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산 성곽. 창의문~숙정문 구간. [자료-유영호]

북악산 성곽(창의문~숙정문 구간)

<창의문(彰義門)>, 인조반정 그리고 이괄의 난

이제 도성 밖 부암동일대의 기행을 마치고 북소문에 해당하는 <창의문>으로 돌아왔다. 먼저 창의문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던 문루를 영조 16년(1740)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물론 1958년 보수를 하였지만 큰 틀에서 지금까지 300년 가까이 그 원형이 유지된 문이다. 또 조선시대 이 일대에서 청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곡의 골이 깊고 수석이 밝게 빛나서 아름다운 모습'에 개성을 오가는 사람들이 개성의 자하동과 같다고 하여 자핫골 또는 자하동(紫霞洞)이라고 칭하였으므로 창의문을 <자하문>이라고도 불렀다. 이런 이유로 창의문 밑을 지나는 터널을 <자하문터널>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 한양도성 북소문에 해당하는 <창의문>, 궁궐의 지맥을 보존하기 위하여 항상 닫혀있던 문이지만 사소문가운데 가장 역사적인 사건을 많이 겪었던 문이다. [사진-유영호]

창의문은 최초 건립 이후 항상 폐쇄된 문이었다. 태종 13년(1413) 풍수학자 최양선이 상소하기를 창의문과 숙정문 일대는 "바로 경복궁의 좌우 팔에 해당되므로 길을 열지 말아서 지맥(地脈)을 온전하게 하소서"라고 하자 임금이 이를 받아들여 북소문인 창의문과 북문인 숙정문은 태종 때 폐쇄되었다. 단지 세종 때 도성 수축을 위하여 편의상 두 문을 연 적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왕의 명에 따른 일시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창의문을 어명(御命)에 의하지 않고 들어온 사람들이 딱 한번 있었다. 마치 1968년 북의 무장조직이 청와대를 습격하러 온 것처럼 약 400년 전 조선의 임금 광해군을 축출하기 위한 반정군이 창의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들어 온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반정은 성공하여 광해군은 쫓겨나고 새로운 임금 인조가 등장한 것이다. 이를 우리는 인조반정(1623)이라 부른다.

반정군은 광해군이 그의 친형 임해군과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폐륜을 저질렀다는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킨 것이다.

인조반정은 서인(西人)이 주도하고 남인(南人)이 동조하면서 명청(明靑) 중립외교를 추진했던 광해군과 대북파를 제거하였다. 이로써 이후 조선에는 본격적인 노론(老論)의 정권이 들어섰고, 이들 세력은 조선은 물론 일제시대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창의문과 관련된 인조반정의 역사는 21세기 지금의 현실에서도 우리사회의 기득권층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인조반정이 있던 해로부터 120년 뒤 영조가 인조반정 2주갑(二周甲)을 기념하기 위하여 창의문에 왔다가 지난날을 회상하며 인조반정의 공신들 이름을 써서 지금도 창의문 문루에는 그것이 걸려 있다.

▲ <창의문>문루에 걸려 있는 '인조반정'의 공신명단. 이괄은 공신등급에 반발하여 이후 난을 일으킴으로써 여기에 빠져있다. [사진-유영호]

이곳 창의문 문루에 올라서서 이렇게 광해군의 중립외교와 그것을 좌절시킨 인조반정을 상상하며 지난 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장한 동북아균형자론을 대비시켜 보고 21세기 한반도의 외교정책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그려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런데 창의문 문루에 올라 인조반정의 공신들을 써 놓은 현판을 자세히 보면 반정 당시 군대를 총지휘했던 사람으로 반정의 1등공신이라 할 만한 이괄(李适)의 이름이 빠져있다. 바로 1년 뒤 이괄은 반정 후 이뤄진 논공행상이 불공평하다는 이유로 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본래 반정계획상 군대를 김류가 지휘하기로 하였지만 막상 그는 현장에 나타나지 않아 이괄이 군대를 총지휘하였음에도 김류는 1등 공신으로, 자신은 2등 공신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자신은 한직으로 밀려나고 또 이괄의 아들이 무고로 인하여 반란음모계획자로 몰려 압송될 처지에 이르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이괄의 난>이다. 이로써 조선은 외세가 아닌 자체 반란군에 의해 한양을 점거 당하는 유일무이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난을 피해 인조는 급히 피신하였고, 피난 길 도중 현 양재역 사거리에서 말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급히 팥죽을 먹었다 하여 이곳을 '말죽거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후 관군과 반군은 현 서대문구 무악재에서 큰 전투를 벌였으며, 관군의 승리로 난은 수습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괄은 인조반정의 공신에서조차 삭제되고 말아 그의 이름은 지금 창의문 문루 속에 걸려 있는 현판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 아마도 조선역사 500년 동안 한양에서 이렇게 큰 전투가 벌어지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조선 국왕의 묘호(廟號)>, 조(祖)-종(宗)의 무원칙

<묘호(廟號)>란 태조, 세종, 고종 등 우리가 흔히 부르는 국왕의 이름인데 그것은 국왕이 죽은 뒤 붙여지는 이름이다. 국왕이 죽은 뒤 2품 이상의 대신들이 모여 3개의 후보 묘호를 올리면 신임국왕이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 그런데 여기 창의문과 관련 있는 인조의 경우 그의 사후 묘호를 정하는데 있어 커다란 논쟁이 있었다. 나는 이 논쟁을 통해 조선 역대 국왕의 묘호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 조선 500년 동안 총 27명에 이르는 조선국왕의 묘호. [자료-유영호]

먼저 묘호를 짓는데 있어서 《예기(禮記)》에 두 가지 원칙이 나온다. 그 기본원칙은 "가계의 시조는 조(祖)가 되고, 그 후예는 종(宗)이 된다"로 이를 종법원리(宗法原理)라 하며, 부수적 원리로 "공(功)이 있으면 조(祖)가 되고, 덕(德)이 있으면 종(宗)이 된다"(祖功宗德)고도 했다.

종법은 적장자가 종자(宗子)의 지위를 상속하는 제도다. 따라서 왕조를 건국한 시조는 태조라 칭하고 그를 계승하는 왕은 '종'이라 해야 한다. 그래야 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이것이 묘호의 권위요, 왕권의 상징이다. 즉 조공종덕(祖功宗德)은 부수적인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원칙에 따르면 조선도 묘호로 조(祖)가 쓰이는 사람은 고려의 태조 왕건처럼 한 명뿐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조선에서는 종법원리보다 조공종덕이 중시되었던 것이다. 즉 원칙보다 예외가 중요시 되었다고나 할까?

인조 역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인조가 죽고 그의 묘호 문제가 '인종'이 아닌 '인조'로 결정되자 홍문관 심대부가 이보다 앞선 세조, 선조, 중종의 예를 들며 다음과 같은 반대의 상소를 올렸다.

"예로부터 조(祖)와 종(宗)의 칭호에 우열이 있지 않았습니다. 창업군주만이 홀로 '조'로 호칭됐고, 선대의 뒤를 이은 그 밖의 군왕들은 비록 큰 공덕이 있어도 '조'를 칭하지 않았습니다. 세조대왕의 경우도 (형인) 문종의 계통을 이어받았는데, '조'로 호칭한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선조대왕이 '조'를 칭한 것도 의리를 보아 옳지 않은 일입니다. 중종대왕은 연산군의 더러운 혼란을 평정했지만 '조'가 아닌 '종'으로 칭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효종실록》

하지만 인조의 아들 효종은 이러한 상소를 "망령된 의논"이라며 물리쳤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창업군주만 조(祖)를 쓰는 원칙을 약화시키고, 공(功)이 있는 군주에게도 조(祖)를 쓸 수 있는 예외규정을 적용했다면 과연 인조에게 무슨 공이 있었단 말인가?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배척하고 친명외교를 고수하면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불러 오지 않았던가?

당시 '인조라는 묘호를 주는 것이 맞다'는 측의 주장은 '반정을 통해 종사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으며, 윤기(倫紀)를 회복시킨 공이 있으니 조(祖)를 칭하는 것이 예법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조 때 백성들은 굶주리고 이들의 해골이 길바닥에 나뒹구는 신세가 되었다. 다 쓰러져 가는 명나라를 섬기려다 병자호란을 당한 인조는 '차라리 광해군 시대가 낫다'는 저주에 가까운 원성을 사게 되었다. 그러자 인조 역시 사과문을 발표하지 않았던가?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은 사람마다 원하는 바인데 나는 지금 헤진 갖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는 것이 일반 천민과 다름이 없고, 자식을 사랑하고 돌보려 하는 마음은 천성에서 자연히 우러나오는 것인데 나는 지금 두 아들과 두 며느리를 모두 이미 북쪽으로 떠나보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내가 매우 마음 아파하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않다. 백성을 기르는 자리에 있으면서 도를 잃은 나머지 나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백성에게 화를 끼쳤다. 그리하여 난을 구하러 달려온 군사들로 하여금 전장의 원혼이 되게 했고, 죄 없는 백성들을 모두 다른 나라의 포로가 되게 하여 아비는 자식을 보호하지 못하고 지아비는 지어미를 보호하지 못하게 하여 어디를 보든지 간에 가슴을 치고 하늘에 호소하게 했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책임을 장차 누구에게 전가할 것인가. 이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을 머금고 오장이 에이는 듯 하여 뜬 눈으로 밤을 새운다."《인조실록》

후대인 나로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이다. 하기야 뭐든지 자신의 세계관에 따라 세상은 달리 보이는 법이다. 인조에 앞선 선조의 경우 임진왜란 때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쳐 나라와 백성을 토탄에 빠뜨렸지만 그에게 '선종'이 아닌 '선조'의 묘호를 주장하는 자들은 오히려 선조가 '임진왜란을 다스렸다'고 주장했으니 말이다.

"대행대왕께서 임진왜란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시 세운 공이 있습니다. 조공종덕의 원리에 따라 마땅히 조(祖)라 해야 합니다."《광해군일기》

이처럼 무원칙하게 정해진 조선국왕의 묘호는 후대로 하여금 참으로 헷갈리게 한다. 나는 이러한 우리의 역사를 보며 비록 친일파 이광수에 의해 쓰였을 지라도 좋은 말이라 《백범일지》의 한 구절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눈길을 걸어 갈 때 어지럽게 걷지 말기를, 오늘 내가 걸어간 길이 훗날 다른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결국 내가 처음 도성기행을 출발할 때 만났던 <계유정난>의 주인공 수양대군의 묘호가 세조가 된 것이 조선의 후대국왕들에게 이정표가 된 꼴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씁쓸하다.

백악정상에서 상상해보는 <세종로의 변화과정>

창의문을 벗어나 백악의 성곽 길을 오르려 하면 그 입구에 <창의문안내소>가 나온다. 창의문부터 시작되는 백악은 청와대 뒷산이라 신분증이 있어야 출입이 가능하다. 이러한 출입조차 노무현 정권 때부터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청와대방향으로는 사진촬영도 금지되어 있다. <구글맵>에서는 이미 다 볼 수 있는 청와대를 굳이 사진도 못 찍게 하는 행정이 약간은 한심하게 느껴진다. 청와대의 안전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이런 조치를 통해 권력을 신비화하고 오히려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워싱턴 백악관의 담장 바로 앞에 시위대가 포진하고 있는 광경과 오버랩 된다. 한국은 분단된 나라라 미국과 다르다는 논리를 펼지 모르지만 아마도 미국이 테러 당할 위험이 한국보다는 훨씬 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예민한 경계근무는 오히려 이곳을 찾는 일반시민들을 짜증나게 할 뿐이다.

참고로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한 야당 후보는 자신이 당선되면 청와대를 옮겨 백악을 시민의 품에 안겨주겠다고 했다. 하루라도 빨리 이 땅에 전쟁위험이 사라지고 서울 한복판에 이런 거대한 시민공원이 생겨나길 꿈꾸며 백악을 오른다. 이 산은 생김새부터 거의 정삼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듯 무척 가파르다. 비록 큰 산은 아닐 지라도 그 경사가 심해 숨 가쁘게 올라야 한다.

땀을 흘리며 드디어 풍수지리상 한양도성의 주산이며 북현무인 백악의 정상에 올랐다. 그야말로 서울 전체가 한눈에 펼쳐져 보인다. 도성의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는 낙산과 인왕산 그리고 남주작 남산까지 모든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백악 바로 아래는 청와대와 경복궁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고, 그 앞으로 옛 <육조거리>(경복궁~광화문사거리)가 뻗어있으며, 일제시대 길을 뚫어 이 육조거리를 서울역까지 잇고 있다. 이 모든 거리를 지금은 총괄해서 <세종대로>라 부른다. 21세기 서울의 중심을 내 시야에 넣고, 600년 전 한양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어떻게 변해 온 것일까를 상상해 보았다.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 궁궐의 주산(主山)을 어디로 할 것인가를 놓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벌인 논쟁에서 무학대사의 인왕산 주산론은 앞서 인왕산성곽을 오르며 살펴보았다. 그런데 인왕산 주산론의 근거에는 이 주작대로와 관련한 또 하나의 이유가 더 있었다. 정도전의 말처럼 백악-궁궐-목멱산-관악으로 배열하면 주작대로는 남북으로 놓여야 하는데 무엇보다 백악과 관악 두 산이 모두 불의 산이고, 또 목멱산(木覓山:남산)에는 '나무 목(木)'자가 들어 있어 불이 나면 도시 전체가 재앙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정도전은 백악을 주산으로 하되 무학대사가 걱정하는 화마를 막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불을 먹고 산다는 상상의 동물 '해치(獬豸)' 두 마리가 광화문 앞에 서서 불을 막으며, 황토마루(黃土峴)라는 나지막한 언덕을 육조거리와 운종가(종로)가 만나는 오늘의 광화문사거리에 둬 불길이 대궐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 또한 경복궁-육조거리-숭례문에 이르는 주작대로를 직선으로 연결하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숭례문 앞에 남지(南池)라는 큰 연못을 팠으며, 숭례문 현판을 다른 대문과 달리 세로로 세웠다. 나름대로 상당히 치밀하게 기획된 설계이다. 따라서 풍수가들은 "그나마 조선이 나라를 유지한 것은 정도전이 무학 대사의 지적을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조선의 한양도성 내 축선은 현재 지도로 보면 광화문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종로 보신각까지 간 뒤 지금의 남대문로를 통해 숭례문까지 이르는 정(丁)자형 길이다. 화마가 길을 따라오지 못하도록 축선을 꺾어서 설계한 것이다.

▲ 한양도성을 설계할 때 궁궐의 화마를 막기 위한 여러 장치들과 이후 일제에 의해 변경된 한양의 축선. [자료-유영호]

그런데 이러한 조선 한양의 축선은 일제시대에 이르러 파괴되고 변형되고 말았다. 일제는 축선을 변경시키고, 지맥을 끊었던 것이다.

먼저 일제는 조선이 만들어 놓은 '정(丁)자형 축선'을 '일(一)자형 축선'으로 변경하여 일직선이 되도록 바꿔 버렸다. 광화문사거리의 황토마루도 깎아 없애고, 또 그 동안 관악의 화마를 막기 위해 틀어 놓았던 주작대로를 일직선으로 변경시켰다. 이로써 경복궁-광화문사거리-경운궁-숭례문-서울역으로 쭉 뻗어 나가도록 바꾼 것이다. 또 이 길을 열면서 경운궁이 대한문 쪽이 잘려 나갔고 이름조차 덕수궁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을 <태평로(태평통)>라 칭했다.

뿐만 아니라 궁궐로 이어져 오는 북한산의 지맥을 끊어 버린 것이다. 첫째 경복궁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는 이유로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 '홍례문'을 헐어낸 부지 위에 전시관을 짓고 사자(死者)의 무덤에만 까는 잔디를 깔았다. 그리고 이 행사를 진행하며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무엄하게도 조선국왕의 자리인 근정전 용상에 앉아서 개회사를 낭독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조선 지맥과 축선을 영구히 끊기 위하여 1926년 근정전과 광화문 사이에 거대한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웠던 것이다.

다음으로 창덕궁은 광화문에서 동대문으로 이어지는 길(율곡로)을 내어 하나로 붙어 있던 창덕궁과 종묘를 잘라 버렸다. 이로써 응봉(성균관대 뒷산)의 맥이 창덕궁에서 종묘로 이어지는 것을 막았다. 또 창경궁에 동물원, 식물원을 설치하여 공원으로 격하시켰고 이름조차 창경원으로 바꾸어 창덕궁의 어깨를 이상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축선변경 및 지맥 끊기와 더불어 이렇게 변형된 서울의 지형에 <경무대 총독관저>(현 청와대 자리), <조선총독부>, <경성부청>(현 서울시청 도서관) 등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섬으로써 1940년경 서울의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대일본천(大日本)이란 세 글자가 선명하게 보이며, 마지막으로 남산 중턱에 조성된 <조선신궁>의 정문을 '하늘 천(天)'자로 건축하여 일제의 '내선일체를 위한 도시설계'는 완성되었다.

반북의식 고취를 위한 한글파괴, <1.21사태소나무>

백악마루에서 이제 다시 성곽을 따라 내려가면 첫 번째로 만나는 것은 소위 <1.21사태소나무>이다. 1968년에 있었던 1.21사태에서 북의 무장병과 전투를 벌였던 흔적을 남겨 놓은 것이다. 이것의 목적은 이를 통해 국민들에게 지속적인 대북경계심을 유발시키기 위한 것이다. 좋은 말로 했을 때 '대북경계심'이고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반북의식'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과연 이러한 '반북의식'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보고 떠나다.

▲ 1968년 청와대습격사건 때 일어난 총격의 흔적으로 청와대 뒤편 성곽 길에 전시되어 있는 <1.21사태 소나무> [사진-유영호]

얼마 전 서울시공무원 간첩사건이 검찰에 의해 조작된 사건임이 드러났다. 국가기관이 어느 한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한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그들은 간첩을 잡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지난 날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된 수많은 사건들이 최근 무죄로 판결나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이러한 국가범죄가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분단된 현실을 이용한 국가의 반북사상 고취와 이에 대한 동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분단 트라우마'를 이용하여 국가권력은 '국가안보'라는 핑계로 '정권안보'을 꾀한 것이다. 분단 60년 동안 우리사회에서는 반공을 위한 그 어떠한 행위도 신성시 되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행위에 대한 의심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곧 북의 동조자이고 그에 대한 처벌은 묵인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권은 끊임없이 반북의식을 고취시키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것은 1.21사태에 대하여 조금만 관심을 갖고 보면 알 수 있다. 2009년 7월부터 개방한 북한산 <우이령길>, 이것은 일반시민들에게는 일명 <김신조 루트>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길이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서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까지 이어지는 총 6.8km의 길이며, 32명 무장병력의 '침투경로'라고 선전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 길은 지난 41년 동안이나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었던 곳이다. 그렇다면 '김신조 루트'라는 말과 '침투경로'라는 말이 어떻게 한글을 파괴하면서까지 우리들에게 반북의식을 심어주고 있는지 보자.

▲ 정부가 발표한 1.21사태 무장단의 청와대 진입경로. 소위 <김신조 루트>라는 이유로 한 동안 민간인 통행을 금지한 <우이령길>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자료-유영호]

첫 번째, 북의 무장병력은 '우이령길'로 침투하지 않았다. 이들은 군사분계선을 넘은 뒤 '파주 법원리-미타산-앵무봉-노고산-진관사-북한산 비봉'을 통해 세검정, 창의문을 거쳐 청와대로 침투한 것이다. 김신조 루트라 불리는 우이령길은 정부가 밝힌 침투경로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7km나 떨어져 있는 곳이다. 우이령길은 이 무장병력이 청와대 옆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나서 그 뒤 3명이 이쪽으로 도망쳐서 이곳 역시 총격전이 있었던 여러 곳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저 이곳은 32명의 무장병력 가운데 3명이 사살된 곳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이령길은 침투로가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도주로 쯤 될 것이다.

당시 32명의 무장병력은 총격전이 시작되자 이곳으로만 도주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사방팔방으로 도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이령길만 그 동안 통제해온 것일까? 그리고 왜 정작 그들이 침투한 경로는 모두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전혀 통제하지 않았고, 오히려 도주로인 우이령길을 통제하였을까? 뿐만 아니라 이 길을 통제하며 그 이유로 '도주로이기 때문에 통제한다'는 말이 아닌 '침투로이기 때문에 통제한다'고 거짓말을 한 것일까?

내 생각에 우이령길을 통제한 이유는 다른데 있음에 분명하다. '침투로'라는 말은 일단 언어적으로 틀린 말이며, 그저 이 길을 막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물론 나는 우이령길을 막은 진짜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정부가 내세운 이유는 길을 막을 명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언어파괴로 김신조는 우이령길에 가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을 속칭 '김신조 루트'라고 한 것이다. 이 길은 침투로가 아니라 몇 명의 무장병이 이 길에서 그저 사살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신조 루트라고 하는 것은 언어파괴이다. 또 이곳은 도주과정에서 무장병이 사살된 곳이기에 이 길을 루트(route)라고 하면 안 된다. 그들은 우이령길이라는 선(線)을 지난 것이 아니라 그저 그 길 가운데 한 점(點)에서 사살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언어를 파괴하면서까지 새로운 말을 창조하는 것은 결국 '반북의식에 기댄 자기행위의 합리화'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나는 도성기행을 하며 이곳 백악에서 <1.21사태소나무>를 볼 때마다 이런 불쾌한 생각이 든다.

<숙정문>, 600년 동안 닫힌 대문

<1.21사태소나무>를 지나 성곽을 따라가면 또 다시 곡장(曲墻)이 나온다. 이곳을 지나고, 촛대바위를 지나면 서울성곽 사대문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는 <숙정문(肅靖門)>이 나온다. 이 문은 1396년 태조 5년에 도성의 다른 대문들과 함께 준공되었으며, 본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지만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속칭 북대문, 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 한양도성의 북문, <숙정문>은 1976년 새로 복원한 것이며, 문루의 현판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이다. [사진-유영호]

숙정문은 준공되고 얼마 있지 않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 문을 폐쇄하고 길에는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또 도성 북문이지만, 서울성곽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숙정문이 음방(陰方)으로 여자의 방위라면 남문인 숭례문은 양방(陽方)으로 남자의 방위였고, 8괘로 숙정문은 '감(坎)'괘로서 물(水)을 뜻하고 숭례문은 '리(離)' 괘로서 불(火)을 뜻했다. 따라서 양(陽)인 숭례문은 늘 개방한 반면 음(陰)인 숙정문은 8괘의 물(水)뜻하기 때문에 가뭄 때만 열었다. 이것은 음양오행설에 기초하여 양(陽)이며 불(火)을 뜻하는 남문을 막고, 음(陰)이며 물(水)을 뜻하는 북문을 열어두어 비가 내리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또 풍수설에 북문을 열어놓으면 음풍(陰風)이 들어와서 서울 사대부가 부녀자들에게 음분(淫奔)이 많이 생긴다하여 항상 문을 닫아두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정월 보름 전에 부인이 이 문에서 세 번 놀면 액막이가 된다는 속설도 있다.

한편, 숙청문(肅淸門)이 숙정문(肅靖門)으로 바뀐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다. 숙정문 외에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976년 이 문이 복원될 때 현재의 숙정문이란 편액을 달았으며, 이 편액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의 글씨이다.

이제 북문인 숙정문을 통해 성 밖의 성북동일대를 잠시 돌아보기로 하자. 숙정문 아래로 삼청터널이 지나가고 있기에 삼청터널 북측 입구에 있는 <삼청각>을 제일 먼저 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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