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1월 12일 서울 은평구 ‘이호철 북 콘서트 홀’에서 개최 예정인 혜원 신윤복 학술대회에 관여하느라 지난 제86~7회 연재에서는 짧은 논고를 기고하였다. 이번 제88회 기고도 짧다. 그러나 상당히 중요한 고찰임은 변함이 없다.
아래의 석경에 관한 글은 필자와 이건환의 공저[주1] 『안견 – 재조명』 pp.211~214를 증정(增訂)한 글이다. 석경(石敬, ?~?)은 조선전기의 매우 중요한 화가이다. 그를 어떻게 규명하느냐에 따라 안견과 그의 후계자들의 화맥(畵脈) 계보(系譜)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1. 석경(石敬)의 기존론
석경에 관한 기존론은 답답할 정도로 문제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석경’ 항목은 안 모 교수가 아래와 같이 집필하였다.
“석경(石敬) / 인물·묵죽(墨竹)·운룡(雲龍)을 잘 그렸던 화가로, 안견(安堅)에게서 그림을 배웠던 제자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안견의 제자였다고 하는 것은 오세창(吳世昌)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만 보이고 있고, 다른 기록들에서는 확인되지 않아 분명한 사실로 단정지을 수 없다. 또 『명종실록』에는 ‘석경(石璟)’이라는 화원(畵員)이 이상좌(李上佐)와 함께 1549년(명종 4)에 중종의 영정(影幀)을 그렸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석경은 바로 석경(石敬)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되므로, 석경은 16세기 중엽에 활동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그가 1세기 전의 화가였던 안견의 제자일 수는 없고, 아마도 안견파의 화풍을 추종했던 16세기의 화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그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산수도」(간송미술관 소장) 한 점과 그의 도인(圖印)이 찍힌 「운룡도(雲龍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 점이 남아 있다. 이 중 「산수도」는 안견파의 화풍을 따른 16세기의 작품으로 생각되며, 「운룡도」는 여의주를 앞발로 쥔 채 구름 속으로부터 몸을 부분적으로 드러낸 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즉 ①석경(石敬)과 석경(石璟)은 동일인이다. ②석경(石璟)은 16세기 화원이므로 석경(石敬)은 안견의 제자가 아니다. 안 모 교수의 논리대로 나간다면 안견으로부터 직접 배운 안견의 제자는 없거나 확인되지 않는다. 즉 안견의 직접적인 화맥은 끊겼다. 이렇게 되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까지 15세기의 회화와 16세기의 회화는 연결되지 못하고 따로 노는 결과를 가져온다.
2. 안견 화풍의 계승자들
우리나라의 미술사학자들은, 조선시대 초기와 중기의 화가로서 안견의 화풍을 따른 화가로는 “석경(石敬), 양팽손(梁彭孫, 1488~1545), 정세광(鄭世光), 신사임당(申思任堂, 1504~1551), 김시(金禔, 1524~1593), 이정근(李正根, 1531〜?), 이흥효(李興孝, 1537~1593), 이정(李禎, 1578〜1607년), 이징(李澄, 1581~1645), 김명국(金明國, 1600〜?), 이성길(李成吉, 1562〜?), 조직(趙溭, 1592~1645)” 등이 있다고 안 모 교수는 언급하였고,[주2] 이외에도 “조직과 유은(雅隱)도 안견을 조(祖)로 했다”고 고유섭(高裕燮, 1905~1944) 선생은 언급하였으며,[주3]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기졸(記拙)」에 의하면 정세광, 이정근, 이상좌(李上佐), 이불해(李不害, 1529〜?), 강효동(姜孝同)도 안견의 화풍을 따랐다고 했다.[주4]
그런데 이들 중에서 김시, 이징, 김명국 등은 안견화풍과 함께 절파화풍(浙派畫風)도 따라 그렸으며, 이상좌는 그의 작품이 흔치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상좌는 안휘준 교수가 「몽유도원도」를 예시하여 설명하는 류의 안견화풍을 외면하고 마하파화풍(馬夏派畵風)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안견화풍의 근원이 곽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안견은 마원(馬遠, 남송대 화가)과 하규(夏佳, 남송대 화가)의 화풍도 소화해 내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반증하여 줄 수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안로가 「용천담적기」에서 언급한 “곽희식으로 그리면 곽희식이 되고 이필식으로 그리면 이필이 되었으며 유융이나 마원도 마찬가지였다”라는 기록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3. 석경(石敬)과 석경(石璟), 그리고 석경(石慶)
이상의 인물들 가운데 석경(石敬)은 안견의 제자로 알려진 유일한 인물로서, 안휘준 교수는 그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교묘히 부정하여 안견의 화맥(畵脈)이 끊어진 것으로 만들었다.
“안견의 제자로 알려져 있고 인물과 대나무 그리고 산수를 잘 그렸던 석경(石敬)이 있다. 석경의 이름은 “석경(石璟)”으로도 표기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 “석경(石璟)”은 이상좌와 함께 「중종영정』을 제작하였음이 『명종실록』에 의하여 확인된다. 따라서 “석경(石敬)”이 “석경(石環)”과 같은 사람이라면 그는 최소한 『중종영정』을 그렸던 명종4년(1549년)까지 활약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또, 그가 사실로 안견의 제자였다면, 그가 안견의 제자가 되었던 것은 안견이 노년기에 있던 1460년대나 1470년대, 그러니까 석경이 10세 전후한 어린이였을 때일 것이다.”[주5]
이러한 안 모 교수의 언급에 의하여 석경(石敬)과 석경(石璟)이 동일인이라면, 그리고 석경이 늦어도 1470년대에 10세 전후한 어린이였다면 『중종어진』을 그린 1549년에는 석경이 79세쯤 되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중종어진』을 그린다는 것은 화원임을 의미하는데 70대 후반까지 화원을 지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위와 같은 안 모 교수의 주장 즉 석경(石敬)과 석경(石璟)이 동일인이라면 석경(石敬)은 안견의 제자일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안휘준 교수는 위에서 언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석경(石敬)과 석경(石璟)이 동일인인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또한 “그가 1세기 전의 화가였던 안견의 제자일 수는 없고, 아마도 안견파의 화풍을 추종했던 16세기의 화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석경(石敬)과 석경(石璟)은 절대 동일인이 아니다. 우선 석경(石敬)에 대하여 문헌을 찾아보면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의 「지봉류설(苦峰類說)』[주6]과 그의 아들 이식(李植, 1584〜1647년)의 『택당집(澤堂集)』[주7] 등에서 그의 작품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그의 용 그림에 석경(石敬)이라고 낙관이 되어 있는 작품이 있어 그의 존재가 확실시된다.
반면에 석경(石璟)은 이상좌와 함께 「중종어진」을 그린 바 있다고 『명종실록』 9권(명종4년 9월 14일, 1549년)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는 틀림없이 화원으로 생존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충주석씨족보(忠州石氏族譜)』를 찾아본 결과 그는 충주석씨 시조 석린(石隣, ?~1187)의 12세손[주8]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명종실록』의 석경(石璟)에 대한 기록을 두고 석경(石敬)의 생존연대 추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 석경(石敬)과 석경(石璟) 이외에 또 다른 석경(石慶)이 중종조에 있었음을 엄흔(嚴昕, 1508~1553)의 문집인 『십성당집(十省堂集)』에서 알 수가 있다. 이 문집에는 엄흔이 쓴 「제대수소장 석경화팔폭(題大樹所藏 石慶畵八幅)」[주9]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석경(石慶)이 그린 로(鷺, 해오라기), 안(鴈, 기러기), 호(虎, 범), 우(牛, 우), 저구(雎鳩, 물수리와 비둘기), 학(鶴, 두루미), 작(鵲, 까치), 압(鴨, 오리) 등 여덟 동물에 대한 그림을 제(題)하고 있다. 이는 석경(石慶)이 수묵 또는 영모에 능한 화가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석경(石慶)은 엄흔(嚴昕, 1508~1553)의 생존연대로 보아 석경(石璟)과 동일인일 수 있다. 그러나 석경(石敬)은 다른 사람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석경(石敬)의 『운룡도(雲龍圖)』 그림에는 석경(石敬)이라는 인흔이 있다. 그리고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안견의 『용(雲龍圖)』 그림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석경(石敬)의 『운룡도』 그림을 비교하여 보면 공교롭게도 그 구도와 화법면에서 매우 유사한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러한 연관성은 석경(石敬)이 안견의 제자라는 오세창의 기록과 구전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 오세창은 『근역서화징』에 석경을 홍귀달(洪貴達, 1438~1504)과 조선시대 유일의 여성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으로 종7품 화사(畫史)를 지낸 홍천기 앞에다 수록하였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의하면, “홍천기는 절세미인이었으며, 최저(崔渚) 안귀생(安貴生)의 무리와 함께 산수화에 이름이 있었으나 화격이 높지 못한 용품(庸品 : 낮은 품계)이었다”고 한다. 즉 오세창은 석경을 세조조에 활동한 화가로 본 것이고, 안견의 제자로 못박아 기록하였다.
석경(石敬)이 안견의 제자가 아니라는 안휘준 교수의 논리는, 결국 안견화풍의 계승자들은 안견에게서 직접 배운 것이 아니라 안견의 작품을 통하여 안견화풍을 모방하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이것은 안견 화맥은 후대에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는 관점을 조선초기의 회화사에 심어 놓음으로써 민족주의 관점에서 형성되어야 할 민족회화사관을 흩트리고자 하는 저의가 아닌지 의심이 간다. 민족주의 관점에서 형성되어야 할 민족회화사관은 우선하여 화맥의 형성과 연속적 계승성을 그 중요한 바탕으로 성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석경(石敬)이 안견의 제자라는 사실에는 이토록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4. 맺음말; 석경의 작품에 관하여
현전하는 석경(石敬)의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운룡도(雲龍圖)」 1점(25.2×30.3cm)과 간송미술관 소장의 산수도 「계산청월도」 1점(25.2×22.0㎝, 지본채색)이 있다. 석경의 「운룡도」는 구름 속에서 용이 앞발로 여의주(如意珠)를 잡은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용의 눈을 부리부리하게 한 묘사력과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구름의 표현에서 석경의 높은 기량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품 안견의 작품으로 전하는 「룡」(25.0×36.0cm, 지본수묵)과 대비가 된다.
「계산청월도」는 비교적 좁은 화면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세필로 산속 계속의 모습과 그 속에 자리 잡은 집, 다리를 건너 산속으로 들어가는 인물 등을 담아내었다. 이 산수도는 석농 김광국(金光國, 1709~1783)의 제첨이 있는 것을 보아 그의 구장품으로 보인다. 한편 간송미술관에는 석경의 작품으로 전하는 영험한 지초(芝草)를 캐는 마고 선녀의 모습을 그린 「마고채지」 1점(19.0×21.9㎝)도 있다. 추후의 연구가 필요하다.
석경의 산수 「계산청월도」에서는 안견파 화가들이 즐겨 구사한 화풍이 보인다. 안견파 화풍이란 안견이 즐겨 구사한 화풍이라는 말이다. 『몽유도원도』에는 안견이 즐겨 구사한 안견파 화풍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몽유도원도』는 곽희 화풍으로 그려 달라고 요청한 주문 작품이기에 안견의 전형적 화풍이 들어가지 않았다. 석경의 「운룡도」와 안견의 「용」을 비교하면 두 작품의 유사성을 볼 수 있다.
석경이 안견의 제자라는 오세창의 주장을 일거에 부정한 안 모 교수의 논리는 우리나라 조선전기 미술사를 흔들고 토막 낸 현대판 자학사관(自虐史觀)이 아니면, 민족을 부정하는 신(新)식민지 사관인가?
주(註)
[주1] 이건환-이양재 공저, 『안견 – 재조명』, p.238., 1994년 6월 1일, ‘한국미술연감사’.
[주2] 안휘준, 『개정판 – 안견과 몽유도원도』, p.165., 2009년 9월 29일, ㈜사회평론.
[주3] 고유섭, 『한국미술문화사논총』, p.101., 1966년, 통문관.
[주4] 이영숙 역, 「윤두서의 『기졸』 화평」, 『미술사연구』, 1987년 6월 창간호.
[주5] 안휘준, 『한국회화사』, p.128., 1980년, 일지사.
[주6] 李粹光, 『芝峰類說』 / "羅斯文級(1552-?)家藏石敬墨竹一幅, 畵品甚奇, 李容齋荇(1478〜1534)題詩曰, 石生筆有神, 信手寫生竹, 凜凜千畝姿, 寄此一枝足, 風人美君子, 所譬淇園祿, 對之至歲寒, 可使食無肉, 其筆與畵, 足稱雙絶‥‥‥. 오세창, 『근역서화징』 p.60에서 재 인용.
[주7] 李植, 「澤堂集」 / "羅夢賚(萬甲, 1592〜1642)家藏畫帖序曰, 羅學士夢賚先君牧使公舊藏, 有石敬畫帖, 帖以黑爲質而用黃白金泥筆之, 左旁各貼詩, 皆一代名家, 余高王父容齋公一章, 亦在其中, 考諸本集, 爲尹主簿宕者所作, 不知其幾傳而爲羅氏有也, 夢賚嘗欲改粧, 離畵與詩, 丁卯虜變, 畵湮於海而詩獨全, 乃命國工李澄, 按詩作畫, 一依前觀, 復以其詩配焉, 夢賚要僕記其槪曰, 吾恐後人, 以澄疑敬也,……”, 오세창, 『근역서화징』 p.60에서 재 인용.
[주8] 始祖 ①石鄰⟶②石靖⟶③石㼀⟶④石興國⟶⑤石道⟶⑥石良善⟶⑦石天乙⟶⑧石汝明⟶⑨石文成→⑩石義正→⑪石期珹→⑫石璟. 그런데 족보를 보면 석경(石璟)은 무관(無冠)의 인물이다.
[주9] 嚴昕, 「題大樹所藏石慶志八幅」, 『十省堂集』.
鷺, 敗葦枯荷秋色微, 一雙白鷺晩相依, 閑情最在窺魚處, 人道無心亦有機.
鴈, 昨夜前溪風雨忙, 殘蘆一葉臥寒塘, 愁鴻相對情無盡, 萬里衡陽去路長.
虎, 巖前巖後樹無風, 獨獸依山兩眠紅, 直恐朝來聲一起, 驚霆白日擊晴空.
牛, 耕罷黃牛傍野眠, 靑烟漠漠草芋芋, 從今自在渾無管, 妄却當時兩鼻穿.
雎鳩, 朝在洲東暮在西, 雙飛雙浴復雙栖, 人間離別知多少, 一見河鳩不勝悽.
鶴, 松間獨鶴立多時, 回首靑冥有所恩, 無限笙蕭飛去意, 王喬蝉蛻一何遲.
鵲, 槎牙老樹小墻西, 時有寒禽夜上啼, 風雪滿空來不斷, 一枝無處可安栖.
鴨, 沙寒水冷奈渠何, 兩岸風生蘆荻多, 幸苦移巢依草際, 兎敎客易困滄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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