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동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서울 최초의 호텔 <손탁호텔>

이화여고 백주년기념관 앞에는 바로 그곳이 지난 날 <손탁호텔>이 있었던 자리임을 알리는 표석이 놓여 있다. 이곳 정동일대가 1880년대 서구열강들의 공사관이 들어서고 선교사들의 선교근거지로 되면서 양인촌이 되었고, 서재필, 이완용 등이 <정동구락부>를 조직하면서 소위 개화운동의 근거지가 된 것이다.

개화운동의 근거지가 갑신정변시기 북촌이었던 것은 당시 종로구 교동에 위치한 일본공사관을 통해 일본의 힘을 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며, 약 10년 뒤 그 근거지를 이곳 정동으로 옮긴 것은 이제 이곳에 또 다른 외세, 서양세력의 힘을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처럼 개화운동세력은 조선의 근대화를 추구한다는 올바른 지향에도 불구하고 방법론에 있어서 철저히 사대적이었던 것이다.

정동구락부는 서재필이 주도하여 조직되었는데 서재필은 갑신정변시기 5명의 주동자가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로 참여하였으며, 정변실패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돌아 온 것이다. 갑신정변이 일본을 등에 업고 추구했던 근대화의 일환이었다면, 이제 정동구락부에서의 그의 근대화운동은 미국을 등에 업고 추진되는 것이었다. 그것도 이제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란 이름을 갖고 미국인 신분으로 활동하였다.

정동구락부는 처음 미국공사, 프랑스영사 그리고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과 민영환, 이완용, 윤치호, 이상재 등 조선인관료들이 사교를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하지만 점차 정치적 색채를 띠기 시작하였으며, 이른바 고종을 경복궁에서 미국공사로 탈출시키려 했던 '춘생문사건'이나 러시아공사관으로 탈출을 성공시킨 '아관파천' 등에 깊숙이 개입하고 이후 <독립협회>의 모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주로 만나며 활동무대가 되어 준 곳이 바로 앙투아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의 사저였다. 정동구락부의 마돈나 역할을 한 손탁은 프랑스계 독일인으로 초대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처형이다. 1885년 32세의 나이에 조선에 들어와 1909년 돌아갈 때까지 25년간 이곳에 머물며 사교계의 꽃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녀의 타고난 사교성과 능숙한 조선어 구사능력으로 명성황후는 물론 고종과도 가까운 사이가 되면서 러시아공사관과 궁중을 수시로 오가며 양측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청일전쟁 후 명성황후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세력을 끌어들이려 할 때 그 다리를 놓은 것도 그녀였다. 이것으로 손탁은 1895년 고종으로부터 왕실소유의 한옥 한 채를 하사 받았는데, 바로 여기서 손탁호텔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집을 살롱으로 탈바꿈하여 정동구락부를 비롯한 각종 사교모임의 무대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삼국간섭 이후 을미사변, 춘생문사건, 아관파천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기에 그 주요 무대가 된 것이다. 또 독립협회는 독립관이 완공되기까지 비공식적인 활동무대로 여기를 이용하였다.

▲ 서울 최초의 호텔인 손탁호텔 [출처-한국콘텐츠진흥원]

이러던 것이 1902년 구 가옥을 헐고 그 자리에 2층 양옥의 손탁호텔을 지었다. 하지만 이 건축자금은 궁내부에서 지출하였기에 공식적으로는 궁내부소속의 호텔이며 정식명칭도 '한성빈관'(漢城賓館 : 孫凙夫人家)으로 표기하고 있었으나 보통 손탁호텔로 통했다. 이렇게 시작된 손탁호텔에는 1905년 을사늑약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가 묵었으며, 영국수상 처칠과 미국대통령 시오도어 루즈벨트의 딸 엘리스도 이곳을 이용했다.

하지만 대한제국 중립외교의 거점으로 이름 날리던 손탁호텔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후 화려한 막을 내렸다. 손탁은 자신의 뒷배경이 되어 주던 러시아세력이 퇴조하면서 1909년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대통령의 딸 엘리스가 손탁호텔에 온 사연>

손탁호텔에 뜬금없이 미국대통령의 딸 엘리스가 왜 묵게 된 것인지 궁금하여 당시의 정세에 대하여 약간 공부해 보니, 우리가 일본의 승리로 알고 있는 러일전쟁과 이에 따른 일본 내 반미시위와 관련된 것이라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함으로써 손탁호텔 역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버렸으며, 우리나라에서의 일본의 지위는 급격히 상승하였고, 그 뒤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마저 일본에게 빼앗긴 것이다. 일본의 승리는 당시 전 세계적으로 충격이었다. 일본인들은 칭기즈 칸이래 서양에 대한 동양의 첫 승리라고 목청을 높였고, 이로써 일본은 국제정치무대의 실세로 자리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승리의 이면에는 미국이라는 또 다른 제국주의가 존재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 조선을 독점하였으며, 남 사할린을 할양받았다. 그리고 여순과 대련의 조차권을 확보했다. 이른바 포츠머스강화조약의 결과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러일전쟁을 매듭짓기 2개월 전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이 미국에 굴복함으로써 미국대통령 루즈벨트의 전폭적인 이면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은 은폐되었다. 이러한 실상을 일본국민들에게 알릴 수 없는 일본정부는 그저 일본이 서양대국을 이겼다는 사실만을 부각시킨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러일전쟁의 승리로 별로 얻은 것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한 일본 신문들은 1905년 9월 1일자 기사에서 '굴욕적인 조약 체결', '전 각료와 원로에게 책임을 묻는다', '국민들은 비분강개, 가만있지 않는다' 등의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또한 동경대학교수 7인이 반대결의문을 발표하는 등 언론과 지식인사회에서 그 비판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는 바로 일반대중들의 강화조약 반대운동을 추동하며 동경시내를 순식간에 폭동의 현장으로 바뀌게 한 것이다.

4만 군중이 동경시내를 돌며 200여 곳의 경찰서와 파출소 등을 방화하였고, 전차 16대를 전소시켰다. 또 대신관저 5곳을 습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교회에 난입해 목사들을 끌어내 폭행했으며, 강화조약 성립을 중재한 루즈벨트의 초상을 화영하면서 미국대사관으로 돌진한 것이다. 이 때 마침 일본에 머물고 있던 루즈벨트의 딸 엘리스가 조선으로 피신해 정동 손탁호텔에 묵은 것이다. 이처럼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제국주의화 뒷면에는 또 다른 제국주의 미국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대주의의 변형 <아관파천>

정동에서 마지막으로 가볼 곳은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며 대부분 파괴되고 탑 부분만 일부 남은 <러시아공사관>의 옛터이다. 예원여중 뒤 정동공원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역사교육에서 한말 시기 항상 등장하는 일명 <아관파천>의 현장이다.

▲ 고종황제 아관파천의 현장이었던 러시아공사관은 현재 탑 부분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사진-유영호]

'약한 주먹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눈물을 닦는 것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구한말 세계열강들 속에서 조선의 처지를 그대로 표현해주는 말이다. 최근 들어 고종이 나름대로 조선의 자주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시각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에 동의하기 어렵다.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고종이 보여준 것이라고는 자신과 백성들을 믿지 않고 힘센 자에 기대는 것뿐이었다. 고종은 처음부터 일본, 청나라, 러시아, 미국 등 힘센 나라를 따라 다녔으며, 결국 을사늑약으로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조차 또 다른 제국주의열강에게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했지 민중과 함께 싸우며 자신의 주먹을 강하게 만들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자 고종은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에 머물기를 두려워했다. 이로써 고종이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발생했다. 일명 이것을 <춘생문사건>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때 조선민중들은 을미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저항하며 싸웠다. 정세가 이렇게 변하자 일본이 의병진압으로 친위대병력 대부분을 지방으로 출동시켰고, 고종은 1896년 2월 이 기회를 이용해 경복궁을 탈출한다. 그리고 도피한 곳이 바로 이곳 러시아 공사관이다. 우리는 이러한 고종의 행동을 <아관파천>이라 하는 것이다. 당시 러시아를 한자로 '아라사'(俄羅斯)로 표기하였으니 아관(俄館)이란 러시아공사관을 뜻한다.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바로 첫날 김홍집 친일내각을 해산시키고 바로 이범진, 이완용으로 구성되는 친러내각을 조직하였다. 이 때 김홍집은 광화문에서 조선백성들에게 맞아 죽었으며, 그의 시신이 효수되고, 도륙되어 각도로 보내졌는데 그 시신조차 백성들의 돌에 맞았다고 한다. 백성들의 항일의지가 이토록 거세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의지를 결집시킬 지도자가 민중 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외세의 품안에 안긴 꼴이다.

고종은 자기의 방식대로 제국주의에 저항하기 위하여 또 다른 제국주의의 힘을 빌리려 했으니 이미 시작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1년 뒤 고종은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구열강들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희망 속에 경운궁으로 간 것이다. 한편 이제 더 이상 제후국이 아닌 제국으로서 지위를 갖고자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자신도 왕이 아닌 황제로 올려놓았다. 하지만 단순히 칭제건원을 한다 하여 왕에게 없던 용기가 생겨나고 국격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1905년 9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하자 고종은 더 이상 자신을 지켜줄 외세가 없게 되었으며, 바로 그로부터 두 달 뒤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을 강요하기 위해 조약내용을 내민 이토 히로부미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는 반대하니 대신들에게 물어보오'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또다시 서구제국주의 열강들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이준을 보냈지만 이미 영국, 미국 등 제국주의 내부에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암묵적인 동의가 끝난 상태였다.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이준은 헤이그에서 사망함으로써 '돌아오지 않은 밀사'로 남게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일본에 의해 왕위조차 박탈당하고 경운궁에 머물며 그저 여생을 보내는 늙은 황족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한편 '돌아오지 않은 밀사' 이준은 헤이그 시립공동묘역에 묻혔는데, 그로부터 사후 56년이 되던 1963년 유해를 국내로 운구하여 현재는 강북구 수유동 북한산 자락에 안장되어있다.

나는 여기에 이준열사의 유훈을 남겨 놓음으로써 내가 처음 도성순례를 시작했던 돈의문 터로 돌아가고자 한다.

"사람이 산다 함은 무엇을 말함이며 죽는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라."

한양성곽순례를 마치며

<서대문역>에서 출발한 나의 한양도성순례를 통한 역사기행은 <구 러시아공사관>터를 마지막으로 다시 <돈의문 터>로 돌아왔다. 이번 기행에서 나는 조선 태조 이성계부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겹겹이 쌓인 600년의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온 기분이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지금도 서울에 살고 있지만 이번 기행을 통해 또 다른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도성기행의 첫 발을 내디딜 때 생각했던 것처럼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이번 기행을 통해 서울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알게 되었으니 그 만큼 나의 서울에 대한 시각은 넓고 깊어졌으리라 생각한다. '사람이 그 무엇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하여 깊이 있게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의 삶이 함께 녹아 있을 때야 진정한 사랑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이번 성곽 길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지만 5천년 우리 역사에 비하면 이것 역시 조족지혈(鳥足之血)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는 한 평생을 배우며 살아가는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나는 또 다시 여행을 떠날 것이다. 이렇게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서울이라는 도시와 함께 대화하고, 또 그 역사의 숨결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고자 한다.

대한민국이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면서 우리사회는 급격히 파편화되고 물질화되고 말았다. 모든 가치기준이 '화폐'라는 물질로 획일화되고 만 것이다. 역사도, 철학도, 문학도 모두 화폐기준으로만 평가되고 있는 세상이다. 물론 이러한 물질만능의 사회는 결코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 자체가 이러한 물질만능주의와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싸움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다양하게 벌어져야 한다. 나는 그 일환으로 이번 역사기행을 택했다. 비록 작아 보이더라도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에 대한 사랑을 꽃피워 나가는 것은 무척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성곽기행을 하면서 그저 아스팔트가 아닌 땅을 밟고 두 다리로 걷는 것도 소중하지만 이왕이면 주변에 흩어져 있는 우리의 역사를 알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결과물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며, 서로의 건강한 비판과 격려 속에서 우리 모두는 더욱 커지고 단단해 지리라 믿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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