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의문 밖 부암동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부침바위>, 부암동의 동명유래가 된 바위

서울미술관에서 세검정 방향으로 약 300미터 아래 길 건너 <부암경로당>(부암동 134번지) 자리는 예전에 약 2미터 높이의 꽤 큰 바위가 있었고 이 바위를 부침바위라 불렀다. 이 바위에 얽힌 사연이 전해져 이곳 동명을 부암동(付岩洞)이라 부르는 것이다. 부암동은 골목길 관광코스로 유명한 곳이니 그 사연에 대하여 알아보자.

▲ 부암동 명칭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가 있던 곳. 도로확장으로 없어지고 그 자리에 부암동 경로당이 들어 서 있다. [사진-유영호]

부침바위의 표면은 마치 벌집처럼 오목하게 패인 자국이 많았다고 한다. 이 바위에 다른 돌을 자기 나이만큼 문지르다가 손을 떼는 순간 바위에 돌이 착 붙으면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전설이 전해져 여인들이 돌을 붙이려 애쓴 흔적이 마치 벌집처럼 보이게 되었고, 그래서 이 바위의 이름도 부침바위(付岩)라 부르게 된 것이다. 도로 확장으로 인해 바위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이 바위에 돌을 붙여 놓고 정성스레 절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풍습이 전해 내려오는 이유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중엽 몽고의 침입을 받았을 시기이다. 당시 많은 청년장성들이 원나라로 끌려 갔는데, 그 중에서 신혼 초야를 갓 지낸 신랑도 섞여 있었다고 한다. 혼인 하루 만에 생이별을 당한 신부는 매일 소복을 하고 이 바위에 가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빌었다. 이 사실이 왕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자 고려 왕은 원나라 조정에 그 뜻을 전하여 마침내 신랑이 돌아오게 되어 이 부부가 상봉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소복을 하고 매일 같이 기도를 하며 빌 때는 바위에 붙인 돌이 떨어졌는데, 부부가 상봉한 후에는 붙인 돌이 그대로 붙어 있다 하여 부침바위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후부터 아들을 낳기 바라거나 잃어버린 자식을 찾으려는 부모들이 이 바위에 돌을 붙이고 빌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이러한 내용이 전설이면 어떻고, 비과학적이면 어떤가? 이대로 아름다운 우리의 역사고 문화가 아니겠는가?

친일 공범론의 창시자, <이광수의 집>

부침바위가 있었던 곳에서 다시 조금 내려오면 '세검정 교차로'가 나온다 여기서 교차로에서 좌측 홍제동방향으로 홍지문(弘智門)이 보인다. 이 홍지문때문에 이 일대를 홍지동(弘智洞)이라 한다.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대문임을 인왕산 정상에 살펴보았기에 그저 멀리서 보고 지나는 것으로 하자. 그리고 교차로를 지나 상명대 쪽 언덕 위에 위치한 이광수의 옛집 <춘원헌(春園軒)>(홍지동 40번지)을 찾아가 본다.

▲ 상명대학교 옆 골목에 위치한 이광수 자택(좌측 기와집)으로 1930년대 이 집을 지어 살았으며, 이곳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사진-유영호]

<춘원헌>은 무척 가파른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이 집은 현재 개인 소유인데 1972년 매입하였고 그 뒤 새로 지으려 했지만 조병화, 박종화, 김광섭 등 여러 문인들이 주인을 설득해 이광수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있게 된 집이다. 이후 2004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이곳은 우리들에게 이광수를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다. 그저 이런 상상뿐 아니라 바로 앞의 빌라의 이름도 '춘원빌라'라는 이름으로 할 만큼 현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춘원 이광수는 이곳에 집을 짓고 1930년대 초반부터 살았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하며 건강상 힘들어서 휴양과 창작을 위해 이 집을 지었다고 한다. 춘원의 회고록에는 이 시기가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집에서 《이차돈의 사(死)》와 《그 여자의 일생》등을 저술했다.

그런데 이광수가 왜 이 시기에 가장 힘들었는지 궁금하여, 지난 이광수의 삶을 추적해보았다. 그는 소설 《무정》을 통해 현대소설을 개척했고, 또 이를 통해 수많은 여성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2.8독립선언서를 썼을 만큼 조국광복을 그리워했다. 이처럼 뛰어난 재주가 있었기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홍명희,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꼽은 것이다. 하지만 1919년 3.1운동이 실패하면서 그는 동요하였고, 결국 그의 이러한 천재성은 모조리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식민통치를 위해 바쳐졌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친일행위는 이미 3.1운동이 발생한 1919년 훨씬 이전인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일본유학시절부터 잉태되어 있었다. 그는 유학 중 일본을 제국주의로 이끌었으며 구체적으로 조선침략의 선동자로 알려진 후쿠자와 유키치를 무척 존경하였다. 이광수는 그를 가리켜 "하늘이 일본을 축복해 내린 위인"이며, 자신 또한 '조선의 후쿠자와'를 꿈꿨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마치 이광수의 친일행위가 1936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그가 전향한 이후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틀린 것이다. 단지 친일행위의 양과 질의 차이였을 뿐이다. '국민개조론' 등 이후 본격적으로 그가 벌인 친일행위야 대부분 아는 사실이기에 생략하기로 한다. 하지만 해방 이후 그가 보인 모습은 집고 넘어가야겠다.

▲ 친일행위로 반민특위에 체포된 이광수와 그 뒤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하여 쓴 《나의 고백》.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위를 반성하는 대신 '친일공범론'을 제시하였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그는 해방이 되자 자신의 친일 죄과를 사죄하는 의미에서 《나의 고백》(1948)을 썼다. 그러나 이 글 어디에도 참회와 사죄는 없으며 오로지 변명과 미화로 일관하고 있다. 이른바 '친일 공범론'을 만들어 자신을 옹호한 것이다. 즉 '일제시대,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모두 친일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자호란 때문에 생겨난 '홍제원 목욕론'처럼 모두 용서해주자는 것이다.

'홍제원 목욕론'은 병자호란 때 공녀로 청나라에 끌려갔다 되돌아 온 여인들(환향녀:還鄕女)의 정조(貞操)가 사회적으로 문제되자 그 책임을 그 여인들에게 씌울 수 없었다. 따라서 인조는 모두 홍제원(서대문구 홍제동 138번지)에서 목욕을 하고 도성으로 들어오면 그들의 정조문제는 씻겨지는 것이며, 이것을 다시 거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고 명했다. 이러한 사례를 이용한 이광수의 글은 다음과 같다.

"일정(日政)에 세금을 바치고, 호적을 하고, 법률에 복종하고, 일장기를 달고, 황국신민서사를 부르고, 신사에 참배하고, 국방헌금을 내고, 관공립 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한 것이 모두 일본에의 협력이다. 더 엄격히 말하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도 협력이다. 왜 그런고 하면, 그가 협력을 아니 하였던들 죽었거나, 옥(獄)에 갔겠기 때문이다. 만일 일정(日政) 사십 년에 전혀 일본에 협력하지 아니하고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는 해외에서 생장한 사람들일 것이니, 이들만 가지고 나라를 하여 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삼천만 민족 전체로서 홍제원 목욕을 하고 다시는 죽더라도 이민족의 지배를 받지 말자고 서약함이 옳기도 하고 효과적이기도 할 것이다."

이광수는 자신의 친일행위를 변명하기 위하여 이 땅에 살면서 고초를 겪은 무고한 민중들을 모두 친일파로 몰고 있는 것이다. 현재도 친일파들의 자기변호 논리 가운데 가장 첫머리에 있는 '공범론'은 이처럼 이광수가 개발해낸 것이다. 그의 천재성은 친일을 위해서도 사용되었지만, 이처럼 자기변명에도 충실히 사용된 것이다.

참고로 해방 후 반민특위가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해 문화계 인사를 검거하는 날 조선의 천재 두 명,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이 첫날 같은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1차 심문 뒤 이 둘은 친일에 대한 고백서를 썼는데 최남선은 "민족의 일원으로서 반민족의 지목을 받음은 종세에 씻기 어려운 대치욕"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른바 《자열서(自列書)》를 쓴 반면, 이광수는 시종 《나의 고백》에서 이야기한 친일공범론의 연속이었다.

그는 "일제에 협력하면서 참정권과 평등권을 얻어 민족을 보존하면 독립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조선 사람들은 황국신민의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창씨개명 안 한 사람, 신사참배 안 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우리 국민은 문맹자도 많고, 경제자립도 어려워 일본과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라며 자신을 옹호한 것이다. 이런 그를 천재라고 부르기에 좀 궁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 뱃놀이를 즐기고 있는 벽초 홍명희(좌)와 김일성주석. [출처 Wikimedia Commons]

반면에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라 불렸던 소설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는 이 둘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부친이 자결하며 남긴 유언,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말을 끝까지 실천에 옮겼다. 해방 뒤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했으며, 1948년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며 남북협상에 참가했다가 북에 남았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월북 직전 문중인사를 올리며 '이승만이가 김일성 반절만 되어도 안 가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북에서 부수상까지 하게 되는데 전쟁 중 심한 동상과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던 이광수를 만났다. 그리하여 강계 인민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했지만 이광수는 폐결핵 악화로 숨지고 말았다.

<세검정(洗劍亭)>, 인조반정군이 칼을 씻은 곳

이제 일제시대를 벗어나 조선의 아름다웠던 계곡으로 가보자. <춘원헌>에서 다시 내려와 구기터널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도로 옆 홍제천 계곡이 보이고 그 계곡 입구에 <세검정(洗劍亭)>(신영동 168­6번지)이란 정자가 있다. 우리에게는 그저 지명으로만 알려졌지만 그 지명의 유래는 바로 이 정자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조선 《궁궐지》에 따르면 이곳은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한 반군세력들이 거사를 모의한 장소이며, 또 이곳에서 칼을 씻어 날을 세웠다고 하여 이름을 '세검정(洗劍亭)'으로 지은 것이라 한다. 지금도 아름다운 계곡인데 조선시대였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를 상상하며, 이 아름다운 계곡에서 사람을 죽이려고 칼을 씻었다니 왠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그것도 외적의 목을 벤 것이 아니라 같은 조선사람을 죽이려고, 또 인조반정이 가져온 역사적 후과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세검정은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고도 하며, 연산군의 유흥을 위한 수각(水閣)으로 세웠다고도 전한다. 그리고 1748년 영조가 이를 새로 고치면서 세검정이란 현판을 달았다. 이 일대는 세검정 계곡의 맑은 물을 이용하여 종이를 만들던 마을이기도 했다. 그래서 건너편 현재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는 종이를 담당하는 국가기관인 조지서(造紙署)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일제시대에도 이 근처에 종이공장이 있었는데 1941년 이 공장의 화재로 인하여 그만 소실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의 세검정은 1977년 서울시가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를 참조하여 복원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겸재의 그림에서는 정자 주변에 담장이 있는데 그것은 복원이 안 된 상태로 있다. 그러니 지금 세검정을 바치고 있는 바위와 그 앞에 깔린 판석만이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꼴이다. 참고로 겸재는 세검정도를 이것이 준공되자마자 부채에 그렸는데, 준공기념으로 영조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겸재 정선은 당시 73세로 영조의 그림 스승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 <세검정>은 1977년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에 따라 복원한 것이지만 그 앞 너럭바위는 여전히 조선시대 학동들이 붓글씨를 연습하던 그것 그대로 이다. [사진-유영호]

 

▲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

이 정각은 넓은 바위 위에 올려져 있는데 이 바위는 오랜 시간 흐르는 물에 씻겨서 그 평면이 무척 곱다. 그리하여 근처 여염집 아이들이 먹과 붓을 가져와 글씨 연습을 하여 먹물이 가실 날이 없었다고 《한경지략》에 전해지고 있다. 또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조선시대 왕의 실록 편찬이 끝난 뒤 원고와 사초들을 씻어 저 넓은 바위에서 말린 후 재활용했다고 한다. 이것을 '세초(洗草)'라고 한다. 

서울 도처에 여러 정자들이 있고, 나름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세검정만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여기에 담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더 있다. 이러한 정자이기에 비록 원형으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많은 상상을 하게끔 하였던 것이다. 그럼 이제 이 세검정 옆으로 흐르는 홍제천 계곡을 따라 서울 한복판에 옛 모습을 꽤 많이 유지하고 있는 <백사실계곡>을 통해 다시 성곽으로 올라가도록 해보자.

참고로 세검정이 위치한 지명은 종로구 신영동(新營洞)이다. 조선 영조 때 국방을 담당하는 5군영의 하나로 경기지역을 담당하는 군영인 총융청(摠戎聽)이 현 세검정초등학교로 옮겨오자 새로운 군영이라 부르면서 신영동이란 이름이 생겼다.

서울 한복판 1급수가 흐르는 곳, <백사실계곡>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탄핵소추 당했다. 이 때문에 당시 대통령으로서의 모든 직무는 국무총리에게 이관되고 노대통령은 그저 헌법재판소의 판결만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탄핵심판의 가부가 결정되기까지 그야말로 식물대통령이 되고 만 것이다. 본인이야 얼마나 답답했을지 충분히 상상이 간다.

그런 노대통령이 그 시기 자주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청와대 뒷산을 넘어 바로 이곳 <백사실계곡>(백석동천:白石洞天) 이었다. 이곳에 처음 와본 노대통령은 서울에 이런 청정지역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곳 백사실계곡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과연 얼마나 좋았길래 청와대 주인이 바로 뒤에 있는 이 계곡에 그리 놀랐을까? 나는 그 길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세검정에서 계곡 옆으로 올라 현통사를 거쳐 좀더 깊숙이 들어갔다. 계곡에는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산벚나무 등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야생조류로는 서울시 보호종인 오색딱다구리 등이 있다고 한다. 그 외 백사실계곡 약 1km는 도룡뇽이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버들치, 산개구리, 가재 등이 서식하는 맑은 계곡물을 자랑한다. 이런 손상되지 않은 자연상태로 인하여 이곳은 '생태경관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 서울 한복판인 이곳에 1급수에서만 산다는 도룡뇽이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런 청정지역이었기에 백사실계곡의 중심에는 조선 후기 별서들이 있던 자리로 계곡 내부에 좀 넓은 평지가 나타난다. 이곳에 '백석동천(白石洞天)'이란 글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백석(白石)'은 '백악(북악산)'을 뜻하고 '동천(洞天)'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말한다. 따라서 백석동천은 '백악의 아름다운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란 뜻이다. 이처럼 백악, 인왕산, 북한산자락이 중첩되어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조선시대부터 왕족과 사대부들의 별서가 여러 채 있었다. 또 이곳은 백사실계곡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에 영의정을 지낸 백사(白沙) 이항복의 별서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그 흔적 또한 뚜렷이 남아있다.

▲ 백사실계곡 중심에 위치한 바위로 '白石洞天(백석동천)'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사진-유영호]

이항복은 앞서 <필운대>에서 보았듯이 권율의 사위로 무척 해학성이 뛰어나 벼슬길에 올라서도 그에게 붙은 별명이 '농담정승'이었을 정도이다. 조선왕조실록에조차 그에 대하여 '해학이 지나쳤다'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관리로서 자신의 직무만은 농담만큼이나 훌륭히 수행하였기에 임진왜란이라는 커다란 전란 중에도 국방업무를 수행하는 병조판서를 5번이나 역임했다. 그런데 선조가 죽고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로 인해 실각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 갔다가 그만 5개월 만에 세상을 떴다.

한편 이항복은 과거시험에서 만난 한음 이덕형과 평생우정을 간직했으며, 그 둘 사이에서 빚어진 많은 일화들로 유명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어려운 시기에도 활짝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풍자와 해학이 샘솟듯 흘러 넘쳤다. 아마도 이곳 백사실계곡에서 그 둘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소일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 백사실계곡 중심에 위치한 백사 이항복의 별장 터. 별장의 흔적 좌측으로는 커다란 연못의 모양도 그대로 남아 있다. [사진-유영호]

참고로 이곳 백사실계곡은 평창동(平倉洞)에 위치해 있는데, 동명은 이곳에 조선시대 총융청의 군량창고인 평창(平倉)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이름 지어진 것이다. 평창의 표지석은 평창파출소 건너편 럭키평창빌라 입구(평창동 329-2)에 있다.

<백사 이항복의 일화>

▲ 백사 이항복 [사진-유영호]

어쩌면 우리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엄숙하고 딱딱할 것'이라는 선입관에 빠져 있는 지도 모른다. 후대에게 이항복은 당시 조선의 선비들이 얼마나 해학과 웃음 속에 생활하였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람이다. 우리 조상의 웃음을 함께 느껴 보고자 그의 일화를 몇 적어 본다.

- 권율의 아버지인 권철이 혼인을 앞두고 손녀사위의 됨됨이를 알아보기 위해 이항복과 만났다. 이 때 이항복은 권철에게 "사람의 겉만 보시려고 합니까, 아니면 겉과 속을 모두 보시려고 합니까?"라고 질문했다. 권철은 "사람의 속 또한 보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가능한가?"라고 대답하자 이항복이 바지를 벗어 보여 주면서 "사람의 속이 이만하면 훌륭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권철은 이항복의 대담함에 감탄하고 혼인을 결정했다고 한다.

- 이항복이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당시 조정에서는 이항복에게 그 지역의 반역의 낌새를 잘 찾아 보고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이항복은 "역적은 날짐승, 들짐승이나 물고기처럼 특산품이 아니라서 찾기 어려운 것입니다"라는 답신을 보냈다고 한다. 이는 참으로 뼈가 있는 말로 여전히 유효한 말 같다.

- 하루는 선조가 이항복을 불러들였는데 그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눈을 감고 조는 척을 했다. 이항복은 자신이 왔다고 절을 올리면 당연히 선조가 눈을 뜰 줄 알았으나 선조가 그대로 자는 것을 보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다가 한 번 더 절을 했다. 그러자 자는 척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던 선조가 눈을 번쩍 뜨고 "방금 절을 두 번 하지 않았소?"하여 호통을 쳤다. 절을 두 번 하는 것은 죽은 사람에 대해서만이다. 즉 선조를 죽은 사람 취급한 것이니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역적으로 몰릴지도 모르는 상황. 물론 이 경우는 선조의 장난질이기는 했지만 당하는 신하 입장에서는 아찔한 상황이다.

일화에 따라서는 누워 있는 선조에게 절을 했다고도 하나 예법상 누운 사람에게는 절대 절을 하지 않는다. 누운 사람에게 절하는 경우 역시 죽은 사람에게 조문하는 경우뿐이기 때문. 만일 그랬다면 절하자마자 선조가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당대의 사대부인 이항복이 누운 사람에게 절하지 않는 예법을 몰랐을 리 없다.

이 말에 이항복이 속으로 당황하면서도 "처음 절은 찾아뵙는 인사였고 두 번째는 그만 물러간다는 절이옵니다."라고 받아넘기자 선조가 그 재치에 감탄했다고 한다.

- 어느 날 선조가 재치 넘치는 이항복을 골탕 먹여보려고 이항복을 뺀 다른 신하들에게 은밀히 다음 날 계란을 가지고 오라고 명하였다. 다음 날 다른 신하들은 모두 계란을 꺼내 선조에게 바치는데 당연히 이항복만은 계란을 바치지 못 했다. 선조가 걸렸구나 웃으면서 왜 가만히 있냐고 하자 갑자기 이항복이 "꼬끼오!"하고 울었다. 선조가 이유를 묻자 이항복은 자기는 수탉이라 알을 낳지 못 해 계란을 바칠 수 없다고 대답해 선조를 탄복시켰다.

- 박동량이 지은 《기재잡사》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누군가가 "동인과 서인의 싸움이 전란을 불렀으니 가슴 아픈 일이오"라고 탄식하자 이항복은 "동서의 사람들은 싸움에 익숙하거늘 어찌 조정에서는 그들에게 왜적을 막으라 하지 않는가?"라는 대답으로 당파싸움을 비판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와 유사한 사건이 최근 현실정치에서도 벌어져 화제가 되었다. 얼마 전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씨름협회의 행사에 참석했다가 씨름협회장이 "의원들이 입씨름을 하지 말고 몸씨름하라", "여기 국회의원님들 많이 오셨는데, 입씨름을 많이 하시는 것보다 실제로 한 번 씨름대회를, 국회의원님들 몇 분 해서 한 번 겨뤄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면 어떨까"라며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대한씨름협회에서 심판을 저희들이 보겠다"는 농담 섞인 인사말을 전하였다.

하지만 김무성 대표는 이 자리에서 이항복과 같은 재치 있는 답을 못하고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고 하니 우리 정치의 발전은 요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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