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문 선생의 안가가 침탈당하면서 체포된 조직원들은 처음부터 혹독하게 고문을 당했다.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는 ‘고문 기술자’로 유명한 이근안을 수사에 투입했다. 당시 이근안은 경기도경 대공분실 소속이었다. ‘불곰’이란 별명처럼 건장한 체격의 이근안은 국가보안법 사건마다 고문 장비를 챙겨 출장을 다니던 특급 고문 기술자였다.
이근안은 특히 이재문 선생을 잔인하게 다루었다. 경찰이 급습할 때 창밖으로 던진 이재문 선생의 서류 보따리를 압수했기에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조직의 윤곽은 거의 드러난 상태였다. 그런데도 체포 당시 자상으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이재문 선생에게 이근안은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당시 체포된 남민전 조직원들의 증언을 보면, 이근안은 고문을 즐겼다고 한다. 고문으로 상대를 짓밟으면서 쾌감을 느끼는 ‘사이코패스’였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독립운동가들을 악랄하게 고문했던 노덕술과, 빨치산들을 잔인하게 죽였던 김종원의 후계자인 셈이다.
이근안은 유도의 업어치기로 상대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 수시로 팔다리의 관절을 꺾어 극심한 고통을 주었다. 손을 뒤로 꽁꽁 묶고 상체를 활처럼 거꾸로 휘게 해 철봉에 매달아 놓는 통닭구이 고문도 자주 사용했다. 이근안의 전매특허는 물고문과 전기고문이었다. 그놈은 죽지 않을 정도에서 고통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자신이 행한 숱한 경험을 통해 터득하고 있었다.
2차, 3차로 뒤늦게 체포된 사람들은 그나마 덜 당했다. 10.26이 터진 뒤에는 대공분실도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원래대로라면 수사가 마무리된 뒤 청와대로 불려가 특진에 대통령 표창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가 죽으면서 흐지부지되는 바람에 사기가 떨어졌다고 한다.
1994년 6월에 구국전위로 구속됐을 때, 나를 수사하던 경찰청 대공분실에는 팀장 격인 ‘홍반장’이란 자가 있었다. 이 자가 남민전 사건 당시 수사관이었다. 그때 일을 이야기하며 표창을 받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 또 “이재문은 우리가 심하게 다뤘는데, 안재구는 늦게 잡혀 운이 좋았다”라며 독사눈으로 내게 이야기했다. “나중에 더 크게 돼서 또 잡혀 와라”라며 비아냥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근안은 1980년대 전민노련, 민청련, 반제동맹 등의 국가보안법 사건을 수사할 때, 잡혀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떠벌였다고 한다.
“남민전의 이재문이 왜 죽었는지 알아? 나한테 당하면 너도 이재문처럼 돼.”
이근안의 고문 행각은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사건 당시 이근안에게 고문받은 김근태 의장의 폭로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6.29선언 후 곳곳에서 이근안의 잔인한 고문 행태가 폭로됐다. 이근안을 당장 구속하라는 여론이 일자 이근안은 돌연 경찰직을 사퇴하고 도망쳤다. 10년 만에 잡혀 법의 심판을 받았지만, ‘고문은 예술’이라고 지껄이며 전혀 뉘우치지 않았다. 출소한 뒤에는 책을 내고 목사 안수까지 받았다던가.
이재문 선생은 오랜 수배 생활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데다가 혹독한 고문 수사를 받으면서 급속도로 몸이 망가졌다.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에는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건강이 나빠졌다. 의무과에서는 외부 진료가 시급하다고 판단했지만, 안기부를 비롯한 관계당국은 이를 묵살했다. 어차피 죽을 사형수라며 무시했다. 설사 사형수라도 치료받을 권리가 있음에도 끝끝내 가족의 요청을 불허했다. 이재문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들은 아무런 조치 없이 그대로 방치했다.
이재문 선생의 병명은 ‘위유문부 협착증’이었다. 적절한 치료와 수술을 받으면 충분히 나을 수 있는 병이었다. 그랬다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음식을 삼키지 못하고 구토를 일삼는 처참한 고통은 겪지 않아도 됐다. 부당하고 억울한 죽음은 40여 년이 지나서야 풀렸다. 2024년 9월에 법원은 이재문 선생에 대해 외부 진료를 불허한 국가기관의 잘못을 인정하고, 가족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남민전 사건이 터진 뒤, 아버지가 이재문 선생과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1980년 9월의 2심 선고 직후였다. 아버지는 이때 세계 수학자들의 탄원 덕분에 무기형으로 감형됐다. 재판이 끝나고 이재문 선생은 제지하는 교도관들을 물리치며 환한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다가왔다.
“안 교수, 정말 잘 됐습니다. 우린 서로가 신념을 온전히 간직한 채 헤어지니 이별이라고 할 수 없겠죠. 동지는 일심동체이니 이별은 없는 것입니다. 안 교수가 살아남아서 우리 동네가 남의 동네로 변하지 않도록 끝까지 애써주세요.”
아버지는 ‘우리 동네’가 ‘남의 동네’로 변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이재문 선생의 말을 가슴에 새겼다. 그 말은 남민전이 세웠던 목표와 과제를 꼭 이루어 달라는 당부였다.
1981년 1월의 대법원 판결 후, 아버지는 사형이 확정된 두 동지를 남겨두고 이감을 가야 했다.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는 담벼락 안의 차가운 독방이기는 하지만 한곳에 있다는 게 위로가 됐다. 하지만 이제는 영원히 헤어져야 했다. 아버지는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때 이재문 선생이 인편에 마지막 인사를 전해왔다.
“어떤 독재정권도 민중의 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날이 멀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안 교수가 우리 조직을 책임져야 합니다. 부디 건강을 챙기세요.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꼭 세상에 전해주세요.”
아버지는 이재문 선생의 유훈을 감옥에 있을 때도, 출소한 뒤에도 잊지 않았다.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지키려고 애썼다. 아버지에게 이재문 선생은 동지이자 상부의 책임자이면서 지도자였다. 소년 시절에 자신을 투쟁의 길로 이끌어 준 밀양중학교의 벗 강성호이면서, 무릉동에서 자신을 ‘산사람’으로 교육해준 박철환 지도원 같기도 했다.
죽음이 임박해 왔음을 느낀 이재문 선생은 전봉준 장군의 옥중시를 즐겨 읊었다고 한다. 운명이 다한 자신은 더는 민족의 해방을 도모할 수 없지만, 지극한 그 마음을 이어갈 이들이 계속 나오리라 믿었을 것이다.
時來天地皆同力 때가 오니 하늘과 땅이 모두 힘을 합치는데
運去英雄不自謀 운명이 다한 영웅은 스스로 도모할 수가 없네.
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하고 의를 바로 세우는 데서 내가 잃을 게 없으니
爲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위하는 지극한 이 마음을 그 누가 알까.
이재문 선생은 1981년 11월 22일, 극심한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났다. 서울구치소로부터 “시신을 인수해 가라”는 통보를 받고 장조카인 이진일이 달려갔다. 눈을 뜬 채로 숨을 거둔 이재문 선생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뼈밖에 안 남은 모습이었다.
이진일은 작은아버지의 눈을 감겨 주고, 마포구 창전동에 있던 자신의 아버지 집으로 모시고 왔다. 이미 경찰이 골목 입구부터 깔려 드나드는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감시의 사슬은 죽어서도 풀리지 않았다. 이재문 선생의 영결식은 인천의 한 성당에서 거행됐다. 성당 안팎에는 사복경찰은 물론 전경들까지 배치됐다. 이들은 영결미사가 진행되는 내내 주변을 살폈다. 이재문 선생의 운구가 마지막 안식처인 인천의 천주교 공원묘지로 향했다. 경찰은 이곳까지 쫓아왔다.
이재문 선생의 별세 소식은 감옥의 동지들에게도 전해졌다. 아버지는 이재문 선생의 마지막 당부를 애통한 가슴속에 오래도록 되새겼다. 광주교도소에 있던 남민전 전사 김남주 시인은 「전사 1」이란 시로 이재문 선생을 기렸다. 김남주 시인은 안가가 발각될 때, 이재문 선생과 함께 있다 붙잡혔다. 이재문 선생과 마지막까지 같이 생활하며 가까이서 챙겼던 김남주 시인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전사 1
일상생활에서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름 빛내지 않았고 모양 꾸며
얼굴 내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시간엄수가 규율엄수의 초보임을 알고
일 분 일 초를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동지 위하기를 제 몸처럼 하면서도
비판과 자기비판에 철두철미했으며
결코 비판의 무기를 동지 공격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조직생활에서 그는 사생활을 희생시켰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가리지 않고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먼저 질서와 체계를 세워
침착 기민하게 처리해 나갔으며
꿈속에서도 모두의 미래를 위해
투사적 검토로 전략과 전술을 걱정했다.
이윽고 공격의 때는 와
진격의 나팔소리 드높아지고
그가 무장하고 일어서면
바위로 험한 산과 같았다.
적을 향한 증오의 화살은
독수리의 발톱과 사자의 이빨을 닮았다.
그리고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의 준비에 착수했으며
그때마다 그는 혁명가로서 자기 자신을 잊은 적이 없었다.
1980~90년대 대학의 학생회실에는 어디를 가든 김남주 시인의 「전사 1」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때는 이런 전사의 삶을 살자는 다짐으로만 여겼다. 이 시가, 김남주 시인이 자신의 지도자였던 이재문 선생을 추모하며 감옥에 쓴 시라는 건 다들 잘 몰랐다.
또 다른 중앙위원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신향식 선생은 1982년 10월 8일 정오에 서울구치소에서 형이 집행됐다. 신향식 선생은 남민전에서 ‘혜성대’ 대장을 맡았다. 혜성대는 다양한 응징 투쟁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남민전의 특별기구였다. 아버지가 교양선전선동부를 맡아 주로 조직원들의 사상교육을 책임졌다면, 신향식 선생은 남민전의 투쟁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다.
신향식 선생은 고문 수사관들조차 나중에는 존경을 표할 정도로 가혹한 상황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통혁당과 남민전을 거치며 한순간도 지조와 신념을 잃지 않았던 낙천적인 혁명가였다. 사형을 앞두고는 “죽으면 내 무덤가에 잣나무나 한 그루 심어 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신향식 선생의 사형집행 소식을 들은 김남주 시인은, 그의 불꽃 같은 삶과 죽음을 담은 추모시 「전사 2」를 감옥에서 썼다.
전사 2
해방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많은 사람이
실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수천 명이 죽어갔다.
수만 명이 죽어갔다.
수십만 명이 다시 죽어갈지도 모른다.
지금도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나라 곳곳에서 거리에서 공장에서 감옥에서
압제와 착취가 있는 곳 바로 그곳에서
어떤 사람은 투쟁의
초기 단계에서 죽어갔다.
경험의 부족과 스스로의 잘못으로
어떤 사람은
승리의 막바지 단계에서 죽어갔다.
이름도 없이 얼굴도 없이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는 지하의 고문실에서
쥐도 모르게 새도 모르게 죽어갔다.
감옥의 문턱에서
잡을 손도 없이 부를 이름도 없이 죽어갔다.
그러나 보아다오 동지여!
피와 땀과 눈물의 양분 없이
자유의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했으니
보아다오 이 나무를
민족의 나무 해방의 나무 투쟁의 나무를
이 나무를 키운 것은
이 나무를 이만큼이라도 키워 낸 것은
가신 님들이 흘리고 간 피가 아니었던가.
자기 시대를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자기 시대와 격정적으로 싸우고
자기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데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오늘 밤 또 하나의 별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떨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투쟁의 길에서
자기 또한 죽어갈 것이라는 것을
그 죽음이 결코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 그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어머니인 조국의 대지에 스며들어
언젠가 어느 날엔가는
자유의 나무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며
해방된 미래의 자식들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서
그가 흘린 피에 대해서 눈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쑥스럽게 부끄럽게
이야기할 것이다.
유신독재에 맞서 격정적으로 싸우다 조국의 대지 위에 떨어진 별, 이재문과 신향식……. 별이 된 두 사람은 오늘도 조국의 하늘에서 영원히 빛나고 있다.
“역사에서 위대한 것은 승리만이 아니다. 패배 또한 위대한 것이다. 이 땅에서 아름다운 것, 그것은 싸우는 일이니 그것을 다른 데서 찾지 말아라.”(김남주의 시 「잣나무나 한 그루」 중에서)
살아남은 남민전의 전사들은 두 사람의 뜻을 잊지 않았다. 마음속에 깊이 간직했다. 전사들은 감옥에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에게 감옥은 또 다른 투쟁의 공간이었다. 위대한 패배를 딛고 다시 일어서는.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