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평화로웠던 그리운 교사생활
나의 초등학교 교사생활은 6.25전쟁의 피난 전후 전혀 환경이 달라버린 두 가지 시기를 겪었다. 교사로 부임된 1949년 9월부터 1950년 열 달동안의 평화롭고 낭만적이기도 했던 시기도 겪었고, 또 한편 전쟁으로 집도 학교도 불타버린 폐허에 돌아와 흙담과 맨 땅바닥에 가마니때기를 깔고 교실이랍시고 해두고, 앞에는 말뚝기둥에 칠판을 걸어놓고 수업을 했던 절박한 시기도 겪었다. 이 시기는 북의 인민군이 후퇴하고 낙동강에 총소리가 없어져 복귀허가가 난 10월 초부터 그 이듬해 내가 진학하려고 사표를 제출할 때까지, 1951년 8월까지, 그 사이 11개월간의 시기였다.
처음 부임할 때는, 그 불타버린 목조교사가 교실도 복도도 나뭇결이 반질반질 윤이 나는 멋진 마룻바닥을 가진 교사였다. 대청소할 때 5, 6학년 학생들이 마루에 초칠을 해서, 양말 신은 발로 다니다가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했고, 그 복도를 1, 2학년 어린이들이 콩콩 소리를 내며 달리는 그 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 그 그리움을 내 가슴에 종종 안겨들고 있다.
부임하자 곧 학교생활이 몸에 익어가고 처음 긴장되던 수업도 한 두어 달이 지나자 그 긴장도 풀려 여러 선배 교사들이 방과 후에 벌리는 막걸리 판에도 어울리기 시작했다.
좀 주기가 오르면 노래판이 벌어지는데, 그때는 당연 지휘자는 기타를 잘 타시는 임명선 선생님이었다. 임 선생은 오른 손 집게손가락 한마디가 없는 손가락으로 기타를 타는 모습은 정말 멋이 있었다. 누가 무슨 노래를 하건 기타반주는 거저 잘 맞추셨다. 나도 풍금으로 그리 잘은 못하지만 반주도 더러 해주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경주에서 살았는데, 그때 아버지가 피아노를 사주시고 아버지로부터 피아노를 배운 일이 있어 그것으로써 풍금을 그런대로 연주 할 수 있었다. 그 덕으로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칠 수도 있었고, 아이들 노래에 반주도 좀은 해줄 수 있었다.
10월에는 가을운동회가 있었다. 이 날의 초등학교의 운동회는 시골 면민들의 체육대회이기도 했다. 아이들 운동회의 순서는 주로 오전에 거의 다 마치고 오후는 면의 각 동리의 청년들이 겨루는 동리대항 계주가 있고, 이때 초등학교 교사들도 면민들과의 친목을 위해 한 팀을 만들어 참가했는데, 선생님들이 나더러 선수로 뛰라고 했지만 나는 유달리 짧은 다리로 달음박질은 전혀 아니라서 사양하는 데 진땀을 뺐다. 그 대신 그 ‘아기 선생’이라는 별명 때문에 아이들이의 손님 찾기 놀이에서는 인기라서 서너 번이나 불려나가 달렸다. 아무튼 이리저리 그날은 바쁘게도 돌아쳤다.
구지는 제법 큰 5일장이 열리는 곳이고 낙동강 가의 물풍한 곳이어서 인심도 넉넉해서 이웃 현풍보다는 번성함은 덜 해도 그 대신 유장한 풍류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차차 아이들과도 친해지고 나도 늘 아이들의 모이감을 넉넉하게 장만해두고 내 공부방이 따로 있어서 일요일이나 겨울방학 때는 아이들이 놀러오기도 했다. 7, 8명이 되면 마당에 짚 덕석을 갈아놓고 수건 놓기 등을 해서 벌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 놀이를 했다.
하도 세월이 오래 지나서 그 아이들 이름은 고사하고 얼굴도 이제는 잊혀가고 있다. 이제 그 구지라는 시골장터도 아파트마을이 되어 대구광역시에 들어가 도시 가운데 들고 말았다고 한다.
겨울방학 때는 도동마을에 있는 외갓집에서 한 열흘쯤 지냈는데 낙동강은 얼어붙어서 나룻배는 강가로 끌어올려 있고 사람들은 등빙(登氷)을 해서 건너고 있었다.
외아재는 이 시기가 한몫을 단단히 보는 때였다. 낙동강 강변의 모래땅의 밭에는 낙화생이 특산물이었다. 외아재는 11월부터 그 이듬해 1월까지 한참추위에 강 연안의 마을을 다니면서 낙화생을 사서 짐배에 실어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저 멀리 다사(多斯) 강창(江倉)까지 가는데, 가는 길은 5, 6명의 뱃군이 어깨에 걸방을 메고 걸방의 등에는, 뱃머리로부터 나온 굵은 밧줄이 길게 나와 있는데 거기에 매달려있는 걸개에 일군들의 걸방의 줄이 걸려있다. 뱃군들의 몸이 땅과 40도 정도 기울여 숙이고 힘을 모아 뱃머리에 걸려있는 밧줄을 통해 배를 끌고 있는 것이다. 그 고된 힘을 뱃군의 노래, 좀채로 알아듣기 힘든 노래를 부르면서 힘을 짜내고 있다.
나와 외아재는 배 한가운데 두터운 요를 깔고 솜을 두텁게 넣은 이불을 어깨에까지 걸치고 있었다. 배를 끌고 있지만 강심은 고요해서 아무런 느낌을 받지 않고 주변 경관이 거저 천천히 뱃머리 반대쪽으로 가고만 있었다.
이렇게 해서 올라가면 바람이 밀 바람일 때는 23시간 정도 걸리고 마주 바람일 때는 25시간 정도 걸린다. 강창에서 낙화생 콩을 다 팔고 내려올 때는 주인과 일군은 모두 타고 내려오는데 강의 흐름에 따라 오는 길이라 10시간 정도로 걸려서 되돌아온다.
아무튼 오전 1시에 도동나루에서 출발한 배가 그 다음날 오전 5시에 강창나루에 도착했으니 일군들의 중간휴식시간까지 해서 28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런데 내려올 때는 흐름에 따라 내려오기 때문에 10시간 정도로 도동나루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는 모두 배안에서 밥도 해먹고 두터운 이불을 덮고 잠자는 것이 또한 일이었다.
외아재는 늘 혼자 배를 타려 하셨지만 외할매는 세월의 인심이 흉흉한지라 외갓집 장골청년을 데리고 다니도록 했다. 그날 나는 장골 축에는 못 끼는지라 그냥 여수로 따라가기만 한 것이다.
외아재는 겨울에는 이 뱃길을 쉬지 않고 다녔다.
겨울방학 동안 나는 학력을 올리는 데에 모든 힘을 기울였다. 제일 힘든 공부는 영어였다. 그 당시 실력은 겨우 중학교 3학년 정도나 될까? 이눔의 공부는 무조건 외우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재미가 날 게 없다. 재미가 없으니 나중으로 미루게 된다. 그래서 점점 더 멀어지고 만다. 목적은 가능하면 1950년 7월에 있는 「대학입학자격 검정시험」을 쳐서 입학하는 것이다. 이러면 이때 합격한다면 대학을 1년 빨리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늦어도 1951년 7월에 합격하면 그 학년을 찾아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다. 목표는 이렇게 세웠지만 그놈의 영어 때문에 골치다.
매일 학교근무를 마치면 오후 5시에 퇴근,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우-누이들과 좀 놀다가 할아버지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공부 때문에 라디오는 할아버지께 맡기고 뉴스는 할아버지로 통해 이야기로 듣기로 했다. 그러면 자연 토론을 하게 되고 할아버지의 지혜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학교직원은 교장, 교감과 교사 12명. 그중 여교사 3명. 남자교사 9명이 숙직을 해야 하기 때문에 9일마다 한 번씩 돌아온다. 사환 1명, 청부 1명. 이들은 교대로 숙직근무를 했다.
이렇게 학교 교사생활도 몸에 익어가고 있고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교장 선생도, 교감 선생도 나에게는 특별히 사랑을 베풀고 있고 따라서 나도 학교일은 스스로 찾아서 하고 있다. 이렇게 공부에다, 여러 가지 잡무를 거들고 지내는 중에 겨울방학도 끝났다. 2월에 개학했다. 3월에 제2학기가 시작된다.
당시 학제로 신학년은 9월1일에 시작하고 제1학기는 9, 10, 11, 12월 25일부터 방학, 1월 25일에 개학해서 2월 20일까지는 1학기에 들고 2월 말까지는 봄방학, 3월부터는 제2학기가 시작되는데 3, 4, 5, 6, 7월 25일까지이었다.
당시 초등학교에는 4, 5월의 봄이 되면 아동들의 재롱을 「학예회」라는 행사로,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 노래와 장기 유희 등으로 학부형들에게 그 재롱을 보이는 행사였다.
교사로 된 이는 누구라도 그들이 가르치고 있는 학동들이 배운 성과를 그 학동들의 부모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하나의 바람일 수 있다. 그래서 교육적 행사로 해서 봄•가을의 좋은 날을 정해서 「학예회」라는 잔치를 벌였다.
이때는 남자 교사도 애를 쓰지만 여자 교사들은 수고가 더 많다. 아동들의 예능을 보여 주어야하는데 그 일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잘 k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1, 2학년 저학년의 유희나 노래는 여교사가 그 세심한 감정을 담아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본래 천성으로 가지고 있는 예능을 발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무엇을 했는지 하도 오래된 세월이 지난지라 다 기억할 수 없지만, 단지 ≪그리운 강남≫이라는 노래를 열심히 가르쳤고 이를 합창으로 불러서 학부모에게 대단한 갈채를 받아 ‘아기 선생’이 인기를 한껏 올렸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 이야기를 여기에 쓰려고 했지만 그만 가사를 까먹어서 포기하려했는데, 백방으로 찾아 그때 그 가사를 온전히 전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리운 강남≫
1. 정이월 다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 오며는
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을 어서 가세.
2. 하늘이 푸르면 나가 일하고
별 아래 모이면 노래 부르니
이 나라 이름이 강남이라네.
[후렴]
3. 그리운 저 강남 두고 못 감은
삼천리 물길이 어려움인가
이 발목 상한지 오램이라네.
[후렴]
4. 그리운 저 강남 건너가려면
제비 떼 뭉치듯 서로 뭉치세
상해도 발이니 가면 간다네.
[후렴]
그 후 이 노래는 아이들에게 인기를 얻어 고무줄놀이 때 부르는 노래로도 부르며, 그래서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 나가면 1, 2학년 어린 아이들이 나만 보면 안겨들고 매달리고 했다. 그 중에는 제 오빠처럼 여기는지 어떤 아이는 내게 말도 놓았다.
1950년, 새봄이 들자 38선 일대는 남과 북의 군대들이 서로 총질을 하고 충돌이 날이 갈수록 잦아지고 그 규모가 더욱 커지고 있어서 그것이 언제 전쟁으로, 더구나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되어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될는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지난 해, 1949년 6월에, 남북 『민전』이 하나의 『민전』으로 통합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 평화적 통일방책을 제의한 바 있었는데, 그 후 1년 동안 정세를 개괄하고 조국통일의 절박함을 강조하고, 8.15해방 5돌을 맞이하여 조국통일을 이루어 기념하자고 호소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화적 조국통일방책을 추진하자고 제의했다.
1. 8월 5~8일에 전조선적인 남북총선거를 실시하고 통일적 최고입법기관을 창설하며 8.15해 방 5돌 기념일에 서울에서 최고입법기관회의를 소집하자.
2. 이를 위하여 6월 15~17일에 해주 또는 개성에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원하는 『남북민주 주의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협의회』를 소집하여 여기서 평화통일을 위한 제 조건과 총선거 실시의 절차, 『중앙선거지도위원회』 창설문제를 토의 결정하자.
3. 『대표자협의회』에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계속 반대하는 민족반역자들은 참가시키지 말 것이며 조국 통일사업에 『유엔조선위원단』의 간섭을 허용하지 말 것,
이 『조국전선』의 방안에 대해서 남조선의 반동들은 적화통일의 한 수단으로 하는 ‘평화공세’라면서 헐뜯고, 미제와 이승만정권은 북진통일을 부르짖으며, 이 내용을 담은 서한을 가지고 보낸 인사들을 전선에서 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한편 이승만은 5.10선거 이후 날이 갈수록 민심을 잃어가고 있다가 1950년 5월 30일 총선거에서 대패를 함으로써 민심이반의 절정을 맛보았다.
선거는 이승만의 직접적인 감독 밑에 30명의 반대파 입후보를 가두어 놓고 테러를 감행하는 공포 속에서 진행되었으나 이승만의 지지자는 210석 가운데 겨우 47석밖에 당선되지 못했고, ≪남북협상파≫를 비롯한 ‘반이승만파’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것으로써 선거의 결과는 비단 ‘이승만독재정치’의 파멸을 가져올 뿐 아니라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통치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정세를 뚫고 식민지통치체제를 지탱하려면 다수파를 꺾어 누르고 이승만체제를 유지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전쟁밖에 없다는 것을 미제는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운 방침에 따라 6.25전쟁을 일으킬 것을 결정하고 덜레스가 트루먼의 명령에 따라 국방장관 존슨과 합참본부장 브래들리 그리고 맥아더와 더불어 『도쿄4자회담』으로 불리고 있는 이 회담으로 6.25전쟁에 관한 모든 문제를 서둘러 결정했던 것이다.
6월 17일, 남조선에 들어온 덜레스의 그 첫 행각으로서 6월 18일 『38도선시찰』에 나섰다 그는 여기서 북반부의 방어형편과 남조선국방군의 전쟁준비상태를 검열한 후 국방군장병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6월 19일, 덜레스는 5.30선거의 새 국회의 개원식에 참가하여 미국의 극동정책을 설명하고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에서 ‘당신들은 외롭지 않으며’라고 하여 전쟁을 내비추었고, 언제나 미국의 강력한 ‘정신적 및 물질적 지지’를 받을 것이라며 그 전쟁을 담보해주었다.
이와 같은 준비와 격려 그리고 담보를 받은 이승만은 전쟁으로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아침 서울 방송에서 38선 일대에서 남북의 군대가 대규모의 충돌이 일어났다고 보도했고, 이북 평양방송에서는 남측 국방군이 38선을 넘어 침략했고 영용한 인민군을 이를 격퇴하고 있다는 방송도 곧 이어 나왔다.
이리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