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새 삶을 찾아 몸부림을
재회의 반가움과 그 사이에 벌어진 우리 가족에서 일어난 시대의 한으로 모자의 설음을 울음으로 푼 다음, 나는 어머니를 뫼시고 안방으로 들어가 몸과 마음을 수습하고, 다시 나만 문밖으로 나와 대청으로 열린 문턱에 서서,
“엄마! 아들의 절을 받으시오.”
라고 여쭙고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방안으로 들어가 어머니 곁에 앉아 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자 재두, 향이 그리고 용아가 따라 들어와 나와 엄마를 둘러싸고 서로 몸을 비비며 끌어안았다.
우리들의 반가운 만남을 듣고 안채의 박진목 씨 부인인 의성댁이 아들딸들을 데리고 방문이 비좁도록 들어와 우리들 가족의 반가운 재회의 웃음꽃을 피웠다. 거기에는 나를 무척 따르던 희진이와 희선이가 그 장난스런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곧 점심때가 되었다면서 어머니는 부엌으로 가시고 의성댁 아주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안채로 들어갔다.
나는 그동안 아래 면장 사택에 외할아버지를 뵈러 가야겠다면서 밖으로 나갈 양 했더니 엄마는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거기에 가도 이제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또 울음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외할아버지는 지난 초여름의 어느 날 장대같이 비오는 날 밤에 돌아가셨다.”
라고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외할배는 니가 병문안간 후 한 달쯤 지나 퇴원하셨는데, 병 차도는 없었고 앓으시다가 지난해 양력 7월 7일 밤에 억수같이 오는 비를 타고 가시는지 그날 밤에 돌아가셨다.”
라고 일러주셨다. 그래서 나는 또 물었다.
“그럼 정업이 아재 식구는?”
“그래 거창댁 엄마 데리고 저그 고향 거창으로 도로 갔는데 그 후론 소식이 없구나. 그래도 나를 누님이라 부르는 정은 남아있어 보고 싶구나. 너를 만났으면 얼마나 반가와 했을꼬.”
나는 이때 정말 ‘인생이 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동안에 일어난 이야기를 틈틈이 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면장은 이 지방에서는 잘 모르는 분이 왔다가 곧 그만 두고 바로 아랫담에 있는 정미소 주인인 범안골 최씨 마을의 최종대(崔鍾大) 씨가 면장이 되어 지금까지 하고 있다고 했다. 최종대 씨는 「구지고등공민학교」도 맡아 외할아버지의 뜻을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어머니의 이야기 중에 그동안 우리 집은 여기 구지에서도 큰 환란을 겪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난해(1948년) 11월 초에 일어난 대구 6연대반란사건으로 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전에 내가 있을 때 얌전하고 인사성 바른 윤청길(尹淸吉)이라는 사람이 「구지경찰지서장」이었는데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곧 딴 곳으로 전근을 가고, 이북 평안도 출신인 김정구(金貞九)라는 자가 왔다.
이자의 애비는 일제 때 악질지주로 그의 고향에서 지주의 권세로 양가집 여자를 욕보여 인민들의 원망을 받고 있던 중 8.15해방을 맞아 인민들에게 붙잡혀 거세를 당하고 그 지방에서 쫓겨났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그 애비를 데리고 이남으로 도망 와서 「서북청년단」에서 활동하다가 경찰에 들어와 「남대구경찰서 구지지서장」이 되어왔다고 했다.
이자가 오고부터 조용했던 이 지방에 청년들이 붙잡혀오면 지서 안에서 종종 매 맞아 울부짖는 소리가 났는데, 이 자가 술이 취하면 유치장에 갇힌 농민들을 꺼내어 몽둥이질을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지방 분위기가 고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은 대구에 앞산 밑에 있었던 일본군 보병80연대의 진터(지금은 앞산비행장)에 주둔하고 있었던 국방경기대 6연대에 반란이 일어나 이 반란병이 진압군과 교전하여 물리치고 대구-진주의 국도로 해서 진격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그대로 진격해오면 곧 현풍울 거쳐 구지로 당도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이다.
이 일로 해서 이 구지지서장 김정구라는 작자는 잔뜩 얼어서 ‘이젠 죽었구나!’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래서 술을 잔뜩 마시고서는 이 지방에서 좌익운동을 하던 샛담 마을의 박 씨와 곽 씨 두 분을 잡아 오고 난데없이 나의 아버지와 밀양에서 내가 뫼시고 온 손기용 선생을 잡아 직결처분을 한다면서 총을 빼들고 야단이었다는 것이다.
이 소리를 들은 당시 구지면장인 최종대 씨는 경찰지서에 들어가서 그놈에게 야단을 치면서,
“니가 조용한 우리 고을에 와서 고을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 두 분 선생을 죽이면 너는 살아서 돌아갈 것 같은가? 차라리 나를 죽여라. 만일 나를 죽이지 않고 우리 고을 위해 일하시는 두 분 선생을 죽인다면, 우리 학생들과 고을 사람들이 너와 너의 계집과 자식은 한 사람도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라고 소리치며 그가 겨누고 있는 총 앞에 가슴을 헤치고,
“그러니 이 사람들 죽이기 전에 내부터 죽여라.”
고 하면서 달려들었다.
이 소리를 그의 아내가 듣고 달려와서,
“당신이 지금 제 정신인가! 고향에서 그처럼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는가! 아버님이 그처럼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는가!”
라고 소리치면서 술 취한 그놈을 사택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고 했다.
이런 소동은 어찌 구지뿐이겠는가. 이남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실제로 이렇게 해서 죽임을 당한 사람이 수없이 많았던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한편이 한 짓이 스스로 두려워서 하는 일종의 발악이었던 것이다.
반란의 사태는 반란군이 가야산으로 들어가서 진지를 구축하고 터를 잡자 조용해지고 이 김정구라는 놈은 지방민의 진정과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나의 외가 큰집 할아버지의 호통으로 떨려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처럼 내가 없을 때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하면서 그 동안 익숙했던 아지트 생활에서 조금씩 벗어나면서 심신을 조용히 다독거리게 되었다. 나는 한동안 함께 다녔던 「구지고등공민학교」의 친구들과 배구도 하고 축구도 하면서 지냈다. 특히 학교의 사환으로 일하고 있는 김치선이 형과는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면서 구지생활에 길들어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보시는 나의 생활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 위험한 생활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남 보기에 놀고 있는 것이 불안했고, 낮에는 아무 하는 일 없이 방에서 책만 보고 있는 것도 또한 불안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자꾸 「구지고등공민학교」에 다시 입학하라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말씀드렸다.
“아버지, 제 일은 제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해서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지만 생각이 정리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 여쭙겠습니다.”
그러면 겉으로는 “오냐, 알았다.”고 말씀하시지만 영 못마땅한 빛이 얼굴에 오르신다.
결국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나의 생활문제이다. 그것은 자활이 원칙인데 그 방도를 찾기가 쉽지 않다. 내가 자활을 한다는 것은 내 자신의 생활비는 내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것이 그 기본인데, 이는 곧 취직을 해서 노동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직 무엇을 가지고 일해서 생활을 해야 할지 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단 집을 나가고 보아야 하겠는데, 이때껏 집을 나가 생명의 위험을 안고 살아온 내가 다시 집을 나간다고 하면 부모가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야반도주도 할 수도 없는 처지인 것이다. 부모의 가슴에 못 박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다음 하나는 나 자신의 발전의 문제이다. 내가 아무리 독학을 한다고 해도, 그래서 내 자신이 아무리 성과를 올려도 아버지나 어느 누구에게도 인정받기는 어려운 것이다. 학교에 다니면 한 해가 지나고 학년이 올라가면 그 자체가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는 성과로 되지만 독학은 그렇지 못하다. 독학으로 아무리 실력을 올려도 나만 알 수 있는 것이지 남이 나를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결과를 인정받을 기회가 없는 것이다.
우선 내가 공부한다고 낮 동안 방안에 죽치고 책을 펴놓고 있으면, 그것은 남들이 보기에 공부가 아니고 그냥 시간 보내는 것으로만 보일 뿐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오후에 집에 잠깐 오셔서 건넌방에 책상머리에 있는 것을 보고서 아버지 얼굴에 어리는 표정에서, ‘맨날 책만 보는 할 일 없는 논팽이’라고 하시는 소리없는 말씀이 거기에 떠오른다. 그래선지 지금 당장 시킬 일은 아닌데도 한소리 하시는 것이다.
“야, 그 방 꼴이 뭐야!” 아니면 “너는 마루 밑에 장작도 안 보이나! 그것도 안 패고 뭐 하노!”
내가 집에 오고부터 한 달이 좀 더 넘었을까. 아침에 출근하실 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말씀하셨다.
“어제 도동(나의 외가동네) 갔다가 와 보니 내일 제사에 쓸 쌀이 모자라는데 큰일 났네. 내겐 돈도 없네.”
라고 하고선 나를 쳐다본다. 아마 아버지가 돈을 마련하고 내가 ‘현풍’장이나 ‘십이리’장에 가서 팔아오라(주1)는 암시다. 그래서 나는 머리를 끄덕하고 ‘알았다.’는 수긍을 보냈다.
아버지는 지갑을 꺼내어 돈을 나에게 주고 출근을 하셨다.
나는 그 돈을 받아 호부머니에 넣고 그냥 책상에 펴놓은, 지금 한참 읽고 있는 「미분적분학」 책에 머리를 다시 쳐 박았다. 그리고 계속 책과 펴놓은 시험지에 눈을 박고 머릿속은 온통 수식으로 엉켜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점심시간이 다 되었는지 아버지가 내 방문을 열었다. 방안에서는 내가 아침에 출근하실 때 그 모습으로 책에 눈을 박고만 있는지라, 그만 아버지의 화증은 폭발하고 말았다.
“이놈아! 아직도 책상머리에 머리만 쳐 박고 있나! 아침에 쌀 팔라고 한 소리 못 들었나!”
라는 고함소리가 났고, 이어 마루 밑에서 장작개비를 한 가치 들고 그만 방안으로 들어와 그냥 나를 팬다. 나는 머리를 두 팔로 감싸고 방밖으로 내뺐다. 나를 놓친 분을 내가 펴놓은 책과 계산노트에다 푸시는지 책상 두드리는 소리와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봉변이었다.
나는 안채에 들어갔고, 의성댁 아주머니는 나를 뒤꼍에 피란시키고 난 다음 어머니에게 갔다. 조금 있으니 어머니가 내 옷과 신발 그리고 쌀자루와 멜빵끈을 가지고 오셨다. 그리곤 아들이 다쳤을까 염려되는지,
“야야(얘야), 어디 다친 데는 없나?”
“괘않다.”
하고 바지를 입고 웃옷을 걸치고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십이리 장터로 출발했다. 십이리는 경남 창녕군 대합면 십이리인데 5일장이 서는 곳이다. 이날이 장날이어서 쌀을 팔러(사러) 갔다. 구지에서 거리는 8킬로미터 정도인데 그때 나서면 오후 다섯 시쯤 되어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바빴다. 한참 미적분학에서 그 기초개념에서 가장 기초이고 그래서 확실히 잡아야 하는 중요한 부분이고 아무 도움 없이 내 스스로 깨달아야 해서 힘이 더 드는 곳이다. 길을 가면서도 내내 생각이 거기에 머물렀다. 직관적으로는 아무 것도 아닌 듯 하지만 그것을 극한의 개념과 연결에서 개념을 잡으려니 생각이 좀 채로 정리되지 않아 벌써 사흘을 거기에서 보내고 있었다.
십이리장에 도착하는 대로 곧장 싸전을 찾아가 쌀 한 말을 샀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팠다. 점심때가 훨씬 지났다. 장터 한쪽에 솥을 걸어놓고 국밥과 국수를 파는 집이 있고 손님들이 기역자판을 둘러싸고 한참 먹고 있다. 나는 방금 판 쌀을 한쪽 어깨에 울러 메고 그 가게로 갔다. 그리곤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아지매, 얼른 국수 곱빼기로 한 그릇 말아주소. 아직 점심을 못 먹었더니 배속의 거지벌레가 한창 지랄을 하구마.”
아지매는 맞장구를 쳤다.
“거지벌레는 안 달래주면 저승까지도 따라간대요, 총각.”
“그래서 얼른 달래려고 이 야단 아닌교.”
아지매는 널찍한 대접에 그득히 한 그릇 말아 내 한태 건네주면서,
“아 그 총각, 말도 걸쭉하게 잘 하네. 장차 누구 사위가 될는지!”
“앗다 아지매 딸 있는교. 있으면 남 채가기 전에 얼른 사윗감으로 채 갔부소, 그만.”
그만 기역자판에 그득히 둘러앉은 장군들이 모두 폭소를 터뜨린다.
이런 말 속에 국수는 언제 들어갔는지 배를 설설 쓰다듬으면서 일어나 쌀자루에 멜빵을 둘러치고선 팔을 그 멜빵 속에 집어넣어 일어서면서 한번 우쭐거리면서 짊어졌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쌀값을 주고 남은 돈에서 국수 값을 치러주면서,
“아지매, 국수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럼 안녕하소.”
“예 총각. 잘 가이소. 그리고 또 오소.”
그리고 집으로 오는 길에 과자 가게에 들러서 굵다란 눈깔사탕 한 봉지를 샀다. 동생들이 좋아하는 얼굴을 떠올리면서.
6월 초순이라, 해도 많이 길어져 오후 4시가 좀 넘었을까, 해는 서쪽으로 기울기는 했으나 아직도 서산에 한 뼘 넘어나 있다.
대문으로 들어서면서 소리를 쳤다.
“엄마, 내 왔다.”
엄마는 뒤꼍 부엌에서 반가운 얼굴로 나오셔서, 나를 맞았다.
“일찍도 왔네. 아이구 이 땀 좀 봐라. 얼른 샘가로 가자. 등물 좀 쳐줄게.”
“아니 괜찮아. 도랑가에 가서 좀 씻을래.”
하고 무명베수건과 비누를 가지고 나오자, 어느 새 용아가 알고 나를 따라 온다.
“형아, 도랑에 가서 우리 물싸움하자.”
“좋지. 용아 옷을 몽땅 다 젖도록 물을 뒤집어 씌워야지.”
하고 용아 손을 잡고 공출미곡창고 위쪽으로 갔다. 거기서 조금 더 도랑을 따라 올라가면 도랑 양 옆에 무논이 있는데 도랑과는 1미터 쯤 높은 논바닥이다. 도랑물은 폭이 2미터 정도인데 양 기슭에 각각 한 사람 씩 서서 두레박줄을 잡고 웅덩이 물을 퍼 올리도록 자리가 만들어져 있다. 웅덩이 깊이는 물을 댈 때는 허리 높이 정도는 되지만 물을 댈 때가 아니면 물꼬를 낮추어 깊이를 줄여서 아이들의 물놀이에 안전을 보장하고 있다. 나와 용아는 거기에서 물놀이를 하려는 것이다.
용아는 발가벗고 나는 위통만 벗고 팬티바람으로 물에 들어가 땀도 씻고 용아의 물놀이 상대를 해주기도 했다. 그곳은 응달져서 그늘이 깊어 곧 추워진다. 그래서 우리들은 30분쯤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왔더니 저녁에 배달되는 영남일보 신문이 있다. 나는 대강 기사 제목만 보다가, 평소 관심이 없는 광고 쪽에 우연히 눈이 갔다. 거기에는 경상북도의 이름으로 광고가 나 있는데 큰 활자로 ≪초등학교교원모집≫이라고 나와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퇴학을 맞은 나인지라 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냥 훑어보다가 응시자격이라는 란에서 괄호 속에 중학교 3학년 졸업 또는 수료 미달자는 응시자격시험을 쳐서 그 합격자는 본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고 나와 있다.
나는 눈이 번쩍 띄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이번에는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읽어보았다. ‘나도 시험을 칠 수 있는지’라는 데에 관심을 집중해서 읽었다. 결론은 먼저 응시자격시험을 치고 자격을 얻은 다음에 1주일 후에 본시험을 치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시험을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은 국어, 영어, 수학, 사회(공민, 역사, 지리), 과학(물리, 화학, 생물, 생리), 음악, 미술, 체육이론에다 교육이론이었다. 다른 과목은 아무튼 해볼 모퉁이는 있는데, 교육이론은 전혀 낯설다. 그래서 대구에 가서 서점을 둘러보면 무슨 방도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이튿날로 대구로 갔다.
대구 중앙로 서점이 여러 곳 있는데 모두 둘러보고 교육이론으로 오천석이 쓴 「새교육」이라는 책이 있었다. 이것이 가장 적당할 것 같아서 그것을 샀고, 그밖에 악보를 해설한 음악교과서와 미술교과서, 체육교과서들을 사 가지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벼락치기로 공부를 시작했다. 다른 과목은 자신이 있고 책도 있지만 생판 처음인 것은 교육이론인 「새교육」이고 미술과 음악 그리고 체육이다. 아무튼 나는 건넌방에 들어박혀 곁에 누가 있던 관심 밖으로 하고 책에 밤낮으로 매달렸다.
시험은 「응시자격시험」이 1949년 6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고, 본시험은 7월 상순의 어느 날이었는데 장소는 대구시 봉산동에 있는 「대구국민학교」였다.
나는 이 시험에 두 번을 모두 합격해서 초등학교 준교사의 자격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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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쌀을 팔고 사는 경우는, 다른 물건을 팔고 사는 것과는 정반대의 뜻으로 말한다. 곧 ‘쌀을 판다’는 말은 이편에서 돈을 내고 쌀을 받는다는 뜻이고, ‘쌀을 산다’는 말은 이쪽에서 쌀을 내고 돈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는 쌀이 화폐로 씌었다는 일을 말해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