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분단되어있는 현실적 상황을 자주적으로 이겨내고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가 「5.10남조선단독선거」를 반대하는 투쟁을 전민족적으로 전개하려고 1948년 4월 19일에, 이승만•김성수를 비롯한 분단세력을 제외한 전민족적 통일세력의 제정당•사회단체의 대표자들이 모여, 분단을 반대하고 미•소 양군을 동시 철수시키고 전조선적으로 총선거로서 민족적 자주독립 통일정부를 세울 것을 호소했으나, 미국과 그 추종 국제세력이 유엔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바로 민족분단을 획책하고 있는 절박한 정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이미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이 유엔의 선거를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서울에 들어와 있고, 이들은 선거를 감시한다고 하면서 38도선 이북으로 들어가려다가 소련 군대가 거부하자 미국은 남조선단독선거방침을 받아 안고, 남조선에다 친일역적패당과 친미사대주의자들로 구성된 정권을 만들기 위한, 이른바 「5.10남조선총선거」에 돌입하고 말았다.
이러한 급박한 정세를 맞이하여 4월에 평양에 모인 전조선의 제정당•사회단체의 대표들은 이미 구성해놓은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를 평양에서 열어 48년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토론을 거쳐, 단독선거에 의한 남조선의 국회와는 달리 전조선적인 통일적 입법기관의 선거를 실시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하고 발표했다는 말은 앞서 말한 바 있다.
이 결정에 따라 친일역적패당과 친미사대주의자들을 제외한 전조선적인 입법기관의 대의원을 선거하게 되었다.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는 먼저 전조선의 남북 인구의 비례에 따라 대의원 수를 남조선에 360명을, 북조선에 212명을 할당하고, 북조선은 8월 25일에 대의원 총선거를 하기로 했고, 남조선은 앞서 말한 바대로 각 시•군의 5명~7명의 인민대표자를 선발해서 해주에서 열리는 남조선의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도록 해야 했다. 인민대표자를 선발하고, 이들을 해로로, 육로로 해주로 보내는 일을 남조선의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의 주도하에 「선거지도위원회」를 조직하여 담당하도록 했다.
먼저 각 시•군의 민전은 산하의 정당•사회단체로부터 인민대표자를 추천받아 「선거지도위원회」에서 대표자를 결정하고 이들을 해주로 보내는 일을 집행했다.
이 일은 7월 초순에 결속을 보았고, 7월 중순부터는 이들 대표들과 이들 대표들로부터 선출되는 입법기관의 대의원을 지지한다는 서명의 연판장에 도장을 받아야 했다.
해주의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의 대표자 선발은 각 정당•사회단체에서 제기되는 후보를 토의해서 대표자결정을 결속하는 일과 이들을 해주로 보내는 일은 조용하게 치러졌지만, 연판장에 서명날인 받는 일은 매우 힘 드는 일이었다. 경찰과 극우단체의 감시의 눈을 피해서 동네의 골목을 누비고 다녀야 했고 대중들을 만나서 설득도 해야 하는 힘들고, 또한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남로당의 세포조직을 동원했고 당원이 속한 대중단체, 노동조합, 농민위원원회, 시장상인상조회, 민애청, 여성동맹, 민주학생동맹 등 대중단체들이 적극 나섰다.
연판장 서명날인에 대중들이 적극 참여했다.
연판장에 서명 날인하는 일도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똑같은 날인을 5부를 작성해야 했다. 연판장을 보낼 곳은 남조선 군정청, 북조선주둔 소련군사령부, 미국대통령, 소련수상 그리고 국제연합 의장, 5곳이었다.
내가 연판장에 서명날인을 받는 일에 직접 참가하기 위하여 밀양읍의 내이동, 내 고향집 연계소의 언저리에 2, 3일을 돌면서 받았고, 특히 교동 고모동내에 파고들어가서 고모와 고모부 내외의 도움을 받고, 초등학교 동창들의 후원으로 연판장 서명 날인을 받았는데, 하룻밤 새에 200 명 가까운 서명을 받기도 했다.
여기에는 5.10단선에서 당선된 「한민당」 국회의원들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이들이 거의 모두가 친일지주이고 또 이들을 싸고 있는 자들은 거의 그 지역의 부랑꾼이거나 폭력배이기에 민중들로부터 인심을 톡톡히 잃은 자들이라서 이들이 미워서 이번는 오히려 연판장선거에 동정적이었고, 남조선을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이 미국 식민지로 되고 있다는 데 대한 대중들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교동에서는 나를 고모 집에 그냥 있으라고 하고 동기동창 동무들이 들고 나가 돌아다니면서 집안의 봉건적인 노인을 따돌리고 안방으로 해서 도장을 거의 다 받았다고 했다. 그날 나는 아주 편안하게 맡은 분공을 초저녁에 다 마쳤다.
오랜만에 연계소 집에서 할매 곁에서 잠을 잤다. 그래도 아침 일찍이 내 안전을 위해 할매는 아직도 덜 샌 새벽 어두움에 새벽밥을 차려주셨다. 조직 선을 타고 삽개의 연락 ‘트’로, 파서막의 정미소 ‘트’로 해서 밀양군의 서남지대 8개 면의 연판장 작업진행 정형을 보고받았다.
대중의 호응도가 생각 밖에 높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는 하나도 없다. 이대로 나가면 연판장운동은 90% 가까이 될 것 같았다.
공개적으로 하는 선거가 아니라서 각 면의 18세 이상의 선거권자 수를 미리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어서 그 퍼센트는 알 수 없지만 호응도는 엄청나다는 것은 알 수는 있었다. 각 면의 행동대원들이 가는 동네마다 환영이었고 반동이 없는 민주부락에서는 그날이 무슨 회촛날(會招日)처럼 막걸리에다 단술도 담고 묵도 치고 닭도 잡고 지짐도 굽고, 그래서 한잔 들어가면 동네 바깥마당에는 자연히 풍물소리까지 났다고도 했다.
7월 하순부터는 연판장을 수집하고 그것을 정리해서 곱게 철하고 제본한다. 보통 한 면의 유권자의 연판장을 받을 때 그 1부가 미농지 150~200매 정도인데 5부이다.
미농지는 아주 엷은 종이인데 3000~4000명 정도의 주소 성명을 세로로 쓰고 날인한 명부이다. 이를 미농지로 꼰 노끈으로 맨 서류로 되겠는데 그 한 부가 한 개 면의 선거인 전부로 된다고 보면 된다. 밀양읍은 좀 두텁게 되겠는데 그래도 다 합해서 한 부가 군 전체로 12권, 5부 모두 합쳐 60권 정도일 것이다.
이를 각 면마다 수집 날짜와 시간을 정해서 연락‘트’에서 주고받아야만 했다.
다음에 이 연판장을 백두대간 산줄기를 따라 이북으로 전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새로운 연락‘트’를 설치해야 했다. 그곳이 상동면 도곡리(道谷里)이다.
상동면 도곡리는 지금 경부선 상동역에서 도로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다가 동창천(東倉川)을 건너지 않고 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올라가면 강이 오른편으로 굽어 길도 동쪽으로 틀고 있는데 오른편으로 1차선 도로가 나있고 방향은 남쪽이다. 그 길을 따라 가면 도곡리라는 마을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더 남으로 가로막힌 산을 향해 가면 지금 5, 6호되는 (옛날 - 1948년에는 15, 6호 나 되었다.) 마을이 나오는데 이를 상도곡리라고 부른다.
이 상도곡리는 밀양시에서 산외면으로 들어서는 긴늪 밀산교를 지나 상동역방향으로 가지 않고 산외면 다원으로 가는 길 갈림길에서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개천 오른편으로 개천따라 올라가면 ‘남가실’이라는 자그마한 동내가 나온다. 이 동네도 1948년에는 15,6호나 되는 동네이지만 지금은 10호도 채 안 된다.
이 ‘남가실’에서 개천따라 올라가면 엄광이라는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동네에 이른다 ‘남가실’에서 약 4킬로미터 쯤 되는데 그 안 골짜기를 ‘안당골’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빤히 고갯마루가 보인다. 이 고개를 넘으면 바로 도곡리 마을이 보이고 저쯤 좀 떨어져 상도곡리가 보인다.
나는 이 상도곡리를 1948년 7월 하순에서 8월초까지 거의 하루걸러 뻔질나게 다녔다.
당시 도로에서 엄광으로 가는 길 첫 동네인 ‘남가실’에는 조선조 정조(正祖) 시대, 지금으로부터 약 220년쯤 전 지손(支孫)으로 갈라진 5형제집의 끝에 집안의 한 갈레의 일가가 살고 있었다. 당시 연세가 환갑이 좀 넘은 솔례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 일가의 할아버지가 사셨는데, 그 아들이 일제 식민지시대에 노동운동으로 이름을 떨쳤던 안영달(安永達)이다.
안영달은 8.15해방 이후 미국의 정보공작원 로빈슨에 고용되어 박헌영, 이승엽과 더불어 북 공화국을 전복하려는 음모활동을 벌리다가 붙잡혀 죽었다.
나는 당시 안영달은 우리 일가로서 유명한 사회주의자로만 알고 있어서 존경하고 있었고, 따라서 솔례 할아버지도 그의 아버지로서 물론 존경하고 있었다.
나중에 어떤 기록에서 솔례 할아버지도 한때 「의열단」에 가담하여 광복운동을 했다가 일제에 붙잡히자 곧 동지를 배반하고 일제에 전향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내가 이러한 사실을 몰랐고, 몰랐던 그 당시, 즉 1948년 7월부터 8월초까지 도곡리로 가는 중간에 있는 마을 ‘남가실’의 할아버지 댁을 지나갈 때마다 들러서 할머니의 인정스런 대접을 받았다. 솔례 할아버지, 할머니는 일제 말기에 알곡을 구하기 어려울 때 나의 할머니가 그 일갓집에서 먹을 양식을 구해 오시기도 해서 지금도 그 고마움은 잊을 수 없다. 아무튼 나는 이들 가족을 생각할 때마다 내 가슴에는 묘한 갈등이 넘실대기도 한다.
내가 이 동내를 지나게 되는 시간은 언제나 밤 8시에서 9시쯤이었다. 나의 다원 ‘트’에 연판장 서류가 모이고 이를 정리헤서 노끈을 꼬아 제본하여 잘 간추려 무거운 다듬잇돌로 눌러 두면 서류가 곱게 간추려진다. 대개 오후 7시쯤에 이를 유지(기름종이)에 사서 지개 등판의 짚 등바지 속에 넣고 지개에는 나무토막을 여남은 개 얹어 밧줄로 매고 짊어지고 다녔다.
북조선에 있는 남녘 동무들이 이번 연판장 선거를 적극 지원해나서기로 한 것이다. 남녘 야산대에서 활동했던 동무들이 앞으로 벌리게 될 유격전을 위하여 『강동정치학원』에서 학습하고 있던 동무들이 이 연판장을 나르기 위해 적극 나서기로 했다는 것이다.
밀양군당과 민전에서 연판장을 모아다가 내가 담당한 8개 면당과 지도원 동지가 맡은 4개면당의 연락‘트’에 보내오면 이를 산외면 다원에 있는 나의 ‘트’에 모으고, 이를 하루걸러 상도곡리에 있는 『밀양군농민위원회』‘트’에서, 당시 우리들이 ‘강동사람’이라 부르던 『강동정치학원』 동무들에게 주어서 이북에 있는 「선거지도위원회」로 전하는 일이다.
‘강동사람’은 각 군마다 2명씩 배치되어 백두다간을 타고 가서 해주로 전달하는 것이다.
상도곡리라는 마을은 20호 쯤 되는 마을인데 반동이 없는 민주부락이다. 여기는 바로 해방구라는 뜻이기도 했다. 아이도 어른도, 남자도 여자도 「적기가」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민청가」, 당시 10월인민항쟁을 생각하면서 임화가 작사하고 김순남이 작곡한 「인민항쟁가」를 많이불렀고, 또 「결전가」라는 새로운 노래도 불렀다. 그밖에 물론 「국제가」라고 하던 「인터내셔널」도 불렀다.
우리는 여기에서는 모두 거리낌 없이 힘차게 불렀다.
이 ‘강동사람’들은 지금도 내 망막 안에서 아직도 살아있고, 그 노랫소리는 귀의 고막에 남은 것인지 아직도 그 목소리가 남아있지만, 우리 민족사에서는 영영 떠나버리고 만 것인가. 박헌영 종파일당의 한 놈인 치안국 대공분실장 백형복의 모략적 배신으로 거의 모두 희생되고 말았던 것이다.
분단을 반대해서 『연판장투쟁』에서 헌신적으로 싸웠던 우리들과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1,008명의 대표자 그리고 ‘강동사람’이라 불렀던 「남조선인민유격대」의 시작이었던 청청한 젊은 동지들의 피로써, 첫 『최고인민회의』의 남조선 대의원 360명이 태어난 것이다. 마침내 1948년 8월 25일, 북조선에서 실시한 총선거에서 당선된 212명과 합해 전체 남북조선의 대의원으로 최고인민회의가 성립되었다.
이는 외세의 개입이 없는 남북조선의 인민들이, 북위 38도선으로 분단되어있는 현실적 상황을 자주적으로 이겨내고 인민 스스로가 대의원을 뽑아서 구성한 인민을 대표하는 기관이었다.
이로써 그해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