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7월의 대학살을 넘어 피난길로

1950년 7월 4일, 6월 25일에 터진 전쟁으로 학교는 무기 휴교되었고 교사들은 교무실에서 잔무를 정리하며 더러 모여서 모두 그늘진 얼굴로 전쟁의 귀추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시간은 정오를 한 두 시간 지난 듯 했다.
교무실 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다. 전투복을 입고 카빈총을 멘 경관 둘이 들어섰다.
“안재구 선생이 누구요?”
“전데요. 왜 그러시오?”
“지서장이 부릅니다. 잠깐 지서로 갑시다.”
서두는 품이 자못 날이 섰다.
그들을 따라 지서로 들어갔다. 지서장의 날선 눈이 나의 얼굴에 박힌다.
“집어넣어!”
순경 하나가 벽에 붙은 지서 유치장 문을 열고 나에게 턱짓으로 들어가라는 눈치를 준다. 허리를 굽히고 들어갔다. 그곳은 궤짝 같아서 앉기만 하고 설 수 없는 곳이다. 문이 덜컹하고 닫혔다.
나는 어마두지에 당한 일이라 어리둥절했다. 지서장은 나의 외갓집 집안사람으로 나에겐 할아버지뻘이 된다.
“할배요! 우짠 일인교?”
“이 자식아! 가만히 있거라! 본서에서 잡아 보내라 해서 그렇다. 나도 모른다.”
이 할배는 「한민당」 국회의원을 하는 외가 큰집할배가 자기 호위경관으로 금태 두른 경찰인 경위로 특채되었고, 외가큰집 석당 할배가 「5.30선거」에서 떨어지자 호위경관을 면하고 이곳 구지경찰지서 지서장이 되어 전근 온 것이다.
면장하시던 외할배는 이미 2년 전에 돌아가셨고, 외가큰집 할배는 이승만이 부르짖는 서울사수를 철석같이 믿었던지 못 내려오는지, 안 내려오는지, 아무튼 나의 보호막은 없어졌다. 이젠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들이 하는 품을 보니 ‘속절없이 죽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부터 면민 중에서 모모라고 하는 사람들이 숫하게 잡혔고 아침에 똘똘 묶여서 본서에서 온 트럭에 실려 갔다. 숙덕거리는 소리로 ‘모두 골로 간다.’는 소리였다. 그건 산골에 데려가 총살해서 끌어다 묻는다는 말이었다.
곧 어두워졌다. 아무 생각도 없다. 나이 18살에 피지도 못한 인생이다. 어머니 생각이 났고 할아버지 생각으로 눈물이 났다. 하지만 피지도 못하고 죽은 사람이 어디 내뿐이랴. 「2.7구국투쟁」 이후 야산에서 활동하다가 붙잡혀 죽었다는 동무들을 생각하니 슬픔이 좀 가셨다.
이렇게 죽음의 슬픔과 두려움을 짓씹고 있던 중 시계는 자정을 지나 두 점을 친다. 좀 지나 유치장 문이 덜컹 하고 열렸다. 지서장 할배다.
“이리 나와!”
나를 자기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혔다.
“이 사람, 내가 우째 우리 집안 외손을 죽을 곳에 보내겠노. 내보내 줄 테니 도망가라. 본서에는 못 잡았다고 할 테니.”
“할배요! 고맙구마.”
나는 일단 집으로 갔다. 엄마가 나를 끌어안고,
“하느님요, 자식을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할매는 눈물 젖은 얼굴을 내 얼굴에 부비면서
“야는(이 아이는) 죽지 않는다! 죽지 않고말고.”
지서장은 내가 월급 받은 돈으로 어머니가 사 모은 금붙이와 아버지의 최신형 시계를 받고 내준 것이다.
해마다 6월 말이 되고 7월에 들어서면 저승 문 앞까지 갔던 이 시절의 일이 떠오른다.
7월! 7월 달은 대학살의 달이었다.
나는 지서장 할배의 말 따라 도망을 쳤다.
그 이튿날 새벽에 나는 할아버지께 절을 올리고, 어머니의 권에 따라 거기서 십리쯤 되는 유가면 한정리 원산이라는 마을에 사는 어머니의 고모 집으로 갔다. 우리들이 ‘원산이할매’라고 부르는 그 할매는 나를 보고,
“네가 우짠 일고, 이 소란스런 때에?”
“할매! 날 좀 숨겨줘.”
라고 말하고 일의 전후를 말씀드렸다. 그때는 새벽이라 동네 안쪽에 들어있는 할매집까지 가는데 사람 한 사람 만난 일도 없었다. 할매는 불문곡절 잡은 내 손을 잡고 끌어들이고,
“그래, 걱정마라. 여기 숨을 데가 한곳 있다. 이리 따라 오너라.”
하시고 앞장서 가셨다. 옆문을 열고 가시더니 대밭으로 삼면이 둘러싸인 사당으로 들어가 모신 신주 앞에서 고개숙여 작은절을 하시고 그 바로 밑 청마루의 한끝을 힘들여 쿵하고 밟자 마룻장 한 장이 내려 구멍이 열렸다. 할매는 내려간 마룻장을 집고 땅기자, 장승으로 이어진 마룻장이 한 장 더 따라 열렸다. 침침한 어둠에서도 안으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보였다.
“이 안에 숨어있으면 세상 어느 누구도 못 찾는다. 내, 곧 자리와 요니불을 가지고 올 테니 낮에는 이 안에 숨었거라.”
라고 하시고,
“너도 여기에 모신 천위(不遷位) 할배의 외손이니 이 할배가 너를 지켜주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할매에게 말씀드렸다.
“그럼 할매, 불천위 할배께 절부터 해야지.”
라고 말씀드리고 모신 신주의 함을 향해 공손히 절을 올렸다.
이 불천위 할배는 나의 13대조 할아버지의 장조(丈祖)어른이시다. 이 집안에서는 불천위 감사공 할아버지로 부르고 있는 신위는, 성이 현풍곽씨(玄風郭氏)이고 휘(諱)는 월(越)이며, 감사 벼슬을 했다. 당시 임진전쟁을 앞두고 동북아시아의 복잡한 정세로 해서 생긴 조•중간의 외교문제를 잘 해결한 공로로 시호를 받고 불천위로까지 오르신 할아버지이다.
이 할아버지의 맏아들 휘 재지(再祉)가 나의 13대조 할아버지의 장인이시고 둘째 아들이 임진전쟁 때의 의병장으로 조국을 지킨 유명한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장군이시다. 그러니 나의 13대조모는 바로 망우당의 질녀(姪女)이시다.
나는 이 외존고모의 보호로 꼭 한 달을 숨어살 수 있게 되었다.
7월이 다 끝나가자 대포소리가 멀리서 들리더니 그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러다가 8월에 들어 4일 아침에 바깥이 매우 어수선해서 마룻장을 올리고 가만히 사당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 동생 용아와 새로 생긴 동생인 재주를 업은 향아가 사당으로 들어오는 문 곁에서 장난을 치고 놀고 있지 않는가. 이어 외사촌 누이동생 쾌야도 나와 사당으로 오는 길로 나서고 있다. 나는 일단 사당 안으로 들어와 문을 안에서 잠갔다.
곧 이어 ‘원산이’할매의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재구야, 내다. ‘원산이’할미다. 인자 나오너라. 너그 집 식구들과 외갓집 식구들이 모두 여기로 난리피난을 왔다. 이제 나와도 된다. 지금은 네 잡을 경찰은 모두 없어졌다.”
이 소리를 듣고 나는 문을 열고 나가면서 소리를 쳤다.
“향아! 용아! 쾌야!”
“형아!, 오빠!”
하고 모두 뛰어와서 내 두 팔에 매달렸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할아버지가 계시는 사랑채로 갔다. 사랑채의 큰방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재 형제가 계셨고 작은방은 외아재와 외가큰집의 진잠아재와 그 어린 아들이 계셨다. 방금 집도 살림살이들도 모두 버리고 들어와서 그런지, 몸도 마음도 모두 걷잡을 수 없어서 그런지 멍하니 그냥 앉아만 있었다.
이러한 어수선한 분위기를 그 이튿날 새벽에 일어난 사건으로 온 동네의 사람들과 피난 온 사람들을 모두 전쟁의 실감이 들도록 만들었다.
새벽 5시쯤이었을까, 아랫도리가 물에 푹 젖은 채로 낯선 붉은 별표를 이마에 단 모자를 쓴 병정이 10여명이 아래에 이상한 통을 매단 총을 가지고 날선 눈빛을 가지고 동네로 들어와서 비슬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어디냐고 물었다고 했다. 그리고 들어가는 길목까지만 안내해달라고 해서 동네의 한 청년이 따라나섰다고 했다. 그리고 한 두어 시간이 지나자 국군이 몇 사람이 와서 그 군대가 간 길을 물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간 다음 좀 지나자 산에서는 콩 볶는 소리를 크게 내는 것과 같은 소리가 일어났다. 그리고 한참 지나자 부상자를 담가에 싣고 국방군 3, 40명이 내려왔는데 그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 이튿날 국군이 동네에 들어와서 동네를 비우라고 했다.
원산이 할매 식구도 함께 외갓집 식구들과 같이 피난길을 나서야 했다. 그 피난지는 거기에서 동남쪽으로 4킬로미터 조금 못되는 경남 창녕군 성산리 곽천 냇가에 정한 ≪피난민수용소≫라고 했다. 그날 점심때에 곽천 마을에 도착했는데 그 마을은 창녕성씨의 집성촌이었는데 우리 집과 외갓집이 혼인관계로 이리저리 사돈 간이 되어 방을 내주어 한뎃잠을 피할 수는 있었다. 5월말 경에 태어나 아직 백날도 못된 나의 막내동생 재주는 그 8월의 뙤약볕에 얼굴껍질이 벗겨지기는 했지만 건강하게 이겨내고 있었다.
모두 피난 짐을 지고 가는 터이라 재주를 업고 가는 몫은 여덟 살 여린 어깨가 맡았던 것이다. 피난 짐은 덮고 잘 홑이불들과 옷가지 그리고 취사할 양은 냄비와 양은그릇과 수저 등이었다.
그런데 재주보다 두어 달 먼저 태어난 외사촌 누이동생은 몸이 약했다. 자꾸 열을 내고 앓았다. 피난 중이라 약도 구할 길도 없고 외아지매는 근심이 여간 아니었다. 그래서 또 피난을 가라고 하면 어쩔까 하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피난을 또 가라고 하면 비슬산 산줄기를 넘어 청도 땅으로 가야 했다. 청도 땅으로 가면 연척이 사는 두어 동네가 있지만 곽천 마을처럼 넉넉한 마을은 없다. 외아지매는 걱정이 여간 아니었다. 전세는 날이 갈수록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소문에는 여기도 얼마 못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애를 태우고 있는데 이 곽천 마을도 비우라는 것이다. 그날이 8월 16일이었던가, 그날 오전 중에 곽천 동네를 비우라는 것이다. 모두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또 피난 짐을 싸고 그 마을, 이때까지 우리들에게 고맙게 했던 곽천 마을사람들과 함께 그 피난 봇짐을 메고 모든 가산을 버리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도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기약 없는 날짜에 생사조차 모르는 피난길을 말이다.
아침에 열을 내고 있는 어린 내 외사촌 누이동생이 외아지매 등에 업혀 가는데 중간 중간 쉬면서 아이를 내려 젖을 먹여도 잘 빨지 못한다고 하면서 길가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는 그 곁에 앉아서 근심어린 얼굴로 보기만 했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외아지매는 갑자기 큰소리를 냈다.
“아이구, 우짷고. 그만 물고 있는 젖꼭지가 그냥 나왔네. 이를 우짷고! 지나가는 사람 중에 의사 없는교? 내 아이 좀 살려 주이소. 제발 내 아이 좀 살려 주이소. 아이고 이를 우짷고!”
라고 절규했다. 나의 어머니, 그리고 외가큰집 아지매 그리고 아재들이 둘러섰다.
한참 지나자 외아재는 아지매 곁에 앉아서,
“이제 그만 울고, 그 아이 내가 안을께. 이리 주어....”
라고 해도 아지매는 그저 멍하니 먼 하늘을 보고만 있었다. 나의 어머니가 아지매가 안고 있는 아이를 안아오자, 아지매는 정신이 나간 양 그냥 먼 하늘로 아이가 가고 있는 것을 보는 양 그저 하늘 한 곳에 시선을 멈춘 체 눈물이 가득한 눈만 번히 뜨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는 아지매의 한쪽 어깨를 흔들면서 좀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아, 정신 차리게. 죽은 아이는 빨리 잊는 게 죽은 애에게도 좋고 그 어미도 좋다네. 이제 산 아이 걱정을 해야지. 지금 우리는 피난길이 아닌가! 이 사람 정신 차리게.”
라고 하면서 잡은 어깨를 흔들자, 외아지매는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만 큰소리로 통곡을 했다. 어머니도 마주안고 통곡을 했다. 아마 내가 한 번도 못 본, 죽은 내 동생 정아 생각도 났을 게다. 그때 못다운 서러움을 벌충이나 하는 듯이. 이 시누이올케의 통곡소리에 곁을 지나가던 피난민 어머니들은 산 아들딸, 죽은 아들딸의 걱정인지 모두 눈물을 뿌리며 더러 소리 내어 울면서 이 졸경을 보다가 지나갔다.
좀 지나자 가까운 동네에 들어가 연장을 빌려온 외가큰집 아재와 아버지가 오셨다. 나는 어머니가 안고 있는 아이를 받아 안고 동네로부터 나온 어른의 안내에 따라 산골짝 안으로 들어갔다. 골짝의 약간 비탈진 남향 마른 땅을 골라 구더기를 팠다. 두세 자 깊이로 팠다. 구더기 안에 포근한 부드러운 흙을 깔고 거기에 마른 홑이불을 펴고 아이를 눕히고 양쪽 자락으로 덮어 포근하게 감아 샀다. 그리고 부드러운 흙으로 이불을 덮은 몸이 보이지 않도록 덮은 다음 파놓은 흙을 덮어서 삽으로 두드리면서 튼튼하게 묻었다. 그리고 곁에 좀 굵은 나무를 베어다가 말뚝을 만들어 그냥 표지로써 박아두었다.
돌아와서 나는 외아지매에게 말했다.
“고종사촌 오빠가 마른자리를 골라 보드라운 흙으로 덮어서 여름에는 시운하게 그리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잘 묻었다. 이제 아무 걱정 말거라, 외아지매야.”
그리고 우리들은 발이 떨어지지 않은 걸음을 걸었다. 저녁녘이 되어서야 고개 넘어 청도 풍각면 흑석이라는 좀 큰 마을 곁에 흐르는 냇가에 자리를 폈다. 그리고 저녁밥을 준비했다.
저녁밥을 지을 부뚜막을 만들고 마른 나무를 해다가 불을 피워 밥을 하고 있는 중에 이건 또 뭔가. 흑석마을의 청장년들이 10여명이 손에 몽둥이를 들고 와, 피난민은 딴 곳으로 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디로 가라는 것인가?”
라고 하자 산동의 매전면에 「피난민수용소」를 만들어놨으니 그리로 가라는 것이다. 이래서 승강이가 붙었다. 자연 분위기가 험해졌다. 그래서 밥만 해먹고 자는 것은 도로가에서라도 자겠으니 어둡기 전까지 만이라도 부탁했다. 처음은 그것도 안 된다고 했지만 솥에 끓고 있는 밥을 버리고 가라고는 할 수 없었던지 몽둥이로 지키고 있는 가운데 밥을 해먹고 자리를 떴다. 그날은 도로가의 풀밭에 포플라 가로수에 기대어 밤을 보냈다. 밤공기가 차지자 아이들은 꼭 품고 잤다.
아침에 외갓집 식구들과 의논을 했다. 외갓집은 밀양으로 거서 원산이 할매의 언니가 밀양의 살내마을에 계셔서 그쪽으로 가기로 한다고 해서 우리식구들과 헤어지기로 했다. 외아재는 밀양에 가서 그쪽 형편이 괜찮으면 소식을 전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튿날은 우리들은 외갓집식구들과 헤어져, 녹명동(鹿鳴洞) ‘녹갈’이라는 동네에 들어가 좀 촌수가 먼 일가의 취객(娶客) 집에 찾아들어 ‘헛간채라도’ 하고 들어갔는데 서로 알고 있는 처자라 거절도 못하고 소여물간을 빌어 아이들만 안에다 들이고 어른들은 그 처마 밑에서 자리를 깔고 한뎃잠을 잤다. 그래도 안 되었던지 일가 아지매가 나와서 할아버지만 데리고 사랑채에 붙은 보리씨를 넣어둔 골방을 내주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동네구장이 그 집, 우리집안 취객인 이서방이라고 부르는 ‘새아제’와 동네 구장하고 하는 이야기를 내가 무심코 엿들었다.
“이 사람아! 자네 우짤라고 그러나? 빨갱이를 재워주었다고 소문나면 자네들이 그 감당을 우짤라고 하는가! 나도 책임 추궁을 당할 것이니 내라도 신고를 해야겠네.”
“아무리 그렇지만 어찌 처족 처삼종숙을 어떻게 신고를 하겠습니까? 아재, 한번만 그냥 봐 넘겨주소.”
이 말을 들은 나는 소름이 끼쳤다. 나는 할아버지께 당장 달려가서 고했다.
“할아버지, 큰일 났습니다. 구장이라는 놈이 와서 이 집 새아재에게 할아버지를 신고하라고 닦달을 하고 있습니다. 할버지, 빨리 나오이소. 다른 식구야, 별일 없을 테니 할버지는 피하시고, 저는 그놈의 구장 놈이 신고하러가는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재껴버리고 달아나겠습니다.”
하고 곁에 있는 기둥에 걸린 낫을 벗겨 들었다.
“아니다, 내가 없으면 그놈이 신고하지 않을 것이다. 일찍 신고 안 해서 놓쳤다고 오히려 야단맞을 테니. 우리들이 달아나서 어디 가까운데서 망을 보다가 식구들이 나오면 그때 함께 가기로 하자.”
라고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하기로 하고, 나는 이 말을 아재에게 전하고 아침에 일찍이 출발하라고 했다. 할아버지와 나는 나온 그대로 큰길가로 나와 식구들이 나오도록 기다렸다. 한 시간쯤 지나서 모두가 한 곳에 모였다.
할아버지는 또 한 군데 연척이 있는데 거기로 가보자고 하셨다. 우리는 할아버지를 따라 어제 온 도로를 건너 북동쪽 방향으로 난 도로를 따라 갔더니 이서면(伊西面) 면사무소에 이르렀다. 할아버지는 이서면 사무실에 들러서 직원에게 몇 가지를 묻고 어딘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선 미소를 띠고 기다리셨다. 한 10분쯤 지나자 중년 신사가 오셔서 할아버지께 아주 정중하게 절을 했다. 할아버지는 그냥 절을 받았다. 그리고서 아버지와 아재 그리고 나를 불러 인사를 시켰다. 이름이 반상호(潘相鎬)라고 했다.
반상호 선생은 한때 서울에서 공부를 했고 그때 할아버지가 운영하셨던 ≪노동학원≫에서 사회주의강연을 많이 들어 공부하셨다고 했다.
그날 점심은 반상호 선생의 댁에서 오랜만에 집에서 정식 주방에서 한 음식으로 대접을 받았다.
반 선생은, 지금 어디로 가실 작정이시냐고 물었는데, 할아버지는 산동으로 가서 집안의 한 취객을 찾아 거기에서 피난을 할 작정이라고 하셨다. 반 선생은 말씀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피난을 하시면 어떠시냐?”
라고 권하셨다.
“반 선생도 알가시피 이쪽 당국이 기피하는 인간인지라 반 선생에게 혹 무슨 폐라고 될 수 있어서 그렇게는 못하지...”
라고 말씀하셨다. 아무튼 우리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났지만 기억에 유달리 남는 분이셨다. 그날은 오후에 비가 추적거리며 왔다. 반 선생은 우리가 떠날 때까지 좀 푹 쉬시라고 하시면서 사랑채를 통으로 비워주셨다. 우리는 비가 추적대는 오후의 나른한 때를 만나 이틀 동안 한뎃잠이나 다름없는 잠을 보충하느라고 모두 눕자마자 골아 떨어졌다. 반 선생은 그 동안 안에 들어가서 미수가루를 비롯해서 간단한 간이식사재료를 급히 만들도록 하시고 다른 식료품도 많이 찬합에 담도록 준비하셨다.
우리가 한 두어 시간 자자 할아버지는 모두 깨우시고 너무 오래 쉬면 몸이 퍼져 오히려 몸에 해롭다면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라고 다그치셨다.
오후 4시경에 출발하려고 했더니 반 선생은 행선지를 물으셨다. 늦은 오후에 출발하려는 것을 보고 그리 멀지 않은 곳임을 알고 짐을 집안 일군을 시켜 져드리려고 한 것 같다.
나는 상대에게 부담스럽지 않게 배려하는 방도에 대해 많은 것을 반 선생으로부터 이때에 배우게 되었다.
우리들은 백곡의 김해김씨 종갓집으로 찾아갔다. 백곡은 무오사화 때 점필재(佔畢齋)가 부관참시를 당하고, 참형을 당한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동네이다.
우리 식구, 네가 성인은 못 되지만 성인 축에 넣고 성인 여섯에다 아이 넷, 모두 열이 대거 피난을 구실로 갑자기 쳐들어갔다.
밀양과 청도는 유림의 일은 두 고을이 합사하는 일이 보통이어서 바깥사람들은 자주 만났던 사이라 친목이 돈독한 사이였고, 어머니는 그 집종부와 가까운 연척이어서 서로 반가워했다. 윗대의 어른들이 안 계신 지금, 그 연고를 밝히는 일은 매우 어려워 그냥 하룻밤을 자고 산동으로 가는 길에 하룻밤을 쉬고 간일로서 고마움만 남게 된 것이다.
그날 우리 식구들은 잇달린 두 방을 쓰게 되어 그 동안 생긴 노독을 풀게 되었다.
그 이튿날 아침을 먹고서 청도의 산동지역으로 출발했다. 비슬산 넘어 낙동강 연변의 마을에서 동네를 모두 비우고 청도의 산동 매전면(梅田面) 동창천의 강변으로 정해진 「피난민수용소」로 수없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모여드는 피난민을 따라 청도천을 따라 내려가다가 경부선 철도의 철교 밑에 놓인 진금다리를 건너 산자락에 붙었다. 관하고개를 향해 계속 오르막길로 나아갔다. 피난민은 짐을 지고 가는데 소 등에 짐을 싣고 가는 사람도 있으나 소달구지도 간혹 보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등짐으로 솥, 양식과 간단한 여름침구를 뭉쳐서 지겹게 걸어간다. 그것도 산자락에 붙어서는 그리 물매는 급하지 않지만 계속 오르막길이었다.
마침내 청도고을의 산동과 산서를 가르는 관하고갯마루에 올라섰다. 이 고갯마루를 넘어 조금 내려가면 관하면(管下面) 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이 나온다. 그래서 그 고개를 관하고개라고 피난민들은 불렀다.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생선 썩는 냄새보다 더 지독한 냄새가 풍겨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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