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산 성곽 : 혜화문~동대문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낙산 성곽(혜화문 ~ 동대문 구간)

조선왕조의 적장자 세습을 힘들게 한 <낙산(駱山)>

<돈암장>에서 <혜화문>쪽으로 돌아와 다시 성곽 길을 걷기로 하자. 한양의 내사산 가운데 가장 낮은 낙산성곽 길이다. 분명 산은 산이로되 해발 125미터의 낮은 산이라 등산한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이다. 이 산은 그 모양이 낙타와 같이 생겼다 하여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낙산성곽 바로 옆에 위치한 마을이름은 마을주민의 65%가 65세 이상이라 '장수마을'로 불린다. 이곳은 일제시대를 거쳐 6.25 전쟁 시기 피난을 다니던 사람들과 농촌을 떠나 도시로 돈을 벌러 왔던 빈민들이 정착하면서 구릉지형이었던 삼선동에 집을 지어 살기 시작한 곳이다. 주민들의 기본 거주기간이 40년 이상이라 마을공동체가 다른 곳보다 잘 발달되어있다고 하니 비탈진 언덕, 좁은 골목길 등이 달동네를 연상시키지만 왠지 정겹게 느껴지는 곳이다.

장수마을을 옆으로 바라보며 산책하듯 걸어 올랐지만 금방 정상에 있는 낙산공원에 도착하였다. 경복궁은 좌청룡, 우백호로 낙산과 인왕산을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 풍수지리에 따르면 좌청룡은 장남을 상징하며, 우백호는 차남을 상징한다. 하지만 장남에 해당하는 좌청룡 낙산이 낮고, 차남에 해당하는 우백호 인왕산이 높고 험준한 까닭에 조선왕조는 적장자(정실부인이 낳은 맏아들) 세습이 드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적으로 26번 있었던 왕위계승에서 적장자로 순탄하게 계승된 경우는 단 여섯 명에 불과하다. 그 여섯 명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이다.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27대 임금 순종의 경우도 엄밀한 의미에서 적장자는 아니다. 그 위에 형이 태어난 지 5일 만에 죽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여섯 명의 임금조차도 숙종을 제외하고는 일찍 죽거나 반정으로 폐위되는 등 이들이 임금으로 재위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한양천도를 결정하고 도성을 지으며 무학대사가 인왕산을 주산으로 정할 것을 주장한 것도 이러한 백악주산론의 약점을 걱정했기 때문이란 말이 전한다. 만일 인왕산이 한양도성의 주산이 되었다면 좌청룡이 되는 백악이 우백호가 되는 남산보다 더 높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장자세습이 순탄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없다'고 하지만 이런 풍수지리설에 의한 해석을 접하고 있노라면 흥미롭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다.

조선의 명승지<쌍계(雙鷄)>와 신선이 내려온 <삼선평(三仙坪)>

혜화문에서 낙산 정상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면 서울 어디나 그렇듯 이곳 역시 온통 건물들로 꽉 차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현대화된 콘크리트 건물들을 제거하고 지형을 고려하여 지난 조선시대를 상상해보면 멋진 곳으로 다시 그려진다. 낙산 정상에서 성안으로 바로 아래 동숭동과 이화동이 있는데, 이곳의 옛 지명은 쌍계동(雙鷄洞)으로 기묘한 암석과 울창한 수림에 두 줄기의 맑은 시냇물이 흐르던 곳이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이곳 쌍계(雙鷄)는 삼청(三淸)·인왕(仁王)·백운(白雲)·청학(淸鶴)와 함께 한양의 5대 명승을 이루었다. 그리고 현재 이화동(梨花洞)이란 명칭은 쌍계 이곳에 '이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데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런 자연경치뿐 아니라 조선은 한양도성을 구축하면서 새 도읍의 동쪽, 즉 해가 뜨면 제일 먼저 햇살이 비치는 아늑한 이 일대에 만년대계의 가르침과 배움의 터전을 잡고자 최고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을 위치시켰으며 그 주변인 현재의 명륜동과 혜화동일대를 '가르침을 높이 여긴다'라는 뜻으로 '숭교방(崇敎坊)'이라 이름 지었다. 참고로 현재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을 아우르고 있는 동숭동(東崇洞) 은 '숭교방의 동쪽에 있는 동'이라는 뜻으로 지어진 동명이다.

이러한 조선의 교육철학은 지명에서도 그대로 들어난다. 그리하여 성균관이 자리한 곳으로부터 종로 4가, 5가에 이르는 길가의 지명도 하나같이 충(忠), 효(孝),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따서 인의동(仁義洞), 예지동(禮智洞), 충신동(忠信洞), 효제동(孝悌洞)과 같은 이름을 붙임으로써 성균관에 이르는 거리 전체가 학문의 냄새가 물씬 풍기도록 하였다. 이로써 우리는 조선이 교육과 인재양성에 얼마나 역점을 두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성벽을 사이에 두고 동숭동과 맞보고 있는 삼선동(三仙洞)은 조선시대에 혜화문밖의 동소문동, 동선동일대의 평평한 들판을 삼선평(三仙坪)이라고 칭했기 때문에 연유된 이름인데, 앵두밭이 유명했던 삼선동은 남쪽 옥녀봉에서 옥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세 명의 신선과 놀았다는 전설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성안에는 한양도성 5대 명소가운데 하나인 쌍계(雙鷄)라는 명승지가 위치해 있었으며, 성 밖에는 신선이 셋씩이나 내려와 조선의 처녀와 놀았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었을까 상상만 해도 아름답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이 저술된 곳, <비우당(庇雨堂)>

낙산공원 정상 마을버스 정거장에서 동쪽으로 차도를 따라 약 450미터쯤 가면 우측에 작은 초가집이 한 채 있다. 이곳은 광해군 6년(1614) 지봉 이수광이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지봉유설》을 저술한 곳으로 알려진 <비우당>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 지봉 이수광에 의해 국내 최초의 백과사전 《지봉유설》이 저술된 <비우당>, 그리고 그 뒤 바위에는 정순왕후 송씨와 인연이 있는 <자주동샘>(紫芝洞泉 : 자지동천)이 있다. [사진-유영호]

비우당의 자리는 본래 조선 초 세종 때 유관이라는 정승이 살았던 오두막집 <우산각(雨山閣)>이 있었던 자리다. 유관은 태조부터 세종까지 4대에 걸쳐 총 35년간 정승을 지냈지만 울타리도 없는 작은 오두막집에 살았는데, 워낙 허름하여 비만 오면 천정에서 빗물이 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그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비가 올 때마다 아내에게 한 말인 즉 "우산도 없는 집은 이 비를 어지 막을꼬?"이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 후 선조 때 유관의 4대 외손 되는 판서 이희검이 유관의 높은 뜻을 기려 이 집에 살았으며, 이 집을 조금 넓혔다. 하지만 혹여 누가 '소박한 집'이라고 말하면 이희검은 "우산에 비해 너무 사치스럽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희검 역시 청빈하게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 폐허가 된 이 터에 이희검의 아들 이수광이 다시 집을 고쳐 짓고 살았는데, 이때 그는 '비를 근근이 가릴 수 있는 집'이란 의미로 <비우당(庇雨堂)>이란 당호를 달았다고 한다. 이런 일화를 보면 정말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조상들의 삶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기리는 우리의 모습은 너무 편의적인 것 같아 무척 아쉽다. 비우당 바로 뒤에는 <紫芝洞泉(자지동천)>란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지만 건물에 가려져 쉽게 볼 수가 없다. 바로 이것은 단종 비 정순왕후 송 씨의 애련한 삶이 깃든 곳으로 또 다른 유적이다. 비우당은 지봉 이수광의 삶을 기리기 위하여 최근 복원된 것이다. 그것도 비우당의 본래 위치는 이곳 창신동이 아닌 저 아래 숭인동 5번지로 청룡사 남쪽 부근이다. 이곳으로부터 직경 약 300미터쯤 떨어진 곳이다. 그러니 좀 냉혹하게 말하자면 비우당이 복원된 곳은 그 위치도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가짜'가 '진짜'를 가리고 있는 꼴이라 할 수 있다.

낙산일대, 단종 비 <정순왕후 송씨>의 수많은 흔적들

이수광의 <비우당>뒤에 정순왕후 송 씨가 염색한 옷을 말렸다는 <자주동샘>이 있듯이 이곳 동대문 밖 숭인동, 창신동일대는 정순왕후의 삶이 남긴 흔적이 꽤 많다. 이런 이유로 정순왕후 송 씨의 흔적을 따라가는 역사기행코스도 개발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유적인 생겼는지 알아보자.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정비인 정순왕후 송 씨는 열다섯 살에 혼인해 열여덟에 남편 단종을 잃은 비운의 상징인 여인이다. 그것도 왕비의 신분에서 노비의 신분으로 전락한 채로 말이다. 서대문 김종서의 집터에서 보았듯이 세조의 계유정난으로 그의 남편 단종은 폐위되고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렇게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면서 단종과 정순왕후는 그 뒤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하는 이별이 된 것이다.

단종과 마지막 헤어진 곳이 청계천의 <영도교>이다. 왕과 왕비의 이별을 지켜 본 백성들이 '영이별 다리', '영영 건넌 다리'라고 불렀고 그 뒤 성종이 나무다리를 헐고 돌다리로 신축한 다음 친히 '영도교(永渡橋)'라는 이름을 짓고 글씨를 써서 새기도록 했다. 하지만 이 다리는 흥선대원군시절 경복궁 중건 때 석재로 쓰여 사라지고 일부 돌만 남아 띄엄띄엄 징검다리처럼 있던 것이 일제강점기 때 콘크리트 다리로 변화되었지만 그것마저 청계천 복개공사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2005년 청계천 복원공사 때 다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영도교이다.

또 1158년 고려 의종때 희종법사가 창건한 숭인동 청룡사에는 <우화루(雨花樓)>란 건물이 있다. 이곳은 단종과 정순왕후가 헤어지기 전 마지막 밤을 지새우던 곳이다. 여기서 둘이 이별을 앞두고 빗물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흘린 곳이며, 그 눈물을 꽃비(雨花)에 비유하여 지어진 명칭인데 그 이름이 아름답고도 애절하기 그지없다. 그 후 사람들은 단종과 정순왕후가 '영원히 이별한 곳'이라 하여 <영리정(永離亭)>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다.

▲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 밤을 보내며 빗물처럼 눈물을 흘렸다는 <우화루> [사진-유영호]

이렇게 단종과 이별을 하고 정순왕후는 청룡사 정문 옆에 작은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이곳의 이름을 <정업원(淨業院)>이라 짓고 시녀 3명과 함께 살아 간 것이다. 이곳에는 한가할 때면 정순왕후와 세 시녀가 함께 두던 '고누놀이판'이 새겨진 바위가 1960년대까지도 있었지만 지금은 도시개발의 물결 속에 사라지고 없다. 이런 것을 보면 수백 년을 지켜 온 역사도 자본의 논리 속에서는 그야 말로 한 순간일 뿐이라는 생각에 '자본'이라는 것이 괴물처럼 느껴진다.

▲ 정순왕후 송 씨가 단종과 이별한 뒤 도성밖으로 나와 거주하였다는 <정업원> [사진-유영호]

어쨌든, 원래 세조는 자기 질부 정순왕후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성안에 집을 마련해주려 했지만 남편이 유배된 강원도 영월과 좀더 가까운 동대문밖에 살기를 원했다. 정업원 바로 옆 봉우리를 오르면 단종이 유배된 영월방향으로 동쪽이 훤히 보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훗날 정순왕후가 죽고 250년이 지난 뒤 영조는 단종와 정순왕후의 애사(愛史)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정순왕후가 살았던 이곳에 '淨業院舊基(정업원구기:정업원 옛터)' 다섯 자를 어필로 써서 비석을 세워 주었다. 또 '동쪽을 바라보던 봉우리'라 하여 '東望峯(동망봉)' 세 자를 써서 정업원 맞은 편 산봉우리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동망봉은 정순왕후가 매일같이 올라가서 단종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통곡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정업원구기의 현판 역시 영조의 어필이다. 현판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前峰後巖於千萬年 - 앞 봉우리와 뒤 바위 천만 년을 가소서
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 - 신묘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노라

하지만 영조의 어필이 새겨진 비석과 동망봉 바위는 일제강점기 때 이 일대가 채석장이 되면서 모두 사라지고 없다.

▲ 청룡사 옆 <정업원 구기>에 걸린 영조 어필의 현판. [사진-유영호]

그리고 앞서 들른 <비우당> 뒤편 <자주동샘>도 사연이 깊다. 당시 정순왕후가 그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하여 명주를 짜서 댕기, 저고리 깃, 옷고름, 끝동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팔았는데, 어느 날 이곳에 와서 명주를 빨았더니 자주색 물이 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당시 자줏물이 든 명주를 널어 말리던 바위에는 '紫芝洞泉(자지동천)'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자지(紫芝)란 자줏빛을 띠는 풀이름을 말한다.

또 동대문 쪽으로 내려가 동묘에 가면 그 옆에 위치한 숭신초등학교 담장에 <여인시장> 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이곳에서 여인들이 정순왕후를 돕기 위하여 채소시장을 연 것이라고 한다. 이것에 대하여 《한경지략》에 "영도교 인근에 정순왕후를 돕기 위해 마을 여인들이 금남(禁男)의 채소시장을 열었던 곳"이라고 전하고 있다. 끼니조차 제대로 이을 수 없었던 정순왕후에게 푸성귀 같은 먹을거리라도 전하기 위해 동네여인들이 시장을 만든 것이다. 지난 조선시대 여인들로 이루어진 장터가 이제는 주로 노인들이 찾는 '동묘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어 그 느낌은 다르지만 여전히 장터로 남아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렇듯 정순왕후는 단종에 대한 그리움과 힘겨운 생계를 이어가며 살아갔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죽기 얼마 전 중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의 묘를 찾아 봉분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정순왕후는 안타깝게도 남편 단종과 함께 묻히지는 못했다. 정순왕후의 무덤은 단종의 무덤과 떨어진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다. 그래서 그의 무덤은 평생 남편을 생각하고(思) 그리워한 그녀의 일생에 맞게 사릉(思陵)이라 지어진 것이다.

죽어서도 만나지 못한 이처럼 애틋한 그리움으로 인하여 이곳 사릉에 심어진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가지가 단종의 묘가 있는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1999년 사릉에 심어져 있던 소나무 한 그루를 단종의 묘 장릉으로 옮겨 심고 이를 정령송(精靈松)이라 명명하였다. 사후 478년 만에 이렇게 소나무 한 그루를 통하여 단종과 정순왕후는 함께 있게 된 것이다.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흔히 드라마 소재로 적합하여 많이 애용되고 있다. 하지만 남편과 일찍 이별했다는 사실을 빼고 그녀를 바라본다면 또 다른 상상이 펼쳐진다. 정순왕후는 무척 장수해서 82세의 나이로 중종 16년 사망했다. 남편 단종은 요절했지만, 아내인 그는 묘하게도 조선 역대 왕후가운데 신정왕후 조 씨 다음으로 두 번째 장수한 왕후이다. 따라서 그녀는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의 치세를 직접 보고 죽었다. 그리고 사망 직전, 당시 세자로 있던 인종은 정순왕후에게 먼 증손자뻘이 되니 만약 정순왕후가 노비로 전락하지 않고 왕비로 계속 있었다면 막후실세로 그녀 힘은 어마 어마했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 말고도 또 다른 상상도 펼쳐진다. 우리가 앞서 인왕산 성곽을 넘어오며 보았던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왕위에 올린 중종반정'도 그녀는 직접 목격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로 인하여 쫓겨난 중종의 첫 번째 부인 단경왕후 신 씨의 치마가 인왕산 치마바위에 걸리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도성의 좌청룡 낙산에서는 단종 비 정순왕후가 동망봉에 올라 단종을 그리워했을 것이고, 우백호 인왕산 기슭에는 중종 비 단경왕후가 치마를 바위에 내걸고 경복궁에 있는 중종이 자신을 부르길 기다렸을 것이다. 그때 정순왕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무척 궁금하다.

참고로 정순왕후는 역대 왕비 중 처음으로 '세자'가 아닌 '국왕'과 혼인한 왕비이기도 했다. 태조~세종까지는 잠저 시절에 혼인했다가 남편이 왕으로 즉위한 이후 왕비로 격상된 형태이며, 문종비 현덕왕후는 세자빈 때 사망하고 문종이 즉위한 이후 추증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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