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선생이 되는 손자, 조손의 상봉

7월 달에 들어서자 합격자 소집 날짜를 통보받았다. 그날부터 「대구국민학교」에서 1주일간의 교육실습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전날 대구시 대봉동에 있는 이모 집에 가서 그 동안 거기에서 숙식하기로 했다. 이종형과 누나는 학년말 시험도 끝나고 학교 공부도 끝난 뒤라서 이집 저집 일갓집으로 나들이에 바빴고 나는 역시 형의 책장에 있는 책을 보는 데 정신이 빨려 있었다.
형과 누나는 내가 1년 넘어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초등학교 시험에 합격했다면서 나타나자 영문을 몰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누나가 알았다는 듯이 갑자기 눈이 동그래져서 말했다.
“그래 우리 학교 우리 반 아이들 중에서도 그 시험에 합격해서 ‘교생실습’한다고 하던데 바로 그거야? 그 시험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라는데, 니가 거기 합격했나? 거기는 중학교 졸업해야 한다는데......”
“그래, 그런데 중학교 3년을 졸업 못한 사람은 응시자격시험을 미리 1주일 전에 치러 합격해야 하고 본시험을 치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는 두 번 시험에 모두 합격했거든.”
“아무튼 너는 좀 이상한 아이야. 한 번도 남들은 죽는다고 하는데 두 번을 치고 기어이 붙었구나. 정말 대단해.”
그리고는,
“우리 반 아이 아무개 하고 아무개 하고는 합격했고 많이 떨어지기도 했는데.... 그 애들은 중학교 4학년을 졸업했잖아. 너는 중학교도 다 못 다녔잖아. 야, 너 한턱내야겠다.”
우리들이 하는 이 말을 듣고 있던 이모는 정말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았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재구야, 니가 그 환란을 겪고도 이제 선생이 되었으니, 그래 오늘은 우리 모두 축하는 뜻으로 불고기를 해먹자.”
라고 말씀했다. 이모는 나중에 나에게 말씀하셔서 알았지만, 내가 산에 들어갔던 일을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것이다. 조심스러워 아무에게도 말 못했다고 하셨다. 그래서 내 손을 잡고,
“재구야, 너 정말 이번에는 장하구나.”
라고 하셨다. 그리고 시장에 나가 불고기꺼리를 사다가 그날 저녁 나와 이종 형제자매가 모두 잘 먹고 나를 축하해주었다.
「대구국민학교」에서 1주일간의 벼락치기 ≪교육실습≫을 했다. 한 학급에 7, 8명의 교생이 배당되었다. 나는 4학년의 한 학급에 배치되었다. 그 학급의 담임선생님인 나의 지도교사는 머리칼이 곱실한 남자 선생님이신데, 나중에 1956년에 「경북대학교사범대학」 졸업학년에 대학의 「부속국민학교」에서 또한 ≪교육실습≫을 할 때, 거기에서 또 나의 지도교사로 되어 주셨다. 정말 나와는 인연이 있는 분이신데 그 자그마한 얼굴 모습은 떠오르지만 애석하게도 성함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 씻겨버려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보려 해도 되찾을 수가 없구나.
처음으로 교단에 섰을 때 어린 학생들의 그 초롱초롱한 천진한 눈결이 나에게 집중되자 내가 과연 이 학생들을 잘 가르칠 수 있을까라는 생각만 가득했고 그밖에는 아무생각도 나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난 다음 내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생각해버려 해도 머리가 그만 텅 비고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1주일 동안, 교사로서 사무적인 일도 지도교사의 사무를 대신 하면서 실습했고, 수업을 맡으면 그 수업의 ‘교안’이라고 하는 「학습지도안」도 작성하여 미리 지도교사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그야말로 벼락치기 같은 실습이어서 마치고 난 다음에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배웠는지 생각도 잘 나지 않는다.
실습을 마치는 날이 바로 학년말 여름방학이 되는 날이었다. 그날, 학교 강당에서 ≪교육실습수료식≫을 마치고 「초등학교 준교사」 자격증서를 받았다. 그리고 학교를 배치 받고 사령장을 받기 위한 여러 가지 서류 양식을 받았다. 그리고 호적초본, 보증인 등 구비할 서류가 많았다. 이것들은 모두 8월 초순까지 경상북도 학무과에 제출해야 했다.
나는 호적초본을 떼기 위해 고향 밀양에 가야 했다.
밀양에서 투쟁조직에서 이탈되어 구지로 온지 3개월이 좀 넘었다.
그동안에 할아버지는 주변의 밀양고을 유림에서 힘을 써서 합법신분을 찾으셨다고 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1948년 4월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민전」 밀양지부를 대표해서 참석하셨는데 회의를 마치고 많은 사람들이 남북조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 남측 대표자 해주회의에 인민대표자로 남았는데, 할아버지는 모두 다 남으면, 지금 급박한 시기에 자기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된다고 하시고 바로 내려오셨다.
할아버지가 내려오신 일을 알고 있는 경찰당국은 할아버지를 잡으려고 피 눈이 되어 설쳤다.
당시 밀양고을 유림에서는 그들이 모임을 가질 수 있는 회관이 필요한데, 마땅한 곳이 없고 새로 건축하자니 비용이 너무 많이 들 것 같아서 고민 중이었다.
구 왕조 말에 지은 「연계소」가 안성맞춤이기는 하지만 소유권이 할아버지께 있으므로 말을 낼 입장이 못 되는 터였다.
그러던 중에 할아버지가 평양에서 돌아오셨는데 경찰이 잡으려고 하는 지라 유림에서 이 기회에 「연계소」를 유림에서 받고, 대신에 할아버지의 비합법 신분을 보장하고 할아버지가 살 수 있는 적당한 깨끗한 기와집을 유림에서 구입해서 「연계소」와 교환하자는 데로 뜻을 모으고 이를 할아버지에게 제안했던 것이다.
이 제안에 대해서 할아버지는 선 듯 받아드렸다. 단, 할아버지는 집을 교환하는 문제이지 그 대신으로 신분문제에 대해서는 조건으로 달지 않기로 하자고 하고 합의를 했다.
그러나 유림에서는 할아버지의 체포에 대해서는 이와 별도로 유림의 대표적인 인사라는 것으로써 체포문제는 경찰 측과 해결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 고향집 「연계소」는 밀양유림소유로 되었고, 거기 기둥에 한자로 「밀양유도회」(密陽儒道會)라고 쓴 간판을 1970년대까지 달고 기둥이 기울어 있었는데 지금은 그 건물이 없어졌고 집터에는 온갖 콘크리트 건물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제 「연계소」는 옛 이야기로만 남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체포문제가 이처럼 해결되고 나도 초등학교 교사로 취직이 결정되자, 나는 하루라도 빨리 할아버지를 뵈러가고 싶었다. 그런데다가 본적지에 가서 호적초본을 떼 와야 하는 것이다. 새로 이사하신 집은 터실에 계신 할아버지의 사촌이신 도동할배 집과 골목을 마주하고 있다고 했다.
교생실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호적초본 때문에 밀양에 간다고 어머니에게 말씀 드렸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말린다. 어머니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어머니와 같은 말씀이었다. ‘안 된다.’는 것이다.
“네가 어떻게 그 죽음구덕에서 빠져나왔는데 다른 곳은 몰라도 거기는 안 된다.”
는 것이다. 그리고 서류 내는 기한까지 아버지가 직접 갔다 오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호적초본’일 가지고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자 나는 직격으로 덤볐다. 나는 아버지에게 말씀했다.
“아버지, 할아버지가 그놈들이 잡으러 해서 여기 이곳도 못 오셨고 그래서 아버지도 아이들도 못 보고 계셨는데 얼마나 보고 싶겠습니까? 특히 근근이 살아서 집에 온 저는 어떻겠습니까? 잡는다는 일이 풀리고 할아버지가 집에 와 계셨는데 제가 당장 뵈러가야지요. 별 탈 없이 지내는데 제가 뵈러 못 간다는 것, 그건 미리 겁내고 안 가는 것 아닙니까? 저 내일 당장 갈랍니다.”
“허! 이놈 봐라. 어디 말로 해서 내가 너를 당하겠나. 네 어미는 안 된다고 할 건데.”
라고 해서 승낙을 얻은 셈이다.
나는 어머니에게도 같은 말을 여쭈었다. 어머니는 한참 생각하시더니 말씀했다.
“재구야, 밀양가면 니 아는 사람이 많을 텐데. 그 사람들 만나면 뭐라 할래?”
“뭐라기는, 시침이 딱 떼고 인사하지 뭐. 그 사람들, 날 좋아하는 것, 엄마 알잖아.”
라고 설레발을 쳤다. 그리고 ‘오냐. 좋다.’라는 말은 아니지만 ‘알았다.’는 양해를 얻은 셈이었다.
그 이튿날, 일찍이 대구로 가는 버스를 탔다. 오전에 대구역에서 기차를 탔다. 그리고 12시쯤에 밀양에 도착했다. 나는 역에서 읍내로 가는 자그마한 버스를 탔고 곧 읍내 차부에 도착했다. 빠른 걸음으로 ‘연계소’ 고향집으로 가서 그 대문 맞은편에 트인, 터실에 가는 골목길로 들었다. ‘연계소’ 고향집은 수리를 하고 있었다. 고불고불 골목길을 돌아 도동할배 집으로 찾아갔다. 대문이 열려 있어서 나는 ‘할매’ 소리를 힘차게 내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안방의 미닫이문이 활짝 열리더니 우리 할매의 얼굴과, 기다란 얼굴에 귀가 길쭉한 한목 할매의 얼굴이 함께 나왔다. 나는 반가워서,
“우리 할매도 여기에 있네.”
라고 하고 방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더니 할매는,
“할매께 인사를 하고 곧 집으로 가자. 너그 소문도 듣고. 너그 할배는 아침에 나들이를 가셨는데. 들어오셨는가 모르겠네.”
그래서 나는 물었다.
“요즘, 할배. 출입도 하시는가뵈.”
“응, 요즘은 박시제 씨 집에 자주 가시지.”
박시제(朴時濟) 씨는 나의 존고모, 그러니 할아버지의 누이인 조음 할매의 시숙이다. 나의 할아버지와는 시골 고향 사람으로 동몽선습(童蒙先習)을 함께 배웠던 서당 친구이고, 일제 때 한때 의열단에 들어 활동했으나 붙잡혀 고문을 받고 못 견디어 전향했다. ‘북성거리’에 조그마한 정미소를 하고 있었다.
당시 왜놈들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하면 그 변절의 정도에 따라 정미소, 양조장, 금융조합 이사 등, 말기에는 식량배급소 등등으로 먹고사는 데 일없도록 해주었다.
8.15해방 이후, 친일파 또는 변절자들이 친미 우익으로 가서 한 자리 한다고 설쳤는데 이 박시제 씨는 그냥 조용히 정미소나 하고 지냈다.
그리고는 일제 때 함께 고생했던 어려운 동지들을 보면 쌀말이나 노잣돈이라도 도와주기도 했다. 말하자면 양심적인 운동의 동조자라 할까. 이번 나의 할아버지의 신분 합법을 위해 많은 수고를 했다.
일제 때 우리 집이 식량으로 어려울 때면 쌀이 아니더라도 식량을 구해 보내주기도 해서 우리들이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기도록 해주었다.
할매와 나는 새로 이사 온 집으로 왔다. 바로 한목할배 곧 뒷집할배 집의 맞은 편 집이다.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남향집으로 전체로는 4간 2줄의 기와집이었다. 서쪽 대문인데 집에 들어서면 집 남쪽 앞에는 널찍한 마당이 있는데 채전이 되어 있다. 집의 오른편 2줄 1간은 부엌간인데 안쪽에는 찬방이 있다. 2줄 3간은 1간반의 방이 세 개이고 남쪽으로 3간 반 줄은 퇴청으로 되어있어서 방도 넓고 퇴청도 폭이 넓다.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분과 작은아버지 3식구 살기에는 넉넉하다.
할매하고 함께 집에 들어갔더니 제일 안쪽에 있는 방에서 작은아버지 아재가 나왔다.
아재는 내 손을 잡고,
“그 동안 고생 많았지.”
라며 반가와 했다.
“아재, 할배는?”
“아마, 북성거리에 가셨는가 보다. 늘 그 집 사랑에서 친구들과 소일하시지. 점심 자시러 올 때도 있고, 그 집에서 잡술 때도 있고 하지. 오늘은 너도 왔고 하니 아마 점심때는 오실거구만.”
“허, 허, 아재는 요즘 점도 치는가뵈.”
하고 내가 웃자, 아재도 웃으며,
“그럼 우리 내기 할까?”
하며 웃는다.
그러고 보니 점심때가 다 되었다. 할매는 부엌간에 들어가셔서 점심상을 차리고 있었다. 아재는 마루에 두레상을 펴고 부엌간으로 들어가서 찬과 밥을 담은 상을 가지고 나온다. 막 마루에 상을 갖다놓자 대문을 열고 할아버지가 들어오신다. 나는 마루에서 내려와 할아버지 곁으로 다가들며 할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할아버지! 저 왔습니다.”
“오냐, 네가 왔구나. 어디 보자. 그래 몸은 건강하지러! 그 새 키도 훤출하게 컸고 몸도 확실해졌구나. 어디 보자. 안아보자. 내 새끼야!”
좀 채로 반가운 표정을 안 내시는데, 할아버지도 나처럼 나를 많이 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나를 떼놓으시자 성큼 마루 위에 오르신다. 나도 뒤따라 마루 위에 올랐다. 할아버지는 방안으로 들어가신다. 나에게 절을 받으시려는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가 방에서 좌정하시기를 기다렸다가, 방문 문턱까지 가서 열린 문 안의 할아버지를 향해 큰절을 하면서‘
“할아버지, 그 동안 기체후 만강하십니까!”
“그래, 나도 건강하다. 그 동안 고생이 많았제. 내가 밀양에 와서부터 네 안부는 줄곧 들어왔다. 모두 네 칭찬이더라. 그런데 우리 어른들의 일이 신통찮아서 네들 고생만 시켰구나. 정말 너희들에게 미안하구나.”
“할아버지, 그 어른들로부터 많이 배웠습니다.”
“오냐! 마루로 나가자. 오늘은 좀 덥구나.”
모두 마루로 나왔다. 절하고 이야기하는 동안 할매와 아재는 두레상에 상을 다 차려놓았다. 할머니는 조그만 하고 나지막한 상에다 밥과 허드레 찬을 얹어 따로 잡숫는다.
모두 잡숫는 차림이 다 되었을 때, 나는 말씀을 여쭈었다.
“할아버지, 제가 지난달에 ≪초등학교 교사채용시험≫을 쳤는데,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교생실습도 어제 다 마쳤습니다. 9월 1일자로 교사발령이 나온답니다. 어느 학교로 발령이 날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9월부터는 학교 선생이 된답니다.”
하고 보자기에 사들고 온 초등학교준교사자격증과 합격통지서를 내놓았다.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시면서 자격증과 합격통지서를 보시고는,
“야야, 그게 정말이가? 정말이구나! 장하구나. 네가 어린 것이 벌써 선생이 되었구나. 이제 다 키웠네!”
“니가 선생이라?”
아재는 정말 어이없는지, 너무나 뜻밖이어서 입만 벌리고 있다. 할매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누가 선생이라고? 뭘 가르치는데?”
라고 하자, 할아버지와 아재가 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구가 선생이 되었다는구나. 소학교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아이고, 무슨 아이가 아이를 가르친다고....”
할매는 말도 아니다는 듯이 픽 웃는다.
할배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하고서 앞에 놓인 증서와 통지서를 보이면서,
“이제 재구는 다 키웠다. 이제 장가만 보내면 다야.”
라고 했다. 할머니는 그제야 나를 부둥켜안고 울음소리로,
“저 작년 섣달그믐께 너를 보내고 무슨 일만 생기면 ‘우리 재구가’라며 벌떡 일어나곤 했는데, 이런 쾌한 소식이라니. 재구야 정말, 이제는 좋은 일만 생길 것 같네. 아이구 이리 와 내 새끼야 안아보자.”
이처럼 숙질, 조손간에 모두 반가움과 그 웃음으로 점심밥 먹는 것도 잊고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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