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전쟁과 피난, 헐뜯기는 조국
“아이구 지독해라. 할배! 이게 무슨 냄샙니까?”
“이놈아! 아무 말 말고 그냥 내려가자.”
짐을 풀고 골짝으로 몇 걸음 내려가자 희뜩희뜩한 것이 군데군데 보였고 검붉은 빛깔도 보였다. 송장이다. 설 묻은 것을 짐승이 파헤친 것이다. 그 냄새는 바로 이 송장이 썩는 냄새였던 것이다. 나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 자리에 펄썩 주저앉고 말았다. 눈물이 났다.
나중에 휴전이 되고 고향마을에 갔더니 수많은 할배, 아재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그 보이지 않은 할배, 아재들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애써 묻지도 못했다.
이렇게 죽은 할배, 아재들이 30만이라고도 하고 50만이라고도 한다.
49년, 50년에 그처럼 신문광고 면에 그 많던 전향성명서, 탈당성명서를 낸 사람들이 거의 다 그 죽음 속에 들어있었다.
그들은 반공투사(?)가 되겠다고 맹서를 했는데도 말이다. 동지를 잡아다 주었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보도연맹에 들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더 조직적으로 학살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마치 독일의 히틀러시대처럼 ≪내가 유대인이요.≫라고 하는 ‘다비드의 별’을 붙인 유대인처럼.
우리는 7월의 대학살을 잊지 않는다. 학살의 원흉은 미제이고, 그 하수인은 일제 식민지시대에 동포를 배신한 친일민족반역자였던 친미민족반역자였음을.
6.25라면 언제나 떠오르는 몇 가지 잠재의식이 나를 깨워준다.
청춘의 시작인 열여덟 살의 채 익지 않은 청소년인 내가 죽음을 앞에 놓고 궤짝 같은 조그만 경찰지서 유치장에서 앉아 지새우던 기막힌 밤, 청도 산서에서 산동을 넘어가가는 피난길 관하(管下) 고갯마루에서 불어오는 역한 시취(屍臭) 그리고 설 묻은 것을 들짐승들이 마구 파헤쳐놓은 사람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시체들, 피난길에서 젖먹이 아이를 궂히고 슬피 울던 외숙모의 처절한 모습, 지금도 팔순이 다된 내 늙은 오감을 뒤집어놓는다.
이것은 어느 곳의 어느 사람이 당했던 것이 아니라 삼천리강산에 삼천만동포가 당했던, 그것도 동족상잔의 어처구니없는 민족적 고난이었던 것이다.
어찌 자기 권세가 위태롭다 해서 이처럼 처절한 고난을 동포에게 안겨준단 말인가.
나라를 배반하고 겨레를 배신하는 자의 말로가 이처럼 지독한 악귀로 되었단 말인가.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자의 잔학이 늑대조차 외면하도록 만든단 말인가.
벼룩도 얼굴이 있는가. 그들은 침략을 수호라고 하고 반역을 애국이라고 했다. 하기야 일제 식민지시절에 왜놈에게 붙어서 잘나가던 놈들이, 미제의 식민지통치 기반이 되고, 미국에서 동포가 거두어들인 독립군 자금으로 호의호식하고 박사 공부했던 자와 더불어, 나라를 반 동강내어 미국 놈이 만든 예속정권이 그자들이 만든 법으로 선거한 5.30총선에서마저 직사하게 패배하여 2년 후에는 틀림없이 미국 놈이 만들어준 그 권좌에서 쫓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미국 놈은 이자가 쫓겨나면 닭 쫓던 개꼴이 되기가 십상이라, 이자와 미국 놈이 이남 땅에서 떨려나게 안 되려면 전쟁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과 미제는 이 전쟁을 통해 전시의 분위기를 한껏 이용해 ‘싹쓸이’를 했다. 5.30국회의원들에게는 ‘서울을 사수한다.’고 속여 이들 대부분이 서울에 남아 있도록 만들었고, 미군이 서울에 다시 올 때는 이른바 ‘부역자’문제로 걸고 나왔다. ‘부역자’로 몰리지 않으려면 이북으로 갈 수밖에 없도록 해서 결국 이들 중 상당수가 이북으로 올라가도록 만든 것이다. 그래서 국회에는 이승만의 반대세력이 크게 줄었던 것이다. 그밖에 반대세력은 그들에게 이미 전향한 「보도연맹」 맹원까지 모조리 잡아서 30만을 산골에, 광산 폐광에 몰아 총으로 난사해 죽여 없애버렸던 것이다.
미제는 우리나라를 그들의 서부 변경으로 아는지 서부 인디언을 학살하듯이 마구 학살했다. 전쟁을 피해서 피란 가는 행렬에 대해 기총소사로 학살했고, 비행기에서 네이팜을 뿌리고 소이탄으로 불바다로 만들어 태워 죽였다.
특히 1950년 가을에 이북으로 침략해 들어간 미군은 이북 인민의 도고한 자존심과 침략자에 대한 굽힐 줄 모르는 저항에 부딪치자 침략자의 포학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이북 천지를 지옥의 피바다로 만들었다. 황해도 신천에서만도 3만 5천여 명의 인민을 학살했는데, 이는 당시 신천군 인구의 4분의 1이다.
이런 사실들은 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나서 외국기자들의 기사들로써 알게 된 사실들이다.
그 지독한 냄새로 결국 모두 뛰다시피 고개 너머 관하마을을 지나 마을 아래 무심이 흘러가는 동창천 강가에 이르렀다.
어린 아이들이 딸린 열 식구가 누가 기다려주는 곳도 없는 피난길이라 가다가 쉬고 쉬다가 가는 길이어서 날이 가는지 새가 가는지 아무런 관심도 없는 날짜인지라, ‘오늘이 며칠인지’도 아리송했다. 우리들은 동창천 건너 강가 풀밭에다 자리를 정하고 한뎃잠을 자기로 했다.
아재와 나는 이서면 학산 마을의 반상호 선생의 집에서 얻어온 낫과 톱을 들고 강가에 비스듬히 내려뻗은 산자락으로 가서 팔목 굵기 만한 나뭇가지를 몇 개를 장만하고 거기에 쳐낸 잔가지를 칡넝쿨로 묶어서 강가로 내려와서 어린 재주를 안고 자는 어머니, 할매 그리고 재두, 향아, 용아가 들어가 잘 수 있는 천막을 쳤다.
천막이래야 이슬을 막을 홑이불 두 장을 이어서 네 기둥 위에다 새끼로 묶어서 덮고, 사면 중 바람마지 한 면만 겨우 가린 것이다. 주야를 안고 자는 엄마를 모두 둘러싸고 자는 잠자리를 만든 것이다. 할배와 나 그리고 아버지와 아재는 언덕 가의 풀밭에서 맞춤한 평평한 돌에 보따리를 얹어 베개로 해서 그냥 홑이불 한 장에 두 사람이 함께 덮고 누었다.
이렇게 자는 둥 마는 둥 하는 잠을 자고 날이 훤히 밝자 나는 강가에 가서 돌무더기를 쌓아서 부뚜막을 만들고 아궁이만 조그맣게 내고 모두 진흙으로 발랐다. 이런 부뚜막을 두 군데를 만들었다. 양은냄비를 얹어 공사를 마치자 어머니는 나와서 어제 낮에 삶은 보리쌀에 쌀 몇 줌을 씻어 얹고 불을 땠다.
찬은 이서면 학산 마을의 반 선생님 집에서 찬합에 담은 것으로 했지만, 아무리 여름이라 해도 한뎃잠이라 따신 국으로 속을 데워야 해서 한 냄비에는 국을 끓였다. 따신 국이래야 된장에다 멸치 한 마리도 없이 그냥 우거지를 넣어서 삶은 국이다.
이렇게 해서 지은 밥을 쌀은 가려서 아이들에게 갈라 먹이고 어른들은 꽁보리밥을 먹었다. 아직은 한 여름이라 보리밥은 잘 퍼져서, 그리고 어제 저녁끼니는 피난민을 상대로 길에서 파는 삶은 감자로 해결했는지라, 그리고 우리 식구들은 아이 어른 모두 식성이 좋아서 잘 먹었다.
그리고 곧 천막을 헐고 설거지를 하고 그리고 짐을 챙겨 보따리를 싸서 출발준비를 했다. 이 때 돌무지 돌다리를 건너가는 이곳 사람들이 있어, 할아버지는 그들에게 길을 물었다.
“여보, 길 좀 물읍시다. 여기서 오봉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갑니까?”
“오봉 뉘 집으로 갑니까?”
라고 반문을 했다. 할머니가 대답을 했다.
“성만댁으로 갑니다.”
“아. 그렇습니까? 우리도 오봉으로 갑니다. 어디서 옵니까?”
“예, 구지에서 옵니다. 피난 옵니다.”
“아이고, 애 자십니다. 아이 딸린 내권도 있고.... 저도 그 집하고 일갑니다.”
“예 그렇습니까? 그럼 우리 인사합시다.”
할아버지는 대인에서 열러있어서 먼저 통성명을 했다.
“예, 저는 안석산이라고 합니다.”
나는 좀 의아했지만 늘 가명을 쓰는 데 익숙한지라 과연 우리 할아버지답구나 하고 씩 웃었다. 그러자 그 편에서
“저는 이〇〇라고 합니다.”
나이는 50 중간인 듯 한데 할아버지보단 서넛은 적은 듯 했다. 이름은 기억에 없고 사람은 서글서글해서 붙임성이 좋은 것 같다.
우리들은 이들 일행을 따라 쉽게 오봉이라는 마을에 들어갔다.
이제 걸음도 몸에 익었는지 아이들도 더운 날씨에 칭얼거리지 않고 잘 따라 왔고 향아도 아직 세 달이 채 안 된 어린 동생을 업고 그 뙤약볕을, 그 두터운 누비강보에 싸서 띠로 묶어 등에 업고, 그리고도 군소리하나 없이 잘 걸어왔다.
하도 보기가 안쓰러워 내가 좀 업자고 해도 고개를 흔들며,
“오빠 무거운 짐을 우쨔고.”
라고 하면서, 그 말이 고마운지 생긋하고 웃는다.
이렇게 쉬엄쉬엄해서 십리 쯤 걸어갔더니, 길은 오른 편으로 굽어들어 양 비탈이 가파른 골짜기로 들어간다. 골짜기 밑은 맑은 물이 쏴 소리를 내면서 흐르고 있다. 길은 오른 편 비탈에 붙어 나 있다. 한참 올라갔더니 골짜기 맞은편이 펀펀한 비탈로 되더니 이랑도 보이는 밭도 나타났다. 20호는 안 되는 마을이지만 그 비탈에, 아래에서 위로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겹쳐보였다. 조금 올라가자 골짝 개울을 건널 수 있는 널찍한 반석이 양쪽에 있고 그 사이는 작은 바위돌이 끼어 있어 징검다리로 건널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우리와 동행이었던 이씨의 일행 중 젊은이가 먼저 재바른 걸음으로 가서 이곳 오봉 마을의 새아재 집으로 통기를 보냈는지 골짜기 징검다리 이쪽에서 30대 중반의 장년 내외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
여인이 앞으로 나와 나의 할매 손을 잡고 미소를 띠우면서 인사를 했다.
“석산 아지매. 난리통에 이곳 골짝까지 오셨네. 그래도 조카딸의 시집까지 오셨으니 아무리 난리라도 반갑다고 해야지.”
하면서, 좀 채 못 마나는 친정 일가를 만나니 반가운 눈물이 나오는가보다, 할매를 안고 그 품에 얼굴을 묵고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낸다.
그 옆에 선 새아재도 할아버지께 서서 허리를 깊숙이 굽히고 절을 했다.
“먼 길을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이십니까. 집안은 협소하지만 곧 계실 곳을 장만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쪽을 향하고,
“이이가 남양 갔다가 돌아오셨다는 일가 처남인가 보네.”
라고 오봉 아지매를 본다. 아버지는 새아재와 악수를 하면서,
“이 사람이 가미실 아재의 사위로구먼. 반갑네.”
둘은 처음 인사라 좀 어색하면서도 반가워하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하여 인사를 서로 건네고 어머니와 나 그리고 아재들의 인사를 마치자 새아재의 인도를 따라 징검다리를 건너 새아재 집으로 들어갔다. 비록 초가이지만 두터운 용마름하며 튼실한 기둥이 이 마을에서 새아재 집안의 위치를 알 수 있도록 해주었다. 집의 정침은 서남향집이지만 오른쪽에는 동남향의 행낭 체가 있으며 그 밑으로 한 축 내려서 사랑체가 있다. 행낭 체와 마주보는 헛간 체에는 커다란 암소가 제법 자란 송아지의 등을 핥아주고 있는 품이 이집은 우리가 아니면 전쟁을 모르고 사는 집 같다는 느낌이 왔다. 남정네는 사랑으로 들었고 여인들은 안으로 들었다.
집 같은 집으로 들어서인지 아이들은 방으로 들어가자 드러누웠고 눕자 곧 잠이 들었다.
어른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하다가 점심을 맞았다. 오봉 아지매가 보리밥이지만 군데군데 울콩으로 보리밥의 구수함과 어울려 더욱 밥맛을 돋우었다.
점심을 끝내고 새아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재와 나 또 할머니까지 해서 개울을 건너 오른편 비탈에 있는 제법 반듯한,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초가집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말씀을 하셨다.
“석산 어른(이는 나의 할아버지에 대한 택호 호칭). 여기에 계시는 동안 한울안의 집에 계시면 마음으로 부담이 될 것 같아 이 집에 계시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혼자 생각입니다만 석산 어른 생각은 어떻습니까.”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는 이게 웬 일인가 하는 표정이고,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서로 다른 식구끼리 한울에서 그 날수는 얼마 아니라 해도 불편하지. 그런데 이 집은 빈 집은 아닌 것 같은데....”
“예. 저의 어른들이 거처하시던 집인데 지금은 아우 집으로 가셔서 비었습니다. 내외분이 오셔도 저의 집에 방이 많아서 이 집에 안 계셔도 됩니다.”
“우리야 생광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
집도 깨끗하고, 방문을 열어보니 두 방은 모두 방바닥은 당시 유행하던 황도 방인데 콩댐을 해서 반질반질했다. 삼간 두 줄인데 오른편 큰방은 두 간방이고 앞 두 간은 청이다. 뒤 한 간은 부엌이다. 우리 열 식구에겐 좀 좁지만 피난치고는 고급이다.
우리 식구 중 어른들은 곧 짐을 챙겨 이쪽으로 옮겼다. 부엌에는 쇠솥이 걸려있다. 조금한 부뚜막도 있다.
할매와 엄마는 좋아 어쩔 줄을 모른다. 오봉 아재 내외도 오셔서 좋아했다. 어머니는 좋아서, “마치 꼭 오봉 누이 내외가 우리 피난을 기다라고 있는 것 같네. 정말 고맙네.”
라고 인사를 했다.
이 날이 8월 14일이었고 우리가 10월 4일 이곳에서 복귀하는 날까지 해서 51일간을 여기에서 우리 집처럼 살았다.
그 이튿날 아버지는 청도읍으로 아침 일찍 나가셨다. 가지고 있던 돈이 떨어져 무엇을 팔아서 돈을 장만하시려는 것이다. 어머니의 말씀에 구지지서장에게 주고 좀 남은 금을 마저 처분해서 양식을 장만하려고 가시는 것이라 했다.
그날 오후 3시쯤 아버지가 돌아오셨는데 보리쌀 한 말과 멸치 등, 우선 아쉬운 찬거리를 조금씩 사오셨다. 그런데 외아지매가 인편으로 어머니에게 써 보낸 편지가 있었다. 오랜만에 활달한 외아지매의 붓글씨체를 보았다.
그런데 그 사연은 우리들을 침울하도록 만들었다. 거기에는
≪형님 식구들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밀양 고을 지경을 넘어서는 안되옵니다.≫
라는 글발이 우리들 눈에 두드러지게 박혀왔다.
바로 이 오봉 골짝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5리도 못되는 능선을 넘으면 밀양 산내면으로 들어선다. 여기는 신문도, 라디오도 없어서 바깥소식이나, 전황은 깜깜 무소식이었다.
아버지는 간간이 매전면 온막리(溫幕里) 강변에 초막을 지은 「피난민수용소」에 다녀오지만 전혀 새로운 소식은 없고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혈전을 벌리고 있다는 것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특히 청년들에 대한 검문이 심한데, 그것은 무조건 잡아다가 군대에 보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재와 나에게는 함부로 이곳 밖으로 나갈 생각은 말라는 것이다.
사실 그 당시는 병역을, 일정한 법령에 따라 징집하는 절차는 없고 길에서 무조건 20대, 30대 청장년을 불문곡절 잡아다가 트럭에 싣고 보충대로 끌고 가는 것이다. 도시에는 야간에 담을 넘고 들어와 집뒤짐을 해서 잡아다가 전선에서 흘리는 피를 보충했던 것이다. 온 천지가 아버지를, 아들을 빼앗겨 통곡하는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과 딸의 통곡으로 가득 찬 나라로 만들었던 것이다.
9월에 들어서자 밤에는 날씨도 추워졌다. 낮에는 골짝으로 들어가 썩은 가지를 꺾거나 패다가 지게에 지고와 군불을 땠다. 특히 갓 난 막내 동생 주야를 데리고 주무시는 엄마를 위해 그 작은방은 보온에 신경을 써야 했다. 오봉 아지매는 우리들이 아무 가급 없이 그냥 보내는 주야의 백일을 챙겨주셨다. 백숙을 작은 시루에 한 시루 쪄서 주야의 백날을 축하해주셨다.
9월 추순 어느 날 온막리 수용소에 가셨다가 오셨는데, 「구지초등학교」 곽종간 교감선생을 만났다고 했다. ‘온막리 피난민 수용소에 「전시연합국민학교」를 개교하려고 하니 그때는 거기로 오라’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나는 이튿날 아침 일찍이 온막리 수용소로 달리다시피 갔다. 『매전면온막리피난민수용소』라고 간판을 써 붙인 대형 천막 사무소를 찾아갔다.
바로 그때 입구 바깥에 놓여있는 벤치에서 나를 부르는 낯익은 소리가 들렸다. 바로 우리학교 신응철 교장선생이셨다. 나는 교장선생을 향해 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꾸벅 절을 했다.
“교장선생님, 여기서 우짠 일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물었다. 교장선생은 반가운 목소리로 내 손을 잡으면서 말씀했다.
“자네 찾으려고 안 왔나. 다른 선생은 여기서 다 만났는데 자네와 젊은 선생들은 만나기가 어려워.”
“선생님은 어디로 피난하셨는교? 사모님은 편안하시고요?”
“우리야 괜찮은데. 아버지도, 참 할아버지도 괜찮으신가?”
“자, 우리 먼저 사무를 좀 보자구나. 자네들을 만나려고 대구에서 여기까지 온 것은, 첫째 월급을 주려고. 이번 월급에는 전시수당이라고 한 달 월급만큼이나 더 붙여준다네. 또 하나는 젊은이들이 모병에 걸리면 불문곡절 끌려가지만 교사는 거기서 제외되는데, 모병 검문에 걸리면 제시하는 ≪전시요원증≫과 ≪전시요원≫이라고 쓴 완장(腕章)이라는 게 있다네. 자, 자네 것, 여기 이 봉투에 모두 들어있으니 열어보고 대조해서 모두 맞으면 여기에다 영수했다는 도장을 찍으면 된다네. 도장이 없으면 무인이라도 좋고.”
나는 교장선생을 향해 꾸벅 절을 하고,
“선생님,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하자, 교장선생은 말했다.
“어이, 이 사람. 내가 주나. 나는 심부름이야. 허 허 허”
하고 유쾌하게 웃으셨다. 나는 봉투 안에 든 완장을 팔에다 둘러찼다. 완장은 붉은 줄이 두 가닥 비스듬하게 그어졌고, ≪전시요원≫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는데 커다란 붉은 도장이 찍혀 있다.
나는 곧 교장선생과 헤어졌다. 나는 이 소식을 엄마에게 그리고 아버지께, 할배 할매께 전하려고 바로 그 봉투를 끌어안고 오봉으로 달리다시피 해서 되돌아왔다. 나는 집에 들어가자 대문에서부터 소리쳤다.
“엄마, 나 월급 나왔다. 석 달 밀린 월급하고 전시수당까지 해서, 이 봉투에 들었어!”
하고 봉투를 흔들다가 어머니에게 드렸다. 어머니는 반가운 말씀을 했다.
“재구야, 이번에는 네가 크게 효도하는구나. 안 그래도 돈이 떨어져서 걱정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네가 식구를 살리는구나.”
할아버지도, 할매도, 아버지도 그리고 아재도 반가운 웃음으로 얼굴이 활짝 폈다. 재두와 용아는 전시요원이라는 완장을 찬 나를 보고 신이 났다. 나는 보기가 민망해서 벗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 피난살이는 10월 3일에, ‘10월 4일 복귀하라.’는 복귀령이 나서 끝났다. 우리식구들은 그날로 떠났다. 할배와 할매는 어머니와 아이들을 데리고 천천히 왔다. 중간에 이서면의 반상호 선생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이튿날로 왔지만, 아버지와 아재 그리고 나는 아침 일찍 오전 5시쯤 출발해서 백이십리 길을 하루 만에 걸어서 오후 4시쯤 구지면 창동의 우리 집에 당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