화연중”이라고 하면 1375년부터 1378년까지의 시기이다. 주문이 1370년대 중후반에 태어났다면 조선에 온 1423년은 그는 40대 후반이되고, 안견은 20대 초반이 된다.
그 둘이 만났다면, 그리고 1447년의 『몽유도원도』에 보이는 산봉우리와 유사한 묘사가 주문이 1446년 이전에 그린 것으로 고증되는 「죽재독서도(竹齋讀書圖)」에 나타난다면,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말이 되겠는가? 따라서 안견과 주문은 주 활동연대라 달라 만난 적이 없고, 그러므로 안견은 1400년경이 아니라 1418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민족사관의 눈으로 본다면 안견과 주문은 무관하며, 주문에게 려말선초에 조선화풍의 영향을 준 것은 이수문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⑨「문청(文淸)과 그의 회화를 다시 논한다」에서 “여졸과 문청과의 연계를 보아 문청의 출생연대를 적어도 1400년 이전으로 올려잡아야 하며, 또한 그의 도일 시기는 여졸이 생존해 활동하던 시기가 응영연간(應永年間, 1394~1427년)이므로 이수문의 도일 시기(1424년) 보다 다소 앞선 시기로 올려잡아도 무방하다.”라고 하였다. 안견은 문청이나 이수문과 교유할 수도 없었고, 안견이 화가로 나오기 이전에 문청과 이수문은 이미 도일한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초에 활동한 려말선초의 화가 신덕린과 문청 이수문 등 3인은 안견과 교류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신덕린이 타계한 1402년(태종2년) 이후부터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나오던 1447년 사이에 활동한 조선초기의 화가는 누가 있을까? 안견에게 그림을 가르친 스승은 누구일까?
고려시대에 중앙관청으로 도화원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서경(西京, 평양)에는 지방관청의 하나로 설치되었던 기록이 있다. 서경의 중요성에 비추어 중앙의 관제를 그대로 따랐을 것으로 보면 중앙에도 도화원이 있었을 것이다. 고려후기의 개인 문집에 보이는 화국(畫局)도 도화원의 별칭으로 보인다.
조선에 들어와서 도화원은 개국 초기에 이미 설치되어 있었음이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된다. 1400년(정종2)에 용관(冗官)의 도태(淘汰) 문제와 관련하여서 상림원(上林院)·상서원(尙書院)과 함께 도화원의 이름도 열거된 것을 보면, 도화원이 그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개국 당초에 고려의 관제와 전통을 조선이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말의 도화원 제도도 그대로 조선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후 『경국대전』(1474년)에 도화서(圖畫署)라는 관서 이름(官署名)이 처음 나온다. 결론적으로 볼 때 도화원은 조선초기부터 존재하였고 1464년(세조10)까지는 고려때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안견은 도화원 화원이었다. 안견은 조선초 태종조의 도화원 화원이나 그 주변 화가 누군가에게서 그림을 배웠을 것이다. 누군지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와 정황으로 보아 안견은 고려말 회화에 나타나는 화풍과 화론을 배웠을 것은 자명하다.
3. 『몽유도원도』가 안견의 유일한 진작이라는 가상 논리가 망친 조선전기회화사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 “金安老, 『龍泉談寂記』, “本朝安堅 字可度 小字得守 池谷人也 博閱古畫 皆得其用意深處 式郭熙則爲郭熙 式李弼則爲李弼 爲劉融爲馬遠 無不應向 而山水最基長也.”라고 하였다. 즉, “본조의 안견은 자가 가도이고 소자가 득수이며 지곡인이다. 고화를 많이 보고 그 깊은 곳에 있는 뜻 쓴 곳을 얻어 곽희식으로 그리면 곽희가 되고 이필식으로 그리면 이필이 되었으며 유용이나 마원도 마찬가지였다. 뜻대로 못 그리는 것이 없었다. 가장 잘 그리는 것은 산수였다.”라는 것이다.
이 기록은 현동자 안견이 중국 송원대의 유명한 산수화가 곽희(郭熙, 1023~1085경)나 이필(李弼) 유융(劉融) 마원(馬遠, 1140~1225) 등 당시 조선에 전래하여 있던 여러 화풍을 깊이 연구하여 그렸다는 의미이다.
필자는 ⑪「안견신론(安堅新論)의 핵심은 무엇인가?」에서 안 모 교수의 가상 논리를 지적하였다. “안 모 교수의 안견론은 다음 세 전제에서 출발한다. 첫 번째 전제는 「몽유도원도」만이 안견의 진작(眞作)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 전제는 안견의 화풍은 곽희 화풍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전제는 안견은 조선초기의 대화가이므로 그가 일본 무로마치 미술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필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첫 번째 전제 때문에 안 모 교수는 안견의 전칭 작품 모두를 부정한다. 또한 안견 제자들의 그림에서 곽희 화풍이 아니라 마하파 화풍이 나오는 것들도 의문시한다. 그리고 두 번째 전제 때문에 곽희 화풍의 영향이 안 보이는 안견의 인장이 보이는 작품 모두를 부정한다. 또한 세 번째 전제 때문에 안견의 작품보다 연대가 앞서 그려진 일본 무로마치 미술가보다 안견의 생존연대를 무리하게 올려 잡는다.
이러한 안 모 교수의 논리는 안견만이 15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로 한정하게 되며 결국이 이는 조선전기 회화사 전체를 참담하게 위축시킨다. 그러나 안견이 곽희 화풍뿐만 아니라 이필 유융 마원의 화법에서도 뛰어났다는 『용천담적기』의 기록에 의하여 안견의 화풍은 곽희 화풍이라는 논리와 「몽유도원도」만이 안견의 진작(眞作)이라는 논리는 성립이 안 된다. 안견이 구사한 산수 화풍이 다양했다는 사실은, 안견의 다양한 화풍이 조선전기 회화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확장 논리를 끌어낼 수 있게 한다. 「몽유도원도」는 안견의 대표작 가운데 한 점이지만, 안견의 기준작은 아니다.” 『몽유도원도』가 안견의 유일한 진작이라는 가상 논리가 조선전기회화사를 망치고 왜곡한 것이다.
4. 안 모 교수 ’안견론‘의 실체는 무엇인가?
- 안견의 출신지에 관하여 ;
안 모 교수의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고향은 충남(忠南)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는 안견을 순흥안씨(順興安氏)로 왜곡하며, 안견의 본관 지곡(池谷)을 지곡(地谷)으로 바꾸고 이를 다시 충남 서산의 지곡(地谷)으로 왜곡하였다. 그러나 필자의 논고 ⑩「안견의 관향(貫鄕) ‘지곡(池谷)’. -안견의 고향은 충남 서산이 아니라 지금의 서울시 강남구이다」에서 논하였듯이 안견은 경기도 광주군 지곡(池谷) 출신으로 지금의 서울시 강남구 세곡동과 자곡동 일대이다. 현동자 안견의 고향이 충남 서산 지곡(地谷)이 아니라, 미술사학자 근원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이 주장한 대로 경기도 광주군 지곡(池谷)임을 논증하였다. 충남 서산 지곡은 조선시대에 그림을 배울 수 있었던 ‘예술 환경(Art culture infra)’이 전혀 없었으나, 경기도 광주군 지곡은 도성과 가까웠고, 그 일대는 세종의 광평대군(廣平大君, 1425~1444)에게 내린 사패지(賜牌地)였다.
- 안견론쟁의 논점에 관하여 ;
그리고 필자가 ⑪「안견신론(安堅新論)의 핵심은 무엇인가?」와 그에 연결된 논고 ⑫「『몽유도원도』의 신해석(新解釋)」에서 밝혔듯이, 30여 년전 안견론쟁의 세 가지 논점(論點)은, “①첫째, 안견은 산수에서 다양한 화풍을 구사하였다. 따라서 「몽유도원도」는 안견의 대표작이기는 하지만, 안견의 기준 작품이 될 수는 없다. ②둘째, 안견을 산수화가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안견은 산수(山水) 외에도 초상(肖像) 화훼(花卉) 매죽(梅竹) 노안(蘆雁) 누각(樓閣) 말〔馬〕 의장도(儀仗圖) 등 다양한 분야의 그림을 그렸다. ③셋째, 안견의 생존연대는 1418년경부터 1470년경이므로 일본 무로마치시대의 회화에 영향을 준 것은 안견이 아니라 이수문과 문청이다.”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동자 안견은 여러 화풍에 능하였으므로 곽희(郭熙)의 화풍을 원용(遠用)한 『몽유도원도』는 안견의 대표작이기는 하지만, 안견의 기준작품이 될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안 모 교수가 “『몽유도원도』는 도잠(陶潛, 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라고 주장한 것을 여지없이 비판하였다. “「몽유도원도」와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다. (중략)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의 정치적 야망(野望)을 담고 있다.”라고 논증한 것이다.
즉, 안 모 교수의 가장 큰 패착은 『몽유도원도』만을 안견의 유일한 진품이자 기준작품으로 가설(假說)을 정하고 안견 회화를 연구하여, 곽희 화풍이 아닌 다른 화풍을 보여주는 안견의 모든 작품은 관지가 있든 없든 모두 안견의 작품이 아니라고 부정한 데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안견의 인흔이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설천도』와 전칭작품 『적벽도』 등이다. 심지어 『적벽도』에 그려진 인물의 묘사력이 뛰어나 “산수화보다 인물화에 뛰어났던 화가에 의하여 그려진” 그림으로 단정하였다. 그러므로 필자는 ⑬「어진화사(御眞畫師) 안견(安堅)과 『적벽도』」란 논고에서 안견이 어진(御眞) 화사(畫師)였음을 논증하였다.
“안견이 1442년에 안평대군의 초상화를 그린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같은 해에 안견이 광평대군의 초상화도 그렸다는 사실은 1994년 안견논쟁시에 필자가 밝혀낸 사실이다. 세종조에는 많은 어진(御眞)이 도사(圖寫)가 되는데, 특히 1442년부터 1444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안견이 안평대군과 광평대군의 초상화를 그린 것은 1442년이다. 어진 도사와 맞물려 대군들의 초상화 제작도 이루진 일이다. (중략) 안견은 1442년부터 1444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어진과 대군들의 초상화 도사의 공로로 인하여, 1445년 당시에 이미 정4품 호군(護軍)이 되어 있었다. 화원으로서 정4품 호군은 어진 화사가 아니고서는 오를 수 없었다.”
- 안 모 교수의 안견론의 폐해 ;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안평대군이 제시(題詩)를 받아 첨부한 것처럼, 안평대군이 안견의 『소상팔경도』에 받았던 제시만을 제첩한 『소상팔경시첩』이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별개의 소장품으로 안견의 작품이라 전하여 전래한 『소상팔경도』 8폭 도첩(圖牒)도 소장되어 있다.
안 모 교수는 『소상팔경도』 8폭 도첩을 16세기의 그림으로 창작 시기를 내려 잡고 있다. 그리고 『사시팔경도』를 『소상팔경도』 8폭 도첩보다도 먼저 그려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그림이 그려지던 그 시대에 가서 그림 그리는 것을 본 것처럼 단정한 것이다. 그것은 그 두 화첩의 그림이 『몽유도원도』에서 보이는 화풍과 다르다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김안로의 『용천담적기』에서는 안견이 “고화를 많이 보고 그 깊은 곳에 있는 뜻 쓴 곳을 얻어 곽희식으로 그리면 곽희가 되고 이필식으로 그리면 이필이 되었으며 유용이나 마원도 마찬가지였다. 뜻대로 못 그리는 것이 없었다. 가장 잘 그리는 것은 산수였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안견이 다양한 화풍을 구사하였다는 것을 인식하면 안 모 교수의 『소상팔경도』와 『사시팔경도』에 관한 논점이 아주 허구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가 있다.
조선전기에는 『소상팔경도』와 『사시팔경도』가 여러 점 그려졌다. 보한재 신숙주는 1445년에 지은 「비해당화기(匪懈堂畫記)」에서 안평대군이 소장하고 있는 현동자(玄洞子) 안견(安堅)의 작품을 열거하면서 『팔경도(八景圖)』 두 점을 제일 먼저 언급하였다. 이를 보면 안견도 『소상팔경도』와 『사시팔경도』를 1445년 이전에 그렸다. 회화사학계에서는 안견이 1442년 이전에 『팔경도』 두 점을 그린 것으로 본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소상팔경도』와 『소상팔경시첩』을 하나로 연결하여 평가하였을 것이다. 안 모 교수가 『소상팔경도』를 16세기 중반의 그림으로 폄하한 이유가 화첩과 시첩을 연결시켜 논하지 못하게 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필자는 ⑭「안견작 『사시팔경도』」와 ⑮「안견의 『소상팔경도』와 안평대군의 『소상팔경시첩』」에서 이러한 문제를 논하였다.
결과적으로 볼 때 안 모 교수의 괴상한 논리를 뒤집는 데 부담을 느낀 소장파 회화사학자들은 지난 30년이 넘도록 조선전기 화가의 연구는 기피하고, 조선중-후기 화가들 연구에 주력하였다.
5. 현전하는 조선초기의 작가미상의 작품을 통해 본 안견화풍론
- 『설천도』는 안견의 작품이다
일본의 동경국립박물관에는 작자미상의 「파초야우도(芭蕉夜雨圖)」가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은 1410년(태종10) 8월 이전에 제작되었다는 절대적인 제작 하한년도를 가지고 있다. 1410년에 봉례사(奉禮使)로 일본에 갔던 집현전 학사 양수(梁需)와 일본 교토(京都) 오산(五山)의 시승(詩僧) 13인 등 14인의 화찬이 적혀 있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파초야우도」는 양수를 따라갔던 조선시대 화원(畵員)의 작품일 것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이 「파초야우도」 그림에 「설천도」에 나타나는 첨형(尖形)의 원산(遠山)이 그려지고 있으며, 근경의 산에는 이른바 ‘단선점준(短線點皴)’이 보인다. 이를 보면 선(線)도 준(皴)도 아닌 이른바 ‘단선점준’은 안견 이전에도 있었다.
「파초야우도」를 참고하여 ⑯「안견의 『설천도』와 작자미상의 『파초야우도(芭蕉夜雨圖)』를 대비한다」를 논하였다. 『설천도』 화면 오른쪽 중간의 가장자리 부분에는 ‘안견(安堅)’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따라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설천도』는 안견의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 『추림촌거도(秋林村居圖)』는 안견의 작품이다
간송미술관에는 안견의 그림 「추림촌거도(秋林村居圖)」가 소장되어 있다. 낙관이 없지만,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화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화평과 수집가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의 화제가 붙어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공재 윤두서와 석농 김광국의 구장품(舊藏品)으로, 김광국이 제첩한 명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에 실려 있었던 작품이다. 공재와 석농은 각기 당대 최고의 고서화 감식안(鑑識眼)이었다. 작품에 낙관이 없지만 안견의 작품으로 단정해서 화평과 화제를 썼다면, 이 작품은 필히 안견의 작품이 여러 점 들어있던 화첩에서 떼어내 『석농화원』에 넣은 것으로 판단된다.
공재 윤두서의 화평(畵評)에 “安堅博而不廣 剛而不健 山無起伏 樹少面背, 然其高古處 如寒墟小市 古屋危橋 樹枝攢鍼 石皺雲蒸 森然黯然 自不可及. 殆東方之巨擘 醉眠之亞匹.” 즉 “안견은 많이 알지만 넓지 않고 굳세지만 강건하지 못하여 산에 기복이 없고 나무에 앞과 뒤가 적다. 그러나 그의 고상하고 예스러운 곳과 추은듯한 언덕과 작은 저자, 오래된 집과 위태로운 다리, 나뭇가지가 바늘이 모인 듯하고 바위가 주름지고 구름이 피어나면서 뻑뻑하면서도 어두운 것은 진실로 따라갈 수 없다. 마땅히 동방의 거장으로 취면(醉眠, 金禔의 호)에 버금가는 짝이다.”(유홍준 교수의 『김광국의 석농화원』 인용)라고 하였다.
이토록 전승이 확실한 작품마저 안견의 진작임을 부정한다. 그렇다면 “이는 서구적인 신 식민사관이며, 이러한 논리를 확립한 사람이 과연 한국인으로서 제 정신머리가 있는 사람인가?”하는 의문이 필자는 ⑰「안견 작 『추림촌거도』와 『강향장색』」은 “문화맹(文化盲)이 아니라면, 윤두서와 김광국의 구장품으로 그들의 화평과 화제가 들어가 있는 작품이라면 당연히 안견의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논고를 썼다.
6. 안견 회화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
이른바 안견파 화풍이라는 말이 있다. “안견파 산수화에는 ‘편파이단구도(偏頗 二段構圖)’와 ‘단선점준(短線點皴)’과 ‘침형세수(針形細樹)’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라고 평가한다. 그러한 화풍을 보여주는 그림들을 안견의 작품이 아니라고 부정한 후에, 그러한 화풍을 보여주는 작품은 안견파 산수화라고 말한다. 이것은 궤변(詭辯) 아니면 무엇인가? 안견의 화풍이 없는 안견파라는 것은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안 모 교수에 의하면 “단선점준(短線點皴)은 2~3mm 정도의 짧은 선이나 점의 형태로 산, 언덕, 바위 등의 질감을 표현하는 준법으로, 가늘고 뾰족한 붓끝을 화면에 살짝 대어 약간 끌거나 터치를 가하듯 하여 집합적으로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서는 15세기 후반부터 발생하여 16세기 전반기에 유행하였던 한국적 준법으로 안견(安堅)의 작품이라 전해지는 작품에서 특징적으로 보인다”라는 사용 시기를 한정하는 단서(但書)를 달고 있다. 이 단어는 조선화나 동양화에 있어서 화보(畫譜)에 나오는 준법(皴法)도 아닌데, 안견이 창안한 화법도 아니고, 안견을 따른 작가들의 그림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기에 유행하였던 한국적 준법으로 사용 시기를 한정하는 단서는 이른바 단선점준이 나타나는 국박 소장의 안견 작품들은 안견의 작품임을 부정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논리이다. 이 단서에 의하여 단선점준이 나타나는 그림은 안견의 관지가 있어도 모두 안견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부정되며, 소위 단선점준이 고려말기의 작품에 나타난다고 하여도, 그러한 작품은 모두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기의 작품으로 판정하여야 한다. 엄밀하게 볼 때 ‘단선점준’이라는 단어는 안 모 교수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만이 안견의 유일한 진작이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만든 신조어로서, 그 사용 시기를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기로 한정한 가설이다.”
안견과 동시대의 화가로는 최경(崔涇)과 강희안(姜希顔) 석경(石敬) 이장손(李長孫) 최숙창(崔叔昌) 서문보(徐文寶)가 있으며, 여류화가 순창설씨(淳昌薛氏) 등이 있다. 그 직후에 안견의 영향을 받은 주요 화가로는 이상좌(李上佐)가 있다.
16세기의 주요 화가로는 이자실(李自實)과 신진사류화가 양팽손(梁彭孫) 김정(金淨) 신잠(申潛) 김시(金禔)가 있으며, 이암(李巖) 이경윤(李慶胤) 이정(李霆)과 여류화가 신사임당(申師任堂)이 있다.
필자의 논고 ⑱「초상화가 최경(崔涇)과 신숙주(申叔舟) 초상화」, ⑲「선비화가 인재 강희안(姜希顏)」, ⑳「조선초기의 여류화가 순창설씨(淳昌薛氏)부인」, ㉑「석경(石敬) 정론(正論)」, ㉒「이장손(李長孫)과 최숙창(崔叔昌), 서문보(徐文寶)」, ㉓「이상좌(李上佐)와 이자실(李自實) - 이상좌의 화원가계오대고정(畵員家系五代考整)」, ㉔「조선전기의 선비화가 학포 양팽손(梁彭孫)」, ㉕「요절한 중종조 선비화가 충암 김정(金淨)」, ㉖「아차산 아래의 선비화가 영천자 신잠(申潛)」, ㉗「16세기의 사인화가(士人畵家) 양송당 김시(金禔)」, ㉘「조선전기의 종실화가들 - 두성령 이암(李巖)과 낙파 이경윤(李慶胤) 가족, 탄은 이정(李霆)을 중심으로」, ㉙「여류화가 신사임당(申師任堂)」 등등에서 안견파 화풍과 조선전기의 화가들을 논하였다. 조선전기 회화의 실체를 판단할 수 있으므로 일독을 권한다.
7. 총론의 맺음말
안견은 조선전기 200년간 최고 최선의 화가이다. 그러나 그의 화풍에 관한 회화사학계의 논의는 『몽유도원도』로 한정하여, 오히려 그의 실체를 못 보도록 허공에 띄워 놓았다. 지난 1년여간 여기 통일뉴스에 연재한 필자의 논고를 저술의 목차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나의 려말선초 회화론』.
1. 「30년전 안견론쟁을 회상하며 - 안견 관(款)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에 관한 나의 고해성사」
제1부. 고려말기 회화론
2. 「고려회화의 다양성 연구의 단초(端初)를 우선 고려불화에서 찾아야」
4. 「『행화구욕도』와 이인로를 통해 본 고려와 금나라의 서화 교류」
5. 「고려말 화단(畫壇)에 관한 탐색(1) - 1. 익재 이제현과 이재 공민왕의 작품은 한국회화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6. 「고려말 화단(畫壇)에 관한 탐색(2) - 2. 작가미상의 고려후기 회화」
제2부. 려말선초 화가 3인 회화론.
7. 「려말선초의 서화가 순은 신덕린과 그의 작품에 관한 고찰」
제3부. 15세기 작가론(1) – 나의 안견신론」.
10. 「안견의 관향(貫鄕) ‘지곡(池谷)’. - 안견의 고향은 충남 서산이 아니라 지금의 서울시 강남구이다」
15. 「안견의 『소상팔경도』와 안평대군의 『소상팔경시첩』」
16. 「안견의 『설천도』와 작자미상의 『파초야우도(芭蕉夜雨圖)』를 대비한다」
제4부. 15세기 작가론(2).
18. 「초상화가 최경(崔涇)과 신숙주(申叔舟) 초상화」
22. 「이장손(李長孫)과 최숙창(崔叔昌), 서문보(徐文寶)」
제5부. 16세기 작가론
23. 「이상좌와 이자실 - 이상좌의 화원가계오대고정(畵員家系五代考整)」
24. 「조선전기의 선비화가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25. 「요절한 중종조 선비화가 충암(冲庵) 김정(金淨)」
27. 「16세기의 사인화가(士人畵家) 양송당(養松堂) 김시(金禔)」
28. 「조선전기의 종실화가들 - 두성령(杜城令) 이암(李巖)과 낙파(駱坡) 이경윤(李慶胤) 가족, 탄은(灘隱) 이정(李霆)을 중심으로」
맺음론
30. 「안견 총론」 (현재의 글)
필자는 결국 지난 30여 년간 안견과 안견에게 영향을 주었을 려말선초의 화단(畫壇), 그리고 안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여러 화가에 관하여 50편이 넘는 글을 썼다. 그 분량은 두터운 분량의 책 한 권은 족히 될 것이다. 그 최종 결론을 다시금 언급하고자 한다.
안견은 다양한 화풍을 구사하였고, 여러 분야의 그림을 그렸다. 『몽유도원도』는 안견의 대표작이기는 하지만, 안평대군이 대략 스케치하여 알려준 구도로 곽희의 화풍을 원용하여 그려달라고 주문한 그림(注文畵)이므로 안견의 기준작품이 될 수가 없다.
따라서 안 모 교수의 『몽유도원도』만이 안견의 유일한 직작이라는 가설에서 시작한 그의 안견론은 문화맹의 오류를 보여주고 있으므로, 그의 안견론을 무시한 상태에서 안견의 모든 전칭작품은 재검토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 회화사학계에서의 조선전기회화사는 전면적으로 다시 쓰여야 한다. 안견론이 새로 정립되지 않고서는 조선전기회화사는 허구로 점철되기 때문이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