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투쟁 전선에서 이탈과 시대의 한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물이 여울이 되어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사방을 둘러보니 단장천이 좁은 물목이 되어 띠다리 밑을 흘러가는 급한 물살의 물소리가 들렸다. 바로 띠다리를 건너면 죽남이라 따로 부르는 다원 마을의 동편에 있는 다죽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다리를 건너가면 어제까지는 그 동안 길도 들고 정도 든 마을들이지만 이제는 적지와 같은 마을이다. 그래서 내 몸 하나 은신할 수 있는 마을은 거기에는 이미 없다.
오던 길을 되돌아 귀미 마을 입구로 들어가는 강둑길 위에 올라 살내 마을로 들어가는 길 따라 갔다. 그러다가 넓은 강변의 자갈밭을 질러 달빛에 일렁이는 물빛을 보다가, 바지를 걷어 허벅지까지 감아올리고서 여울을 건넜다.
깊은 데라야 무릎 위라서 쉽게 건넜다. 건너편은 좀 가풀막진 언덕인데 길이 비스듬하게 나 있어서 거기로 해서 올라가니 구철로가 놓였던 철로의 철길을 걷고 도로로 만든 길이었다.
일제 때 경부선이 처음 놓았을 때는 단선이었는데, 1940년대 시작부터 경부선 철도를 복선으로 확장했다. 이 구철도를 폐선하고 지금의 철도를 새로이 놓고 추화산 밑으로 약 1킬로미터나 되는 터널을 뚫고 철길을 단축시켰다. 이 복선공사 이전의 경부선은 용두목 철교를 건너자 철로는 오른편으로 완만히 굽어 추화산 동쪽 자락의 벼랑길을 깎아 철길을 놓고 강변으로 쑥 나온 산줄기 두 군데는 터널을 뚫어서 기차가 다녔다. 물론 그때 기관차는 석탄을 때는 증기기관차였다.
구철길이 놓였던 언덕길에 올라 도로로 된 길을 상행으로 가다가 터널로 들어가지 전에 산 위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6, 70미터 올라가면 그 밀양에 사는 여주이씨 집안의 정자가 있는데 그 이름이 「월연정」(月淵亭)이다. 이 월연정을 지나 강쪽으로 나온 두 산줄기 사이에는 백송나무 두 그루가 하나로 어울려 뻗어있는 천연기념물이 있다. 그 가근방의 초등학교 학생들의 봄가을 소풍 코스로도 되고 있다.
나는 이 구철도길 도로로 올라 사방을 살펴보았다. 개미새끼 한 마리도 없이 조용했다. 일단 굴 안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백송나무가 있는 골짜기 출구 쪽으로 나왔더니 달빛이 환하게 강을 비추고 있었다. 바로 산 밑이라 물이 깊어서인지 수면은 달빛을 받아 조용히 비추고 있다. 그 조용한 수면은 보기만 해도 물이 깊어보였다.
일단 나는 급한 곳으로부터 벗어난 것 같았다. 그리고 세상만사가 그냥 고요하기만 해서 사색하기가 좋았다.
그때서야 맑은 정신이 생겨서 내가 한 일에 대해, 즉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환란에서 일단 피하고 본다는 생각으로만 해왔던 일이 비로소 되돌아보게 되었다.
제일 먼저 제2선을 찾겠다고 간 귀미 동네 아지트에서 당한 일이 다시 되살아났다.
‘마, 그만 가라카이까네. 허 참 그냥 가란 말이욧.’라는 낯익은 목소리가 이때 비로소 그 임자가 바로 서공생 동지라는 생각이 났다. 그 목소리가 틀림없이 서공생 동지인데, ‘왜 나를 만나주지도 않는가?’ 그리고 그 떨리는 목소리가 더욱 마음에 걸리었다.
그래서 생각이 깊어지게 되었고 그 어떤 짐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것도 짐작일 뿐이지만.
그때는 이미 천황산 밑의 아지트는 김종원부대에 의해 산산이 짓밟혔고 파괴되고 있어서 귀미의 제2선에서 천황산 쪽으로 갈 수 없었던 것이었다. 김종원부대가 그 일대를 생명이 있는 것은 기어 다니는 벌레까지 모조리 학살했다는 말이 전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서공생 동지는 그처럼 매정하게 나를 떼어낸 것이었다. 차마 말로써 나타내지는 못하고 그냥 ‘네 갈 데로 그만 가라.’는 뜻이 담긴 메시지였음을 짐작하게 된 것이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나? 이제 갈 데는 없다. 그러자 두려움이 생겼다. 그리고 할배가, 할매가 보고 싶었다. 또 엄마가, 아버지가 그리고 동생들이...... 그래서 가족이 그리워서 가슴이 옥죄었다. 그러면서 내가 연계소 집에 들어갔다가 붙잡히면 식구들은 괜찮을까?
그 다음은 지금 몸에 지니고 있는 이 무기는 어찌 할까.
무기를 버리면 당장 어느 놈이 달려들 것 같은 환상마저 생기고 있다. 그렇지, 이 무기가 없으면 마지막 도망인 죽음도 스스로 못하게 되는 거지.
그래도 그냥 지니고 갈 수는 없다. 그래 적들에 붙잡혀 무장해제 당하는 것보다 버리자. 그래도 이 무기가 어떤 무기인데, ‘목숨을 걸고 동지들이 얻은 것인데.“라는 버리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생겨나기도 했다.
결국 이제부터 전투의 마당으로부터 떠날 바에야, 하고 버리기로 했다.
달은 중천에서 서쪽으로 기울자 추화산의 동쪽 벼랑 언덕에 있는 지금 내가 있는 자리는 곧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일단 강가에 나온 언덕 위로 올랐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권총, 콜트45를 뽑아들었다. 총탁을 얼굴에다 갖다 대었다. 밤공기를 많이 닿아선지 싸늘한 냉기가 마음을 진정시켜준다. 마음이 어느 정도 고요해지자 나는 총을 어깨 넘어 뒤로 잔뜩 재껴 힘을 주어 던졌다. 그래도 총이 무거워서인지 멀리 강심까지 못가고 벼랑 밑 가장 깊은 곳으로 보이는 곳에 떨어졌다.
“풍덩”
그리고 이때껏 했던 고민까지 한꺼번에 안고 나를 떠난 것인지 시원하지만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이제 모든 번민을 버리고 전장에서 떠나 집으로 가자는 생각만 났다. 그러자 할매의 품이 그리워졌다. 첫 굴은 짧지만 두 번째 굴은 약 200미터는 좋이 되었다. 여기는 불빛 없이는 방향을 잡지 못할 것 같아서 마른 나뭇가지를 기다랗게 묶어서 횃불을 만들었다. 그리고 굴 안으로 들어갔다. 불빛에 굴벽이 드러났고 가는 길이 환하게 나타났다.
이윽고 굴을 빠져나왔다. 달빛은 어둔 곳에서 나와서인지 너무나 밝았다.
긴늪 공굴 다리에서 범북고개를 넘는 도로 아래 왼편 잘록이를 넘어 공동묘지의 왼편 고갯길을 넘어갔다. 자정이 다 되어, 나는 송징이 다리 밑에서 도로로 올라 사방을 휘둘러보았는데, 인기척 하나 없는 밤이었다.
서문다리로 가는 수로를 따라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면서 서문다리를 건너 동가리 신작로를 보니 달빛을 받은 신작로는 저 멀리 우리 집 앞까지 환하게 보였고 인기척 하나 없었다.그리고 개소리 하나 안 나는 고요한 거리였다. 마침내 연계소 우리 집 대문에 다다랐다.
닫은 대문을 손을 대고 가만히 안으로 밀었더니 대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나중에 할머니에게 들은 말인데, 내가 집 나간 날부터 대문의 빗장을 잠그지 않았다고 하셨다. 집나간 손자가 언제 올는지도 모르고, 또 급하게 올는지도 몰라서 늘 빗장을 걸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다.
나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들어갔다. 그리고 가만히 할매를 불렀다.
“할매, 내 왔다. 재구가 왔다.”
라고 불렀다. 한 번 더 불렀다. 그러자 그 말소리도 끝나지 않아 할매 목소리가 들렸다.
“밖에 누고! 아이구 저그 재구 목소리 아이가!”
그리고 방안에 전등이 켜졌다.
그러자 뜻밖에 키가 큰 남자가 대청으로 나오고 바로 맨발로 마당으로 내려서더니,
“네, 재구제! 재구 맞제!”
아이구 이를 수가 아버지다. 나는 그만 아버지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네가 우짠 일고! 이 밤중에. 어서 올라가자.”
이때 할매가 마당에 내려와서 나를 잡고 반 울음으로 소리쳤다.
“아이고, 내 새끼야! 네가 이 밤중에. 어서 올라가자.”
그러자, 아버지는 밖에 놓인 기다란 바지랑대를 들고 대문 밖으로 나가 사방을 둘러보고 들어오셨다. 그러면서,
“혹시, 누가 너를 따라오는가 싶어서.”
라고 하신다. 혹시 나를 잡으러 뒤따라오는 놈이 있고, 나는 어떤 놈으로부터 도망해서 오는 줄 아셨는지, 그래야 별수 없지만 아들을 지키겠다는 아버지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눈빛은 팔순이 넘는 지금도 종종 떠오른다.
그리고 방에 들어오셔서 나를 보고,
“너, 지금 괘않나?”
“예, 괘않습니다.”
한 소동 가시고 나서 나는 그 동안 있었던 일을 할매와 아버지가 너무 걱정하시지 않도록 일없는 투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오게 된 전말도 이런 수준으로 대강 여쭈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이번에 내가 정말 잘 왔구나. 어매(어머니). 정말 조상이 너를 지켜주시는 갑다. 이제부터 제사를 밀양에서 구지로 옮겨서 지내려고 하는데, 제사에 쓰이는 제상과 향로반 그리고 제기를 가지고 가려고 오늘, 아니 이제는 어제지, 내가 왔는데, 너와 꼭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오늘 니가 여기로 왔으니. 그래 내일 제기들과 농짝 등 살림살이를 싣고 가는 트럭을 맞추어 놨다. 그것 타고 가자. 정말 조상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너를 지켜주고 있구나. 그래 내일 그 차 타고 바로 구지로 가자.”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네가 집 떠나고 나서 내가 사는 기, 사는 기 아니다. 잠자리에 들어도 니 걱정, 앉아도 서도 니 걱정이지, 이 눔아! 어떤 소문만 들어도 니가 혹시나 하고, 방정맞은 생각이 자꾸 떠올라서. 더구나 개엄 아이 죽고부터는 정말 사는 기 아니었다. 니 개음 사람 죽은 소문은 들었나.”
“돌아가시기 한 열흘 전에 한번 뵈었다. 생각하면 절통할 노릇이다. 개음 아지매는 말이 아니제.”
라고 대답하자, 할매는 다시 말씀했다.
“세상에 무슨 원수가 졌다고 죽일 내기야. 왜놈시대에 조선왜놈 노릇 그렇게나 해도 해방되고 어디 한 사람이나 다치게 했나. 저그가 동포들에게 한 노릇 생각하면 어디 한 번만 죽어서는 그 짓거리, 어디 다 갚을 수가 있어야제. 그런데도 무슨 원수가 졌노, 사람을 마구 죽이고. 야야, 이제 이야기 그만 하고 일찍 자자. 내일은 짐도 싣고 가야지. 재구 너도 일단 잠부터 자고. 그리고 내복 내어줄게. 속옷 갈아입고 자거라.”
하고 아재가 입던 내복을 내주었다.
내 키슬링을 그대로 두고 왔는 게 못내 아쉽다. 그 좋은 내복, 학생복 모두 버리고 와서 아까운 생각이 났다.
그리고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잠자리에 들자 늘 버릇이든 할매 젖가슴 만지는 것도 잊고 그냥 내 몸에서 무엇이 소옥 빠지듯 하면서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대문 밖에 미제 ‘스리쿼터’라고 하는 반트럭이 왔다. 그리고 운전수와 아버지가 짐을 싣는 소동에 나는 잠을 깼다.
나는 급히 일어나 얼굴에 물을 찍어 바르듯이 세수를 하고 짐 싣는데 좀 거들 것을 찾아 나섰더니 짐은 이미 다 싣고 운전수는 고무 밧줄로 실은 짐을 이동 중 흔들리지 않도록 짐칸의 테두리의 걸개에다 걸어 바짝 조이고 있었다.
이윽고 짐을 다 싣고 출발준비를 끝내자 운전수와 더불어 모두 대청으로 올라와 아침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할머니의 장기인 시원한 북어 국에 간 고등어에 묵은 지를 얹어서 조린 짭짤한 조림과 여러 가지 다양한 밑반찬으로 맛깔스럽게 차렸다.
세 사람 모두 든든하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차를 탔는데, 할머니는 어느 새, 말았는지 김밥을 담고 묵은 지 속에 박아놓은 짭짤한 무를 꺼내어 납작납작하게 설어서 담은 3층 찬합을 보자기에 산 것을 나에게 안겨주면서,
“가다가 배고프면 노나 먹으라.”
고 했다.
차는 무안으로 해서 영산과 창녕을 지나 현풍 못가서 유가에서 구지로 들어갔다. 거리는 약 60킬로미터 정도인데 당시 도로사정이 나빠 시간은 중간에 잠깐 쉬는 시간까지 쳐서 2시간 정도 걸렸다. 밀양 연계소집에서 아침 9시에 출발했는데 구지 집에 11시 좀 넘어 도착했다.
차가 도착해서 모두 차에 시선이 몰렸는데, 거기에 내가 차에서 내리자 모두 놀라 멀쑥하게 쳐다보더니 그 눈이 활짝 열리는 듯 하다가 그만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웃음꽃으로 펴나면서 소리쳤다.
“와! 재구야, 니가 웬 일고!”
엄마의 목소리였다.
“힝야!(형아)”
재두와 용아의 반가움이었다.
“오빠야!”
향아의 외침이었다.
엄마의 팔이 내 어깨에 감기고, 재두, 용아가 각각 오른 손과 왼 손을 차지했고, 향아가 내 허리에 매달렸다.
엄마는 그 외침이 곧 넋두리로 변했다.
“고게 나서 복도 없이 오라비도 못 보고 그만 가버렸지. 삼신 할매가 무슨 용렬로 도로 데려갔는가. 그래 고게 너를 불러오려고 가버렸구나. 그 불쌍한 것!”
하고 울었다.
그러자 나는 구지를 떠날 때 그 유달리 부른 엄마의 배가 푹 꺼져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어매! 아이는?”
“그래, 고게 세상에 나서 돌도 못 지내고 그만 가버렸다. 한참 재롱부리다가 그만 가버렸다.”
그래서 내가 없는 동안에 난 내 여동생이 내가 집에 돌아오는 것도 못 보고 가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죽은 아이가 정말 불쌍했고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가여웠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가슴에 보듬어 안고 있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될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서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나중에 호적을 보았더니 이름이 안재정(安在貞), 1948년 3월 25일에 구지에서 출생해서 내가 집에 돌아오기 석 달 전 1949년 1월 16일에 사망했다. 이건 정말 내게 주는 시대의 한이다.
1948년 11월에 들어서서 홍진을 했는데 12월 하순 경에는 다 나았고 회복된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양력 설 제사를 지내려고 어머니가 아이를 업고 구지에서 밀양 연계소 고향집으로 오셔서 설 제사를 무사히 잘 마쳤다.
그런데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고 발진이 생기면서 앓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곧 폐렴으로 변하더니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밀양에 와서 밀양의 병원에 진료를 부탁했으나 의사는 병세가 너무 늦었다고 했다.
죽고 난 다음에 장례는 밀양의 추화산과 아북광산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산으로 밀양의 공동묘지가 있었고, 거기에 있는 애장터에 묻었다는데, 무심한 오라비는 그 곁을 몇 번이나 그냥 지내치기만 했구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