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흔히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하여 더 많이 안다는 것 뜻하죠. 즉 아는 만큼 우리의 사랑도 커지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알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내가 딛고 사는 이 땅의 역사를 활자가 아닌 내 발로 직접 느껴보고자 나의 한양도성기행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횟수를 거치면서 내가 보고 느꼈던 것들을 나 스스로 정리해보고, 또 그것을 함께 공유해 보고자 글로 남기기로 한 것이며, 또 내가 역사전문가가 아니기에 혹 잘못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지적과 비판은 기꺼이 환영합니다. /필자 주

<필자 프로필>
후퍼소프트(www.whoopersoft.com) 대표이사
<하나를 위하여 : 민통선-DMZ 통일나들이>, <북한영화, 그리고 거짓말> 저자, <21세기 민족주의>(공저)

 

▲ 인왕산 성곽(사직동~창의문)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궁궐의 주산(主山)> 논쟁.

<선바위>와 <국사당>을 보고 돌아와 다시 본격적인 성곽 길로 접어 들었다. 꽤 급한 경사의 산을 조금 더 올라가면 앞서 도성에 대한 기초지식에서 배웠던 굽은 성곽 즉 ‘곡장(曲墻)’을 처음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산세를 이용한 성곽이지만 양방향에서 도성을 위협하는 외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쌓은 성곽의 모양새다. 일반시민들이 산책하는 이 곳을 첨단무기로 전쟁을 벌이는 현재에도 여전히 군부대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관성일까? 아니면 군사적 필요성일까? 쓸데없는 상상을 해본다.

이제 곡장을 지나 급한 경사로 숨가쁘게 올라가면 곧 340미터 높이의 인왕산 정상이다. 경복궁을 비롯해 도성 안이 한 눈에 들어 온다. 그런데 처음 궁궐의 위치를 어디로 할 것인가는 크게 논쟁이 된 사항이다.

▲ 한양도성의 내사산과 외사산, 내사산을 잇는 선이 한양도성이 되고, 외사산을 잇는 선이 성저십리(城底十里)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자료-유영호]

이를 보기 위하여 먼저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를 보도록 하자. 한양은 내사산(內四山 : 백악-낙산-남산-인왕산)을 따라 성곽이 축성되어 있으며, 밖으로 외사산(外四山 : 삼각산-용마산-관악산-덕양산)이 성밖 10리(성저십리)를 둘러쌓고 있다. 여기서 경복궁을 기준으로 풍수지리상 백악은 한양의 주산(主山)이 되고, 북한산은 이를 뒤에서 받치는 진산(鎭山)이 된다. 즉 북한산-보현봉-백악으로 그 맥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남산은 임금의 책상처럼 안산(案山)이 되는 것이고, 관악산은 신하들이 임금을 조회(朝會)하는 서울의 조산(朝山)인 것이다. 또 경복궁 옆의 낙산과 인왕산은 각각 좌청룡, 우백호로 그 지위를 갖게 된다.

그런데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어디다 축성할 것인가, 즉 주산을 어디로 할 것인가를 놓고 조선 초 큰 논쟁이 있었다. 처음 하륜이 서대문형무소 뒷산인 ‘무악(안산)주산론’을 주장했으나 터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무학대사의 ‘인왕산주산론’과 정도전의 ‘백악주산론’은 불교와 유교의 정면 대결 양상이었다. 하지만 ‘군주는 남쪽을 보고 정사를 본다’는 제왕남면(帝王南面)의 원칙을 강하게 주장하는 정도전의 방안이 힘을 얻으며 채택된다. 이에 백악주산의 문제점으로 무학대사는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이후 2백 년에 걸쳐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신라 의명대사(義明大師)가 일찍이 말하기를, ‘한양에 도읍을 택할 적에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를 건다면 곧 5세(五世)를 지나지 못해서 왕위를 찬탈 당하는 화가 일어날 것이며, 2백년 만에 전국이 혼란스러운 난리가 올 것이라.’ 한 말이 있습니다.”《연려실기술 제1권》

여기서 정씨 성을 가진 자는 정도전을 이르며 실제 태조 때 왕자의 난을 치렀다. 또 5대(태조-정종과 태종-세종-문종-단종)를 지나자마자 세조의 왕위찬탈이 있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200년 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것이 ‘인왕산 왕기설(인왕산에 왕의 기운이 있다는 주장)’로 과장돼 이 말에 솔깃한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 <자수궁>(옥인동 45-1)을 짓도록 하였다.

나야 풍수지리에 대하여 잘 모르지만 어쨌든 내사산 가운데 인왕산이 가장 멋진 산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조선시대 산수화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및 안견의 《몽유도원도》등 거의 대부분 인왕산을 배경으로 하는 것들이지 백악이나 남산, 낙산 등을 배경으로 그려진 산수화는 극히 드물다.

<치마바위>, 단경왕후의 연분홍 빛 그리움을 파괴한 제국주의

인왕산 정상에 앉아 잠시 쉬며 인왕산이 경복궁의 주산이 되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그런데 이곳이 정상인지라 오히려 육안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바로 아래로 넓게 드러난 치마바위가 있다. 이 치마바위에는 남편에 대한 한 여인의 그리움이 전하며, 또 일제의 황국식민화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슬픈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먼저 이 바위이름이 치마바위로 전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중종반정 때문이다. 중종반정은 신수근 형제를 역적으로 몰아서 처단하고, 연산군을 왕위에서 끌어내려 그의 배다른 동생 진성대군을 임금으로 추대한 사건이다. 그런데 문제는 복잡한 가족관계였다. 역적으로 처단된 신수근의 여동생은 쫓겨난 연산군의 아내였지만, 그의 딸은 연산군 이후 추대된 진성대군의 아내였다.

따라서 연산군 이후 진성대군이 임금이 되면서 신수근의 딸은 자연스럽게 중전이 되었지만 동시에 그의 아버지 신수근은 역적이 되었기에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정세력들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왕비가 된 뒤 고작 7일만에 폐비가 되고 말았다. 연산군의 부인이 중종의 부인의 고모가 되는 꼴이니 고모와 조카가 모두 졸지에 폐비가 된 꼴이다.

하지만 중종은 폐비가 된 단경왕후 신씨를 매우 그리워하여 신씨가 폐출되어 머물고 있던 사가 방향을 자주 바라보았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신씨는 자신의 치마를 인왕산의 바위 위에 중종이 볼 수 있도록 걸어놨다고 한다. 이러한 사연이 전하면서 사람들은 이 바위를 치마바위로 부르게 된 것이다. 단경왕후 신씨의 치마 때문일까? 이 치마바위는 날이 맑은 날 바라보면 연분홍색깔을 띠어 바로 곁에서도 만날 수 없는 님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슬픈 것은 이러한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조선시대로 끝난다는 것이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27년이 지난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제국주의는 대륙침략전쟁의 속전속결을 위하여 모든 역량을 중국 화북전선에 집중하는 한편 후방인 조선은 징병제와 징용제 그리고 황국신민서사 제정 등 전시동원체제를 가속화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1939년 가을, 서울에서 이른바 ‘대일본청년단대회’를 개최하였고, 이를 영원히 기리기 위한 사업의 하나로 이곳 치마바위에 이를 기념하는 아래 사진 속에서 볼 수 있는 글씨를 새겨 놓았다.

▲ 일본에 의해 인왕산 치마바위에 새겨진 글자 흔적들. [사진-유영호]

오른쪽부터 그 순서대로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줄 : 東亞靑年團結(동아청년단결)
둘째 줄 : 皇紀 二千五百九十九年 九月 十六日(황기 2599년 9월 16일)
셋째 줄 : 朝鮮總督 南次郞)(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
네째 줄 : 작은 글씨로 한 열에 28글자씩, 네 줄 길이로 대일본청년단대회를 개최한다는 사실과 기념각자를 남기는 연유를 한자(漢字)로 서술한 내용이 잔뜩 새겨져 있었으며, 그 말미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 토키사부로(鹽原時三郞)’라는 한자 글귀가 자리했다.

이 문구가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이 인왕산에 새겨진 이유는 이곳이 ‘서울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물론 자료에 의하면 여기에 새겨질 문구는 원래 ‘동아청년단결’이란 6글자였다. 하지만 위와 같이 바뀐 것이다. 어쨌든 그것이 6자면 어떻고 60자면 어떤가? 문제는 이것이 의도하는 바이다. 일본의 의도를 당시 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 기념문자로서 신동아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데에 몸과 마음을 바치는 상징이 되게 하며 이 글자를 생각함으로써 동아(東亞)의 오족(五族)을 대표한 청년들은 더욱 단결을 굳게 할 것을 맹세하기로 한 것이다.”(1939년 9월 7일자 매일신보)

이로써 단경왕후 신씨의 연분홍 치마가 널려 햇빛에 비치며 임금에 대한을 그리움은 나타낸 치마바위는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누더기가 되고 만 것이다. 물론 해방이 되자 조선인들은 일제의 잔재를 지워내기 위하여 이 바위에 새겨진 글들을 쪼아냈다. 그리하여 지금은 글자의 모양을 정확한 알아보기 힘들지만 단경왕후의 치마가 마치 찢겨진 채 너풀거리듯 그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다.

치마바위 아래로 수송동계곡의 절경이 최근 상당부분 복원되어 그 옛날 정취를 상상해 볼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종로구 옥인동(玉仁洞)에 속한다. 옥인동이란 이름은 자연부락 옥동과 인왕동의 첫 글자를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옥동은 옥류동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개인주택으로 가려져 있어 쉽게 볼 수는 없지만 옥인동 47번지에는 옥류동(玉流洞)이라고 우암 송시열의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 최근 복원된 <수송동계곡>에서 바라 본 인왕산 치마바위. 왼편 아래 <기린교>로 추정되는 돌다리 주변이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당대 최고의 명필 안평대군의 집터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진-유영호]

그리고 옥인동과 동북쪽으로 붙어 있는 곳이 ‘신교동’인데 이곳에 서울농학교가 있다. 이곳이 바로 정조(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의 사당인 <선희궁>이 있던 자리이며 운동장 좌측에 그 일부가 남아 있다. 선희궁을 만든 후 그 동편에 새로 다리를 놓아 이 곳을 신교동(新橋洞)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탕춘대성>, 조선의 도성구조변화

인왕산 정상에서 땀을 닦고 쉬며 우리의 역사를 맘껏 상상해 보았다. 이제 천천히 하산하도록 해보자. 정상에서 창의문 쪽을 향하자 마자 좌측 기차바위가 있는 능선은 북쪽을 향하여 상명대학교를 지나 북한산 비봉으로 연결되는데 이 능선이 한양의 서쪽 성인 서성(西成), 즉 <탕춘대성(蕩春臺城)>이다.

조선 초기는 한양도성밖에 없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음으로써 방어에 대한 개념이 형성된 것이다. 본래 도성은 ‘궁성(宮城)-내성(內城)-외성(外城)’으로 구축되는 것이 원칙인데, 조선시대 서울은 궁성과 내성만 있고 외성은 없었다. 이 당시 도성이란 군사적 목적이 아니라 도읍으로써의 위상과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머물렀기 때문이다. 또 초기에는 명나라가 건재한 상황에서 상호 우호적 관계이었기 때문에 굳이 군사적 목적으로서 ‘성곽 축성의 필요성’이 덜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고, 또 명나라가 망하고 적대관계인 여진족이 세운 후금으로부터 병자호란을 겪으며 국제정세는 급변하였다. 즉 도성을 재정비해야 할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이리하여 숙종 때 남한산성을 증축하고, 북한산성을 새로 축성하였다. 그리고 이 북한산성과 한양도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탕춘대성을 축성한 것이다. 상명대 앞에 있는 홍지문(弘智門)이 바로 이 탕춘대성의 정문이다.

▲ 탕춘대성의 대문인 <홍지문>으로 좌측은 홍제천 물이 이곳을 빠져나가는 오간수문부터 북한산성까지 성곽이 건설되어 있으며 우측 산은 인왕산으로 그 험한 산세를 이용하여 외적을 방어할 수 있어 특별히 성곽을 건설하지 않았다. [사진-유영호]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후금에 대항하여 남한산성에서 농성하였다. 하지만 그곳은 한양도성에서 거리가 멀고 한강을 건너야 하는 치명적인 지리적 단점이 있다. 하지만 북한산성은 도성에서 멀지 않고 강을 건너야 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 북한산 줄기로 산세도 험하여 군사적 방어효과도 컸던 것이다. 하지만 명분상으로는 도성을 보위한다는 것이지만, 사실상 위기발생시 국왕의 피신장소를 새로 만든 것에 불과하다.

조선 500년의 역사기간 동안 단 한번도 서울성곽을 사이에 두고 외세와 전투가 벌어진 적은 없다. 굳이 있다면 인조반정 후 자신의 공과를 몰라준다며 난을 일으킨 <이괄의 난> 정도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것은 ‘외세와의 전투’라는 성격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다.

어쨌든 숙종은 임진왜란 때 종묘사직이 있는 한양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주한 선조를 반성하며 한양도성을 증축하였고 또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새롭게 쌓았다. 이로써 다시는 국왕이 백성을 버리고 떠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의 각오’를 한 조선이 망해서 일까? 그 뒤를 이은 대한민국은 막상 전쟁이 발발하니 대통령 이승만은 일반 국민들의 피신은 나 몰라라 한 채 인민군의 남진 속도를 저지코자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자신은 전용기를 타고 부산으로 혼자 도주해버렸다.

인왕산에서 탕춘대성을 통해 북한산성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바라보며 수백 년 전부터 6.25전쟁까지의 역사적 상상이 내 머리 속에 이렇게 지나갔다. 이제 계속 성곽을 따라 내려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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