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피난을 끝내고 돌아와서
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니 청이고 마당이고 모두가 집안의 살림살이를 끌어내어 어질어놓아서 발 딛을 틈도 없었다. 방문은 모두 열려있고 더러 문짝도 없는 곳도 있다. 일단 집안으로 들어가서 마당의 물건은 대청 위로 올려놓고 방안에 흩어진 살림살이는 대청에 내다 놓았다. 부엌으로 들어가니 그릇들은 살강에 원래대로 있고 솥 안은 그 동안 사람이 쓴 흔적은 없었다. 먼저 물통을 가지고 샘가에 갔다. 두레박은 그대로 있어서 물을 한 통 길어 앞마당으로 나왔다.
축담 가에 굴러있는 대빗자리를 가지고 방안을 쓸고 정리를 해서 우선 앉을 자리와 밤의 잠자리를 준비했다. 아직 안채의 의성댁 아주머니 식구들은 오기 전이라, 오늘은 남자 네 식구,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재와 나 네 사람이 거처할 장소로 사랑채 두 방을 청소했다.
흩어진 누더기 중 무명베를 가려서 걸레로 쓸 것을 두어 개 만들어 두 방을 깨끗이 쓸고 닦았다.
벌써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어 해는 짧아져서 이미 서산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저녁밥을 지어야겠다. 부엌에 들어가 쌀독을 열어보았더니 바닥까지 깨끗했다. 그래서 짊어지고 온 피난보따리를 풀어서 비상식량을 꺼내었는데 내일 아침까지 먹으면 꼭 맞을 것 같다. 내일엔 방앗간이 열릴까.
찬은 다행히 된장독이 그냥 있어서 바깥마당 담 밑에 가꾼 남새가 풀덤불 속에서 좀 쇠기는 해도 국거리가 되어 된장국을 끓이고 등짐 속에 가지고 온 찬합을 열어서 겹상을 한 두 상을 차렸다. 조손이 한 상, 아버지 형제가 한 상이다. 천지신명의 도움인지 아무튼 무사히 돌아와 집에서 밥상을 받게 된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전기 끌어들이기에 그리 수고하셨는데 지금은 그냥 전주만, 군데군데 끊어진 전선을 드리우고 서있다. 그래서 밤이 되니 천지가 정말 절벽강산이었다. 나는 장롱과 양복장을 뒤지고 책상과 책장을 뒤지어 겨우 초 동가리를 두 개 찾아내어 방을 밝힐 수가 있었다. 요이불도 깨끗한 것은 하나도 없고 누더기 같은 것으로 겨우 깔고 덮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와 나는 건넌방에, 아버지 와 아재 형제 두 분은 안방에서 잤다. 집에 돌아오기는 했는데 우리가 살던 집 같지 않고 낯설기만 했다.
내 책상은 그대로 있기는 했지만 책이랑 문방구들은 이리저리 찢어지기도 하고 팽개쳐 있어 내일 날이 밝으면 정리하기로 하고 방도 어둡기도 해서 일찍 자기로 했다.
이튿날 아침엔 우선 미수가루를 찬 샘물에 타서 한 그릇씩 마시고 바로 신작로 건너 최종대 선생 정미소로 가보아야 했다. 쌀이 떨어졌던 것이다. 나는 쌀자루를 하나 들고 정미소로 갔더니, 눈이 부리부리하고 사람 좋은 스무 대엿 살 되는 이집 맏형이 반갑게 맞는다.
“재구 이 사람, 그 동안 어른 모시고 피난 잘 다녀왔는가!”
“형아는 언제 왔노? 최종대 선생님도 안녕하시제?”
“그래, 우리 식구들은 모두 ‘범안골’에 다 와 있다. 아버지도 거기 계시고.”
‘범안골’은 현풍 쪽으로 1킬러미터 정도 떨어진 최씨들의 집성촌인데 최종대 선생의 고향마을이다.
방앗간 소리가 안 나는 정미소에서 쌀 달라고 말하기 민망해서 주뼛거리고 있었더니 형아가 먼저 말했다.
“집에 쌀이 떨어졌지? 피난 갈 때 집에 있는 쌀 여남은 가마니를 창고에다 넣고 그 위에 헌 가마니때기와 덕석때기를 잔뜩 덮어놓고 갔더니 그 쌀이 그대로 있대. 그래 한 말 쯤 줄게. 그 자루 이리 다고.”
언제나 그 화통한 성격 그대로이다.
“형아, 고맙다. 장이 서면 그때 값으로 쳐줄게.”
“그럴 게 없다. 우리는 버리다시피 하고 그냥 두고 갔는데 값은 무슨.....”
“아무튼 회계는 나중에 하고 쌀이나 주소.”
형은 내가 건네주는 쌀자루에 가득 채워 준다.
“형, 고맙다. 나중에 보자.”
하고 나는 쌀자루를 어께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밥을 지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는 먼저 학교로 갔다. 구지경찰지서를 지나 바로 곁에 붙은 소방기구 창고 옆에 난 학교로 올라가는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갔다. 양가에는 수양버들이 교문까지 줄서 있다. 교문 못 미쳐 왼편에 교장선생 사택이 있는데, 일본식 목조집이다. 그 집은 아무 탈 없이 그대로 있다. 그래서 학교도 그대로 있거니 하고 교문의 두 기둥 사이에 들어서자 앞에 공간이 학교교사로 가득 들어오던 것이, 학교 뒷담만 유달리 먼 거리로 보이고 아무 것도 없다. 나는 그 자리에 그냥 서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가슴이 쿵덕하고 ‘이럴 수가!’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왔다.
운동장은 있는데, 그 안 쪽에 있어서 보여야 할 교사가, 텅하는 빈 소리가 나도록 없는 것이다.
나는 급히 운동장을 질러 아무것도 없는 빈터로 갔다. 거기에는 교사의 공굴 기초만, 거기에 교실이 있었다는 표라도 내는 듯이 네 모 반듯하게 나 있고, 그 안에는 더러 숯으로 변한 타다만 모난 것만 이리저리 흩어져 있을 뿐 아무 것도 없다.
‘이를 어쩌나!’라는 한숨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교사 한 가운데 교무실이 있고 교실이 양쪽으로 4간 씩 벌려있는 본관단층건물과 그 오른편에 교실 두 간의 별관, 그리고 본관너머 후관 교실 두 간, 교실 13간이 이 몽땅 재조차 없는 것이다.
별관 옆에 좀 떨어져 있는 창고와 운동장 오른편에 있는 숙직실은 그냥 남아있었다.
나는 자연 숙직실로 발길이 갔다. 그 발걸음에 인기척을 느꼈던지 학교의 청부인 김씨 아저씨가 숙직실 현관 미닫이문을 드르르 소리를 내면서 열고 나왔다.
“김씨 아재요. 그 사이 어떻게 지났소. 피난은 잘 하셨소?”
라고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었다.
“아이구, 안 선생님 아닌교? 언제 돌아 오셨는교!”
라고 하면서 인사를 했다.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혼잣말을 지껄였다. 마치 김씨 아저씨에게 들어달라는 양.
“어제 오후 늦게 왔습니다. 그런데 학교가 다 불타버렸네요! 이제 아이들은 어디서 공부를 하죠?”
나는 학교를 나와 지서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갔다. 피난 전에 내가 공부방으로 쓰고 있던, 하 선생이 계시던 학교사택 쪽으로 갔다. 집은 상한 데 없이 그대로인데 먼지와 바람에 날려 온 낙엽이 가운데 청에 수북이 쌓여있을 뿐이다.
내 공부방의 문을 열어보니 내 책상이 마치 어제처럼 그대로이고 책도 펴놓은 채 그대로였다. 나는 밖으로 나가 샘가로 나갔더니 두레박은 있는데 두레박줄은 삼이라서 그런지 팍삭 사가서 못 쓰게 되었다. 거기에 있는 녹 쓴 바께쓰와 퇴청에 있는 깨끗한 무명베걸레를 가지고 집 오른편에 흐르는 개울로 내려갔다. 거기서 걸레를 빨아서 청과 방을 쓸고 닦아 피난 전처럼 내 방과 그 곁의 대청을 청소했다.
그리고 그 집을 나와 골목길로 해서 창동 장터로 갔다. 도로가에 있는 버스정류소로 나왔다. 텅 빈 장터를 가로질러 화산동, 수리동, 오설동 그리고 도동으로 가는 도로로 빠져나오자 길갓집에는 모두 피난길에서 돌아왔는지 사람소리들이 났다.
이상곤 선생이 하는 「구지의원」은 문이 잠겨있고, 곽삼달 씨가 하는 「구지한의원」은 문이 열려있었다. 나는 그 현관에서 안으로 기웃거렸더니 안에서 곽삼달 선생이 나를 보고 반가운 목소리로 불렀다. 제일 처음 동네 어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사람, 안 선생. 피난 잘 다녀왔는가?”
“예, 선생님도 가족들 모두 다 무사하시지요?”
“다 무사히 돌아왔네. 자네 어른 내외분과 큰 어른도 다 돌아오셨는가?”
“예, 다 근력 편하시고, 지금 저는 학교에 가보았더니 교실이 몽땅 타버렸습니다. 곧 개학은 해야 되는데. 큰일입니다.”
“그런 소문은 들었는데 집 정리하느라고 아직은 못 가보았네. 그 문제는 면의 유지들이 모여 의논을 해보아야지. 다행이 다른 관청은 무사하고 학교만 타버려서. 모두 학교 복구하는데 힘써야지. 뭐 우째 규단이 나겠지.”
곽삼달 선생은 구지초등학교 학부형후원회 회장이시다. 면민들의 일에는 매우 열성적인 어른이셨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챙겨드리고 우리 식구들을 마중하기 위하여 오후 2시쯤 아재와 둘이 나섰다. 일단 한정리 원산이 마을까지 가서 피난 복귀자들이 몰려오는 길가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원산이 동네로 들어가 원산이 할매집으로 갔더니 할매 집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고 그 앞집에 있는 할매 일가 집 어른으로부터 할매집 식구들은 며칠 지나서 올 것이라고 했다.
대구에서 창녕으로 가는 도로가 곽천에서 나오는 길과 마주치는 길목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도로가 풀밭에 자리를 하고 퍼져 앉아 기다렸다. 피난복귀민이 처음은 드문드문하더니 오후 4시가 가까워지자 이제는 죽 잇달았다. 거의 구지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나를 만나자 마치 내가 무슨 대책위원 쯤으로 여기는지 붙잡고 묻는다.
“아이구, 이게 작은 안 선생 아닌교! 구지는 괜찮던교. 다 타고 아무 것도 없다는데.... 어떻던교?”
“괜찮습니다. 동네마다 어떤지는 몰라도 구지 면사무소 소재지는 「구지국민학교」만 몽땅 타고 다른 곳은 말짱합니다. 집 한 채도 안탔습니다. 걱정 마이소!”
이렇게 만나는 사람마다 이야기하면서 걱정을 풀어주고 있는데, 4시 반 쯤 되자 저쪽 멀찌감치 머리에 잔뜩 이고, 한 손은 인 보따리를 쥐고 한 손은 휘휘 젓는 우리 어머니의 유다른 걸음걸이를 발견했다. 그 곁에는 용아가 있고 향아가 주야를 업고 온다. 할매는 재두의 손을 잡고 이쪽으로 오고 있다. 나는 뛰어갔다. 나는 어머니 곁으로 가면서 불렀다.
“엄마! 나야, 여기야.”
나는 쓰고 있는 보릿대 모자를 벗어 휘휘 두르며 소리쳤다. 엄마는 나를 발견했다. 엄마의 얼굴에 웃음이 함박꽃처럼 피어났다. 나는 어머니의 머리에 인 임을 받아 들었다.
모두 나를 둘러싸고 반가워했다. 엄마와 할매는 제일 먼저 묻는 말은, ‘집은 괜찮는가.’라는 말이다.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리고 좀 허풍을 넣었다.
“아무 일도 없더라. 우리가 피난 나올 때 있던 그대로이더라. 그리고 구지면 소재지는 아무 집도 상한 것은 없더라.
여러분, 구지면 창동에는 불탄 집은 한 채도 없고요. 다만 「구지국민학교」만 몽땅 다 타버렸습니다. 다른 동네는 어떤지는 모릅니다. 창동은 ‘샛담’도 ‘창동 2구’도 말짱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창동으로 나갔다.
이윽고 집이 가까워지자, 어머니는 그 좀 뒤뚱거리는 걸음새로 반달음으로 나아갔다. 그 앞에는 아재가 줄달음으로 달리고 있다.
집에서 이 모습을 보고 계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도로가로 나오셨다.
이렇게 해서 우리 식구들은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아래채 방 두 곳을 깨끗이 정리하고 방바닥에 윤이 나도록 쓸고 닦아놓았다. 시간은 오후 5시경이었다.
나와 엄마는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식사 준비를 했다. 정침채의 의성댁 아주머니도 도착했는데 모두 면사무소 맞은편에 있는 양조장 친정집으로 가서 있겠다고 하면서 그리로 갔다고 했다.
며칠 후에 교장선생님도 복귀했다. 교실이 전소되어 개학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면장과 의논해서 면내 각 마을마다 품을 내어 학교 북쪽 담에 의지하여 흙벽돌로 담집을 지어 지붕은 가을 추수 후 볏짚으로 이엉을 씌우고 바닥은 덕석을 짜서 바닥에 앉아서 공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일단 학생들은 10월 10일경에 4, 5, 6학년을 소집하여 담임선생과 함께 흙벽돌을 만들기로 했다.
흙벽돌은, 나무로 벽돌 틀을 만들어놓고 거기에다 황토와 볏짚을 쓴 것을 적당히 섞어 물로 이겨 흙반죽을 해서, 그 벽돌 틀로 찍어내어 볕에다 말린다는 것이다. 이 작업을 아이들과 교사들이 맡아 한다는 것이다. 이 동안에 마을에서 가을 추수를 끝내면 마을마다 품을 내어 벽돌로 담집을 짓는다는 것이다. 적당한 넓이와 높이의 흙벽돌 울타리를 쌓아 그 위에 나무로 용마름을 세우고 서까래를 얹어 작은 솔가지로 알매를 쳐서 그 위를 이엉을 엮어 덮어서 교실로 한다는 것이다.
10월 10일경 소집한 4~6학년 학동들은, 오전에는 학교의 북편 담을 따라 학동들을 남향으로 앉히고 그 앞에 일단 군(郡) 학교비에서 보낸 흑판을 걸어놓고 수업을 하고 오후는 흙벽돌 제작 노동을 했다.
1~3학년의 저학년 학동들은 오전에 12시까지 수업이라기보다 교사가 두, 세 시간 데리고 노는 것이 일이었다.
흙벽돌 제작은 말이 학동들과 한다지만 이는 전적으로 교사가 해야 할 몫이었다. 나는 4학년 담임이라서 일하기에는 너무 어려 장난질만 했다. 거저 물 길어오는 일이나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모두 혼자 해야 했다.
11월에 들어서 마을에서 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게 중에는 이런 일에 익숙한 일군이 있어서 진행에 속도가 붙었다. 11월 중순에는 학교 울 안 북편에 말이 교실이지 흙담으로 울을 친 헛간 같은 곳에서 책상도 없이 수업을 했다. 수업 중에는 그래도 견딜 만하지만 쉬는 시간에는 아이들 장난으로 교실은 콜록거리는 먼지 안개 속이었다.
이런 흙담교실이 4개가 만들어졌다. 저학년 1~3학년용으로 하나, 3부제로 해서 수업했다. 4~6학년은 각 학년마다 하나의 교실, 그래서 3교실이었다. 이런 수업으로 1950년도 신학년은 10월 10일에 시작되었고 12월 20일에 방학이 되었다. 그리고 1951년 1월 25일에 개학하여 2월 25일까지 해서 1학기를 마쳤다.
나는 1950년도 신학년에는 5학년을 담임했다. 지난 학년에 담임한 학급을 그대로 계속 담임한 것이다.
겨울방학동안 학교는 흙벽돌 울타리교실에서 천막교실로 바뀌고, 에페크원조물자(전쟁잉여물자)로 교실바닥에 미송 각목으로 기둥을 세우고 판때기로 책상으로 하는 교실을 만들어 3월 2일에 개학하는 2학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사람이란 참 이상한 면이 있다. 그 사회가 어떤 지경에 있건 후대는 생기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후대를 가르치는 일은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문화는 대를 이어 계승되는 것이기 때문인 갓이다. 그래서 전쟁이라는 혹독한 인류문화의 파탄 그 속에서도 교육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발버둥질 속에서 살고 있는데 전쟁은 계속 비극을 우리들에게 주고 있었다.
전쟁은 전투라는 죽일 내기로 하는 행위라지만 그 전투가 끝나면 쌍방 사이에 전투의 현장을 정리하는 행위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를 군사용어로 ≪전장정리≫(戰場整理)라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로 이리저리 마구 흩어져 있는 전사자의 시신수습이고, 둘째로 이리저리 마구 흩어져 있는 살상수단을 수습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른바 6.25전쟁이라 일컫고 있는 미제의 전쟁에는 이런 ≪전장정리≫가 전혀 안되고 있었다. 이로써 미제가 일으키는 전쟁의 전장이 된 나라가 받는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만일 미국이, 전쟁이 자기 국토에서 일어난다면 전장정리라는 것을 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남의 나라에서, 남의 국토에서 전쟁을 하는 침략전쟁이라서 그런지 미제는 전쟁정리라는 것은 안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전장이 된 우리의 국토는 사체투승이 강산으로 만들었고, 살상수단이 온 강산을 뒤덮고 있는 국토로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들이 피난을 갔다가 복귀한 다음에 민간인들이 이 불성실한 전장정리 때문에 입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피난에서 복귀해서 몇 달 동안은 면내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폭발사고 일어났고 오발로 인한 인명사고가 일어났다.
미제는 언젠가는 그들의 ≪전장정리≫의 의무를 포기한 대가로 입은 피해를 반드시 갚아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지금은 이름도 가마득히 잊은 친구이지만 박격포 포탄의 한 종류인 백린탄(白燐彈)의 폭발로, 그 백린을 뒤집어쓴 그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모습이 아직도 내 망막에 새겨져 있고, 내 이름을 부르며 살려달라는 그 목소리는 결코 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