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부서진 조직에서 새판을 짜야 하는데......
「5.10단독선거」를 끝내고 남측 「국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하더니 「대한민국」이라고 국호를 가지고 남측 단독정권이 성립했고, 그 수장인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내세워 남측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미 군정청으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아 경찰과 사법권을 미군정으로부터 인수받아 단선, 단정을 반대하는 민중을 탄압하는 수단을 확보했고, 이때까지 남측에 주둔하는 미군의 주둔군 사령관이 쥐고 있는 남측의 국방경비대의 통수권을 인수받아 이를 남측 정권, 즉 「대한민국」 국군으로 호칭하고 대통령인 이승만이 통수권을 쥐게 되었다.
이로써 이승만은 미국이 쥐어준 남측의 통치권과 국방경비대의 통수권을 쥐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때까지 단선•단정을 반대하여 투쟁해온 절대적 대다수의 민중의 역량을 치안이라는 명목으로 눌러버리고, 조국의 분단을 반대하여 궐기한 제주도 민중의 인민유격대와 이 토벌을 반대하여 궐기한 「여수•순천반란군」을 정벌하는 일이 이승만 정권이 목전에 놓여 있는 과제인 것이었다. 따라서 정세는 바로 단선•단정 반대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의 국면으로 이어지게 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를 맞아 당과 전선은, 단선•단정운동에서 연판장투쟁에서 고양되었던 역량을 튼튼히 지키고 이를 토대로 해서 미국의 민족분단기도를 반대하고 조국통일운동으로 전환시켜야 할 과제를 받아 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의 인민항쟁과 이에 따라 발생되고 있는 남측 국방군의 반란투쟁이라는 드러난 국면에만 매몰되어 투쟁의 기초로서 인민대중의 역량을 묶어세우는 일에는 소홀했다.
이렇게 된 데는, 투쟁의 지휘부가 남측 현장에 있지 않고 북조선의 책상에서 두드러진 무장투쟁 부분에만 관심을 가지고 지도했고, 그것도 연락선으로만 지도하고 있어서 그 투쟁을 뒷받침하는 대중적 역량조직에는 관심도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무장투쟁이라는 두드러짐으로써 적의 집중공격의 표적으로 되어있어서, 투쟁이 자리 잡히기도 전에 집중공격을 받아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 예로서 대구의 「6연대반란투쟁」을 들 수 있다. 만일 6연대의 반란투쟁이 그 토대로서 인민대중의 투쟁과 아울렀더라면 그때 가야산•팔공산•금오산•황악산 일대를 하나의 커다란 전구로 구축할 수도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연판장투쟁에서 고양되었던 대중적 역량이 아무 실효성이 없는 ‘공화국기 게양투쟁’으로 감추고 있어야 할 역량이 드러나 가혹한 탄압을 불러들이도록 만들기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와 남측 대의원선거를 위한 「남조선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많은 남측 역량이 이북으로 갔는데 대부분이 이북에 주저앉아 이남으로 오지 않았다. 이들은 남측에서 당면하게 일해야 할 성원이어서 빨리 귀환해야 할 일꾼들이기도 한 것이다. 그로써 생긴 역량부족을 메꾸지 못해서 조직역량이 줄어들고 있게 된 것이다.
이들이 대부분 「강동정치학원」에서 학습하고 있었고, 그 후에 돌아오게 되었지만 남로당의 종파분자들의 음모로 대부분이 희생되어 남측운동에서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게 되고 말았다.
그 결과 대중적 역량의 발전에서 그대로 장애를 받게 되어 역량이 회복되지 못하고, 마침내 대중으로부터 조직이 증발되고 만 것이다.
밀양 군당에서는 1948년 10월에 들자 대중조직의 역량의 양적부족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공화국기 게양투쟁」으로 체포, 피신으로 더욱 양적으로 피해를 입었고, 이 탄압으로 대중으로부터 신임이 줄어들어 역량이 양적 감소보다 질적 감소, 즉 신망도가 줄어들어 조직이 대중으로부터 뜨기 시작했다. 이 틈을 비집고 적의 공세는 더욱 세차게 몰아쳐왔다.
탄압은 경찰의 구검보다 극우폭력조직의 테러가 더욱 극심했다.
극우폭력조직은 아예 사람을 죽이는 폭력이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주는 고문이었다. 산 사람을 대창으로 팔다리를 찌르고 거꾸로 매달아 몽둥이로 치는데 죽고 사는 것을 생각지 않는 폭력이었다.
특히 여성에게는 성폭력이 으레 따르는 것이어서 정신적으로 불구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단장면 안법리에서는, 남편을 잡으러 온 극우폭력단이 남편을 잡지 못하지 그 아내를 대신 잡아가서 남편 있는 곳을 대라면서 완전나체로 하여 여성으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성고문을 당해 평생을 정신적으로 그 치욕을 안고 살아야 했다. 그 여성으로부터 간접으로 들은 일이지만 어찌 인간으로서 그럴 수 있는가라고 ......
조직의 말단 성원을 잡으면 그 상부를 대라고 고문을 하는데 그 생사를 묻지 않는다고 했다. 조직의 간부를 잡으면 그 상부와 하부 조직 성원을 대라고 신체적 수치심을 일으키도록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고문에 못 이겨 동지를 불고나면, 양심을 팔아야 하는 「사상전향서」라는 것을 써야 하는 것이다.
1948년 12월 1일, 이른바 「국가보안법」이 공포되고부터는 이 「사상전향서」라는 것을 필수적으로 받기로 되었는데, 거기에는 「탈당성명서」라는 것이 또한 필수적으로 붙여야 했다. 그 「탈당성명서」는 신문에 광고를 내고, 그것을 「사상전향서」에 붙여서 내는 것이다. 그 문구는 모두 똑 같은 것인데 그 내용은,
≪이름 〇〇〇 단기 42〇〇년 〇〇월 〇〇일생
주소 〇〇〇 〇〇〇 〇〇〇 〇〇〇
소인은 무식한 소치로 단기 42〇〇년 〇〇월 〇〇일에 남조선노동당에 가입한 과오를 반성하고 동당을 탈당하였기에 성명서를 냅니다.≫
인데, 신문 광고란에는 이런 작은 광고로 가득 채웠다.
특히 1949년 6월에 「보도연맹」이 만들어지고부터는 도하 신문광고란에는 이 「탈당성명서」로 도배를 했던 시대가 있었다.
「탈당성명서」가 도하 신문의 광고란에 가득하고 「사상전향서」를 내고 경찰서에 풀려나오는 시대에서도 많은 당원들이 사상전향을 반대하고 맞아 죽거나, 극우폭력단에 의해 생매장을 당해 죽는, 지조를 지키고 생을 끝냈던 혁명가도 수없이 있었다.
이런 스산한 시대에 내가 존경하던 선배 조우재 동지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나는 안당골에서 연락부 지도원 동지를 만나 이 소식을 들었다.
조우재 동지에 대해서는 그 자료가 없어서 그의 출생과 성장은 잘 알지 못한다. 밀양의 한 철공소를 하는 집에서 태어나 밀양농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대학을 다녔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 조선의 청년학생들을 일본군의 대포밥으로 쓰기 위해 학병이라면서 군대에 끌고 가려 할 때 그 학병을 피해서 밀양의 북부에 있는 화악산으로 도망해 들어갔다.
당시 화악산에는 징병, 학병, 징용, 보국대를 피해서, 또는 못된 왜놈들을 몽둥이찜질을 하고 도망쳐서 숨어살고 있는 조선 청년도 많았다고 한다.
나의 할아버지는 이런 소식을 듣고 일제가 망하던 1945년 4월에 이들 청년들을 찾아 화악산으로 들어가 이들에게 무장훈련을 시켜 앞으로 있을 연합군의 조선반도 상륙 때 이들 청년들로써 무장유격대를 만들어 밀양 고을을 우리 조선사람의 손으로 해방하려 했다고 말씀하셨다.
8월 15일 일본이 망하고 해방이 되자 할아버지는 이들 청년들을 데리고 하산하여 경찰서와 일제 행정기관을 접수하고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을 때, 조우재 선배는 청년부장을 맡으셨다고 한다. 그 후 1946년 4월에 「조선민주청년동맹」(약칭 민청)이 결성되자 그 밀양지부의 위원장을 맡으셨고, 미 군정청이 1947년 5월에 「민청」을 해산시키자 6월에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약칭 「민애청」)으로 개편했을 때 조우재 선배는 또한 밀양지부의 그 위원장을 맡으셨다.
조우재 선배가 체포되어 밀양경찰서에 구금되었을 때, 김종원이 지휘하는 「백골부대」라고 하는 마산에 있는 5연대 제1대대의 정보대가 마침 밀양에 있어서 이들에 의해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발목부터 인피를 위로 벗기는 고문을 당했는데 끝까지 항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문을 하고 신문을 하는 자에게 다음과 같이 항변하면서 생명이 끊어졌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나는 유물론자이기에 귀신이 있다고 믿지는 않지만, 만일 내가 죽어 귀신이 된다면 까마귀가 되어 이 밀양경찰서의 지붕 꼭대기에 앉아서 밤마다 울어 친일역적 경찰을 저주를 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죽었다고 한다.
이 말로 미루어본다면 고문을 김종원이 직접 한 것으로 보인다. 김종원은 일본군의 헌병 오장(伍長=하사)이었다고 한다.
조우재 선배가 체포당할 당시에 무슨 임무를 맏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군당의 중요한 부분을 맡고 있는 간부였을 것이다. 당 조직의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12월의 어느 날 군당의 조직책을 맡고 있는 간부가 체포되어 변절해서 조직체계와 당원 명부를 내주었다는 입이 딱 벌어지는 소식이 전해왔다. 이 소식과 동시에 군당 연락부의 지도원 동지가 나에게 군당 연락부로 오라는 소환이 왔다. 나는 도곡리의 옥산어른에게 가서 인사를 하고 그날 밤으로 도곡리에서 다원으로 갔다.
다원의 나의 ‘트’로 도착하고 도착신호로 약속된 석유난포 등을 켜서 방문 위에 매달려 있는 고리에 걸었다. 10분 좀 넘어 방문 앞에서 지도원 동지 ‘청도샌님’이 문 앞에서 기척소리를 냈다. 나는 문을 열고 지도원 동지를 맞았다.
나중에 가서야 알았지만 그 군당의 조직책은 이름이 최달현인데, 나의 연계소 고향집에서 가까운 터실이라는 논과 밭이 있는 들로 나가는 길목에 제법 큰 기와집이 있었는데, 그 집의 큰 아들이었다. 일제 때 일본에서 전문학교를 다녔다. 8.15해방 이후 민청에서 청년운동을 하다가 남로당 군당의 간부로 되었고, 1948년부터 군당의 조직책을 맡았는데 체포되자 곧 전향했다. 경찰에 협력해서 많은 동지를 잡아주었고, 그는 이 공으로 경찰에 특채되어 밀양경찰서의 사찰계 형사가 되어 팔자를 고쳤다는 것이다.
최달현의 변절로 밀양의 남로당은 회복할 수 없는 만큼 타격을 받았고 이어 모든 조직이 파탄나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군당 연락부로 다시 소환된 것은 군당의 조직선을 검정해서 사고 선을 정리하고 새로운 조직 선을 회복할 방도를 찾기 위해서였다.
일단 부북면당의 ‘트’와 하남면당의 ‘트’를 통해 그 산하의 면당과 읍당의 활성을 검증할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중에 천만다행으로 군당의 조직 연락선은 조직부와 전연 별도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은 군사부에서 관장하고 있었기에 최달현의 변절에도 노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직부의 직할로 되고 있는 산하 대중조직과의 연락선은 완전히 파탄났다고 보고 새로이 구축해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지금 밀양군당은 알몸만 있고 알몸을 둘러싸고 있는 손발은 완전히 마비 또는 잘려나간 형국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각 면당에서 농민, 청년, 문화, 여성 등 각 방면의 조직을 전혀 새로 내와야 하고 그들 대중조직을 군 지부 조직으로 묶어주어야 하는 것이 군당이 안고 있는 과제로 되고 있는 것이다. 실로 난감하고 아득한 상황에 당면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정세는 시시각각으로 엄중해가기만 하고 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