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할배의 평양 이야기

이날 나는 오후에 읍사무소에 가서 호적등본과 초본을 떼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점심을 잡숫고 난 후 북성거리 정미소 사랑방으로 가셨는데, 저녁은 집에 오셔서 잡숫는다고 하셨다면서 저녁 찬거리를 위해 저자에 가신다고 바구니를 들고 나오셨다.
“재구야, 네 뭘 먹고 싶노?”
“나야 뭐든지 잘 먹는 줄 알면서 와 묻노. 할배, 할매 좋아하시는 것이면 다 잘 먹는다 아이가. 아무 거나 사오면 된다.”
“그래 너 천어조림 좋아하잖아!”
밀양 남천강에는 민물고기가 많이 잡혔다. 민물고기는 디스토마 충 때문에 날로 먹으면 위험하지만 끓여서 찌개나 조림으로 해서 먹으면 맛도 좋고 영양에도 좋다. 그러나 나이든 어른들은 회를 쳐서 먹기를 좋아했다. 특히 밀양 남천강의 잉어회와 은어회는 유명하지만 지극히 위험했다. 그래서 밀양에는 황달병환자(디스토마환자)가 유달리 많았다.
‘끝에방’에는 아재가 대청 쪽 마루 미닫이를 열어놓고 글씨를 쓰고 있는데 날이 갈수록 그 필체가 아름다워지고, 내가 집 나간 1년 전보다 글씨가 더욱 세련되었다.
나와 아재는 2년 전 밀양중학교 ‘메이데이사건’으로 퇴학을 맞았다. 아재는 밀양공설운동장 메이데이행사에 나가지도 않았는데 「한민당」 위원장이던 교장 이주현이 할아버지가 좌익이라고 아재까지 싸잡아 나와 수환이 아지매까지 한 묶음으로 해서 퇴학시켰던 것이다. 아재는 이 울분을 붓글씨쓰기로 삭이고 있는 것이다.
아재 방의 책상은 언제나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 그런데 이날 책상 책꽂이 있는 책에는 낯선 책들이 많이 있었다. 조선어문법 책이 많이 있었다. 나는 그 가운데서 최현배 선생이 쓰신 「우리말본」 책을 빼냈다. 거기에는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문법」이 있고 그밖에도 조선어문법에 관한 책이 많이 있었다. 또 일본어문법 책도 많이 있었다. 벌써 아재 책상에는 내 책상에서 수학 냄새가 나듯 조선어문법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재, 이 방은 조선어문법 냄새가 진동하네. 그 동안 문법공부를 많이 했구나.”
“그래 사람마다 각기 재미 붙일 곳이 생기는 것 같다. 네가 수학을 유달리 좋아하듯이.”
아재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지금 자기가 공부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소개해 주었다.
오후는 아재 방에서 아재 글씨를 감상하고, 곁에서 먹을 갈아주고 함께 지냈다.
저녁때가 되자 나와 아재는 북성거리 정미소로 가서 할아버지를 모시러 갔다. 거기에는 밀양유림에서 진보적인 어른들이 많이 모여 계셨는데 특히 이진화 선생을 뵈었다. 이진화 선생은 나에게 통감 책 한 질을 주신, 동진학교 교장선생이신데 우리 독서회의 민청지도원 선생이신 구정식 선생님의 스승이시다.
나는 그 어른의 앞에 서서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선생님, 그 동안 기체 안녕하셨습니까.”
“오냐, 괘않다. 이렇게 살고 있으니 서로 만나는 것 아니가. 그런데 우리 정식 군은 생사를 모르니 정말 답답하구나.”
하시고 한숨을 쉬신다. 그러자 박시제 선생이 들어오셨다. 박시제 선생은 내가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 자주 오셨고 나와 잘 놀아주셔서 내가 제법 커서도 버릇없이 굴었다. 나는 일어섰고 좌정하시기를 기다려 정중히 절을 올려 안부를 여쭈었다.
박시제 선생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장난 끼 어린 목소리로,
“재구, 이놈. 니가 인제 선생이 된다면서. 이제부터 너를 함부로 못 하겠구나. 니 할애비에게 이야기 잘 들었다. 그래 참으로 반갑다.”
거기에 계신 여러 어른들로부터 많은 덕담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그냥 웃기만 하시고 계셨는데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았다.
“할버지, 할매가 장을 보시고 저녁 진지를 차렸습니다. 얼른 갑시다. 할버지가 가셔야지 아재 하고 저 하고 모두 저녁을 먹을 수 있는데, 그만 얼른 가입시다.”
나의 이 말에 모두 박장대소가 났다.“왓 핫하. 하 하 하 ...... 그놈, 지 할애비 때문에 가자는 게 아니라, 지 때문에 뎃고 갈 작정이네. 하 하 하 ......”
이렇게 한바탕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나와 아재는 할아버지를 뫼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양 옆에 막내아들과 손자를 데리고 오랜만에 하는 바깥출입이 좋으신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왔더니 그 이웃에 사는 ‘갑이아지매’와 그 새아재도 와계셨다. 갑이 아지매는 나의 종고모, 아버지의 사촌누이동생이고 그 새아재는 아지매의 남편인데 종고모부이다.
교동 고모 생각이 나서 안부를 물었더니 ‘갑이아지매’가 모두를 대신해서 말씀하셨다.
“재구, 너 아직 모르제. 교동 새 아재(나의 고모부)는 지난 연말에 가석방으로 나오셨다. 지금 교동에 계시는데 ‘손 박사’1) 댁 사랑채를 빌려서 거기에서 살림을 차리고 있단다. 내일 시간 내어서 가봐라. 고모도 새아재도 재구 너라면 깜박 넘어가잖아.”
“그래, 정말 반가운 소리네. 그래 새 아재 건강은 어떤고?”
할머니가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5년이나 징역을 살았으니 괘않을 턱이 있나. 속 골병은 다 들었겠지.”
“그래 내일 아침에 일찍이 가봐야겠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고 싶지만......”
라고 내가 말하자,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내일 일찍이 일어나든 길로 바로 가봐라. 거기 니 아지미가 차려주는 아침 먹고 내려와서 바로 구지로 가면 된다.”
할머니는 펄쩍 뛰듯이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고! 겨우 하룻밤 자고 갈라고! 안 된다 안 돼. 교동 가는 건 되지만 내일 가다니.”
“걔가 그냥 인사하러 왔나. 읍사무소에 가서 호적등본을 떼러 왔지. 빨리 서류를 갖춰내야 하는데, 다 일 마치고 천천히 또 오면 안 되나. 그때는 며칠을 있어도 될 텐데. 재구야, 내일 고모한테 가서 아침 먹고 바로 내려와서 대구로 가거라. 할 것 다 마치거든 다시 왔다 가거라.”
라고 할아버지는 딱 잘라 결정하셨다.
나도 할아버지에게 이력서는 경북도에서 주는 양식대로 기재하면 되고, 보증인 2인은 대구에 가서 저의 외가 쪽 사람들에게 부탁하려고 한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것 잘 생각했다. 그쪽에는 우익이 많아서 그쪽 보증을 하면 경북도에서도 잘 해주겠지.”
할머니는 자초지종을 들으시고 아무 말씀도 안하시만 몹시 서운 하시는 듯해서 나는 어리광스런 소리로 말씀드렸다.
“할매, 나야 할매하고만 있으면 다 아니가. 선생이 되고 나면 얼마든지 오면 안 되나.”
“시끄럽다, 고만! 선생질하는 데 바빠서 올 여가나 있는강.”
“그럼 할매가 구지로 오면 되지. 그래 할배하고 아재하고 그만 몽땅 우리 구지로 가자. 나도 월급도 타면 할매 용돈도 드리고 할배 담배 값도 드리고 할게. 우리 그만 구지로 가자, 응.”
이렇게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저녁밥을 먹었다. 자잘한 붕어와 피라미다가 은어새끼도 더러 낀 천어를 된장으로 간을 하고 갖은 양념을 넣고 조린 천어조림은 대가리까지 그대로 씹으면 뼈까지 모두 맛이 들어 그냥 그만이었다.
저녁시간은 우리 식구 넷과 터실의 새아재 내외가 식사 후 한참이나 놀다가 새아재 내외는 가시고 곧 이부자리를 폈는데, 나는 할아버지 잠자리 옆에 자리를 폈다. 할아버지도 고단하신지 곧 잠자리에 드셨다. 나도 겉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할아버지도 잠이 오시지 않은 것 같아 내가 이야기를 걸었다.
“할버지, 평양 가신 이야기 좀 해 주이소.”
“그래 할 이야기가 한 가지 두 가지라야지.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그거 몽땅 말인데.....”
“이눔이, 욕심은.”
그래서 나는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서,
“38선을 어디로 해서 넘었는데요?”
“강원도 양양에 가서, 남대천이라는 강이 있는데 그 강이 38선 경계라드구나. 산골강이지만 그리 깊지 않으나 허릿물은 되지. 양력 4월 초이레라 철은 초봄이라서 따뜻하지만 물은 산골물이기도 해서 차지. 그것도 이쪽 38경비대 몰래 건너는 일이라서 가장 어두운 두세 시쯤이라서. 물이 한창 찰 때라서 아랫도리를 벗고 건너는데 그 찬 기운이 그냥 뼈를 깎는 듯 하더구나. 아마 이남 경비대 쪽에도 연통이 되고 있는지 조용하더구나.
강을 넘자 이북 쪽 사람들이 강둑에서 나와 담요를 씌워주고 짐을 들어주고 해서 이북 경비대에서 준비해 놓은 널찍한 방이 있는 집으로 들어갔지. 거기서 옷을 차려입고 이북의 통일전선 사람들을 만났지. 따뜻한 약차를 마시고 나니 추위가 완전히 가시자, 북측 대표자가 앞에 나와 환영하는 말씀이 있은 다음 바로 준비해놓은 승합차(버스)를 타고 원산시의 한 여관으로 안내되었구나.
거기서 전복죽인 것 같은 간단한 죽으로 아침을 때웠고, 자리를 펴고 한숨 푹 자라고 하더군.
오후 한 두시나 되었을 때 준비를 하고 나오라고 하더구나. 그리고 버스를 타고 달리는데 그 옆으로는 철도가 깔려있는데 평원선(平元線)이라고 하더구나. 한밤중이 되어서야 평양에 도착했는데 바로 이미 정해둔 여관으로 안내되었지.
이렇게 해서 평양에 도착했는데 ≪연석회의≫는 4월 19일부터로 잡혀있고 그 동안은 8.15해방 이후 이북의 ≪반일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운동≫의 성과를 보여준다고 하더구나.
그때부터 돌아올 때까지 ≪연석회의≫가 없는 날, 없는 시간은 모두 시찰로 꽉 짜놓고 하루도, 한 시간도 헛되이 안 되게 계획을 빈틈없이 집행하더구나.
그 이야기를 다하자면 몇 날을 밤새워야 하는데 어디 하룻밤으로야 말이 안 되지.”
그래서 내가 제일 궁금한 것으로 두 가지를 제기했다.
그중 한 가지는 공산주의라면 가장 싫어하시는 ≪김구 선생의 평양에서의 태도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반일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실현이 이북사회를 어떤 모습으로 변해지고 있는 지였다. 내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자 할아버지는,
“허, 이눔이 제법 말꼬리를 트는 법도 아는구나.”
나를 대견한 듯이 바라보셨다.
8.15 후 중국에서 돌아온 김구 선생은 친일 지주세력의 집단인 「한민당」이 그들 세력의 보호막으로 내세웠던 ≪임정추대≫에 올라타고 ≪민주주의혁명세력≫과 정면으로 대립해 나섰고, 또 모스크바 3상회의결정이 전해졌을 때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고 이승만과 더불어 쌍벽이 되어 반탁운동을 주도하면서 미소공위의 ≪민주주의임시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서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서 그 밑에 결집되었던 극우폭력단들은 선생의 이름을 빌어 횡포한 백색테러를 감행하고 다녔다. 그것은 당시 북조선임시위원회 서기장이었고 김일성주석의 외숙인 강량욱 목사의 아들, 딸들이 김구의 명함을 가진 테러단에 의하여 살해당한 사실도 있었다. 이러한 일들로 김구 선생은 ≪테로의 두목≫으로 불리게 될 정도로 민주세력과, 특히 이북 인민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다.
해방 전 ≪임정≫ 때에도 그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테러를 서슴지 않았다. 그의 영향에서 ≪임정≫과 기맥이 통하고 있던 간도일대의 민족주의자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찾아가는 청년들을 부당하게 살해하기까지 했던 일도 있었다.
김구 선생이 공산주의자들을 미워하는 중요한 이유인즉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은 안중에 없고 소련을 거리낌 없이 ≪조국≫이라고 한다는 것이며, 자기들의 주장과 다르면 다 ≪보수반동≫으로 몰아붙이면서 민족의 이익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김구 선생은 해방 전부터 화해할 수 없는 반공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우리들은 바로 그러한 반공주의 꼴통과 합작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김구 선생이 미제의 ≪단선단정≫이라는 음모로 민족분열의 위험이 조성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미제의 회유와 공갈도 물리치고 ≪단정≫반대의 기치를 선명하게 들었던 것이다.
1948년 2월 13일 그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서로써 자기 소신을 밝혔다.
≪...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며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선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38선을 싸고도는 원귀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
이처럼 김구 선생은 일대 인생전환을 한 것이다.
김구선생이 인생전환을 하게 된 데는 물론 ≪4월남북연석회의≫를 계기로 북조선의 진면목을 접하고 이북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된 데에 있는 것이다. 그가 「황해제철소」를 참관하면서 출선의 장쾌한 광경을 보고 ≪신흥의 기상이 약동≫한다고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때까지 가지고 있던 이북에 대한 견해를 씻었던 것이다.
또 한 번은 그가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에 들린 일이 있었는데, 가보니 그곳 원장이 뜻밖에도 ≪임정≫의 교육부장을 지낸 일이 있는 이종익 선생이었다. 거기에다 학원 원아들 속에는 독립군사령이었던 양세봉 선생을 비롯한 독립군의 유자녀들이 있었다. 김일성주석께서 세우신 학원이니 항일유격대유자녀들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독립군 유자녀들까지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놀라움과 감동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체류기간 도산 안창호의 누이동생인 안신호와 상봉하는 기회를 가졌는데 안신호는 그때 ≪북조선녀성동맹≫ 남포시위원회 위원장이며 북조선인민회의 대의원으로서 폭넓은 사회정치활동을 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이 민족개량주의자들을 좋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김구인지라 전형적인 민족개량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안창호의 누이동생이며 그 자신 목사에게 출가한 독실한 교인인 안신호가 그런 요직에서 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엄연히 북조선사회의 요직에서 사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 김구 선생은, 김일성주석이야말로 탁월한 경륜이며 위대한 인품임을 알게 되었고, 김일성주석에게 진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 하여 그는 마침내 ≪임정≫의 ≪법통≫(法統)을 김일성주석께서 받아주실 것을 요청하시기까지 했던 것이다.
≪연석회의≫가 끝나고 김구 선생이 평양을 떠나기에 앞서 김일성주석과 가진 단독회담 끝나자 숙연히 자세를 바로잡고 김구 선생은 자신의 소청이라면서 ≪상해임시정부≫의 인장을 내놓고 그것을 받아달라고 김일성주석께 요청했다고 한다.
그 인장으로 말하면 김구 선생과 그 동지들이 피어린 3.1운동을 계승하는 것으로 자부하는 ≪임정≫의 상징이었다. 김구 선생이 그렇듯 소중히 간직하셨던 인장을 내놓았다고 했다. 물론 김일성 주석은 사양하셨다.
≪반일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의 실현에 대해서는 첫째가 ≪토지개혁사업≫이었다. 이북은 이 사업으로 이북사회에는 영원히 지주가 없는 세상으로 되었던 것이다. 농민들이 모두가 제 땅을 가지고 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농민들의 얼굴이 옛날처럼 가난에 찌든 모습이 아니고 너무나 당당한 모습이었고 30%의 현물세를 물고도 그 사회의 주인으로서 할 일을 자신을 가지고 한다는 것이다. 모두 힘을 모아 학교도 세우고 수리시설도 농민의 것으로 물세를 물라는 놈은 이젠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평양의 보통강은 8.15광복 전에는 홍수방지시설이 없어 큰 비만 내리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42년 홍수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2,000여 정보의 경작지와 1,000여 호의 주택이 물에 잠겼다.
광복 후 「평양인민위원회」에서 제일 먼저 시작한 사업으로 대대적인 개수공사와 하천정리 사업을 하여 강물의 흐름을 봉화산 기슭에서 곧바로 대동강으로 흐르게 함으로써 수해문제를 해결했다. 본래 강줄기인 9㎞ 넘는 구간에는 보통강운하를 건설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300여 정보의 보통강유원지를 조성하고, 홍수지역의 인민들이 집터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밖에 「황해제철소」 방문에서 출선되어 철도의 강선이 되어 나오는 과정을 보고 방문자들은 감탄과 감격의 아우성이었고 식은 철로가 자기 앞에 머물자 모두 그 철로에 뺨을 갖다 대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김일성 주석이 제일 먼저 세운 공장인 연필공장에도 가보셨다고 하셨다. 이 공장은 단순이 연필을 만든다는 것보다 우리 사회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무엇보다 후대를 위한 사업을 앞세운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곳곳에 새로운 병원이 생겨나서 앞으로는 인민들의 무상치료를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밤이 이슥하도록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다가 조손간에 취침을 합의하고 잠이 들었다. 아마 할아버지는 곁에 자는 나를 보느라고 잠을 축내셨을 것이다.
이튿날 나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 교동으로 갔다. 이사 간 집을 몰라 나의 초등학교 동무인 병우 집으로 가서 병우를 데리고 고모집으로 갔다.
집은 엄청나게 큰 기와집인데 솟을 대문으로 들어가 바로 마주 하는 곳에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을 향해 오른쪽에 큰 별채 사랑이 있는데 거기에 고모내외가 있어 시집가고 5년이나 지나 늦게 신접살림을 차린 것이다.
내가 높은 축담에 올라서자 미닫이문이 와락 열리더니,
“이게 누고! 재구 아이가! 니가 우짠 일고.”
하고 울음 반으로 소리치며 고모가 나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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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손 박사의 박사는 근대 학제의 박사가 아니라 봉건 이왕조 국가의 벼슬 중의 하나이다. 성균관에서 5경(『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의 교수를 관장하는 직책의 벼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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