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50만 당원은 뻥튀긴가 실재인가
12월 12일 밀양 성내 장날, 아침을 일찍 먹고 행장을 갖추어 산외면 경찰지서 앞에서 첫 버스를 기다렸다. 7시가 좀 지나서 버스가 지서 앞에 도착했다. 지서 정문 입초가 버스를 세우자 차장 소녀가 내리고 이내 승객이 두어 사람 내렸다. 순경은 그들을 얼른 밑에서 위로 치켜 보고 고개만 끄덕 하자 승객은 그냥 지나갔다. 순경은 버스에 올라서서 앞 뒤쪽으로 시선을 주고 돌아보고선 내렸다. 차문 밖에서 기다리던 두어 사람과 함께 나는 버스에 올라탔다. 좌석은 모두 찼고 통로에는 두어 사람이 서 있었다. 그 동안 차장은 차부에 갔다가 오면서 서류 한 장을 앞에 찬 조그마한 가죽 가방에 집어넣으면서 왔다. 차문 벽을 두드리면서 ‘오라잇’ 소리를 내자 버스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장은 익숙한 동작으로 버스에 올라타자 버스는 ‘부르럭’하는 모질음 소리를 내면서 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속력을 내면서 달리자 자갈포장을 한 도로의 먼지를 뒤에 달고서 전후좌우로 흔들면서 나갔다.
이내 긴늪 철교 앞 검문소 앞에 버스가 섰고 거기에 버스를 기다리던 승객이 두어 사람이 버스의 출입구로 오자 그에 앞서 핫바지저고리 차림에다 봉두난발을 한 청년이 기다란 대창을 끌고 차안에 들어와 앞뒤로 한 바퀴 둘러보다가 나와 얼굴이 마주치자 ‘시익’ 한번 웃고,
“덕출이 너 아침 일찍부터 어디 가노?”
다원 동내의 청년인데 나와는 내 ‘트’의 앞방인 초당 방에서 안면을 트고 있는 사이다.
“응, 형아는 어제 당번인 갑제. 나 읍내 장에 심부름 간다.”
“그래, 좋겠다. 이것도 한 잔 하겠고?”
라고 하면서 손으로 한 잔 마시는 시늉을 한다.
“어디, 내가 그것 할 줄 모르잖아!”
“에이고, 그럼 잘 갔다 온나.”
내가 못하는 술을 제가 아쉬운 양 하면서 차에서 내렸다. 곧 이어 차장이 울리는 ‘탕탕’ 소리와 ‘오라잇’ 소리에 차는 공굴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차는 다리를 건너자 먼지꼬리를 달고 ‘덜컹 투당탕’거리면서 달렸다.
차를 타고 가는 중에, ‘송징이’ 다리에는 부랑 당 같은 우익깡패들이 검문하고 있을 것 같아 교동에서 내려 ‘송징이’ 다리 왼편 ‘뒷동산’ 산길로 해서 신당마을 위로 올라가 읍내 장으로 가는 길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차장에게 교동에서 내리겠다고 했더니 차장은,
“교동, 어디서예?”
라고 묻는다. 나는
“향교 가는 길목에서.”
라고 했더니,
“ 예, 알았어예.”
차가 향교 입구에 섰다. 나는 버스에서 내렸다.
도로를 건너 도로의 둑 밑으로 내려서 논둑길로 좀 내려가면 추화산과 공동묘지 산 사이에 난 시내가 제법 물길이 되고 이를 관개수로로 해서 논물을 대는 ‘송징이’ 도랑의 제방길에 이른다. 이 도랑의 바닥은 겨울에는 물이 없어서 맨바닥이 모래자갈 바닥이다. 이 바닥으로 해서 나가면 도랑 바깥에서 보면 그 안을 보지 못해 사람이 있는 줄은 모른다.
이 바닥으로 해서 나가면, 이번에는 추화산과 ‘뒤동산’ 사이에 그와 같은 도랑이 있어서 그 도랑과 합치는데 그곳이 바로 ‘뒤동산’ 밑이고 그 쪽으로 난 도랑 둑은 바로 산길로 되어 있고, 내리뻗은 나지막한 능선을 두어 개 넘으면 ‘신당마을’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이 길로 해서 가면 바로 읍사무소 옆길로 해서 장터에 들어갈 수 있고, 장터의 남쪽으로 난 도로로 가다가 밀양교로 가는 길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로 굽으면 바로 당시 밀양사람들이 ‘자동차부’라고 불렀던 버스정류소에 이르게 된다.
나는 시장의 지물전에 가서 창호지 열장을 사서 두루마리로 말아, 메고 가는 봇짐 위에 구겨지지 않도록 묶어 매고, 버스정류소로 나가는 길에 장바닥에 떡함지를 놓고 파는 할머니 떡장수에게 강낭콩이 들어박힌 찰떡을 두 개 비상식으로 사 넣었다. 시간은 오전 8시 반 좀 넘었다. 아마 차 시간은 8시 반인 것 같다. 표를 사고 버스에 탔다. 겨우 한 자리를 찾아 앉았는데 어떤 할머니가 타기에 좌석을 양보하고 곁 통로에 섰다. 차는 곧 출발했다. 차는 삼문동을 지나 가곡동까지는 천천히 가다가 예림교를 건너자 달리기 시작했다. 자갈포장이지만 훤히 뻗은 찻길이라 차는 마구 달린다. 한참 들까불다가 평촌 고개 밑부터는 오르막길이라 엔진소리가 높은 대신 차의 진동은 덜 하다. 고개를 넘어 곧 파서막교가 나오자 나는 출구로 나갔다. 차장에게 차표를 건네면서 파서막에서 내린다고 하자 차장은 문을 ‘탕탕’ 두드리면서,
“파서막 하자!”
라고 소리친다. 차는 파서막 수로 위에 놓인 공굴 다리 둑 아래에 섰다. 나는 내리면서,
차장 아가씨에게,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했는데, 아차 ‘또 잘못!’ 하고 즉시 깨달았지만, 과오 다음의 후회는 바로 ‘사후약방문’. 조직원은 남에게 인상을 남게 하는 행위, 행동은 절대금물.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둑으로 올라갔다. 다리를 건너 정미소 뒤안의 방으로 갔다. 다가가는 발자국소리로 동산 어른은 내가 왔음을 아셨는지,
“거기 덕출인가?”
“예, 어르신, 좀 늦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문이 열리고 동산 어른이 얼굴을 내밀었다.
“어서 들오게.”
방안으로 들어가 반절로 인사를 드리고 마주 앉았다.
“아침 전이지.”
“예. 그럼 아침 가져오도록 하지.”
하고 정미소 쪽으로 난 문 위에 걸린 설렁줄을 흔들었다. 좀 있자 밖에서 어린소년의 목소리로,
“큰아버지, 저 왔습니다.”
라고 아뢰는 소리가 났다.
“오냐. 손님이 왔으니 아침상 차려서 가지고 오라 해라.”
“예.”
조금 지난 후 밖에서 기척 소리가 나자 동산 어른은 나에게 문밖에 좀 나가라고 손신호를 보낸다. 나는 얼른 알아듣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밥상의 그릇 소리가 나고 좀 지나자, 들어오라는 말씀이 들렸다. 들어갔더니 어르신과 겸상이다. 나를 마주 앉게 하시고,
“우리 먹는 대로 겸상을 했네. 별난 찬은 없더라고 많이 자시게.”
“예, 잘 먹겠습니다. 어르신도 아직 식전이십니까? 이를 줄 알았더라면 좀 일찍이 올 걸 그랬습니다.”
“아니 괜찮네. 어서 밥이나 많이 들게.”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그간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로당의 조직변절이 생기자. 경찰은 수첩에다 명부를 적어서 찾아다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에는 20대 이상의 청년이나, 여성도 좀 글이라도 아는 이들은 모두 피해 없다고 했다. 늙은이들도 좀 학식 깨나 있는 자들은 피해 도망가고 남의 동네에서 피하려고 온 사람이 좀 있는데 이들도 두려워서 벌벌 떤다고 했다.
소문으로는 일단 잡혀가면 무조건 흠씬 패고부터 묻는다는 것이다.
이를 피하려면 청년들은 우선은 이른바 「국방경비대」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국방경비대」로 지원입대 했다고 했다.
그런데 군대도 못 가는 중년들은 자수를 하면 받아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어르신은 한숨을 쉬면서 말씀하셨다.
“무슨 일을 이렇게 한 것인지! 감당도 못 하면서 배가다 5배가다, 10배가다, 하면서 줄창 받아들이더니 놈들이 만들어놓은 「국가보안법」에다가 걸리도록 해 놓고 말았으니, 이래 놓고도 이들에게 폭동을 일으켜 무장투쟁을 하라고 하니. 모조리 다 죽일 작정인지.
「국방경비대」에 입대하는 청년들은 또 어떤가. 군대에 들어가면 그건 또 토벌하러 제주도로 가고 지리산으로 가야 안 하는가. 동포끼리 총질하러 말일세.”
하시고선 한숨을 내 쉬신다. 내 눈에는 물끼가 나도 모르게 저절로 어린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지금에사 생각하지만 그토록 만들어놓고 남로당의 지도부는 모두 평양에 가서 다리 죽 펴고 있으니...... 모두 피가 터지도록 얻어맞고, 그들이 안겨다주는 총으로 같은 당원이었던 동지를 토벌하고 하고 있는데도......
사태가 이 지경으로 되자 이렇게는 못 한다고 한 일이 반란이었다.
제주도 4.3인민항쟁을 토벌하라고 여수 항구에 몰아간 군대가, ‘우리는 동포에게 충부리를 갖다 댈 수 없다고 일으킨 병사들의 반란이 이른바, 「여수•순천반란」이고, 이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가 「인민유격대」가 되어 항쟁하자, 이들의 토벌에 반대해서 일어난 폭동이 「대구6연대반란」이다. 특히 「대두6연대반란」에서는 병사들이 일으킨 반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장교들이 자기네를 진압하러온 줄로만 알고 적으로 알고 사살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남로당 동지였으니, 남로당 동지끼리 사살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는데, 당의 상부조직은 뭘 했다는 말인가.
박헌영이 이북에 가서 50만 당원을 자랑했다는데 그 50만 당원은 바로 당원 배가•5배가•10배가라면서 뻥튀기한 것인가, 아니 바로 그 뻥튀기는 당원 명부에 실재(實在)로 있어서 1948년 12월 1일 발포한 「국가보안법」으로 몰려 「국방경비대」로 들어가거나, 도망 다니다가 끝내 자수하고 도리어 동지를 밀고하도록 만들고 말았으니. 그런 50만 당원을 만들기 위해선가.
이런 상황은 글로써 시각적으로 알게 되는 것보다 감정을 담은 말로 들어서 알게 되니 당시 나의 감정도 폭발의 임계점으로 이를 지경이었다. 그것이 눈물로 나타나자 동산 어른도 종내 눈물을 보이셨다.
점심상을 내어갈 때 가는 실과 가는 바늘을 부탁했다. 가는 바느실을 가지고 오자 미농지에 작은 글자로 적은 보고서를 미농지 봉투에 넣어서 봇짐을 뒤집어 안쪽 아래쪽에 테두리를 한 양 만든 좁다란 주머니 안에 집어넣고 입구를 표 안 나게 기웠다. 바늘에 꿴 실 째로 바늘을 조끼 안섶에 꿰어 삽개 ‘트’에서 받을 문건 처리를 위한 준비로 했다.
미농지에 쓴 문건은 물을 잘 빨아들이고 물에 젖으면 종이 섬유가 풀려 종이는 분해된다. 바닥 테두리로 깁는 것은 비상시에는 바로 물에 적시려고 하는 것이다.
출발준비를 마치고 동산 어른께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길은 익숙하지만 정세가 험한지라 도중에 검문이 걸릴까 염려되어 전방 일, 이백 미터를 내다보고 북쪽으로 훤히 틘 갓골, 남산리 앞들을 경계를 하면서 남산리 뒤 능선까지 될수록 빨리 넘어야 했다. 그리고 하산하는 길도 조심해야 한다. 철이 겨울철의 시작이라 나무꾼도 별로 안 보이는 시절이다. 산길을 봇짐만 메고 가면 보통 사람이야 먼 길 가나보다 하겠지만 냄새 맡는 군들은 코를 컹컹거릴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이상한 놈이 멀리서 보이면 일단 그놈의 시야를 가릴 곳을 찾아서, 거기에서 나무그늘 틈으로 주시해야 한다. 문제없다는 확실한 보장이 서기까지는 인내심 있게 기다려야 한다.
두어 번 주시할 일이 있었기는 했지만 탈 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남산리 그 안에, 아무도 안 보이는 곳에 있는 골짝에 맑은 시내를 찾아서 수통에 물을 담았다. 목도 좀 추기고 마지막 능선에 올랐다.
남산리 뒤 능선을 넘어 예림재 전경이 보이는 능선 위에서 그 일대와 저 멀리 보이는 모렴당의 솟을대문 일대를 둘러보았더니 그냥 겨울 한낮의 조용함이었다. 창날이 든 작대기를 짚으며 내려가다가, 바람도 가리고 햇볕이 쪼이는 따뜻한 곳이 있어서 봇짐을 풀고 아침에 사서 넣었던 찰떡을 꺼냈다. 반으로 잘라서 한 입 베어 먹었다. 찰떡과는 입안 볼에 닿는 느낌이 다른 강낭콩이 또한 다른 고소한 맛을 낸다.
물통을 조끼주머니에 불룩하게 넣고 봇짐을 메고 떡을 왼 손에 쥐고, 오른 손에 작대기를 짚으면서 걷다가 또 한 입 베어 씹으면서 길을 내려갔다.
모렴당 대문 앞으로 해서 삽개 마을 앞 큰길까지 못 미치는 곳에 있는 부북면당 연락‘트’에 도착했다. 사립문에 요롱이 달려있어서 안심하고 흔들었다.
“지렁지렁..........”
안채 뒤안에서 월산 어른이 나오셨다. 나는 열린 사립문 안으로 들어가면서,
“월산 어르신, 그 사이 별고 없으셨는지요.”
하고 인사를 했다.
“오시느라고 수고 했소. 오늘은 산 너머부터 먼저 가셨는갑제.”
“예, 오늘이 읍내 장날이라, 그 덕으로 버스를 타고 바로 너머까지 가서 그쪽 일마치고 바로 왔습니다.”
“그러면 아직 점심 전이겠네.”
“점심은 괘않습니다. 읍에서 요기꺼리로 찰떡을 사 가지고 다녀서, 오다가 남산리 산마루너머 볕 잘드는 곳에서 요기는 했습니다.”
“아무튼 방안으로 들어갑시다.”
“예.”
하고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걸려있는 기둥시계는 오후 1시 반이었다.
동산 어른이 말씀하시는 상황은 여기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읍내는 사람 잡으러 다니는 것과 가족에게 치는 공갈은 좀 덜 하지만 그 내용은 하남의 동산 어른의 말씀과 마찬가지였다.
월산 어른은 당원 배가운동 때 열심히 해서 그 중에서 몇 사람이 자기를 원망하는 것 같아서 얼굴을 들 수 없다고 하셨다.
역시 이곳도 청년은 경비대 지원으로, 장년은 자수하는 일로서 해서 여간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월산 어른의 신상이 걱정이 되어서 물었다.
“월산 어른으로 해서 입당한 분이 자수해서 월산 어른을 신고하는 일은 없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건 염려 없어요. 그럴 정도의 무의식은 아닙니다. 당원으로 인입할 때 상당히 의식을 올렸고, 지금도 의지는 굳습니다. 지금 경찰이 수배하고 있어서 피신 중입니다. 자수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붙잡혀 고문을 걸면 장담 못하겠지요. 그래서 그들 중 누가 잡히면 그때부터는 나도 피신해야지요.”
정말 딱할 지경이다. 마치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격이었다.
하남면당 ‘트’에서처럼 보고문을 받아 봇짐을 뒤집어 안쪽 솔에 붙은 좁다란 주머니에다 넣고 다시 집었다.
월산 어른은 나를 한참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좀 핼쑥하고 많이 고단해 보이네. 시간이 조급하지 않으시면 한숨자고 저녁식사하고서 가시지?”
“아닙니다. 제가 좀 빨리 와서 1시간 정도는 일없지만 너무 오래는 곤란합니다.”
“그럼 그 동안만이라도 좀 쉬시오. 거기 있는 요니불 펴시고. 맘 놓고 주무시오. 1시간 후에는 틀림없이 깨울테니.”
하고 나가셨다.
푹 한숨 자고 나니 머리가 깨운 하고 힘이 났다.
“보고문은 상부 당에서 검토하고 방도를 지시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전중히 인사를 하고 다원의 나의 ‘트’로 출발했고 오후 4시 반 조금 넘어 도착했다. 나를 기다리시던 지도원 동지는 나의 도착보고를 받으시고 상황을 보고 받으셨다. 보고를 받으신 표정은 심각하셨다. 그리고 내가 받아온 보고문을 접수하고 이를 군당에 전달하겠다고 말씀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