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왕상 정상에서 창의문 구간. [자료-유영호]

우리시대 영원한 청춘, <윤동주> 그리고 그의 동창생들

성곽을 따라 오르는 길과 달리 내려가는 길이라 무척 발걸음이 빨랐다. 그래서 그런지 이내 인왕산자락이 끝난다. 그런데 인왕산이 성곽의 주인을 백악에게 넘겨주기 아쉬워 나의 발을 잡는다. 인왕산 자락의 맨 끝에 위치한 <윤동주문학관>이 바로 그것이다. 2012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수도가압장을 개조해 문학관으로 꾸며 그 후부터 이곳은 수도가압장이 아닌 우리 ‘영혼의 가압장’이 된 것이다.

▲ 인왕산 끝자락에 위치한 <윤동주문학관>과 길 건너편에 <1.21청와대습격사건> 때 사망한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 마주보고 있다. 이곳은 인왕산이 아니라 백악의 시작이다. [사진-유영호]

이곳에 윤동주문학관을 세우게 된 이유는, 그가 연희전문 재학시절 학교 후배 정병욱과 함께 인왕산 아래 누상동에 소설가 김송의 집(누상동 9번지)에서 하숙했는데, 두 사람은 아침식사를 하기 전 집 뒤편의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 삼아 오르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별 헤는 밤', '자화상', 그리고 '쉽게 씌어진 시(詩)' 등 지금까지도 사랑 받고 있는 여러 작품들이 시기에 완성됐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곳에 그의 문학관이 서게 된 것이다.

▲ 윤동주시인이 잠시 하숙생활을 하였다는 곳(누상동 9번지)은 비록 예전 주택은 아니지만 종로구에서 관광상품화하여 표지판을 설치해 두었다. [사진-유영호]

그런데 사실 윤동주가 종로구 누상동에 거주한 기간은 연희전문시절 딱 3개월에 불과하다. 재학시절 그가 주로 산 곳은 서대문구 북아현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과도한 관광상품화는 일반시민들에게 마치 윤동주가 주로 이곳에서 생활했다는 혼란을 초래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어쨌든 윤동주 그는 일제시대의 청년 시인으로,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특유의 감수성과 삶에 대한 고뇌, 애국심이 서려 있는 작품들로 인해 대한민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인물. 영원한 청년이다. 그런데 ‘친구를 보면 사람을 안다’고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윤동주의 사진 한 장이 떠오른다.

▲ 윤동주가 은진중학교에서 숭실에 전학간 친구들과 찍은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편집 유영호]

위 사진은 그가 중학교 다닐 때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은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최종적으로 문익환 목사의 말에 따르면, “은진중학교에서 숭실에 전학간 학생들끼리 모여서 찍은 사진”으로 앉아있는 사람은 이영헌(전 장로교신학대교수), 뒤의 왼쪽은 윤동주, 가운데는 문익환 자신, 오른쪽은 문목사도 얼굴은 기억나지만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며, 장준하는 절대 아니라고 한다. 장준하는 숭실중학 동창이기는 하지만 은진중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또 앉아 있는 사람이 정일권으로 많이 알려졌는데 정일권은 훗날 윤동주, 문익환이 숭실중학교의 신사참배문제로 학교를 자퇴하고 광명중학교로 전학 가서 만난 동창생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문목사의 말에 의하면 이때 전학간 일을 '솥에서 뛰어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광명중학교가 일제에 협력하고, 일본위주의 교육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곳에 훗날 친일파가 된 정일권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윤동주, 문익환과 정일권이 친분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광명중학교 동창생인 것은 확실하다. 문학에 대하여 잘 모르는 나는 이 글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떠올려 본다.

첫 번째, 문목사에 의해 다른 인물이라고 고쳐졌지만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언급된 장준하. 그는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최초로 탈출한 용감한 청년이었다. 그는 그 후 광복군에 결합하여 조국해방을 위한 항일투쟁을 하였으며, 해방 후 전쟁과 5.16쿠데타 등의 시기에 잠시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쳤으나 박정희정권이 반통일정권이라는 속성을 깨우치며 다시 온몸으로 항거하다 1975년 암살되고 말았다.

두 번째, 윤동주의 영원한 벗 문익환. 정전협정 때 유엔군 통역관으로 일했으며, 이후 목회자로써 성실히 활동했다, 하지만 1975년 장준하의 죽음으로 그의 장례식 날 문익환은 “내가 하려다 못한 일을 내가 하마”라며 친구 장준하의 삶을 자신이 대신해서 살 것을 약속했다. 그리하여 훗날 그는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을 뿐만 아니라 1988년 군사정권의 감시 속에서도 평양으로 넘어가 김일성주석을 만나 조국통일의 길을 열었다.

세 번째, 비록 사진 속 인물로 잘 못 알려졌지만 윤동주, 문익환이 전학 갈 학교에 대한 정보가 미흡한 속에 잘 못 택한 광명중학교의 동창생 정일권. 그는 그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친일파였다.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고통 받고 있을 때 그는 만주국 장교로서 독립군 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며, 윤동주가 해방을 6개월 앞두고 옥사하여 돌아오지 못한 조국에서 그는 해방 후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거창양민학살을 자행하였다. 그 후 미대사관을 지냈고, 장준하를 암살한 박정희정권을 지지하며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세를 누렸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정일권이 죽는 날이었다. 하필이면 광명중학교 동창생 문익환과 같은 날 사망한 것이다. 두 사람의 죽음은 당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 되었는데 문익환 목사의 장례는 수십만이 대학로에 모여 노제를 치르고 그 시신은 민중운동가의 상징인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한편 정일권은 일부 정치인들만이 참가한 채 국회의사당에서 장례식이 치러지고 경찰차의 호위를 받으며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는 장면이다. 수십만의 슬픔 속에 떠난 이는 마석 모란공원으로 갔고, 친일파로 《친일인명사전》에 버젓이 등록된 사람은 국립묘지로 갔다.

참고로 정일권은 국무총리시절 임기 내내 '공무원의 요정 출입금지'를 외쳤지만 정작 자신은 미모의 요정여인 정인숙과 염문을 뿌리며 아이를 낳았다. 정인숙은 그 후 피살된 채 범인은 졸지에 그의 오빠가 뒤집어 쓰고 19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이후 그 오빠는 출옥 후 사건발생 30년이 지난 2000년 M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국무총리실에서 심부름 왔다’는 저격수에게 동생이 살해당했다”며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했다.

이제 윤동주의 벗 문익환목사가 그에게 쓴 시를 남기고 윤동주문학관을 떠나기로 하자.

< 동주야 > - 문익환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나한테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 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 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쿠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 몸 짓뭉개이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 버릴 줄 알았던 너의 피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 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청운동>, 청계천의 발원지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의 명승지

돈의문에서 출발하여 이제 인왕산을 넘었다. 인왕산이야 서울 최고의 명산이기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벌써 나는 인왕산을 넘으며 지난 과거로 들어가 많은 역사적 상상을 해보았다. 하지만 여기 인왕산과 백악(북악산) 사이에 있는 창의문(자하문)을 경계로 성 안과 밖의 청운동과 부암동에 많은 이야기 거리가 있으니 성곽순례를 잠시 멈추고 이 두 곳을 걸어 보기로 하였다.

먼저 창의문로를 따라 성안의 청운동으로 내려 갔다. 창의문에서 불과 약 50미터쯤 아래 1.21 청와대습격 사건의 희생자 <최규식경무관 동상>이 있고 바로 동상 옆 청계천의 발원지가 그 뒤로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이나 옛 지도 어디에도 청계천이란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은 청계천이라 부르는 하천을 조선시대에는 개천(開川)이라 불렀다. 청계천으로 바뀌게 된 것은 일제시대인데, 다음으로 가보게 될 ‘청풍계(淸風溪)에서 ‘풍’자를 빼고, 내 천(川)를 붙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 개천이 한양도성을 빠져나가는 곳은 동대문 옆 오간수문(五間水門)이며, 그 발원지가 바로 이곳에 있다. 따라서 내가 지금 서있는 이곳 창의문로는 도로 아래 개천이 흐르지만 현재 이곳에서부터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까지 복개되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좀 더 내려가 자하문터널 옆 청운초등학교에서 서북쪽으로 인왕산방향으로 올라가면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고 글이 새겨진 바위(청운동 52-94)가 있다.

▲ 百世淸風(백세청풍)이 새겨진 바위가 청운동 고급주택의 담장의 일부가 되어 버린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사진-유영호]

이곳은 병자호란 때 세자빈과 원손 등 왕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신하였다가 결국 강화도가 함락되자 화약고에 불을 질러 장렬히 순직한 김상용의 집터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명승지 청풍계(淸風溪)가 바로 이 일대다.

또 하나의 명승지가 청풍계와 붙어 있는 백운동(白雲洞)이다. 그 위치는 청운초등학교의 건너편 경기상고의 서북쪽일대다. 혹 이곳 지리에 익숙하다면 남북으로 뚫린 자하문터널의 좌우 양쪽이 청풍계와 백운동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결국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淸雲洞)은 청풍계의 ‘청(淸)’과 백운동의 ‘운(雲)’ 두 글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지명이다.

청풍계의 계(溪)는 골짜기, 계곡, 시냇물 등을 칭할 때 쓰는 말이고, 백운동의 동(洞)도 골짜기를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최대의 명승지는 지금의 청운동, 즉 청풍계와 백운동으로 바로 이곳이었다. 이런 조선의 명승지를 이미 알아서 인지 백세청풍이라 새겨진 바위 바로 위의 철문으로 닫혀진 집이 바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청운동자택이다. 이 골목 끝으로 인왕산 바위를 기대고 지어진 집이다.

▲ 고 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의 청운동자택. [사진-유영호]

나는 여러 차례 북에 가보았지만 아무래도 처음 군사분계선을 넘던 2004년 금강산관광 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남측 출입사무소에서 오랜 수속을 밟고 겨우 군사분계선을 넘어 말로만 듣고, 머리로만 상상했던 북녘 땅을 드디어 밟고 느낀 그 벅찬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흥분되었다. 당시 정주영 명예회장은 사망한 뒤였지만 그가 이루어 놓은 통일의 길이 정말 대단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막연하게 그저 ‘현대그룹 돈 벌려고 한 사업 아니냐’식의 내 사고가 얼마나 어리석고 편협했던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던 순간이었다. 어렵게 개척되고 열렸던 그런 남북화해의 통로가 2008년 7월 이후 전면 중단된 지금 하루라도 빨리 금강산관광이 재개되기를 희망하며 이 길을 열어준 고 정주영 명예회장에 대하여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하며 이곳을 떠난다.

<1.21 청와대습격 사건>과 <1.23 미해군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청계천 발원지임을 나타낸 표지판 옆에는 1968년 김신조 등 32명의 북한무장병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하여 이곳까지 왔다가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그 와중에 숨진 당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동상과 정종수 순경의 순직비가 설치되어 있다. 북의 무장병이 그 해 한 겨울인 1월 18일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3일만에 능선을 타고 청와대까지 온 엄청난 사건이다.

▲ 1.21사태 총격전으로 숨진 최규식종로경찰서장의 동상(우)과 정종수 순경의 추모비 [사진-유영호]

이들 무장병들이 처음 발견되고 신고된 곳은 그들이 남파된 첫날인 1월 18일이며, 그 위치는 파주 법원읍 삼봉산이었다. 하지만 국군과 경찰은 이들의 동선을 전혀 추적하지 못했다. 당시 국군의 군사적 상식으로는 완전 군장을 한 채로 야간 산악행군일 경우 시간당 4㎞를 넘을 수 없다고 보았지만, 이들 124군 부대는 고도로 훈련된 병사들로 시간당 평균 10㎞씩 주파하면서 법원리-미타산-앵무봉-노고산-진관사-북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달렸다. 그리하여 경찰은 파주시 법원읍에서 간첩신고를 받고도 이들을 추적하지 못했다.

결국 이들과 총격전이 벌어진 곳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청와대와 마주보고 있던 현 청운실버센터일대였다. 이 총격전으로 김신조 한 명이 생포되고, 30명이 사살되었으며, 나머지 한 명은 북으로 도주하였다.

▲ 북측 무장간첩단과 총격전이 벌어진 장소. 우측은 청와대 담장으로 <육상궁>이 위치해 있는 곳이며, 좌측은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란치스코교황의 숙소로 이용된 <주한로마교황청 대사관>의 담장이다. [사진-유영호]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깜작 놀란 박정희정권은 이사건 이후 향토예비군 제도를 실시하였고, 또 우리가 영화로 익숙한 북파공작원양성소인 일명 실미도부대(684부대)를 창설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후 지금까지 매년 1월 21일이면 수도방위사령부는 훈련명 ‘리멤버(기억하라) 1.21’을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것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이 사건으로부터 딱 이틀 뒤 일어난 사건과 연계해서 역사퍼즐을 맞춰나가야 한다.

1.21사건 이틀 뒤인 1968년 1월 23일 미군첩보함 푸에블로호가 동해 원산항에 나포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 진 것이다. 전쟁 중이 아닌 상황에서 군함이 적군에게 나포되기는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아직까지도 마지막일 만큼 대단한 사건이었다. 물론 민간선박으로 위장하였지만 이 배는 당시로써 최고성능의 첩보함이었고, 북한의 영해를 침범함으로써 전투 중 한 명이 숨지고 나머지 82명의 미군이 배와 함께 생포된 것이다.

▲ 1968년 1월 23일 미해군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북의 원산항 앞바다에서 나포되면서 체포된 미군병사들. [사진-노동신문 캡쳐]

1.21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은 발칵 뒤집힌 채 군사적 보복을 하려 하였지만 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미군이 쉽사리 응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틀 뒤 미해군 소속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자 미군의 태도는 전변했다.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급파되고 오키나와 주둔 미군이 한반도로 전진 배치되는 등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가 조성되었다.

이틀 전 동맹국 대통령의 목숨을 노리고 청와대 바로 옆에서 교전이 벌어졌던 것에 대해 미온적이던 미군이 자국군함과 병사들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뿐만 아니라 이후 진행된 북과의 회담에서도 우리는 배제된 채 철저히 북·미 사이의 비밀회담으로 전개되었다. 박정희정권으로서는 시쳇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던 것이다.

결국 푸에블로호 사건은 이후 거의 1년간 협상 끝에 미군함정이 북한영해를 침범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이며, 재발방지 및 푸에블로호를 포함한 모든 것은 북이 압수하고 단지 포로와 유해만을 돌려 받은 것으로 협상은 종결되었다. 덕분에 북은 그때 나포한 푸에블로호를 평양 대동강으로 옮겨와서 반미교육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 푸에블로호가 전시되고 있는 그 대동강 수면 아래에는 또 다른 미국배가 수장되어 있다. 1866년 미국의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횡포를 부리자 평양사람들이 그 배를 불 지르고 수장시킨 것이다. 이처럼 대동강수면 위아래로 모두 미군의 배가 존재하니 미국으로서는 북에 대하여 최고의 반미교양물을 제공한 꼴이 되고 만 셈이다. 2008년에는 푸에블로호 사진과 체포된 미군 사진으로 우표까지 발행하였을 만큼 이는 북에게 최고의 반미교양물이 되고 있다.

▲ 푸에블로호 이미지로 2008년 반미월간을 알리는 북한우표. [사진-조선신보]

한편 1968년 거의 동시에 발생한 1.21사건과 푸에블로호사건을 두고 반응했던 미국의 행동을 우리는 눈 여겨 보아야 한다. 명확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는 정전 상태이고 남쪽에서 이 상황을 통제하는 것은 현재 미군밖에 없는 유엔군사령부라는 것이다.

헌법상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외 부속도서’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북이 붕괴하면 그 통치권이 당연히 우리에게 넘어 온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지난 해방 전후사를 되돌아 보자. 일제가 전쟁에서 지고 해방이 됨과 동시에 우리는 당연히 자주독립국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이 땅에는 38선이 그어지고 남쪽에 들어 온 맥아더장군의 포고령 제1호는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며 해방군이 아님을 명확히 밝혔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군정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또 6.25전쟁 중 유엔군이 북을 점령했을 때 그곳을 통치한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유엔군사령부였다. 전시니까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다. 1950년 10월 7일 유엔 결의안은 “유엔감독 하에 합법적인 선거에 의한 통일한국을 건설할 수 있는 안정된 조건을 전 한반도에서 창출하기 위해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면서 그 조치를 취할 권한을 유엔사에 주었다. 우리 생각과 달리 미국과 유엔은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미치는 지역이 ‘1948년 당시 유엔이 감시할 수 있었던 남쪽에 국한’된다고 보는 것이며, 북쪽에 대한 통치권은 여전히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 현재의 한반도 정치군사적 문제를 규율하고 있는 정정협정문. 이 문서의 서명주체에는 대한민국이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위키문헌]

결국 문제는 ‘정전협정’이다. 이것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은 긴장과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분단이 계속되거나 설사 북이 흡수 통일되더라도 또 다른 파국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육상궁>과 <궁정동 안가>의 슬픈 여인들

최규식경무관 동상에서부터 그가 사망한 장소, 즉 교전이 일어났던 곳(현 청운실버타운 앞)까지 내려오니 바로 옆이 청와대이다. 교전장소에서 청와대 담장 안쪽으로는 커다란 한옥, 즉 <육상궁(毓祥宮)>이 보인다. 이곳은 청와대 경내에 위치해 있기에 사전에 신고하고 허락 받아야 관람이 가능하다.

육상궁은 왕의 생모이기는 하지만 중전이 못되어 죽어서도 그 신위가 종묘로 가지 못한 여인들을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처음에는 숙종의 후궁으로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를 모셨던 곳이다. 한편 육상궁을 칠궁(七宮)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육상궁을 비롯한 다섯 채의 사당에 이와 같은 처지의 후궁 일곱 명의 신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불리는 이름이다.

임금과 함께 잠자리를 하면서도 중전이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임금이 되어서도 대비가 되지 못한 것이 얼마나 서러웠을까? 그런데 이처럼 죽어서도 남편과 자식이 있는 종묘로 못간 후궁의 처지를 생각하니 안쓰럽기 그지 없다.

참고로 이곳의 동명은 ‘궁정동(宮井洞)’으로 육상궁의 궁(宮) 자와 주변의 자연부락 온정동, 박정동 등을 합치며 이 지명의 정(井) 자를 합쳐 ‘궁정동’이 된 것이다.

▲ 청와대 서쪽에 붙은 <육상궁>, 일곱 명의 후궁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이 임금이 되었음에도 신분 상 이들은 중전이 되지 못하고 죽어서도 그 신위는 종묘로 가지 못하고 이곳에 모셔져 있다. [사진-유영호]

이런 후궁의 슬픈 삶을 생각하며 몇 발자국 아래로 더 옮기면 바로 이 육상궁 아래 또 다른 현대판 후궁들이 거처가 있었던 곳으로 이어진다. 현재 <무궁화공원>이 꾸며져 있지만 이곳은 바로 1979년 10월 26일 18년 박정희 독재정권의 마지막 조종을 울린 <궁정동 안가>가 있던 자리이다. 김영삼정부 때 이곳을 폐쇄하고 일반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원으로 꾸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현대사의 커다란 획이 되었던 1979년 10월로 되돌아 가보자. 당시 1970년대 밤의 정치로 알려진 ‘요정정치’가 극성을 부렸다. 이에 박정희는 부정부패척결을 강조하며 요정정치 엄단을 강력히 주문했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은 관제 비밀요정인 바로 이곳 <궁정동 안가>이다. 당시 박정희는 인기여가수와 여대생모델을 불러 놓고 ‘씨바스리갈(Chivas Regal)’을 마시다,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피살 것이다.

▲ 박정희대통령 저격사건 현장검증(좌측 사진)과 당시 술자리에 함께 있었던 가수 심수봉(좌)과 여대생모델 신재순. [사진-중앙포토]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의 말에 의하면 ‘궁정동을 거쳐간 박정희의 여자가 200명이 넘는다’. 당시 대통령 의전과장은 말이 의전이지 그가 하는 일은 황음에 빠진 연산군이 전국의 미녀를 모아오게 한 채홍사(採紅使)의 역할이었다. 당시 “대행사(대통령 혼자 즐기는 행사)는 월 2회, 소행사(측근 3~4명과 함께 즐기는 행사)는 월 8회 정도 치러졌다”고 하니 그야말로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결국 김재규의 변호인에 따르면 그가 대통령을 암살하게 된 “간접적인 동기가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가족, 즉 자식들 문제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김재규는 법정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에 총을 쐈다”고 말한 것이다.

조선의 후궁들을 보며 죽어서조차 홀로 남아 있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는데, 이곳을 지나간 제3공화국의 후궁들은 어느 날 갑자기 현대판 채홍사인 청와대 의전과장에 의해 끌려와 안가에 도착해서야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권력의 위협아래 어쩔 수 없이 술을 따르고, 때에 따라 자신의 순결조차 바쳐야 했으니 그 애통함은 또 어땠으랴? 이곳을 지나간 여인들은 연예인들 뿐이 아니다. 그야말로 괜찮다는 여자는 그 누구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군 병원의 간호장교도 끌려 왔었다고 하니 진시황의 아방궁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

이제야 일반 시민공원으로 꾸며져 이런 추악한 과거는 그저 상상할 뿐이지만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 어서 발길을 돌리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런데 돌아서려니 그냥 떠나지 말고 자신의 존재도 확인하고 떠나라는 어느 한 표석이 나를 붙잡는다.

▲ 병자호란 삼학사 중 한 명인 청음 김상헌의 집터임을 알리는 표석과 그의 시비가 옛 <궁정도 안가>가 있었던 <무궁화공원>내에 위치해 있다. [사진-유영호]

이곳에 ‘궁정도 안가’가 들어서기 훨씬 전 병자호란 시기 조선의 충신 ‘청음 김상헌’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화의를 맺고자 하는 조정의 방침에 끝까지 반대하며 척화론을 주장한 삼학사가운데 한 명이다. 결국 그는 청나라로 끌려갔는데 그가 조국 산천을 떠나며 읊었다는 유명한 시조가 바로 이곳 시비에 새겨져 있으니 그 시조를 여기 남기고 이 자리를 떠날까 한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이제 궁정동 안가가 있던 이곳에서 다시 창의문으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성밖의 부암동으로 잠시 나갔다 오기로 했다. 부암동은 종로구 동네골목길 관광코스로도 유명하다. 이곳 역시 서울의 역사만큼이나 가볼 곳은 무척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로 이번 기행목적에 맞게 되도록 역사적 상상이 가능한 곳을 주로 돌아 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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