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파국과 이탈

밀양군당은 결국 동남의 평야지대, 하남면, 초동면, 상남면과 삼랑진읍의 1개읍과 3개면은 그 지지기반을 상실하게 되었고, 나의 부북면당의 선을 통해 레포 활동으로 조직 선을 유지하고 있는 밀양읍당, 부북면당, 무안면당, 청도면당 4개 면당과, 군당 연락부의 지도원 동지인 청도샌님 주승도 동지가 선을 맡아 연락업무를 관장하고 있는 동북산악지대의 산외면, 산내면, 단장면, 상동면 4개 면당의 선은 그냥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3, 4일에 한번 씩 부북면 삽개에 있는 연락‘트’에 다니면서 선의 안전을 확인하고 다니는 일만 남게 되었다. 결국 우리들은 투쟁에서 주동을 잃고 피동으로 몰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피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도는 없었다. 그렇다면 파국만이 시간문제로 남는 것이다.
결국 그 파국은 4월 8일에 오고야 말았다.
그날은 아침 일찍이 덕실 아재가 와서 지도원 동지의 전갈이라면서,
“덕출이, 청도샌님이 오늘은 오랜만에 셋이 함께 한 상에서 아침을 먹자고 하시네. 빨리 채비를 하고 나와 함께 큰집에 있는 우리 방에 가자.”
라고 했다.
“아재, 참 그러네요. 늘 두리상에서 조석을 함께 했는데, 한동안 못했지요..... 정말 오랜만이네요.”
하면서 좋아했다. 나는 덕실 아재가 했던 그 근면하고 소박한 농사일 이야기가 참으로 재미있었다. 아재는 농사일이 천직으로 알았고, 이야기의 마무리는 늘 한 가지였다.
“내 땅 가지고 내 농사를 짓는 일이 소원이라.”
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농량으로
“내가 지을 농량은 논 열 마지기하고 밭 다섯 마지기만 하면 된다.”
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늘 말했다.
“아재, 아재 농사가 논 열 마지기, 밭 다섯 마지기만 아니지. 앞으로 좋은 세상이 되면 농사도 기계 힘을 빌리고 금비(주1)를 써서 지으면 아재 힘으로 스무 마지기도 못할까, 서른 마지기도 못할까. 나중에는 백 마지기라도 할 건데.”
그러면 아재는 기분이 좋아서 늘 같은 말이지만,
“그래 이 사람 덕출이. 그러면 기계운전도 배워야 하고 금비 쓰는 법도 배워야겠네. 그러면 일자무식군은 농사도 제대로 못 짓겠네.”
“아재, 그래서 공부를 해야지. 그러이 야학에 나가서 한글을 깨달아야지. 부지런히 공부하소.”
“응, 그래야지. 그런데 덕출아. 그런데 그 놈의 공부라면 늘 잠이 쏟아지는데 우짜면 좋노!”
그래서 나는 덕실 아재에게 「아리랑」도, 「양산도」도 그리고 「도라지타령」도 적어주고 한글을 익히도록 거들어주었지만 별 효험을 보지 못했다. 목청이 좋아 노래는 잘했지만, 그 노래는 노래 따로, 글자 따로, 그래서 글자를 익힐 수가 없었다. 내가 좀 더 다잡아서 가르쳐주었더라면 하고 나중에 후회했지만 ..... 그날의 이 아침상은 우리들의 이별상이 되고 말았다.
3, 4일에 한번 씩 방문하던 부북면당의 연락‘트’로 가는 날이어서 그날도 감내를 건너서 제대리 수리 못 둑 아래 논 둑 길로 해서 삽개 마을로 들어가는 큰 길로 잡아 동구 앞에 다다랐는데, 어쩐지 기분이 허전했다. 「모렴당」 솟을대문이 보이고 그쪽으로 들어가는 길모퉁이에 있는 바깥마당 가에 머리가 하연 50대 할아버지가 망건을 쓰고 긴 담뱃대를 들고 서 있었다.
나는 노인이라 마음은 좀 놓였지만 어쩐지 노인의 모습에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기분이 번지고 있었다. 나는 주저하면서 사립문을 바라보니 안전신호인 요롱이 없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집안에 들어가기를 주저하고 막 돌아서려고 하는데,
“거기 총각.”
하는 소리가 내 등 뒤에서 나기에 뒤돌아보았다. 바로 그 노인이 나의 시선을 피하면서 내 곁으로 왔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총각, 어서 이곳을 피해서 빨리 떠나게. 그 집 사람들 오늘 모두 잡혀 갔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노인을 보고 다시 사립문을 보자 다시 뒤에서 말이 쫓아온다.
“그 요롱 말인가, 그 요롱 내가 떼버렸네.”
나는 이제야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다. 나는 노인을 보고,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노인은 담뱃대 든 손으로 동구 밖을 가리키며,
“어서 가게. 좀 전까지 여기 있었는데, 잠깐 어디 간 것 같네. 어서!”
나는 다시 눈인사만 하고 큰길로 나와 그 길 아래 논둑으로 내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아 격철 쇠를 잡아 뒤로 당겨 철컥하고 장탄을 해서 망태에 넣고 그 위에다 보자기를 덮었다. 그제야 두려움이 가셨고 사물의 모습이 뚜렷했다. 아마 총의 힘인가 보다.
그리고는 마치 모판에 물을 받아놓은 논을 보러간 사람인 양 천천히 걸어 모판 쪽으로 내려섰다. 거기에서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노인은 그대로 큰길가에 서있었고, 동네는 고요했다. 이때 비로소 나는 오금이 저려왔다. 그리고 이마에 땀이 났음을 알았다. 월산 어른은 어찌 되었을까, 하고 생각났지만, 우선은 이 자리를 피하려는 데만 정신이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때로부터 30년이나 지난 1979년 가을, 󰡔남민전 사건󰡕으로 수배되었을 때, 속옷을 얻어 입기 위하여 그 동네 삽개 사람으로 나의 초등학교 친구이고 󰡔2.7구국투쟁󰡕 때의 「밀양농잠중학교」 동지였던 박순희에게 들렸을 때 월산 어른의 소식을 물었다. 박순희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다.
“나와는 촌수는 멀지만 한 동네에 살아서 작은아버지처럼 지내던 월산 아재다. 그 이후는 소식이 없네. 그때 밀양에 「백골대」가 한창 설쳤을 때 아닌가. 그 월산 아지매도 몇 해 후에 돌아가셨는데, 자식이 없어 양자를 들였기는 했지만 어디 사는지 모른다네. 어디 ‘빨갱이’라고 해서, 그 연좌제 때문에 ‘우리 아버지요.’라고 하고 제사라도 지내주고나 있는지 ...... ”
이제는 이 박순희 마저 고인이 되었으니.
나는 그냥 걷기만 했다. 감내를 향해 논둑길을 걸었다. 저쯤 왼편에 감내 공굴 다리가 보였다. 물가에 내려가 좌우로 살폈다. 징검다리도 없었다. 어디 얕은 데는 없을까 하고 두루 살폈다. 갈수기가 되어선지 물을 보니 좀 깊은 데라도 무릎 깊이쯤 될 듯해서 발을 벗고 물에 들었다. 물은 보기보다 얕아서 쉽게 건널 수 있었다. 물가에서 수건으로 발을 닦고 버선을 신고서 타이어고무신을 신고 둑 위로 올라 둑길을 따라 남천강 쪽으로 가서 밀양사람들이 ‘둘끝’이라고 부르는 남천강 제방 끝에 올라섰다. 여기까지 오자 이때까지 나도 모르게 흥분되어있던 심장이 좀 고요해진 것 같았다. 그래선지 바람도 좀 찬 것 같다. 확 트인 강 쪽의 바람을 피해 제방 아래 널찍하게 평평한 잔디밭 가의 길 따라 바람을 피해 걸어갔다. 곧 밀양 진장 터에 있는 마을, 이제는 「진장」(주2)이라는 마을이름으로 된 몇 집 안 되는 동네가 나왔다.
진장 마을의 북쪽은 저지대이고 미나리 논이 펼쳐져 있다. 그곳을 왼쪽으로 해서 나가면 잔디밭은 끊어지고 길은 제방 위로 오른다. 제방 밑에 뚫려있는 수로는 해천다리의 밀양성 해자의 물길을 남천강으로 흘러나가도록 하는 물길이다. 여기서부터는 제방의 오른쪽에는 일제식민지시대에 왜놈들의 유락촌이 있었던 곳인데, 그 가까이에 밀양권번이라는 곳이 있었다. 왜놈들은 이 권번 곁에 고급일본식 여관과 왜놈 요리집으로 이루어진 유락촌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왜놈들이 물러가자 미군정은 이곳을 모두 이른바 적산이라 해서 군정청 적산관리청이 차지했다. 이 일본 유락촌의 집은 다시 미군정의 식민지 재편성에 협력하는 친일•친미사대주의 지주들에게 임대해주었고, 이것은 또다시 우익정당•사회단체에 빌려주어 이들의 사무소 또는 숙소로 사용하도록 했다.
당시 거기에는 「독촉」이라 부르던 󰡔대한독립촉성회󰡕, 󰡔대동청년단󰡕, 󰡔서북청년회󰡕, 「학련」이라 부르던 󰡔반탁전국학생연맹󰡕 등 우익폭력단체들이 있어서 학생들이 그곳을 지내가기를 두려워 했던 곳이었다.
당시 나는 상당히 흥분했던 것 같았다. 총을 가진 나는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었고, 내가 그처럼 의지했던 당 조직선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 어떤 체념까지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야말로 폭발 직전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무사히 그곳을 지나왔고, 바로 영남루에 올랐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무봉암으로 해서 그 뒤 무봉산에 올라 볕이 잘 든 후며 진 곳을 찾아 잡초가 섞여난 풀밭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새파란 하늘을 보고 흥분된 마음을 가라 앉혔다. 그럭저럭 시간은 오후 3시가 지났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자니 시간이 지겨웠다. 시간을 보내는 데는 수학책만큼 좋은 것은 없다. 망태 안을 뒤지어 해석기하 책을 꺼냈다. 2차곡선에서 연습문제를 펼쳤다.
한참 책에 빠져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있었는데 으슬으슬 몸이 추워지고 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자 내가 있는 곳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고 배도 고팠다.
다시 영남루로 내려왔더니 왜놈 신사로 올라가는 계단 들머리에 조그마한 차일을 쳐놓고 영남루에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시루떡을 파는 떡장수가 있었다. 떡장수는 떡시루에 시루떡을 앉혀서 거기에 흙으로 이겨 만든 부뚜막에 솥을 걸어두고 그 떡시루를 얹어 떡을 찌고 있었다.
손님 두 사람이 기억자판에 앉아서 썰어놓은 떡을 먹고 있다. 그 곁에는 우거지 된장국솥도 있어서 김이 무럭무럭 일고 있다. 떡과 우거지 된장국이라 요기로는 그만이었다. 나도 그 차일 밑에 들어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떡과 우거지 된장국을 청했다. 기다란 기억자판 내 자리에 수저를 간추려 놓고 떡시루 뚜껑을 열고 금 지어놓은 금에다 납작한 쇠 주걱을 넣어 떡 조각을 부수지지 않게 잘 들어서 접시에 담고, 무김치 조각을 좀 크게 썰어 접시에 담은 찬을 내놓고 우거지 된장국 한 대접 내놓았다.
떡은 콩고물 떡과 팥고물 떡 두 가진데 콩고물 떡은 엄지손가락만큼 썰어 넣은 곶감쪼가리가 씹히는 게 더욱 맛을 돋웠다. 큼직하게 썬 무김치 한 접시에다 국 한 대접으로 배를 채우고 나니 허기진 배도 배거니와 추위도 잠재웠다. 해도 서산으로 기울어 종남산 아래 삽개 동네는 저녁 안개가 덮여지고 있다. 부른 배도 좀 잠재우고서 5시 좀 넘어서 영남루를 벗어나 산외면 다원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무봉산 아래 남천강 ‘꼬꾸랑바우’ 위 기슭을 지나는 길 따라 용평리 앞들을 지나 선불에서 살내로 가는 징검다리를 건너 단장천 남쪽 강변을 가다가 죽남의 그 띠다리를 건너 강따라 다원으로 들어가는 농로를 잡아 서쪽으로 좀 가다가 면소재지와 지서가 있는 곳을 피해 그 서쪽에 동네로 들어가는 길을 찾아 도로를 건넜다. 이제 날은 완전히 저물고 반달은 훨씬 넘는 달이지만 겨우 동천에 떠있어선지 엷은 봄 안개 속이라 사람 얼굴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동내로 들어서는 길로 막 들어서는데 장골 한 사람 나타나 갑자기 내 팔을 붙들었다. 나는 깜작 놀라 나도 모르는 새 손이 망태 안으로 들어가 총을 잡았다.
“이 사람 나일세. 덕출이.”
하고 얼굴을 내미는데 보니 초당방에서 만나던 형이었다. 이름은 기억이 없다.
그 형은 나를 잡고 내 귀에다 입을 갖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덕출이, 이 동네 큰일 났네. 일단 여기를 빨리 벗어나세. 오늘 모두 몽땅 잡혀갔다네.”
나는 그만 정신이 아찔했다. 내 몸이 주저앉을 것 같았다.
“아니, 청도샌님도? 그리고 덕실 아재는?”
라고 하자 그 형은 나를 부축하고
“그렇다네. 모두 다. 일단 여기를 얼른 벗어나세.”
하고 나를 이끈다. 나는 그에게 이끌리어 도로를 도로 건넜다. 우리 두 사람은 한 100미터 쯤 논둑길을 따라 가다가 수로의 마른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기에서 그 형은 그 새 일어난 일을 이야기 했다.
일은 그날, 4월 8일 오후 3시쯤에 일어났던 일이다. 그 형은 그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했다.
“갑자기 트럭에 군복만 입은 군인지 경찰관인지 모르는 청년들과 사복을 입은 자들 합쳐 십 수 명이 타고 더러 닥쳐 청도샌님이 있는 집에 들어가 샌님과 덕실 아재를 붙잡고 마침 거기에 있던 동네 청년 두 명까지 합쳐 모두 네 사람을 붙잡아 그냥 데리고 갔다네. 그 집을 사랑채는 물론이고 안방까지 신발을 신은 채 들어가 마구 뒤지고, 사당에까지 들어가서 신주단지 뚜껑까지 열고 난리를 쳤다는 구나”
이로써 일의 전말을 알았다.
군인인지 경찰관인지 모르는 청년들이란, 당시 밀양에 들어와 있는 이른바 「백골대」라는 「김종원부대」의 G2 성원이 우익청년단체의 깡패들을 데리고 온 것인데, 어느 누가 일러준 정보를 가지고 더러 닥친 것이었다. 이들이 정보를 가지고 사전조사를 했더라면 나까지 파악하고 기다렸다가 내 ‘트’까지 습격해서 나까지 검거했을 터인데, 내 ‘트’가 그대로라니. 당시 군대의 정보조직은 일제의 고등경찰 수준의 군정경찰 수사력보다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은 무지막지한 고문으로 캐고 덤비기 때문에 하루나 이틀 후에는 내 실체까지 파악하고 곧 덤벼들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가만히 있자, 이들이 아직 나를 파악하지 못했으니 지금 내 ‘트’는 안전하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내 물건을 가지고 나올까’라고 생각해보았는데, 이는 모험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 모험을 할 만큼 중요한 것은 내 짐에는 없었다. 그 키슬링에는 지금 입고 있는 학생복 이외에 내 내복 그리고 수학 책과 사회과학 책 몇 권이다. 이를 위해 모험할 일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래서 이대로 여기를 그냥 떠나야 한다는 결론을 내었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나?
일단 제2선, 비상선을 찾아가야지. 이렇게 다음 행동을 결정하자, 나는 곧 그 형에게 말했다.
“형, 나는 이제 다원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구나. 그럼 여기에서 헤어지도록 합시다.”
형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나의 제의에 놀라면서 말했다.
“덕출이 이 사람, 그러면 초당집 자네 방에는 네 물건은 아무 것도 없는강. 지금 짐을 가지고 와도 되겠는데.”
“형, 지금 그건 위험해요. 형은 그냥 들어가시오. 그리고 나중에 형이 내 것은 모두 불에 태워 없애버려주이소. 내 륙색에는 옷가지와 책이 몇 권 들어있는데 형이 쓸 만한 것은 형이 가지고, 아니면 태워버리소. 내가 그것 가지러들어갔다가 잡히면 그건 다시 무를 수도 없는 낭패지요. 그보다야 그냥 버리는 것이 낫지. 형도 그만 가지지 말고 그냥 태워버리소.”
“오냐, 알겠다. 그게 젤 미덥구나. 그렇게 하지.”
그리고 우리들은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나는 건너온 띠다리를 건너 단장면 미촌리 귀미마을로 갔다. 거기서 귀미 마을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귀미 마을에 있는 ‘트’는 무릉동 ‘트’로 갈 때 거기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던 곳이었고 서공생 동지의 ‘트’였다.
나는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시간은 밤 8시가 좀 넘었다.
나는 마당에 들어서서 이쪽 접선암호를 보냈다.
“여보세요, 주인 계십니까?”
안에서 누가 대답했다.
“거기 누구십니까?”
그래서 나는 암호를 댔다.
“살내 마을의 도동댁에서 씨나락(볍씨)을 가지고 왔습니다.”
한참동안 대답이 없었다. 좀 기다렸더니 대답이 왔다. 그런데 올 대답이 아니었다.
“우리 그런 소리 들은 일이 없는데요.”
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서
“아니 여보세요. 씨나락 부탁한 일이 없다니요. 찹쌀 2되하고 멥쌀 6되 가지고 온다는 말 못 들었는교?”
안에서 퉁명한 목소리로 나왔다.
“우린 살내 도동댁도 모르고, 씨나락 부탁한 일도 없소. 그라니 그만 가보이소.”
라는 대답이 굴러 나왔다.
이럴 수가! 나는 기가 차고 어처구니없어 더 이상 말할 기운도 없었다.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냥 서있었다. 그러자 안에서 낯익은 다른 목소리가 나왔다.
“마, 그만 가라카이까네. 허 참 그냥 가란 말이욧.”
나는 그때 살갗에 싸늘한 한기를 느꼈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이 허리춤으로 가고 말이 튀어나갔다.
“예, 그만 갑니다.”
라고 하자 안에서 대답이 나왔다. 그 목소리는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만 잘 가이소.......”
이편 나의 말도 떨려 나왔다.
“예, 편히 계시이소......”
나는 총을 빼들고 뒷걸음질로 해서 사립문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 길로 밖으로 나왔지만 어디로 가야 할까, 정말 막막했다. 그리고 눈물이 왈칵 나왔고 울음소리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통곡이 되어 나왔다. 한동안 그 통곡을 소리죽여 울면서 서 있었다. 그리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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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금비(金肥): 돈을 주고 사서 쓰는 비료라는 뜻인데 화학비료를 말한다.

(2) 밀양고을은 도호부가 있는 고을이었다. 도호부(도호부)는 인근 고을의 병권을 가지고 있는 도호부사가 있는 고을이다. 밀양도호부는 밀양, 창녕, 영산, 김해, 양산, 언양, 청도, 현풍 고을의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도호부가 있는 고을에는 병사가 주둔하는 진이 있었다. 이 진이 있는 장소를 진장이라 했다. 진장이라는 동네이름은 진이 있었던 동네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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