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은 제1위원장의 조의문과 추도 화한을 전달하는 자리에서 김양건 노동당 비서가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과 박지원 의원과 한 시간여의 대화를 나눴다. [사진 - 공동취재단]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김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홍업 전 의원 등이 7월 17일 오후 5시 개성공단 내 북측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사무소에서 김양건 노동당 비서 겸 당 통일전선부장과 만나 1시간 5분 가량 환담했다. 1시간 5분 중 15분 정도는 의례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나머지 50분은 남북대화 재개와 관련된 대화가 오고갔다.

오랜만에 남북의 고위인사가 만난 자리였다. 특히 지난 11일 박근혜 정부가 북한에 제2차 남북 고위급접촉을 오는 19일 판문점에서 개최하자고 제의한 것에 대해 북측이 공식적으로 부정적 입장을 밝힌 시점이라 더욱 대화 내용에 관심이 집중됐다. 공식 성명이 아니라 직접 얼굴을 맞대고 북측의 속내를 타진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북측의 공식입장은 실질적 해결책 요구

남북대화에 대한 북한의 공식입장은 이미 나와 있다. 남측 정부가 제2차 남북 고위급접촉을 제안하자 북측은 사흘 뒤인 14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성명을 통해 한미군사훈련의 중단과 5.24 대북제재 철회, 비방.중상을 포함한 적대행위의 중단 등을 요구했다. 남북 간 대립과 경색의 ‘근본요인’을 해결해야 한다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러면서 “남조선 당국이 주장하는 인도주의적 사업이나 철도.도로 연결, 사회협력 사업들도 사실은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다 반영돼 있는 문제로서 선언들이 이행되면 원만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며 남북 간 협력사업은 기존 합의의 이행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남측이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 이행의 의지를 보인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제안한 여러 협력사업도 논의할 수 있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내비친 셈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8.15경축사에서 “남북 공동번영과 한반도 통일시대”를 열어나가자며 남북이 실천 가능한 사업부터 행동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지만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 이행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환경과 문화분야의 협력을 구체적으로 거론했을 뿐이다. 북한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5.24 조치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에 관한 언급도 없었다.

오히려 북한을 자극할 수 있는 대목이 강조됐다. 박 대통령은 “스스로 핵을 포기한 카자흐스탄”을 거론하며 북한의 핵 포기를 압박했으며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하게 경고했다. 북한이 ‘핵무력.경제건설 병진노선’에 대한 도전’이자 비방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은 그동안 박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 당국자들의 핵포기 압박 발언을 체제에 대한 중대한 비방중상으로 간주하며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곤 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북한은 8.15경축사에 대해 다음날 “북남관계 개선과 조국통일을 위한 근본문제를 외면한 것으로서 논할 만한 하등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며 일축하고, 기존의 합의사항 이행을 강조했다.

《로동신문》은 17일 〈대결의 빗장을 그대로 두고 협력의 문을 열수 있는가〉는 제목의 글을 통해 “남조선 집권자의 ‘8.15 경축사’라는 것은 북남관계 문제에 대한 똑똑한 해결책은 없고 종전의 입장을 되풀이하는 것으로서 실속이 없는 겉치레, 책임 전가로 일관된 진부한 것”이라고 폄하했다. 특히 “북남 협력의 길이 반통일적인 ‘5.24 조치’에 의해 꽉 막혀버렸는데 그것을 그대로 두고 ‘환경, 민생, 문화의 통로’를 열자고 했으니 모순도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박 대통령이 제안한 하천.산림 생태계의 공동관리, 문화유산 공동발굴 등의 사업보다 ‘5.24 조치’의 해제가 우선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힌 셈이다.

김양건 비서의 발언은 대화에 방점

▲ 박지원 의원은 김양건 비서의 발언 내용을 비교적 소상히 전달했다. 사진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조의문을 전달하는 모습. [사진 - 공동취재단]
이같은 북한의 공식 입장은 김양건 비서와 박지원 의원의 대화에서 온도 차이가 있지만 더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김 비서는 남북관계를 실무적으로 총괄하는 입장에서 고충을 에둘러 표현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 때 허물어진 남북관계이기 때문에 다시 시작하기가 무척 어렵다”며 나름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특히 그는 “(남북) 양측이 노력해야 하는데 무슨 일이 자꾸 생긴다. 진전에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다”면서 “남쪽에서 하는 소리가 반가운 소리가 없다. 방송.언론도 자꾸 시비를 하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북한이 올해 초 ‘중대제안’에서 제안한 비방중상 문제가 북한 내부에서 대화에 나서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한 것이다.

김 비서는 또한 남측의 제2차 고위급접촉 제안을 당 중앙위에 보고했다고 언급한 뒤 “8.15 경축사에서 핵 문제를 거론하면서 어떤 것을 하자고 하는 것은 그 내용이 실현될 수 있겠느냐는 의심을 (평양에서) 한다. (한미) 군사훈련도 왜 하필이면 2차 (고위급) 접촉을 제안하면서 하려는가”라며 재차 남측을 비판했다. 바꿔 말하면 남측에서 선핵폐기를 강하게 요구할수록 북측이 대화에 나올 수 있는 입지를 좁히는 것이며, 고위급 접촉도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한미 연합군사훈련 기간으로 명시해 당장 받기가 어렵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즉 선핵폐기와 같은 전제조건이 없이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이행할 뜻을 남측의 지도자가 결단해야 남북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김 비서는 “정세를 악화시키면서 어떻게 풀자고 하는가. 제발 정세를 악화시키는 모험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해 8월 한미합동 군사연습 기간에 불필요한 대북 강경발언이나 행동으로 정세가 악화돼서는 안 된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김 비서의 발언을 종합해 볼 때 북측의 의향은 ‘대화’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박지원 의원은 대화 내용을 설명하면서 “김양건 비서는 한미군사훈련에 대해서 민감한 생각을 가지지만 (북도 군사훈련을 하지 않느냐는) 제 설명에 대해서도 수긍을 하고 결국 최종적인 얘기는 전제조건 없이 실천할 수 있는 지도자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국회회담이 성사될 수 있도록 협력해달라’는 박 의원의 요청에도 김 비서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9월 초 대화 가능성

이런 측면에서 보면 박근혜 정부가 북한에 제의한 19일 제2차 남북 고위급 접촉은 어렵겠지만 적절한 시점에 고위급 접촉을 수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정부는 2차 고위급 접촉을 제의하면서 북측이 ‘편리한 날짜’를 선택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전한 바 있다.

북측으로서는 박근혜 정부가 2차 고위급 접촉을 제안하면서 대북제재 조치인 5.24 조치 해제나 금강산관광 재개 문제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기 때문에 이들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와 조치가 이뤄질 수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또한 인천아시안게임에 북측 응원단 참가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서도 남북접촉은 필요한 상황이다.

이와 관련 김 비서는 “6.15선언이 북남관계 개선을 위한 선언인데 빛을 보지 못하고 있어 가슴이 아프다”며 “민족의 기쁨을 위해 사업을 이어나가는 것이 선대가 바라는 내용일 것”이라고 언급했다.

과거 북한은 남북대화를 이어가거나 재개할 때 적절한 ‘계기’를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양건 비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5주년을 맞아 김정은 제1위원장의 조의문과 추도 화환을 전달하기 위해 개성에서 남측 인사를 만난 계기를 활용해 남측에 대화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면서 남측이 제안한 제2차 고위급 접촉 성사되기 위해서는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한미 연합군사훈련 기간에 지난 2월 한미합동군사연습 때처럼 한반도 정세가 긴장고조로 치달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했다. 남북대화 재개여부는 다시 박근혜 정부로 공이 넘어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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