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아기 선생의 시작

“여러분, 나는 방금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소개받은 안재구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의 학교인 「구지국민학교」에서 여러 분들에게 무엇을 가르친다는 선생이라기보다 함께 공부하고 함께 놀아줄 동무가 되겠습니다. 때로는 형처럼 그리고 오빠처럼 여러분의 생활과 공부를 도우며 여러분과 함께 한 가족으로 이 학교에서 살겠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걱정스런 일이 있으면 함께 걱정하며 서로 도우고 살겠습니다. 이것으로 교단에 처음 서는 나의 인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정말 반갑습니다.”
“차렷, 선생님께 대하여 경례!”
열일곱 살이라지만 아직 만으로는 열여섯 살이 좀 모자라고 빡빡 깎은 중학생 까까머리 차림에다 검은 목닫이 학생복을 입은, 그래서 아이들이 나중에 별명으로 ‘아기 선생’이라 붙인 선생으로서 했던 나의 첫 인사말이다.
내가 구지에서 「구지고등공민학교」 1학년에 다니다가 갑자기 없어졌다가 1년 반이 되도록 소식도 없었는데 또 갑자기 1949년 9월 초하루에 「구지초등학교」 교사로 되어 나타났으니 조그마한 시골 면소재지에서는 그 소식이 벌써 차고 넘쳐 온 면내가 소문으로 쫙 퍼졌다. 그래서 그 ‘아기 선생’이라는 말도 면내의 온 마을에 또한 퍼졌다.
아무튼 그 시절은 교육자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높았다. 가령 면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은 초등학교 교장이고 그 다음이 면장, 그 다음은 전관예우를 받는 유지 쯤 되고 경찰지서장은 그 다음 쯤이나 될까.
그런 시절에 내가 교사로 되었고 거기에다 열일곱 살의 까까머리 소년이었으니, 면에서는 이 일을 경사로 여겨 모두가 자기 일처럼 반가워했다. 참으로 순박하고 정다운 농촌사람들이었다.
나의 첫 담임 학급 반은 4학년 2반인데 4학년은 두 반이 있었다. 그 1반은 나이가 지긋하신 노련한 선생님이 계시어 처음 교단에 서는 나는 그 선생님께 많은 의지가 되었다. 이름은 곽룡암(郭龍岩)이라고 하시는 선생님이신데 교사 경력은 해방 후에 교단에 서게 되었고 당시 나의 아버지 연세 쯤 되시는 분이었다. 아마 교장 선생님이 나이 어린 나를 염려하셔서 내가 의지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 같았다.
교장 선생은 신응철(申應哲) 선생인데 「경북도립중학교」 출신으로 일제식민지시대에서는 출세 길이 훤히 열린 신분인데 초등학교 훈도로 되어 일생을 초등교육에 바치신 교육자이다. 술을 밥보다 더 좋아하셔서 아침 식사는 주로 술도가에서 막걸리 한 되에 소금 안주로 하시는 분이셨다. 언제나 웃음으로 교사들을 대하시고 특히 나에게는,
“초등학교 선생으로 파묻히지 말고 하루빨리 이 틀에서 벗어나라.”
라고 선배로서 늘 충고해주시며 장래를 걱정해주셨고 2년 후 내가 진학을 한다고 사직서를 낼 때 진정으로 반가워해주시고 격려해주신 선배교육자셨다.
형과 같고 아재와 같은 여러 선생님들의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회갑을 넘는 세월인지라 간혹 그 이름이 잘 떠오르지 못하기도 한다. 아마 내 자신의 늙음으로 기억의 이음새가 끊어지다가 붙어지다가하기 때문이다.
곽종간(郭鍾干) 교감선생님과, 나를 아우처럼, 조카처럼 때로는 같은 교육자의 길을 함께하는 동지로 품어주시던 선배 선생님들(金炯福 선생, 李光熙 선생, 郭九燮 선생, 林明善 선생, 그리고 몇 분 선생, 아마 거의 세상을 달리하셨을 것이라 짐작 .....), 동료로 손잡아주시던 선생님들(裵相度 선생, 李性浩 선생, 河聖洙 선생), 같은 날 교단에서 함께 인사를 했던 친구 여선생(李美瓊 선생, 崔貞萬 선생, 金琴淑 선생). 이들 모두 한 하늘 밑에 계시기나 할는지.
나는 학교의 일을 열심히 했다. 교사의 일을 정말로 좋아했던 것 같다. 지금도 나는 교육자가 나의 천직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학생들만 보면 공연이 웃음이 나오고 내 아들딸, 손자손녀들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흐물흐물해진다. 나의 이런 관점은 아마 그때 그 시대에 이루어진 나의 인생관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학교일이 그저 그냥 좋았다. 그리고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환경정리도 도맡아 했다. 복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우리나라 역사연대표를 상세히 적어 붙여 겨레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아이들이 익히도록 했다.
학년 초, 학기 초에는 가정방문을 했다.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교사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구장(동장)이 직접 안내를 했고 구장 집에서는 소박하지만 점심대접까지 했다. 점심때는 보리로 담은 농주이긴 하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한 구장이 정중하게 술잔을 권했고, 나는 몇 번이나 사양하다가 권에 못 이겨 잔을 받곤 했다. 식후에는 담배까지도 한 대 담아 불을 붙인 다음 물 뿌리를 손바닥으로 썩 닦고 권하기도 했다. 못 피운다고 해도 자꾸 권했다. 아마 장난 끼도 좀 있었던 것 같다. 그 바람에 나는 담배를 너무 일찍이 배웠다. 지금은 다 끊었지만.
낮은 울타리 너머는 ‘아기선생’을 보려고 몰려든 동내처녀들의 댕기머리가 담 위로 올랐다가 급히 내려가곤 했다.
이처럼 당시 ‘아기 선생’인 내가 동네 어르신들과 처녀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 같고 그렇게 해서 받았던 인사였던 것이다. 지금도 그 소박한 60여 년 전의 그 농촌인심이 그립고, 그 ‘아기 선생’ 시절이 눈물이 나도록 그립다. 그래서 나는 평생 선생으로 사는 것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있다. 비록 민주주의운동, 통일운동으로 군사정권, 유신정권 그리고 파시즘 정권으로부터 그 천직을 박탈당하고 있지만 나는 그 교사의 천직을 내 마음 속에 늘 가지고 살았으며 한시라도 떠난 적이 없다.
한편 세월은, 48년 5.10선거로 해서 남조선단독정권을 수립되었고 이를 반대하는 인민들의 항쟁을 토벌하고 있던 이승만은 1949년 1월 12일에 기자회견을 가지고 ‘북진통일’의 방침을 내놓아 동족상잔의 전쟁을 정면에다 내걸었다. 이런 방침을 준비하는 듯 5월에 들어서 이남의 국방군을 대거 38선 연변으로 병력을 본격적으로 산개하기 시작했다. 강릉•주문진 일대는 8사단을, 춘천•원주 일대는 6사단을, 동두천 일대에는 7사단을, 개성일대에는 1사단을, 수도사단은 의정부 일대에 그리고 육군본본 직속 17연대는 옹진 일대로 배치시켰다.
그러는 한편 호림부대라는 모략부대를 38선 이북의 후방에 침투시켜 앞으로 북진통일을 위한 준비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테러를 하고 다녔다.
이리하여 1949년 한 해 동안 2600여차의 충돌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 대규모 충돌로는 벽성군 태탄지구와 은파산, 개성지구의 송악산, 양양지구의 고산봉에 대한 충돌 등이었는데 이 지역들에 대한 무력충돌은 그저 단순한 충돌이 아니라, 그 치열함과 규모 그리고 전선의 폭으로 보아서 그것은 사실상 전쟁의 규모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런 충돌을 외국의 보도기관은 38도선에서는 늘 일어나고 있는 ≪작은 전쟁≫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정세가 이처럼 거의 매일 38선 일대의 충돌이 보도되자 이 충돌이 전쟁으로 확대될 때 우리 가족들이 입을 고난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세의 빠른 인식이 필요했다. 나의 이러한 제기로 단파라디오를 구입하기로 하고 내가 첫 월급으로 소니 6 구 자리 단파라디오를 샀다.
또 한 가지로는 밀양에 계신 할아버지와 거기에 딸린 가족, 할아버지 내외분과 아재 세 식구를 구지로 모셔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마침 10월 초 일요일과 개천절이 연이은 연휴가 있어서 내가 밀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그 문제를 놓고 토론했다.
할아버지도 「남로당」에서 자수한 자들을 모아 「보도연맹」을 조직한다고 하는 신문보도도 있어서 밀양에 있기가 곤란한 상황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자수한 것은 아니지만 「보도연맹」이 조직된다면 할아버지의 이력을 잘 아는 밀양의 반동들이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고 자수나 「보도연맹」 가입을 모면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래서 집을 급히 팔고 밀양 살림을 정리하여 구지로 이사하기로 할머니와 아재까지 모두 한 가지로 결속 짓고 10월 중에 이사하기로 했다. 집이 팔리면 그 즉시 이사하기로 했다.
당시 이른바 「보도연맹」은 1948년 12월에 공포한 소위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좌익사범이라는 대상자를, 말은 보도하기 위한다지만 앞으로 있을 전쟁이나 정권이 불안한 사태가 있을 때 몽땅 잡아 처분하려는 모략적 계책(이는 6.25전쟁에서 이들을 몽땅 학살한 사실로 명백하게 증명한 셈이다.)인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재는 밀양 연계소 고향집 대신으로 받은 터실에 있는 집을 팔려고 내놓자 곧 살 사람이 생겨 10월 하순의 어느 날 구지로 이사를 오셨다.
마침 박진목 씨의 집 아래채가 비어있어서 거기에 있는 두 개의 방 온돌을 손보고 도배를 깨끗이 하여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재 세 식구를 맞이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우리 집 식구는 난리를 피해 모두 구지로 옮겨 앉을 수 있었다.
이남의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을 만들어 국민을 세 가지로 분류하는 작업을 서둘렀다. 그 하나는 이른바 도민이라고 하는 분단을 반대하는 투쟁에 가담한 일이 없다고 보는 분류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도민증≫을 주어 관리하고, 분단을 반대하여 운동하다가 체포되어 사상전향을 한 사람들은 「보도연맹」에 시켜 비상시에는 처분대상으로서 「보도연맹」 ≪맹원증≫을 주어 관리하고, 그밖에 사람은 적으로 간주하고 감옥에 가두어 관리한다는 것이다.
감옥에 들어가는 자는 사상전향을 하여, 즉 변절하여 감옥을 면하되 「보도연맹」이라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맹원증≫을 안고 처분 때는 그냥 소리 없이 죽어주도록 하는 세 가지 유형으로 갈라두는 것이다.
그래서 ≪도민증≫이라는 것이 필요했다. 1949년 연말까지 이 ≪도민증≫을 받아 가지고 다녀 라는 것이다. ≪도민증≫에는 작은 명함판 사진이 붙어있어야 했다.
나의 아버지는 바로 그 사진사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사진은 일종의 사치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들어가는 밑천보다 이익이 몇 배나 되었다. 그래서 이 사진을 맡으면 상당히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다.
갑자기 엄청난 수요가 생긴데다가 사진사의 수는 엄청나게 모자랐다. 아버지는 달성군의 구지면, 현풍면, 유가면 3개면의 ≪도민증≫ 사진을 맡게 되었다.
당시 사진 원판은 A5판 크기로 가로 5간이고 세로 4간, 그래서 20명을 찍을 수 있다. 그래서 사진은 5명씩 나란히 세워놓고 한 슈트로 찍으면 되는데, 4간은 원판의 감광 자리를 까만 종이로 가려서 위로부터 아래로 4간을 각각 감광할 수 있도록 원판케이스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버지는 이런 문제는 잘 해결해서 만드셨다.
아무튼 11월부터 사진 일을 시작하셨는데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다.
그래도 일을 감당 못하셔서 조수를 한 사람 양성했다. 조수로 발탁한 사람은 고등공민학교 사환으로 있는 치선이 형이다.
한 가지씩 가르치고 익히면 다음 수준으로 해서 요령과 기술을 하나하나 가르치자 일취월장으로 기술이 늘어 한 달 쯤 지나자 제 혼자 모두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눈썰매가 있고 머리가 영리해서 응용력이 있어서 원리를 알고 혼자서도 어려운 점을 잘 풀어나갈 수 있다.”
라고 하시면서 아버지는 칭찬이 자자했다.
처음은 아버지가 수업 중에만 촬영을 했는데 이제는 촬영은 거의 다 맡아서 했다.
마지막으로 원판을 수정하는 일을 교습 받았다. 이 과장이 제일 어려운데 아버지 말씀처럼 역시 눈썰매가 좋아서 거뜬히 그 과정도 합격이었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박봉으로 고생이었는데 이 ≪도민증≫ 사진일 때문에 생활형편이 좀 나아졌다.
나는 학교 근무를 마치면 집에 와서는 그 동안 못했던 중학교과정을 계통지어 공부를 하는 데에 다그쳤다.
그런데 아버지 아래의 식구 두 분과 우리 형제 남매 4남매 6식구와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재 3식구를 합쳐 모두 9식구가 방 셋을 쓰고 있어서 내가 공부할 방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알아보고 있는 중에, 나의 형편을 듣고 초등학교 김형복 선생님이,
“방이 하나 있기는 한데, 하 선생이 허락을 할는지 모르겠네..... 내가 한 번 알아보지.”
라고 하셨다. 그리고 한 이틀 지나서 방과 후에 김형복 선생님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우고 나를 불렀다. 그리고 하성수 선생님의 교실에 데리고 갔다. 하성수 선생을 나를 보지 활짝 웃으면서 말씀했다.
“안 선생, 김 선생님 한태 이야기 들었는데, 내가 있는 사택에 방이 세 개인데 하나는 우리 집식구하고 갓난애, 셋이 쓰고 있어요. 애가 울어서.... 괜찮을는지. 그밖엔 그저 절 같이 조용하지요.”
“하 선생님, 나, 아기 우는 소리 참 좋아합니다. 아기 안 울면 일부러 집적거려 울리기도 하는데.... 하 하 하. 그건 걱정 마이소.”
라고 내가 말하자, 김 선생님은,
“참 별난 사람도 보네. 일부러 집적거려 울린다고? 허 허 허. 그럼 됐네.”
라고 말했고, 하 선생님은,
“이번 학기에 전근 올 선생님들 생각해서 학교에서 도배도 잘 해주었는데 언제라도 좋구마.”
라고 말했다. 김형복 선생님은 말씀했다.
“내일, 아니 지금이라도 교장 선생님이 계시면 당장 말씀드리고 허락받도록 하이소. 교장도 좋아할 거야, 아매.”
“쇠뿔은 단김에 뺀다고 지금 갈까요?”
그래서 나와 하 선생님은 교장실로 갔다. 교장은 안락의자에 앉아서 책을 보다가 졸고 계셨다. 나는 잠이 깊이 드신 줄 알고 그냥 나갈까 하고 돌아섰더니 뒤에 “안 선생!”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나는 감짝 돌아서서,
“아이구 선생님, 잠을 깨시게 해서 .......”
“괘안소. 고단해서 눈만 감고 있었소. 무슨 일이라도 있소?”
“지금 제가 있는 사택에 빈 방이 있어서 안 선생 공부방으로 하나 드렸으면 해서.....”
“왜, 안 선생 집에는 공부방 할 방이 없나?”
“할아버지와 세 식구가 오셔서 .... 좀 비좁게 되어서요.”
“그럼 그렇게 하지. 안 선생 가거든 아이도 좀 봐주고 하지.”
나는 이외로 쉽게 허락이 나서 그만 신소리까지 나왔다.
“저야, 애 보는 것보다 울리는 것 더 잘 하지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하 선생님, 앞으로 신세 많이 지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재가 하나 생겼다.
집에 가자 어머니에게 학교 사택 방을 하나 빌려 공부방이 생겼다고 하자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잘 됐다.”
그날 밤으로 내 공부방으로 이사를 했다. 거리는 집에서 약 이백 미터 좀 못되는 거리이고, 사택 집은 삼간 두 줄의 집인데 남향집으로 남쪽에 가운데 대청으로 한 간이고, 한 간방 두 개가 양쪽으로 갈라져 있고 안쪽에 두 간 자리 큰방이 있고 그 왼편에 부엌이 있었다. 남향 자리 두 방 증 왼편이 내 공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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