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를 담은 삶들’은 현재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삶을 듣고자 기획되었습니다. 혹자는 박정희식 산업화의 신화가 깨진 것처럼 과거 민주화 ‘운동’의 신화도 깨졌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운동’적 삶을 살아가는 많은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에는 역사적 서사가 담겨 있습니다. 친구가 때로는 열사가 되고 일상적인 활동이 역사에 큰 사건으로 남기도 합니다. 역사적 사실인 ‘서사’를 안고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순간들을 담고자 합니다. 수수의 ‘서사를 담은 삶들’ 연재는 격주 화요일에 게재됩니다. 수수는 이형숙의 활동명입니다. / 필자 주

 

대학시절 박태순(왼쪽)과 김갑수의 모습. [사진-김갑수 제공]
대학시절 박태순(왼쪽)과 김갑수의 모습. [사진-김갑수 제공]

현재 한국의 사회적 화두는 능력주의다. 이 말은 공정이라는 외피를 통해 정의라 불리기도 하지만 본질은 능력주의를 포장하는 말이다. 김동춘 교수는 그의 저서 ‘시험 능력주의’에서 능력이 신흥종교가 되고 심지어는 도덕적 표준까지 되었다고 지적한다. 능력주의 뒷면에 있는 배제되어 패배한 자들 곧 능력 없는 사람들로 치부되는 ‘노동자’들은 무능력자로 부추겨 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때 한국에는 노동자의 삶을 선택하는 수많은 대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노동해방’과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대학 졸업과 함께 주어지는 부르주아 또는 쁘띠 부르주아적 삶을 거부하고 이러한 선택을 했다. 1980년대 이들이 다니던 대학은 신분상승의 공간이 아니라. 가난하다는 이유로 주눅 들었던 삶을 해방시키는 공간이었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서사들: 열사 박태순의 삶

박태순은 영등포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며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1985년 한신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 이후에도 사회변혁을 꿈꾸며 노동운동을 하고자 했다. 1989년 5월 노태우 정권 해체를 요구하며 경기도 수원지방검찰청을 점거한 후 구속되어 1년 6개월간 수감되었다. 출소 후 박태순은 군입대를 거부하며 수원 지역 등의 노동현장에 위장 취업하였다. 위장 취업한 수원지역 공장에서 해고된 후 더 이상 이 지역에서 있을 수 없게 되면서 부천의 공장에 다니며 입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원지역 노동자 모임을 조사하던 기무사와 경찰에 의해 박태순도 사찰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92년 실종되었다.

2001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박태순 실종사건을 조사하던 중 시흥역에서 열차사고로 1992년 8월 29일 사망한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박태순이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벽제에서 화장되어 묘지에 묻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친구들은 박태순을 경기도 모란공원에 안장하였다.

박태순이 기무사 요원과 경기 경찰청의 사찰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밝혀졌다. 사찰을 받던 사람이 왜 열차사고를 당하고 무연고자가 되어 십년간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는지 등 박태순 사망에 대한 실체적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서사를 안고 살아가는 김갑수의 삶

김갑수와 친구들. [사진-김갑수 제공]

박태순의 친구 김갑수는 1985년 한신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입학 당시부터 이미 한신대학교는 교수에서 학생까지 전두환 정권의 타도를 외치는 분위기가 강했다. 기독교 학교로서 정규수업 과정에 문익환 목사 등이 수업 시간에 군부독재 타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수업들이 진행되었다. 이미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박태순과 달리 김갑수는 단지 철학이 좋아서 입학하였지만 진보적 정치 분위기에 익숙해지며, 자연스럽게 사회문제에 눈뜨게 되었다.

대학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1학년을 마친 직후 군대를 간다며 송별식까지 마친 친구 이창현이 공장에 들어갔던 일이다. 군대에 간 줄 알았던 친구는 사라지고 이창현의 아버지가 학교로 아들을 찾으러 오셨다. 친한 친구사이라도 그 당시는 위장취업으로 인해 무슨 일이 생기면 경찰 등 관계 기관의해 조사를 받을 수 있어서 서로를 위해 비밀로 하였다. 친구가 노동운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김갑수는 생각이 많아졌다.

1986년 10월 학생시위를 무리하게 탄압하면서 건대에서 농성 중이던 학생 1,500여명이 구속되는 건대항쟁이 터졌다. 이로 인해 한신대 학생 100명이 구속되면서 학내에 활동가들이 없게 되었다. 김갑수는 3학년 때인 1987년 철학과 학생회장을 하며, 학생회 활동을 하게 되었다. 학생운동 후 그는 노동운동을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다.

그에게 철도 노동자가 된 과정을 물어 보았다. “학생회 활동 후엔 자연스럽게 공장에 들어가려고 준비했었어요. 수원, 안양, 안산 등 들어갈 공장을 찾아서 면접도 많이 보고 했는데 계속 떨어지더라고요, 그러다가 이렇게 마찌고바 같은 작은 공장보다 큰 공장에 들어가자고 생각했어요, 당시 간단한 시험을 보면 철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친구들 세 명이서 철도청 현장 기술직 시험을 봤어요. 다행히 세 명 모두 합격해서 철도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처음 철도에 들어와서 근무를 시작했던 곳이 청량리 차량기지였다. 지금도 그가 일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입고 된 전동차를 점검하고 수리하는 일이 차량기지에서 하는 일이다. 1992년 입사해서 보니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전동차 아래로 들어가 수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하는 작업복이나 장갑조차 제대로 제공받지 못하는 열악한 조건이었다.

이러한 근로조건을 바꿔보고자 같이 입사한 동기들과 작업복과 장갑 제공을 제대로 하라는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요구들이 계속되자 근로 조건이 점차 개선되었다. 가림막조차 없던 정비 현장에 천막이 쳐지고 지붕이 있는 정비 작업장이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보람을 느꼈다.

당시 전국철도노동조합은 삼중 간선제에 의해 노동조합이 구성되는 비민주적인인 노동조합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노동조합의 문제점이 지적되고, 철도노동조합 직선제 쟁취를 위한 활동들이 활발해지면서 2000년 대법원에서 삼중 간선제의 조합장 선출이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김갑수는 청량리차량지부 부지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 활동을 하고 있었다.

2001년 전국철도노조가 직선제에 의해 민주노조로 바뀌면서 그는 조직국장으로 노동조합 상근 조합 활동가가 되었다. 이후 2003년에는 서울지방본부장으로 선출되어 2003년 6월 전국철도노조 파업을 이끌었다. 이 파업으로 인해 그는 구속되고, 해고되었다. 2003년 해고된 이후 2019년 복직되기까지 17년간 해고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2017년 대량징계 철회와 철도노조 외주화를 반대하며 단식농성 중인 김갑수 수석부위원장. [사진-레디앙]
2017년 대량징계 철회와 철도노조 외주화를 반대하며 단식농성 중인 김갑수 수석부위원장. [사진-레디앙]

철도 해고자로서의 삶은 청량리 차량기지와 철도노동자로서 그가 경험했던 노동자들의 현실과 다른 것이었다. 공공운수노조의 비정규직 조직가로서 2004년 활동을 시작하며 전국의 열악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2003년 파업으로 인해 구속되었다가 출소한 이후 친구 박태순의 죽음을 알게 되고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에게 박태순은 고민을 함께 나누는 친구였다. 친구 이상현의 노동현장 투신과 같이 박태순도 안양, 수원, 부천지역에서 공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하고자 했다. 박태순을 마지막 본 것은 1992년 자신의 신혼집 집들이 자리였다. 집들이에 들러 함께 어떻게 앞으로 활동 할 것인지 이야기하고 헤어진 일주일 후 박태순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소위 ‘중부지역당 사건’이나 조직사건에 연루되어 공안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수소문 끝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실종신고를 했다. 몇 년간은 병원 등도 찾아다녔다. 박태순을 찾는 신문광고를 내기도 했다. 혹시 절에 들어간 건 아닌지 생각해 보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는 친구들과 그러기를 바라기도 했다. 이렇게 10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막연하게 기다린 시간이었다.

유가협과 추모연대 등의 422일간의 국회 앞 농성으로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법이 제정되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자 박태순 실종사건을 접수하였다. 친구는 1992년 8월 29일 열차사고로 사망하여 벽제 무연고자로 묘지에 묻혀있었다. 그리고 더 기막힌 것은 친구 박태순이 기무사와 경기경찰청 공안과에 의해 쫓기던 중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기무사 요원들은 이미 박태순이 열차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조사권한이 부족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로 인해 의혹은 있으나 누가 왜 박태순을 죽게 만들었는지 밝히지 못했다. 이 죽음을 은폐한 세력이 어디까지 인지도 밝히지 못한 채 위원회 조사 활동이 종료되었다.

그리고 2005년 12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출범하여 다시 조사를 신청하였다. 2010년 이 위원회도 제대로 진실을 규명하지 못한 채 진상규명 불능으로 끝나게 되었다. 2021년 출범한 2기 진화위에 다시 조사를 신청하였다. 그리고 지금 진상규명 조사가 진행 중에 있다.

김갑수는 친구 박태순의 죽음을 밝히는 진상규명 활동과정에서 추모연대의 진상규명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이 모임은 경찰, 군, 국정원(중정, 안기부) 등에 의해 의문사 당한 죽음의 진실규명을 위해 모인 모임이다. 그는 친구의 죽음뿐만 아니라 한국의 사회운동 과정에서 사망한 의문사의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철도노동자로서의 노동운동과 진상규명 활동을 병행하면서 그는 친구 박태순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기무사 요원이나 경기 경찰 관계자가 진실을 말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 현실은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생각이다.

친구 박태순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 활동과정에서 만난 추모사업회 활동가 등 시민사회운동가들과의 만남은 그에게 ‘운동’에 대한 다른 영역을 경험하게 했다. 무엇이 다른지 그에게 질문하였다.

“노동운동은 재생산 구조 속에 있어서 활동가들이 소진되지 않을 수 있지만, 사회운동 영역은 역량보다 당위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 감당하기 어렵더라도 감내하고 일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활동가들이 재충전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것은 아마도 시민사회 운동과 노동운동과의 차이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박태순의 친구 김갑수는 철도노동자로 살아가며 박태순의 죽음이 밝혀지는 그날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노동운동에 몸담을 것이라고 했다.

 

필자 이형숙 약력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추모연대 집행위원장/

성공회대학교 사회학 박사(한국군(軍) 관련 논문)/

성공회대학교 강사/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 전문위원/

한‧일노동자연대기록모임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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